4.
서도헌은 오전 8시에서 8시 반 사이에 출근했다.
9시에서 11시 50분까지 크고 작은 회의를 포함한 업무를 보고 12시부터 오후 2시까지는 점심시간이었다. 매주 월요일에는 임원들과 런치 미팅이 있기 때문에 회의실에서 주문 도시락을 먹지만 다른 날은 외식을 했다. 서도헌은 식사에 집착하지 않는 편이었다. 약속이 없으면 샌드위치나 패스트푸드로 때울 때도 있고 가끔 일이 있으면 라테 한 잔으로 때울 때도 있었다.
“…식사를 안 하신다고요?”
경악하며 집어 들었던 도시락 반찬을 떨어뜨리는 의준을 보고 김하나는 웃었다.
“한 달에 한두 번 정도에요. 그냥 그러려니 하면 됩니다. 본인이 먹지 않는다고 부하도 먹지 못하게 하는 분이 아니니 안심하고요.”
“…예.”
속내를 들킨 부끄러움에 의준은 얼굴을 붉혔다. 김하나는 말을 이었다.
“매주 수요일 점심은 개인적인 용무가 있으셔서 혼자 나가십니다. 따라갈 필요 없으니 배웅만 하면 돼요.”
“개인 용무라면 무슨… 아, 아닙니다.”
오후 1시. 의준은 회의실에서 김하나와 배달 도시락으로 점심을 먹으며 업무 인수인계를 받고 있었다. 다른 업무로 바쁜 김하나가 점심시간에야 겨우 시간이 났기 때문이었다.
표정 변화가 다채로운 의준을 보며 그가 억지로 삼킨 질문을 짐작한 김하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 표정을 보니 비서실 누군가가 헛소문을 전했나 보죠? 무슨 이야기를 들었건 모두 거짓말이니까 무시하세요.”
“모두 말입니까?”
“그래요, 모두. …아니지, 매주 수요일 점심시간은 혼자 보내시는 건 맞아요.”
김하나가 대답했다.
“하지만 어디 가시는지는 모릅니다. 개인 시간이니 물어볼 필요도 없고요. 연락이 안 되는 것도 아니고요.”
의준이 들은 바에 의하면 서도헌은 매주 수요일 점심시간에 회사 옆의 5성 호텔로 향한다고 했다. 마침 오늘은 수요일이었고 서도헌은 정각 12시에 비서 없이 사무실을 떠났다.
‘여자와 만난다는 이야기가 있어요.’
비서실 동료의 말이 떠올랐다.
‘여자…요? 여자 친구… 있으신가 보죠?’
‘여자친구인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전에 호텔 로비에서 여자분을 배웅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거든요. 저는 아니고 재무팀 동기가….’
연예인이라고 했다. 이름도 들었는데 기억나지 않았다. 호텔과 여자라는 두 단어가 던진 충격이 너무 커서였다.
‘…여자라니.’
헤어지고 5년이 흘렀다. 도헌이 다른 사람과 사랑에 빠졌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저런 외모와 지위를 갖춘 남자를 누가 내버려 두겠는가.
‘그렇구나.’
동료와 대화를 마친 의준은 가슴 한구석이 허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다른 사람과… 그렇구나.’
“…씨? 듣고 있어요?”
“아, 네!”
의준은 생각에서 깨어났다. 김하나가 살짝 눈살을 찌푸린 채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잠깐 다른 생각을 하느라….”
“정직하네요. 그래도 집중하세요.”
“네, 죄송합니다….”
김하나는 시무룩해진 의준을 보고 미소를 지은 후에 말을 이었다.
“전무님 일정 중에 비서가 동행하지 않는 일정은 매주 수요일 점심과 매달 마지막 주 금요일 일정뿐이에요. 개인적인 점심 약속이나 연차를 낼 일이 있으면 맞춰서 잡도록 하세요.”
“알겠습니다. …그런데 매달 마지막 주 금요일은 하루 종일 업무가 없습니까?”
“그래요. 전무님이 연차를 내시는 날이거든요.”
김하나가 대답했다.
“한 달에 한 번 부산에 내려가셔서 주말을 보내고 올라오십니다. 한 번도 어기신 적이 없어요.”
“부산이라고 하셨습니까?”
“그래요. …뭐가 잘못되었나요?”
“아니요.”
의준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이네요.”
“…다행이라니요?”
김하나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의준은 아차했지만 무마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불안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 부산에 전무님의 할아버님이 계신데, 그분을 뵈러 가는구나 싶어서요.”
“그걸 어떻게 알았어요? 전무님이 말씀하셨나요?”
“아니요, 그게….”
도헌에게 들었던 때는 5년 아니 6년 전이었다. 도헌 본인도 잊었을 법한 사실을 이렇게 발설해도 괜찮을까. 의준은 걱정이 된 나머지 입술을 깨물었다.
“걱정 말아요, 외부에 발설하지 않을 테니까.”
김하나는 의준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이 이렇게 말했다. 의준은 고개를 꾸벅 숙였다.
“죄송합니다. 제가 경솔하게….”
“아니에요. 그보다…. 전무님과 친했나 봐요.”
“예? 어….”
의준이 머뭇거리는 사이에 김하나는 말을 이었다.
“전무님은 집안 이야기를 안 하세요. 부산에 조부님이 살고 계시다는 사실은 회사에서 저 외에 아는 사람이 없답니다.”
XX 인베스트먼트 주식회사의 대주주는 미국에 기반을 둔 투자 회사로 대표는 도헌의 외조모였다. 그러다 보니 주주들과 임원들 사이에 서도헌의 외가는 잘 알려져 있었지만 사업과 관련 없는 친가의 정보는 극비에 싸여 있었다.
“전무님이 아무에게나 집안 이야기를 했을 리 없으니까요. 의준 씨와 꽤 친했구나 싶어서.”
“아니요, 그게….”
의준은 시선을 아래로 향했다.
“…지금은 그렇지도 않습니다.”
심장이 뜨끔하고 아팠다. 사실을 말했을 뿐인데 상처를 입다니 우스웠다.
“그렇군요. 뭐, 어쨌든… 부산 일정은 완전한 개인 일정으로 생각하세요. 단지, 교통편 예매는 비서의 업무니까 이 부분은 신경 쓰고요.”
김하나는 캐묻지 않고 화제를 돌렸다.
“명절 때는 특히 그렇지만 평소에도 매달 초에 미리 예매를 해 두면 편해요. 전무님은 빠르고 확실한 이동 수단을 선호하세요. 목적지가 부산역에서 가깝기도 하기 때문에 주로 고속 철도를 이용해요. 마침 이달 말 표를 예매할 시기니까 의준 씨가 해 봐요. 같이 봐 줄게요.”
“알겠습니다.”
그때 회의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나더니 문이 열렸다. 비서실 직원이 김하나를 향해 말했다.
“김 과장님, 방금 현원 상사에서 연락이 왔는데요. 오늘 오후에 예정되었던 회의를 미루겠다고 합니다.”
“왜요?”
“회의에 참석하실 그쪽 대표님 가족분이 가벼운 교통사고를 당하셨는데 가 보셔야 할 모양입니다.”
“저런.”
김하나는 살짝 얼굴을 찌푸리며 일어섰다.
“알았어요. 전무님에게는 내가 보고할 테니까, 가족 어느 분인지, 상태는 어떤지, 입원한 병원은 어딘지 확인해요.”
“네.”
김하나는 의준을 돌아보았다.
“일정이 변경되면 내역과 사유를 잘 정리해서 전무님께 전하세요. 그래야 전무님께서 어떻게 할지 결정을 내리기 쉬워지니까요.”
현원 상사는 XX 인베스트먼트의 오랜 거래처 중 하나였다. 대표들도 서로 잘 아는 사이라고 했다.
“그쪽 대표님 가족이 입원하셨다면 경우에 따라 전무님만이 아니라 우리 대표님께서도 병문안을 가거나 위문 선물을 보내게 될 수도 있어요. 그럴 경우를 대비해서 환자분이 누구인지 상태는 어떤지 확인하면 편하죠. 최악의 경우에는 장례식에 참석하게 될 수도 있으니까 더욱 그래요.”
“알겠습니다.”
의준은 고개를 끄덕인 후에 시간을 확인했다.
“아직 1시 반인데요, 전무님께는 어떻게 보고할까요?”
“2시까지는 돌아오실 테니까 그때 보고하죠. 어차피 오후 4시 일정이었으니까요.”
“알겠습니다.”
의준은 빈 도시락을 정리했다. 회의실 환기를 마친 후에 치약과 칫솔 세트를 들고 화장실로 향한 그는 용무를 마친 후에 손을 씻고 서둘러 양치를 시작했다.
‘오후 외근 일정이 사라졌네. 오늘은 대체 일정도 없으니까, 전무님도 내근이시려나. 그러면 오늘은 거래처 명단이나 읽어 둘까.’
입사하고 2주가 지났지만 아직 배워야 할 일이 많았다. 서도헌은 수습 기간에 상관없이 천천히 인수인계를 받으면 된다고 했다. 김하나도 비슷한 말을 했었다.
‘만일 내가 제대로 인수인계를 받지 못해도 나를 자르지 않겠다는 말인데….’
다른 회사에서였다면 이게 웬 떡이냐고 고마워할 상황이겠지만 이곳에서는 아니었다. 여기는 서도헌의 회사였다.
‘아무나 상관없었지만 마침 내가 나타나서 뽑았다던 사람에게 빈틈을 보이고 싶지 않아.’
서도헌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위해서 최선을 다하고 싶었다.
점심시간이 5분 정도 남은 시점에 의준은 화장실을 나왔다. 사무실로 향하는 도중에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자 도헌이 보였다.
“전무님, 다녀오셨습니까.”
“…….”
도헌은 고개만 끄덕했다. 오전보다 안색이 좋지 않았다.
‘점심을 굶고 운동이라도 심하게 하고 왔나?’
운동. 갑자기 동료에게 들었던 말이 떠올랐다. 두 시간 동안 호텔에 방을 잡고, 여배우와. …설마.
‘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지금?!’
의준은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김하나도 헛소문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아니, 백 보 양보해 사실이라고 해도 대낮에 상사인 남자를 보며 떠올릴 만한 상상은 아니었다.
‘정신 좀 차려, 이의준.’
의준의 옆을 지나치려던 도헌이 걸음을 멈추었다. 의준은 고개를 돌렸다. 도헌이 눈살을 살짝 찌푸린 채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왜, 그러십니까?”
의준은 찔리는 마음을 억누르며 입을 열었다.
“제 얼굴에 뭐라도 묻었습니까?”
“맞아.”
도헌은 대답과 함께 의준의 얼굴로 손을 뻗었다. 깜짝 놀란 의준은 숨을 들이마셨다. 도헌의 손가락이 의준의 입술 옆에 닿았다.
“……?!”
의준의 입술을 스윽 스치고 떨어진 도헌의 손가락에는 흰 거품이 묻어 있었다. 치약이었다.
“…헉….”
의준은 당황해서 도헌의 손가락을 잡았다. 거품을 닦아야겠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곧 그는 자신이 사무실 앞에서 상사의 손을 움켜쥐고 서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헉!”
의준은 화들짝 놀라 손을 뗐다.
“아, 죄송합니다. 제가… 당황해서….”
도헌은 의준을 말없이 바라보다가 몸을 돌렸다. 화가 났을까? 의준은 손등으로 입가를 문지르며 그를 따라 사무실로 들어갔다.
“전무님.”
김하나가 도헌에게 오후 일정 변경을 알리는 사이 의준은 자기 자리로 가서 칫솔 세트를 내려놓고 휴지로 입가를 한 번 더 닦았다.
“---알았어. 병원 쪽에는 연락해 보고.”
의준은 메일 창을 열었다. 혹시라도 일정을 취소한 회사 쪽에서 다시 메일을 보내지 않았을까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이어서 그는 흘깃 그를 바라본 김하나에게 ‘아직 다른 메일이 오지 않았다’는 의미로 고개를 저었다.
“자세한 내용은 아직 모르지만, 공유받는 대로 알려 드릴게요.”
“알았어.”
“오후 일정은 어떻게 할까요?”
“이번 주 내로 처리해야 할 내근 업무가 있던가?”
질문의 끝에 도헌은 의준을 바라보았다. 의준은 놀랐지만 눈을 몇 번 깜박인 후에 입을 열었다.
“이번 주에는 회의와 외근 외에 반드시 전무님께서 처리하셔야 할 일은 없습니다.”
수행 비서 업무를 시작하자마자 가장 먼저 서도헌의 일정을 머릿속에 밀어 넣었기 때문에 대답에는 막힘이 없었다.
“굳이 고르자면 금요일 오전까지 검토해서 반송할 서류가 있습니다만….”
“그건 금요일에 해도 되고.”
도헌은 잠시 생각한 후에 김하나를 향해 말했다.
“H백화점 이 팀장님에게 연락 좀 해 주겠어? 10… 아니, 30분 내로 갈 테니 시간 좀 비워 달라고 해.”
“알겠습니다. 룸도 문의할까요?”
“있으면. 없어도 상관없고.”
“네.”
백화점? 팀장? …룸?
의준은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대화를 마치고 전무실로 향하는 도헌의 등을 바라보았다. 업무 일정을 이야기하다 말고 갑자기 백화점 이야기는 왜 나오는가.
‘게다가 룸이라니? 무슨 룸? 누구하고? 설마 그… 이 팀장님이란 분이?’
“H백화점 고객관리팀 이승철 팀장님. 프라이빗 쇼퍼예요. 명함집에서 봤죠?”
김하나의 말이 들려왔다. 그녀는 전화를 걸며 빠르게 말을 이었다.
“룸은 고객 전용 휴게실 겸 쇼핑룸이에요. 전무님처럼 쇼핑을 좋아하지 않는 분들이 종종 이용하시죠. ---아,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이 팀장님. XX 인베스트먼트 김하나입니다. 잘 지내셨죠?”
통화 도중에 김하나는 전무실을 가리켰다. 의준은 고개를 들었다. 유리 너머로 도헌이 그를 향해 손짓했다. 의준은 황급히 전무실로 향했다.
“부르셨습니까?”
“명함 챙기고, 따라와요.”
“예.”
업무 시간에 백화점에 쇼핑을 하러 가려는 걸까. 그것도 비서를 대동하고.
‘임원은 그래도 되는 건가?’
의준은 급히 자리로 돌아와 상의를 걸치고 안쪽 주머니에 명함 지갑을 넣었다. 김하나가 말했다.
“현원 상사에서 연락 오면 알려 줄 테니까 휴대 전화 확인 잘 하고요.”
“알았습니다. 다녀오겠습니다.”
“오늘 안 들어옵니다. ---의준 씨도 퇴근 준비해서 나와요.”
도헌이 끼어들었다. 의준은 알겠다고 대답했지만 달리 챙길 것도 없었기에 그대로 도헌을 따랐다.
백화점은 가까웠지만 도헌과 의준은 차를 타고 이동했다. 지하 주차장 엘리베이터 앞에서 중년 남자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서 전무님, 오셨습니까.”
“안녕하세요, 이 팀장님.”
도헌은 남자와 악수를 한 후에 의준을 소개했다.
“고객관리팀 이승철 팀장님. 그리고 이쪽은 새로 입사한 수행 비서 이의준 대리입니다.”
“아, 김 과장님 후임이시라던.”
이승철은 의준을 향해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고객관리팀 이승철입니다. 작년부터 서 전무님을 모시고 있습니다.”
“안녕하세요, 이의준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아, 여기… 명함을….”
“아, 고맙습니다. 제 명합입니다.”
장소가 엘리베이터 앞이라 마음이 급해서 명함을 한꺼번에 꺼냈다가 한 장만 건네는 의준과 달리 이승철은 능숙하게 명함을 주고받았다. 도헌은 재촉하는 기색 없이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흠?’
문득 의준의 명함 지갑이 눈에 들어왔다. 독특한 로고로 유명한 명품 브랜드 제품. 그것도 신예 디자이너와 협업해서 제작한 올해 신상품이었다.
‘명품에 관심 있는 성격이었나?’
예전에도 지금도 옷차림이나 소지품은 무난하고 평범했다. 다시 보니 유독 명함 지갑만 튀기는 했다. 어울리지 않는다기보다는 뭐랄까….
“오늘은 어떻게 도와드릴까요?”
이승철이 물었다. 도헌은 그제야 의준에게서 시선을 돌리며 입을 열었다.
“정장을 좀 봐야 하고… 그 전에 선물용 가방을 하나 골라야겠습니다.”
“그러십니까. 선물 받으실 분에 대해 여쭈어도 될까요?”
“20대 초반 여자입니다. 생일 선물용으로.”
여자 가방. 의준은 움찔하고 몸을 떨었다. 상관할 일이 아님에도 신경이 쓰였다.
‘…애인? 아니면 다른 여자?’
예전 같았다면 고민할 새도 없이 물었을 것이다.
‘형, 방금 그 사람 누구예요? 같은 과 사람?’
‘학부 때 친구야. 교수님 만나러 왔대.’
‘친했어요?’
‘인사 정도는 했지. 왜 그래?’
‘아니, 인사 정도 했던 사인데 왜 형 팔을 그렇게 만지나 해서.’
‘오해할 사이 아니니까 걱정 마. 난 죽 인기가 없었어.’
‘그 말을 들으니 믿고 싶던 마음이 싹 사라지네. 형은 거울 안 봐요?’
‘하하하….’
별것 아닌 일조차 이토록 생생하게 떠오르다니. 기억력이 좋으면 이래서 문제였다.
‘잊어버려. 다 지난 일인데.’
그때는 그럴 수 있는 사이였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이제 도헌과 그는….
“의준 씨.”
엘리베이터에서 내려서며 의준을 돌아보던 도헌은 눈썹을 위로 올렸다.
“왜 그럽니까? 어디 아픕니까?”
“네? 아, 아뇨.”
의준은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죄송합니다, 잠깐 다른 생각을 했을 뿐입니다.”
“…그렇습니까?”
도헌은 미심쩍은 투로 물었지만 더 캐묻지 않고 몸을 돌렸다. 의준은 도헌의 등을 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제 우리는 서로에게 필요 이상으로 간섭할 이유가 없는 사이이니까.’
의준은 입술을 깨물었다.
이승철은 도헌과 의준을 1층 명품 브랜드 매장 중 한 곳으로 안내했다. 브랜드명은 낯설었지만 전시되어 있는 물품은 낯익었다. 최근 몇 년 사이에 크게 유행한 숄더백 브랜드였다.
중후한 나무 장식장 안에 장식된 가방과 소품을 곁눈질하며 매장 안쪽으로 이동하자 브랜드 매니저가 그들을 맞았다. 이승철은 그녀에게 도헌을 소개했다.
“서도헌 님과는 구면이지요?”
“그럼요. 오랜만에 뵙습니다, 서도헌 님.”
매니저는 도헌에게 고개 숙여 인사했다. 이승철이 용건을 전했다.
“20대 초반 여성 고객님을 위한 선물을 준비하러 오셨습니다. 잘 부탁합니다.”
“그러시군요. 알겠습니다, 그러면 이쪽으로….”
매니저는 밝게 미소를 지으며 도헌을 한쪽 매대 앞으로 안내했다.
“쇼퍼백은 이미 가지고 있을 테니 다른 종류로 보여 주시죠.”
도헌의 요구에 매니저는 알겠다고 대답한 후에 빠르게 크기와 디자인이 다른 가방을 대여섯 종류 꺼냈다. 이 가방은 신상품이고 저 가방은 인기 상품의 특별 버전이며 이쪽 소형 가방은 직장 초년생분들이 많이 찾으시고 등등…. 설명을 흘려들으며 주변을 둘러보던 의준의 귀에 매니저의 마지막 말이 들려왔다.
“---오른쪽부터 289만 원, 310만 원, 253만 원, 마지막 제품은 196만 원입니다.”
“……?!”
의준은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을 느꼈다.
‘이런 걸… 대학생이 들고 다닌다고?’
의준은 동생인 소영이 자주 메고 다니는 에코백과 비슷한 크기의, 196만 원짜리 가방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테두리만 가죽으로 두른 PVC 재질의 가방. 집이 기울기 전에 어머니가 좋아하던 다른 명품 브랜드에서도 비슷한 가방을 본 기억이 났다. 그 가방도 비싼 편이었지만 150만 원을 넘지는 않았다.
‘물가가 올라서 명품 가격도 올랐다고 들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가방 하나가 200만 원 전후, 아니 300도 넘다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수작업 인건비라고 생각해도 비쌌다. 그렇게 인건비를 지출하느니 프린트해서 저렴하게 팔 수는 없을까. 아니, 그러면 브랜드의 가치가 떨어지고 기술자가 일자리를 잃을 수도 있었다. …그렇다고 바다 건너 극동 아시아에서 일하는 회사원의 평균 월급을 가볍게 넘어서는 가격의 가방을 받아들여야 할 이유는 없지 않을까.
‘아니지, 진정하자. 내가 살 것도 아니잖아.’
의준이 혼란에 빠진 사이에 도헌은 태연하게 작은 토트백을 선택하고 카드를 내밀었다. 상품을 확인하고 계산을 한 후에 선물 포장까지 일사불란하게 진행되는 사이에 의준은 멍하니 매대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음에 듭니까?”
“예?”
옆에서 들려온 질문에 의준은 고개를 돌렸다. 도헌이 턱짓으로 의준이 손을 얹고 있던 매대를 가리켰다.
“거기 그 지갑이 마음에 드나 보군요.”
“네? 아, 아뇨….”
의준은 화들짝 놀라 손을 뗐다. 생각에 잠겨 시선을 아무 데나 뒀는데 도헌이 보기에는 지갑을 보는 모습으로 비쳤나 보다.
“저에게 어울리는 지갑이 아닙니다.”
“…물건이 어울리고 말고가 있습니까? 몸에 지니면 뭐든 어울리는 법입니다.”
그건 당신 같은 남자에게나 해당하는 말이고요. 의준은 혀끝까지 치밀어 오른 말을 삼키며 억지로 웃었다. 도헌은 어깨를 으쓱했다.
“뭐, 나도 이런 브랜드의 어디가 좋아서 돈을 들이는지 이해는 안 갑니다.”
“…방금 가방을 구매하셨으면서 그렇게 말씀하세요?”
“내 물건이 아니라 선물입니다. 그리고 선물은 내가 아니라 상대방의 취향에 맞춰야 실패하지 않지요.”
20대 초반 대학생의 취향을 그렇게 잘 안다고 과시하는 걸까. 의준은 왠지 불쾌한 기분을 느끼며 입을 열었다.
“여자 친구분 취향을 매우 존중하시나 봅니다.”
말을 내뱉기 무섭게 의준은 아차 하고 입을 다물었다. 떠보고 싶은 마음이 노골적으로 드러나 버렸다. 그전에 수행 비서가 감히 임원에게 던질 말도 아니었다.
“수행 비서가 할 말은 아니군요.”
아니나 다를까 도헌은 가차 없이 지적했다. 의준은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됐습니다.”
말투는 평소와 다름없었지만 의준은 불안해졌다. 수습 2주 만에 잘리는 게 아닐까. 일단 김하나에게 실수를 보고하는 편이 나을까.
“---이 선물을 받을 사람은 여자 친구가 아닙니다.”
의준은 고개를 들었다. 도헌은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대학원 시절 은사의 따님이시지요. 은사님과는 가족끼리 교류하는 사이이고, 따님은 한때 과외 학생이기도 했습니다.”
“…….”
“서른이 넘어서 스물 초반 학생과 사귈 생각은 들지 않습니다.”
의준은 눈을 깜박였다. 이윽고 그의 입에서 짧은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약간 풀어지는 그의 표정을 본 도헌의 입술이 살짝 위로 올라갔다.
“안심했습니까?”
“예?”
놀란 의준이 입을 열려던 찰나, 매장 입구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났다. 의준과 도헌은 고개를 돌렸다. 모자를 눌러쓰고 선글라스와 마스크를 착용한 키 큰 남자가 보였다.
남자는 일행과 함께 매장에 들어섰다. 그들을 뒤따르던 여자 몇 명이 매장 보안 요원에게 가로막혔다. 보안 요원이 항의를 받고 쩔쩔매는 사이 남자는 느긋하게 매장을 둘러보다가 의준과 도헌에게로 시선을 향했다.
“어?”
남자는 갑자기 의준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오더니 두 팔을 활짝 벌렸다.
“이게 누구야!”
남자가 두 팔을 벌려 의준을 끌어안으려 했다. 도헌은 의준 앞으로 나서며 그의 팔을 낚아챘다.
“뭡니까?”
남자는 불쾌한 투로 물었다. 도헌은 차가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내 일행에게 무슨 짓을 하려는 겁니까?”
“무슨 짓이라니….”
“…김상우?”
의준은 입씨름하던 남자를 알아보았다.
“상우… 맞아?”
“의준아~!”
상우라 불린 남자는 도헌의 손을 뿌리치고 선글라스를 벗었다. 그리고 도헌을 보란 듯이 젖히고 의준을 덥석 끌어안았다.
“역시 이의준 맞구나! 야, 이게 얼마 만이야? 잘 지냈어?”
“나야 잘 지냈지.”
김상우는 반갑게 의준의 머리를 손으로 문질렀다.
“인마, 연락도 좀 하고 그러지. 메시지 보내도 답장 안 하고 말이야.”
“그랬… 나? 미안, 휴대 전화 끊겼을 때인가 보다.”
“또 끊겼어?”
“어, 아니, 이젠 괜찮고.”
“그래?”
김상우는 의준을 안은 채 도헌에게 시선을 향하더니 입을 열었다.
“그런데 이분은 누구셔? 네 경호원?”
“뭐? 아니야.”
의준은 급히 상우의 품을 벗어났다.
“우리 회사 전무님이셔.”
“전무님?”
상우는 탐색하듯 도헌을 위아래로 훑었다. 도헌은 무표정한 얼굴로 그의 시선을 마주 받았다. 의준은 황급히 두 사람을 소개했다.
“이분은 서도헌 전무님. 전무님, 여기는 제 친구….”
“김상우입니다.”
상우는 도헌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도헌은 그 손을 잡으며 입을 열었다.
“서도헌입니다.”
마주 잡은 손에서 심상치 않은 힘이 느껴졌다. 상우는 눈썹을 살짝 움직이더니 씩 웃었다.
“와, 잘생긴 분이네요. 잠깐 저와 같은 배우인가 했어요.”
“배우이십니까?”
“네.”
상우는 이렇게 대답한 후에 의준을 바라보았다.
“그렇지 않아도 새로 취직했다기에 저녁 즘에 전화해서 만나자고 하려 했는데, 이렇게 만나네. 운명인가 봐.”
“어… 취직 이야기는 누구에게 들었어?”
“소영이한테. 너, 새 전화번호 안 알려 준 건 알아?”
“아, 그랬나? 미안.”
“덜렁이.”
상우는 의준의 뺨을 두 손으로 꾹 누르며 문질렀다. 의준은 난처한 표정으로 그 손을 잡았다.
“상우야, 나… 근무 중이야.”
“아, 미안. 전무님 앞이지.”
전혀 미안해하지 않는 표정으로 이렇게 중얼거린 후에 상우는 손을 뗐다. 그리고 도헌을 향해 입을 열었다.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만나 뵙게 되어 반가웠습니다, 서도헌 전무님.”
다시 악수를 한 후에 상우는 이렇게 덧붙였다.
“우리 의준이 잘 부탁드립니다.”
“…….”
올 때처럼 갑자기 상우는 매장을 떠났다. 입구에 모여 있던 팬들이 그를 따라 이동하며 매장 입구가 일순 텅 비었다. 의준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친한가 보군.”
뒤에서 도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의준은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아, 고등학교 동창입니다. 그때는 그렇게 안 친했는데, 대학을 그만두고 동창회에서 만나서….”
고등학생 시절부터 연예인으로 활동했던 김상우는 동창회에 얼굴을 내민 적이 없었다. 그날이 첫 참석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의준은 그날 이후로 동창회에 참석하지 않을 예정이었다.
“학교 그만두고 처음에 저 친구가 로드 매니저로 고용해 줬어요.”
의준이 사정상 그만두기 전까지 꼬박꼬박 월급을 지불하고 슬쩍 여윳돈도 쥐여 주었던 고마운 친구였다.
“자기도 바쁜데 매해 한두 번씩은 연락해서 안부도 챙겨 주고… 생일 선물도 가끔 해 주고요. 아, 그렇지, 아까 전무님이 칭찬하셨던 제 지갑도 저 녀석이 줬어요. 쓰던 건데 질렸다고.”
“…….”
올해 초에 외부 디자이너와 협업해서 발표한 신상품을 굳이 쓰던 것이라고 말하며 준 이유는 의준이 부담을 느끼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으리라.
‘브랜드 상품에 해박하지 않으니 거짓말을 눈치채지 못하리라 봤겠지.’
도헌은 세게 악수하던 상우를 떠올렸다. 유달리 도전적인 시선도 되살아났다.
“스킨십이 잦은 친구더군요.”
“좀 그렇죠. 제가 키가 작아서인지 툭하면 머리에 손을 올리고 뒤에서 끌어안고 그래요.”
“179센티미터는 작은 키가 아닙니다.”
도헌이 잘라 말하는 바람에 의준은 놀랐다.
“그…렇죠.”
도헌처럼 190센티미터가 넘는 사람에게 그런 말을 들으니 기분이 묘했다. 의준은 슬쩍 덧붙였다.
“그런데… 제 키는 사실 179.5센티미터입니다.”
“…….”
도헌은 대꾸하지 않았다.
‘괜히 말했네.’
키를 정확히 전달하고 싶은 마음에 내뱉었지만 0.5센티미터는 본인 외의 사람에게 의미 있는 수치가 아니었다.
‘키에 연연하는 사람처럼 보였겠지?’
키가 작지 않다고 위로해 줄 때 가만히 있을걸. 의준은 고개를 저었다. 도헌은 그런 의준을 흘깃 보았다.
“나는 아무 말도 안 했으니 억측으로 자학하지 마세요.”
“…아, 아뇨, 저는 아무 생각도 안 했습니다.”
“복잡한 표정으로 한숨을 쉬었던 사람이 할 말입니까?”
“…….”
의준이 입을 다물자 도헌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평균을 넘는 키는 작다고 할 수 없습니다.”
“…네.”
“키를 포함한 외모는 그 사람을 구분하는 무수한 특징 중 하나에 불과합니다. 집착할 필요 없습니다.”
역시 0.5센티미터를 덧붙여 말한 탓에 키에 집착하는 것으로 비쳤나 보다. 의준은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그야… 0.5센티미터도 소중한 키인걸! 거기에 0.5센티미터만 더하면 180센티미터가 된다고!’
정말로 키에 집착한다는 인상을 확고하게 만들고도 남을 말을 꾹 눌러 삼키며 의준은 도헌을 바라보았다.
외모가 그 사람을 구분하는 무수한 특징 중에 하나에 불과하다면, 서도헌은 그 한 가지 특징에 있어서는 천재였다.
둥글고 반듯한 이마와 부드럽게 각진 턱으로 이루어진 얼굴. 중앙에 자리 잡은 콧대는 곧고 높았으며 입술은 적당히 도톰한 데다 양 끝이 살짝 위로 올라가 희미한 미소를 머금은 듯 보였다. 무엇보다 인상적인 분위는 러시아인인 모친에게 물려받은, 반짝이는 회색 눈동자였다. 짙은 눈썹과 대조적인 연한 눈동자는 자칫 딱딱하게 보일 수 있는 얼굴에 독특한 매력을 불어넣었다.
‘솔직히 외모만 두고 보면 완벽하게 취향인데.’
이승철의 안내에 따라 2층 매장으로 이동하는 사이 많은 사람들이 도헌을 바라보았다. 흘끔거리는 사람도 있고 대놓고 그를 따라 시선을 옮기는 사람도 있었다. 사람 보는 눈은 다 똑같았다. 그들도 의준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으리라.
‘5년 전에 난 어떻게 이 남자와 사귀었을까?’
엘리베이터를 내려선 도헌이 고개를 돌려 의준을 바라보았다. 그는 의준이 잘 내린 것을 확인한 후에 걸음을 뗐다.
오래전 일이라 어떻게 사귀었는지 기억나지 않았지만 한 가지만은 분명했다. 남이 된 지금 과거 같은 기회는 두 번 다시 찾아오지 않을 터였다.
‘무엇보다….’
두 사람의 관계를 끝낸 사람은 저 남자였으니까.
의준은 쓴웃음을 지으며 걸음을 뗐다.
***
현관문을 열고 들어선 실내는 조용하고 어두웠다.
‘아, 맞다. 소영이는 오늘 병원에서 잔댔지.’
의준과 소영 남매의 모친은 작년 말에 병원에 입원했다. 몇 년 전에 쓰러진 후로 입퇴원을 반복한 모친 덕분에 병원비는 어마어마하게 불어났다. 초반에는 의료 보험과 의준의 월급 그리고 소영의 아르바이트 비용으로 조금씩이나마 막았지만 눈 깜박할 사이에 감당할 수 없는 빚으로 불어난 상황이었다. 올해 초부터는 간병인을 고용하는 대신 남매가 번갈아 가며 간병하기 시작했다. 돈을 아끼기 위해서였다.
‘다음 달에 월급이 나오면 야간 간병인은 다시 구해야지.’
그러면 소영도 의준도 시간적으로 여유가 생길 터였다.
‘소영이가 휴학하지 않아도 되고.’
의준은 침대에 털썩 드러누웠다.
낮에 백화점에서 보았던 사람들이 떠올랐다. 유행하는 옷차림으로 화장품이나 전자 기기 등을 즐겁게 고르던 소영이 또래의 아이들은 즐겁고 행복해 보였다. 도헌의 ‘은사의 딸’이라던 대학생도 지금쯤 명품 가방을 선물 받고 즐거운 저녁 시간을 보내는 중이리라.
사랑하는 가족 그리고 소중한 친구들에게 생일을 축하받는 기분은 얼마나 좋을까. 그러고 보니 작년 소영이의 생일에는 선물은커녕 닭 한 마리도 배달시켜 먹이지 못했었다.
‘올해는 꼭 뭐든 사 주자. …안 되면 용돈이라도 쥐여 줘야겠어.’
취업을 해서 다행이었다. 연봉이 두 배로 뛰어서 기뻤다. 열심히 일해야겠다. 정말로 열심히.
까무룩 졸음이 밀려들었다. 눈꺼풀이 완전히 감기려던 찰나 갑자기 전화벨이 울렸다.
“여, 여보세요?!”
상대가 누구인지 확인도 하지 않고 대뜸 전화를 받자마자 흐느끼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빠… 나야, 소영이.”
“소영이? …너 울어? 무슨 일… 아니, 어디야?”
“병원이야. 오빠…. 의사 선생님이 오래. …어떻게 하지, 오빠. 엄마가….”
“……!”
잠이 확 달아났다. 의준은 튕기듯 몸을 일으켜 그대로 현관을 박차고 뛰어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