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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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행 비서는 임원과 동행하며 업무를 보조하는 비서였다.

올바른 정의였다. 실제로 해야 하는 업무와 거기에 필요한 능력 및 준비 과정을 ‘업무’와 ‘보조’라는 두 단어로 뭉뚱그렸다는 점을 제외하면 말이다.

“수행 비서도 원활한 업무 진행을 위해 임원을 보조한다는 점에서는 다른 비서들과 마찬가지예요. 가장 중요한 업무는 임원의 일정 관리죠. 그에 따라 필요한 자료를 수집하고 정리하는 일하고.”

입사 첫날, 긴장해서 인수인계를 시작한 의준에게 김하나는 이렇게 말했다.

“하지만 다른 비서와 달리 수행 비서는 담당 임원의 사적인 일정에도 관여합니다.”

“사적인 일정이라고 하시면?”

“업무 외적인 일정이죠. 예를 들어… 두 달 뒤에 예술의 전당에서 있을 해외 피아니스트의 연주회 티켓을 미리 예매하는 일 같은.”

김하나는 말을 이었다.

“그 티켓은 우리 회사와 오래 거래한 은행 지점장 부부의 결혼기념일 선물로 전달될 예정이에요. 물론 전무님 이름으로요.”

“…….”

“현재의 업무와는 상관없지만 완전히 별개라고는 할 수 없는 일이죠. 물론 이보다 더 사적인 일을 맡게 될 때도 있어요.”

이어서 김하나는 다른 예시를 들었다. 임원들 중 한 사람의 가족이 병원에 입원하게 되어서 임원 대신 관련 수속을 수행 비서가 진행했다는 이야기였다.

“그 외에도 새 차를 구매할 때 동행하거나, 집안 행사에 참석해 보조하는 등의 업무도 있지만… 대부분 다른 임원들 이야기고 서 전무님은 그렇게까지 수행 비서에게 일을 맡기는 분은 아니니 안심하세요.”

“…네.”

솔직히 말하면 너무 다른 세상 이야기라 아직 들은 내용을 이해하지도 못했다. 월급을 받고 하는 일을 도와주는 것도 모자라 아예 삶을 보조하는 역할이라니.

‘아… 하지만 왠지 전에 다니던 회사가 생각나기는 하네.’

종업원이 다섯 명이었는데 그중 의준 한 명을 제외한 모두가 가족인 회사였다. 의준은 사장이 사적으로 사용한 법인 카드 내역을 정리하고 사장의 조카인 팀장이 발송 버튼만 누르면 되도록 업무 메일을 작성했으며 사장의 부인인 부사장이 취미로 들여놓은 공기 정화 식물을 가꾸었다.

‘그러니까 결국 도헌이 형… 아니, 서도헌 전무님이 하라는 일을 하면 된다, 이거잖아? 얼마든지 할 수 있겠어.’

의준은 입을 열었다.

“서도헌 전무님의 수행 비서는 지금까지 김 과장님이셨나요?”

“아니요. 사실 나도 인수인계받은 지 3개월밖에 안 됐어요.”

김하나는 원래 수행 비서가 아니었다. 비서실장 다음으로 높은 직위였던 그녀가 서도헌의 수행 비서로 일한 이유는 원래 있던 수행 비서가 갑자기 사직해서였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어요.”

김하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래도 의준 씨가 입사한 덕분에 빨리 원래 업무로 복귀할 수 있어서 다행이에요. 솔직히, 두 업무를 병행하느라 세 달간 주말을 모두 희생했거든요.”

“…저런.”

“물론 휴일 근무 수당은 확실하게 챙겼지만요.”

김하나는 가볍게 덧붙인 후에 남은 업무 설명에 들어갔다. 오전 내내 진행된 1차 인수인계의 끝에 김하나는 이렇게 말했다.

“한 달 동안은 제가 함께 일할 테니 걱정 말아요. 그 뒤에도 필요하면 비서실 사람들이 도울 테고. 전무님도 처음부터 완벽하기를 기대할 분은 아니니까 마음 편하게 시작해요.”

“고맙습니다. 열심히 배우겠습니다.”

“그래요. 그러면 우선….”

김하나는 시간을 확인했다.

“임원 회의를 마칠 시간이니 전무님을 맞으러 갈까요.”

“네.”

의준은 김하나를 따라 회의실을 나섰다. 예정 시간에서 10분 정도 지난 후에 도헌이 사무실로 돌아왔다.

부재중에 온 연락과 일정 변동 사항을 간단히 전달한 후 김하나는 이렇게 물었다.

“---이상입니다. 점심은 어떻게 하시겠어요?”

서도헌은 외부 일정이 없는 날 낮에는 사무실에서 간단하게 샌드위치 등으로 식사를 마치고 업무를 보았다.

‘오늘은 오후에도 내부 회의니까 여기서 먹으려나? …아, 미리 뭔가 사다 두어야 했을까.’

이런 생각을 하던 차에 도헌과 시선이 마주쳤다. 도헌이 입을 열었다.

“오늘은 밖에서 먹지. ---김 과장은 따로 먹고, 이의준 씨는 따라와요.”

“네, 넵!”

도헌이 사무실을 나섰다.

“먹고 싶은 메뉴 있습니까?”

“네? 저는 뭐든 괜찮습니다. 전무님이 드시고 싶은 메뉴로….”

대답하다 말고 의준은 김하나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아니지, 제가… 그, 가실 식당을 미리 예약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럴 필요 없습니다.”

김하나에게 던진 질문에 도헌이 대답했다.

“오늘 점심은 이의준 씨의 입사를 축하하는 의미로 제가 삽니다. 먹고 싶은 메뉴로 골라요.”

“비서실에 신입 사원이 입사하면 늘 그러셨어요. 전통이죠.”

김하나가 빠르게 귀띔했다. 의준은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어… 제가, 이 근처는 잘 몰라서.”

도헌은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 하는 의준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지금도 평양냉면 좋아합니까?”

“네? 아… 네.”

“근처에 아는 곳이 있습니다. 거기로 가지요.”

도헌은 김하나를 돌아보았다. 김하나가 빠르게 입을 열었다.

“예약은 어렵지만 자리가 있는지 확인하고 곧 연락드리겠습니다. 다녀오세요.”

이럴 때는 저렇게 해야겠구나. 의준은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며 도헌을 따라 사무실을 나섰다.

“근처니까 좀 걸을까 하는데, 괜찮겠습니까?”

“네?”

“발 말입니다.”

“무슨 말씀이신지… 아.”

의준은 뒤늦게 도헌의 말뜻을 깨달았다. 도헌은 결혼식에서 만났을 때 의준이 발뒤꿈치가 까져서 절뚝거렸던 모습을 떠올렸던 것이다.

“괜찮습니다. 다 나았어요.”

“그래요.”

도헌은 다시 걸음을 뗐다.

점심시간을 맞아 로비에는 사람이 붐볐다. 드문드문 도헌을 알아본 회사 직원들이 인사를 건넸고 도헌은 고개를 끄덕여 인사를 받았다.

“전 직원은 무리라도 과장급 이상 사원들의 얼굴과 이름을 익혀 두십시오. 김 과장에게 말하면 비서실 자료를 준비해 줄 겁니다.”

“알겠습니다.”

“김 과장은 비서실에서 계속 근무하니까, 인수인계 기간은 신경 쓰지 말고 업무를 배우세요.”

“…네.”

사무적인 대화가 오가는 가운데 도헌이 의준의 오른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자리를 바꾸기 무섭게 도헌 옆으로 차가 지나갔다.

‘이런 점은 여전하구나.’

사무실을 나오기 전에 도헌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지금도 평양냉면 좋아합니까?’

도헌은 의준이 좋아하던 음식을 기억하고 있었다.

사귀던 시절에는 계절에 상관없이 자주 냉면을 먹으러 다녔었다. 처음에는 의준이 좋아한다는 이유로 반쯤 억지로 먹다가 나중에는 스스로 맛있는 냉면집을 찾으러 다녔던 도헌의 모습을 떠올리자 입가에 미소가 저절로 어렸다.

‘그동안에도 혼자 먹으러 다녔을까?’

의준은 도헌을 바라보았다.

도헌과 헤어지고 5년이 흘렀다.

강산이 변할 정도로 긴 세월은 아니어도 사람의 인생에 변화가 일어나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대학생이던 의준은 아등바등 사는 직장인이 되었고 대학원생이던 도헌도 한 회사의 임원이 되었다.

어떻게 젊은 나이에 임원이 되었을까. 대학원은 졸업했을까. 그사이에 다른 사람과 만났을까.

‘그동안 어떻게 살았을까?’

자연스럽게 의문이 떠오르는 바람에 의준은 표정을 굳혔다.

‘그게 왜 궁금해?’

면접 날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렸다. 도헌은 의준과의 과거는 상관없다고 못을 박았다. 그야 그렇다. 그들 사이에는 5년이라는 공백이 존재했다. 일방적인 이별 후에 연락이 완전히 끊기는 바람에 생겨난, 결코 짧다고 할 수 없는 시간의 차이가.

‘나와 상관없잖아.’

현재는 과거의 연장선이 아니었다. 공백이 존재하는 인연은 끊긴 셈이나 마찬가지였다.

지금 의준과 나란히 걷고 있는 남자는 기억 속의 상냥한 연인이 아니라 어렵게 입사한 회사의 상사였다.

‘그래. …이 사람은 도헌이 형이 아니라 서도헌 전무님이니까.’

한번 끊겼던 인연을 다시 이을 수는 없었다. 과거에 연연하느니 새롭게 인연을 시작하는 편이 옳았다.

‘이 사람과 나는 남이야.’

의준은 마음을 다잡았다.

***

어둠에 물든 강 위를 반짝이는 빛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가로질렀다. 심야에 가까운 시간대였지만 차량이 끊이지 않는 이유는 오늘이 주말을 앞둔 금요일 밤이기 때문이었다.

“전무님, 말씀하셨던 감사장을 작성해서 메일로 보냈습니다.”

옆에서 들려온 말에 서도헌은 감고 있던 눈을 떴다. 김하나는 천천히 눈을 깜박이는 도헌을 보고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죄송합니다, 주무셨어요?”

“아니야.”

도헌은 입을 열었다.

“감사장이 끝났다고? 보여 줘.”

“여기요.”

김하나는 자기 휴대 전화 화면을 도헌 쪽으로 기울였다. 정중한 감사 인사와 그의 서명으로 마무리된 짧은 메일을 확인한 도헌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로 보내.”

“내일 오전에 도달하도록 발송하겠습니다.”

김하나는 메일을 확인하며 말을 이었다.

“이의준 씨가 오후에 지시하셨던 자료 번역을 마쳐서 메일로 보냈네요. 확인하셨나요?”

“급한 게 아니니 월요일까지 보내라고 했던 것 같은데.”

“금요일이니까요.”

김하나가 웃었다.

“전무님께서 월요일에 받아 보시려면 오늘 마쳐야지요. 주말에는 근무하지 않으니까.”

“…….”

“그건 그렇고 하루에 끝날 분량이 아니었는데, 용케 마쳤네요.”

김하나는 의준이 첨부한 파일을 살피며 감탄했다. 도헌이 입을 열었다.

“잘 적응하던가?”

“이의준 씨 말씀인가요? 네, 잘하고 있어요.”

김하나는 잠시 생각한 후에 대답했다.

“업무에 의욕적이고 성실하고, 비서실 사람들 인상도 좋죠. 일을 맡기면 빠르고 꼼꼼하게 진행하고요.”

아직 한 주밖에 지나지 않았기에 섣부른 판단을 내리기는 어렵다면서도 김하나는 이의준이 괜찮은 인재라고 덧붙였다.

“아, 그렇지. 이의준 씨는 기억력이 무척 좋더라고요.”

김하나는 말을 이었다.

“얼마 전에 회사 관련 자료를 읽어 두라고 주었는데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서 다 읽었다고 하더니 데이터 오류를 문의하더군요. 홈페이지에 실린 연혁과 받은 자료의 연혁에 서로 다른 부분이 있다면서요.”

그럴 리가 없는데 싶어서 확인했더니 의준의 말대로였다. 급히 검토한 결과 홈페이지에 실린 연혁이 맞고 비서실 자료가 틀렸다는 사실을 알았다. 지난 3년간 같은 자료로 사내 신입 사원을 교육했는데 오류를 지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사소하다면 사소할 수 있는 숫자 표기였다. 동시에 비교하지 않는 이상 찾아내기도 어려웠다.

“그래도 잘못된 건 맞으니까요. 인사부 교육 담당자가 새로 자료를 만들기로 했습니다.”

“기억력은 예전부터 좋았지.”

도헌은 창밖을 응시하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특히 숫자에 강해. 기억도, 연산도. 만 단위 숫자와 만 단위 숫자로 곱셈을 시켜 보면 10초도 안 돼서 대답할걸. 암산 능력이 천재급이거든.”

“그래요? 놀랍네요.”

“본인은 딱히 돈이 되지 않는 재능이라고 투덜댔지만 재능은 재능이지.”

도헌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어렸다. 김하나는 상사의 표정에 놀랐지만 모르는 척 말을 이었다.

“회계나 수학 쪽으로 진로를 정했다면 좋았을지도… 아, 그러네요. 의준 씨가 중퇴했던 학과가….”

“…내일은 일정이 있던가?”

도헌이 물었다. 김하나는 화제 전환에 안도했다.

“이번 주말에는 일정이 없습니다. PT 일정을 잡을까요?”

“일요일 오전으로 해 줘. 회원권 갱신도 확인하고.”

“알겠습니다.”

차가 도헌의 집에 도착했다. 도헌은 지하 주차장에서 김하나와 헤어져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자정을 몇 분 앞둔 시각, 아무도 없는 집은 조용하고 어두웠다. 도헌은 화려한 한강 야경이 펼쳐진 거실에는 눈도 주지 않고 곧장 침실로 향했다.

침실에는 침대 하나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한 달 전 이사했을 때와 별반 다름없는 공간이었다. 바빠서 가구를 보러 다닐 새도 없었지만 이제는 굳이 가구를 들일 생각이 없었다. 어차피 혼자 사는 집이고 몇 시간 눈을 붙이기 위한 침실이기 때문이었다.

도헌은 넥타이를 풀고 셔츠를 벗은 후에 욕실로 향했다. 세면대에 두 손을 짚고 거울을 보았다.

‘시체 같은 얼굴이군.’

유달리 피곤한 한 주였다. 원인은 알고 있었다. 이의준이었다.

한 주 내내 의준과 함께 시간을 보냈다. 수행 비서로서 채용했을 때 각오한 상황이었지만 예상보다 더 정신적 소모가 심했다.

‘누군가를 의식하는 일이 이렇게 힘들 줄은.’

의준의 얼굴을 떠올렸다. 감정에 따라 다채롭게 변하는 표정은 여전했고 성격도 변하지 않았다.

첫인상을 배신하지 않는 좋은 사람. 의준을 아는 사람들은 그를 이렇게 불렀다.

‘여전하다고 해야 하나.’

이렇게 생각하며 거울을 응시하던 도헌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를 떠올리며 미소를 짓다니 불쾌함이 솟아올랐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그럴 리 없잖아.’

모든 것이 변했다. 상황도, 도헌 자신도. 의준만이 여전할 리가 없었다.

‘그 좋은 사람이라던 녀석이 네게 어떻게 했는지 잊었나?’

잊지 않았다. 죽어도 잊을 수 없었다.

아직도 왜 그랬는지 모르지만 그렇다고 일어난 일이 변하지는 않았다.

“…쯧….”

도헌은 고개를 저었다.

재회는 천운이었다. 그동안 꿈꾸기만 했지 실행할 엄두를 내지 못했던 복수를 위한 절호의 기회가 주어졌다.

5년간 그를 갉아먹었던 감정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라면 기꺼이 기회를 잡을 것이다. 그리고 보란 듯이….

‘네게 복수할 거다.’

샤워 부스에 들어가 물을 틀었다. 미지근한 물줄기가 머리를 적셨다. 도헌은 머릿속을 점거하고 있던 의준의 얼굴을 지우려는 듯이 두 손으로 천천히 얼굴을 문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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