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아침 여덟 시, 사람들이 출근 준비를 위해 일어나거나 혹은 이미 집을 나서 직장으로 향하고 있을 그 시간에 의준은 집으로 향했다. 편의점 야간 근무를 마치고 돌아가는 그의 손에는 폐기 도시락 두 개가 담긴 비닐봉지가 들려 있었다.
“나 왔어.”
“어서 와.”
언덕 중간의 반지하층 현관을 들어서며 인사를 건네자 작은 방에서 여동생이 고개를 내밀었다. 학교 갈 준비 중이었는지 앞머리에는 롤이 말려 있고 한쪽 눈에만 마스카라가 발려 있었다.
“도시락 가져왔어. 학교 가기 전에 먹어.”
“응.”
화장에 집중하는 여동생을 두고 부엌 겸 거실로 향한 의준은 깔끔한 싱크대와 매끈한 바닥을 깨닫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소영아, 청소했어?”
“응. 어제 일찍 들어온 김에.”
“일찍? 과외하는 날이었잖아.”
“아… 잘렸어. 애가 학원 다니고 싶어 한대.”
“…그렇구나.”
의준의 대꾸에서 걱정하는 기색을 읽은 소영이 눈가에 손으로 바람을 펄럭이며 말했다.
“오늘 학교 끝나고 전단지 붙일 거야. 친구한테도 과외 원하는 사람 있으면 연결해 달라고 했고. 이래 봬도 유능하니까 금방 새로 시작할 수 있어. 걱정 마.”
“걱정 안 합니다요. 밥이나 먹자.”
의준이 상을 펴고 전자레인지에 데운 도시락을 내려놓았다. 남매는 도시락을 하나씩 차지하고 마주 앉았다.
“오빠는 오늘 나가?”
“오전에는 좀 자고… 오후에 엄마 병원에 가 보려고.”
“그러면 노트북 내가 써도 되지? 오늘 조별 과제 모임 있거든.”
“그래. 아, 혹시 학교에 프린트 되면 이력서 두 장만 더 프린트해 줄래?”
“알았어.”
소영은 제육볶음을 우물우물 씹으며 의준의 안색을 살폈다. 시선을 눈치챈 의준이 왜 그러냐는 표정을 지었다.
“기운 좀 내. 취직 좀 안 되었다고 처지지 말고.”
“뭐래. 기운은 넘치거든. 졸릴 뿐이야.”
“너무 무리하지 마.”
소영이 말했다. 의준은 장난스럽게 얼굴을 찌푸렸다.
“어허, 조그만 게 어디서 오빠 걱정이야.”
“키는 비슷하거든요.”
“…야, 내가 3센티미터 크거든.”
“깔창 높이 아니고?”
“이놈, 말하는 거 봐라? 그게 하나 남은 제육볶음 도시락을 양보한 오라버니에게 할 소리야?”
소영은 피식 웃었다.
“깔창 빼고 재 보자는 소린 안 하네?”
“야, 너 오빠의 자존심을….”
대꾸하다 말고 의준은 뒷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휴대 전화가 진동하고 있었다.
서울 지역 번호가 붙은 일반 전화 번호였다. 모르는 번호였기에 의아해하면서도 의준은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이의준 씨 되십니까?
“그렇습니다만.”
---안녕하세요, XX 인베스트먼트 주식회사 인사팀에 근무하는 이철민이라고 합니다. 전해 주신 이력서 검토를 마쳐서 연락드렸습니다.
“예? 아, 예!”
의준은 기억을 더듬었다. XX 인베스트먼트 주식회사라니, 그런 회사에 지원한 적이 있었던가. 어쩌면 지난달에 이력서를 아무 데나 흩뿌리면서 지원한 곳일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서류 심사를 마쳤고 면접 일정을 잡고자 합니다만, 언제가 좋으실지요?
“어, 아… 예!”
어디건 무슨 상관인가. 면접을 볼 수 있다는데. 의준은 황급히 대답했다.
“저는 언제든 괜찮습니다.”
---그러시면 혹시 오늘 오후는 어떠실지요? 네 시 정도에.
“오늘…요?”
대답 직전에 오후에 병원에 가기로 했던 일이 떠올랐다. 말을 멈추는 의준을 본 여동생이 빠르게 밥을 삼키더니 입을 벙긋거렸다. 괜찮아! 병원은 내가 갈게. 의준은 고맙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오후 괜찮습니다. 예, 그럼 네 시에. 아, 그래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예, 예. …이따 뵙겠습니다. 들어가십시오.”
의준이 전화를 끊자마자 소영은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어딘데? 좋은 회사야?”
“어… 모르겠어. XX 인베스트먼트 주식회사라는데.”
“자기가 지원한 회사도 몰라?”
“그게… 기억에 없어.”
“뭐?”
소영은 기가 막힌 표정을 지었다. 의준은 휴대 전화로 회사 이름을 검색했다.
“20년 넘은 회사네. …기업 투자 전문이라는데. 사원 수도 100명이 넘어. …헉, 대표 이사가 외국 사람인데?”
“외국계 기업이야? 오~.”
“아니, 그런데 지원한 기억이 없어….”
문자가 왔다. 통화를 마친 인사 담당자가 보낸 면접 시간과 장소 안내 문자였다.
“괜찮겠어? 혹시 취업 사기, 다단계 그런 거 아냐?”
“모르겠어. 일단 가 보지 뭐.”
의준이 말하자 소영은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혹시 모르니까, 다섯 시까지 연락 없으면 내가 전화할게. 아니다, 위치 추적 켜 놓을래? 내가 확인할 테니까.”
“재수 없는 소리 할래?”
의준은 웃었다. 불안하기는 했다. 하지만 지금은 이런저런 경우의 수를 가릴 때가 아니었다.
“면접 끝나면 메시지 보낼게.”
기회가 주어졌으니 잡고 싶었다. 의준은 면접을 보러 가기로 했다.
***
XX 인베스트먼트 주식회사는 삼성동에 있었다.
‘우와, 건물 크네.’
XX 인베스트먼트 주식회사가 입주한 건물 앞에 도착한 의준은 조용히 감탄했다. 지하철역에서 5분 거리에 바로 앞에는 버스 정류장이 있는 데다 바로 옆에는 종합 쇼핑몰과 백화점 그리고 호텔이 자리 잡은 역세권 중의 역세권이었다.
‘이런 건물이면 월세도 비쌀 텐데…. 돈 많은 회사인가 보다.’
의준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로비에서 XX 인베스트먼트 주식회사 면접 예정자라고 말씀하시면 신분증 확인 후에 방문자 출입증을 받으실 수 있습니다. 출입증을 이용해 27층으로 오시면 됩니다.’
면접 안내 문자에 따라 출입증을 받은 후에 엘리베이터를 탔다. 버튼이 하나도 없는 엘리베이터에 당황한 것도 잠시, 곧 의준은 같이 탄 사람들을 흉내 내서 패널에 출입증을 슬쩍 댔다. 아무것도 없던 벽에 27층이 표시되었다.
‘최첨단이네.’
면접을 보러 갈 때마다 긴장하곤 했지만 오늘은 유달리 주눅이 들었다. 의준은 괜히 가방을 고쳐 매고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인사팀 이철민 대리님, 이철민 대리님. …안녕하세요, 면접 예정자 이의준입니다.’
마중 나올 예정인 인사팀 사람의 이름을 반복해 떠올리며 첫인사를 연습하는 사이에 27층에 도착했다.
“이의준 씨?”
엘리베이터에서 내리기 무섭게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의준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숙였다.
“예. 안녕하세요, 면접 예정자 이의준입니다. 이철민 대리님이신가요?”
“아니요.”
“예?”
머릿속 예상과 다른 대답을 들은 의준은 고개를 들었다. 눈앞에 남색 정장을 입은 여자가 서 있었다.
“어… 죄송합니다. 제가 사람을 잘못 봤네요. 이철민 대리님을 찾는데….”
“이의준 씨 맞죠?”
의준이 그렇다고 대답하자 여자는 미소를 지었다.
“임원비서실 김하나 과장이에요.”
“안녕하세요. 저, 인사팀….”
“이철민 대리와 만날 약속을 하셨죠? 사정이 좀 있어서 이 대리 대신 제가 나왔어요.”
김하나는 몸을 돌렸다.
“오세요. 전무님께서 기다리십니다.”
전무님?
의준은 김하나를 따라 걸으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 김 과장님, 전무님이 기다리신다면… 임원 면접을 보는 건가요?”
문자로 안내받은 내용에 따르면 오늘 의준은 인사팀장과 경영지원팀장이 참석하는 1차 면접을 볼 예정이었다. 그 사실을 전하자 김하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일반적인 면접 절차를 안내받으셨네요. 이 대리가 착각했나 보군요. 이의준 씨는 일반 면접이 아니라 특별 면접 대상자세요. 실무 면접 없이 임원 면접만 봅니다.”
“…예?”
의준은 얼떨떨한 투로 되물었다. 김하나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전무님과 아는 사이시잖아요. 전무님께 이력서를 직접 주셨고요.”
“제가요?”
대체 언제 그런 대담한 짓을 했던가. 혼란에 빠진 의준을 보며 김하나는 더욱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주말에 잠실 결혼식장에서…. 그때 저도 함께 있었는데. 기억 못 하세요?”
결혼식. 김은혁. 화장실. 그리고….
“아.”
기억을 떠올린 의준은 입을 딱 벌렸다. 김하나는 서도헌과 만났을 때 그와 함께 있던 여자였다.
‘그 말은….’
의준은 믿어지지 않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혹시 지금 말씀하시는 전무님이… 도헌이 혀… 아니, 서도헌 씨인가요?”
“맞습니다.”
김하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XX 인베스트먼트 주식회사의 서도헌 전무님이시지요.”
이력서조차 넣지 않았던 회사의 면접 기회에 얽힌 미스터리가 풀리는 순간이었다.
‘도헌이 형이… 그날 내가 준 이력서를 정말 검토하고 불렀다고?’
김하나를 따라 파티션으로 나누어진 사무실 공간을 가로지른 끝에 도달한 곳은 ‘전무이사실’이라는 표시가 붙은 문 앞이었다.
반투명 유리벽 너머로 사람 그림자가 비쳤다. 의준은 숨을 짧게 들이마셨다.
‘정말로 도헌이 형이….’
김하나는 문을 두드린 후에 열고 먼저 안으로 들어섰다.
“전무님, 이의준 씨를 모셔 왔습니다.”
“그래.”
의준은 김하나를 따라 사무실로 들어섰다. 도헌과 그의 시선이 마주쳤다.
“안녕하세요.”
의준은 꾸벅 인사한 후에 미소를 지었다. 도헌은 표정 변화 없는 얼굴로 소파를 가리켰다.
“앉으십시오.”
“…….”
도헌의 존댓말에 의준은 놀랐다.
‘그렇지, 면접이니까….’
의준은 표정을 가다듬었다. 도헌은 김하나를 향해 말했다.
“가서 일 봐요.”
“알겠습니다.”
김하나가 밖으로 나갔다. 문이 닫히고 사무실에는 도헌과 의준만 남았다. 도헌은 창가에 있던 커피메이커 쪽으로 몸을 돌렸다.
“커피 마시겠습니까?”
“아, 네. …고맙습니다.”
커피 테이블 위에 회사 로고가 새겨진 머그잔이 놓였다. 의준은 작게 잘 마시겠습니다라는 말을 한 후에 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어.’
마시기 좋을 만큼 따스한 아메리카노에서 약하게 단맛이 났다. 의준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잔을 바라보았다.
“각설탕을 하나 넣었습니다. …그렇게 마셨던 것 같아서.”
도헌은 무표정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아니었습니까? 새로 내려 줄까요?”
“아, 아닙니다! 맞습니다.”
의준은 잔을 두 손으로 감싼 채 고개를 저었다.
“각설탕 하나, 맞아요….”
의준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의 귀가 살짝 붉어졌다. 도헌은 그를 흘깃 보더니 책상으로 향했다.
“…….”
의준은 고개를 들었다. 책상 앞에 앉아 이력서를 넘기는 도헌의 모습이 보였다. 아직 이력서 검토가 끝나지 않았나. 의준은 커피를 마시며 기다렸다.
침묵이 길게 이어지며 의준과 도헌 사이에는 종이를 펄럭이는 소리만 간간이 울려 퍼졌다. 그 사이에 의준은 줄곧 도헌을 바라보고 있었다.
처음 만났을 때는 변한 데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자세히 보니 변했다. 우선 머리 스타일이 달라졌다. 예전에는 곱슬거리는 머리를 이마까지 내려서 마치 베이비펌을 한 듯 보였었는데 지금은 이마를 다 드러내고 머리를 뒤로 넘겨서 단정하고 성숙한 느낌을 주었다. 얼굴 살이 빠져서인지 각진 턱과 이목구비도 선명하게 드러났다. 짙은 눈썹 아래로 움푹 들어간 눈 그리고 짙은 쌍꺼풀 아래 반짝이는 이국적인 회색 눈동자. 변한 부분과 여전한 부분이 뒤섞인 얼굴은 5년 전에 비해 성숙하고 어른스러운 인상이었다.
‘잘생겼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지만.’
의준은 미소를 지었다. 때마침 도헌이 고개를 들었다.
“대학은 왜 그만뒀습니까?”
“아.”
구직 활동을 하며 수백 번을 들어 본 질문이었다. 그러나 의준은 늘 그러듯 빠르게 대답하지 못하고 망설였다. 도헌은 재촉하지 않고 의준이 입을 열기를 기다렸다.
“…집안 사정 때문에 그만뒀습니다.”
이윽고 의준이 대답하자 도헌은 다시 물었다.
“어떤 사정인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아버지가.”
의준은 짧게 숨을 들이마신 후에 대답했다.
“아버지가 사업에 실패하셨고… 얼마 지나지 않아 돌아가셨습니다. 그 뒤에 어머니도 쓰러지셔서 학업을 지속할 수 없었습니다.”
“…유감이군요.”
의준이 사무실에 들어온 뒤 처음으로 도헌의 표정이 변했다. 눈썹을 살짝 찌푸리며 미안함을 표시하는 그를 향해 의준은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도헌은 다시 이력서로 시선을 향했다.
“이직이 잦았던 이유를 듣고 싶군요.”
첫 질문과 한 세트나 다름없는 두 번째 질문에 의준은 오히려 침착해졌다.
“회사에서 요구하는 인재상에 맞지 않았습니다.”
학력을 문제 삼은 곳도 있었고 무급 야근을 거부하는 점에 난색을 표한 곳도 있었다. 4대 보험 미가입은 기본이고 계약 직전에 연봉을 슬쩍 깎기는 다반사요, 월급 연체도 잦았다.
가장 최근 그러니까 올해 초에는 수습 기간을 마치기 이틀 전에 잘렸다. 그를 대신해 들어온 사람은 사장의 조카였다.
노동청에 신고해서 법적 권리를 찾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기에는 시간도 돈도 모자랐다. 의준은 위자료로 한 달 월급 정도 되는 돈을 받고 물러난 후 다른 직장을 찾기로 했다.
작년은 그렇게 보냈고 올해는 면접에서 계속 떨어졌다. 이대로 가면 반년째 계속하고 있는 편의점 야간 아르바이트가 가장 길게 일한 이력이 되게 생겼다.
여러모로 절박한 상황이었다.
‘상반기 내로 어떻게든 취업해야 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의준은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그때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한쪽 입술을 끌어올려 비웃음을 띤 도헌의 얼굴이었다.
‘왜 웃는 거야?’
의아해하던 의준의 귀에 도헌의 질문이 들려왔다.
“반대 아닙니까?”
“예?”
“방금 그 대답 말입니다.”
도헌이 말했다.
“‘회사가 바라는 인재상에 맞지 않았다’…. 그게 아니라 본인이 바라는 회사상에 맞지 않았겠지요. 여기 적혀 있는, 이의준 씨가 거쳤던 모든 회사가.”
도헌은 이력서를 손가락으로 가볍게 두드렸다.
“수습 기간을 채우지 않은 곳도, 1년 넘게 다닌 곳도 있지만 평균적으로 한 회사에서 여섯 달 정도 다녔더군요.”
“…….”
“한 달에서 세 달 정도 되는 수습 기간을 거쳐 정식 채용이 된 후에 최대 세 달. 그 정도면 회사가 사원의 자질을 파악하기에도, 그리고 사원이 회사의 본모습을 간파하기에도 충분한 시간이지요.”
도헌은 의준을 바라보았다.
“솔직히 말해 보시죠. 이 회사들의 어디가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까?”
의준이 당황한 이유는 처음 듣는 질문이어서가 아니었다. 그 질문에 담긴 의도가 결코 호의적이 아니어서였다.
‘날 놀리고 싶은 건가? 아니면… 비난하려고?’
오지 말걸 그랬다.
의준은 입술을 깨물었다.
오면서 회사 홈페이지를 샅샅이 훑었다. 자본금, 규모, 연혁. 의외로 건실하고 규모가 큰 회사였다. 오랜 면접 경험과 이력을 통해 예감할 수 있었다. 이곳은 의준의 ‘이력’으로는 합격이 불가능한 곳이었다. 이력서조차 제출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면접 기회를 얻은 이유는 오직 하나.
눈앞에 앉아 있는 남자, 서도헌이 그러기를 원했기 때문이리라.
‘왜? 나를 비웃고 싶어서?’
의준은 입을 열었다.
“이력서에 명시한 총 열 한 군데 중 일곱 군데에서 임금을 체불했습니다. 그중 두 군데는 4대 보험에 가입되어 있지 않았죠. 한 군데는 낙하산 인사로 인해서 그리고 두 군데는 구조 조정 탓으로 권고사직을 당했고 다른 한 곳에서는 성추행 사건이 있어서 자진 사직했습니다.”
‘성추행’이라는 단어를 들은 도헌이 눈썹을 움찔했다. 의준은 도헌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모든 곳에서 추가 수당 없이 야근 및 휴일 근무를 강요했습니다.”
“…….”
“본인이 바라는 회사상에 맞지 않는 게 아니냐고 물으셨지요? 그렇습니다. 맞지 않았습니다. …제가 바라는 회사는 급여를 제때에 정당하게 지불하고 법적으로 당연한 권리를 지켜 주며 인간적으로 대우해 주는 곳이었거든요.”
결혼식에서 마주쳤을 때 그냥 인사만 나누고 헤어졌다면 가슴은 조금 아릿했을지언정 후회 없는 재회가 되었을 텐데. 모두 헛된 기대를 품은 탓이었다.
‘더 있어 봤자 후회만 늘어날 뿐이야.’
의준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만 가 보겠습니다.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의준 씨.”
“안녕히 계세요.”
문을 향해 걸어가던 그를 빠르게 다가온 도헌이 가로막았다.
“면접 안 끝났습니다. 가서 앉아요.”
“저는 할 말 다 했습니다만. 하실 질문이 남았습니까?”
“그래요, 한 가지 질문이 남았습니다.”
“뭡니까?”
노골적으로 불쾌한 기색을 드러내던 의준을 향해 도헌이 말했다.
“바라는 회사상은 잘 들었고, 그러면 묻겠습니다만. 이의준 씨가 그리는 회사상에 맞는 기업에서라면 일할 생각이 있습니까?”
무슨 의도로 던지는 질문인지 곱씹어 볼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그렇습니다. 그런 기업이 존재한다면요.”
시선을 가로막을 만큼 가까운 도헌의 몸을 의식하지 않으려 애쓰며 의준은 일부러 심술궂게 덧붙였다.
“전무님께서는 이곳이 그런 기업이라고 자부하십니까?”
“우리 회사는 자본도 이력도 건실한 축에 속합니다.”
도헌은 말을 이었다.
“어떤 사원의 임금도 체불한 이력이 없고 정사원에게는 4대 보험이 적용되며 복지도 좋은 축에 속하지요. 부서에 따라 야근은 종종 발생하지만 수당은 시간당으로 계산해서 지급됩니다. 지난 10년간 구조 조정은 없었으며 휴직 제도도 잘 갖추어져 있고, 연봉 수준은 동종 업계 상위권입니다.”
“…….”
“덧붙여서 사내 성추행 문제는 엄격하게 다루고 피해자에게는 회사 차원에서 법적 지원을 하며 설립 이래 매년 임직원이 성평등 교육을 받고 있습니다.”
의준은 눈을 깜박였다.
“급여는 사규에 준합니다만, 연관 경력을 인정받으면 5천만 원 정도 될 겁니다.”
“5… 5천?”
놀라서 되묻는 의준을 향해 도헌은 짧게 덧붙였다.
“상여금은 제외입니다.”
“…….”
마지막으로 다녔던 회사에서 의준이 받았던 연봉은 2700만 원이었다. 5천만 원이면 거의 두 배에 가까운 금액이었다.
“정말…로요?”
연봉도 그렇지만 도헌이 자신을 입사시키려 하는 이 상황이 믿어지지 않았다.
“정말로 연봉을 그렇게… 아니, 저를 이 회사에서 일하게 하실 겁니까?”
“이의준 씨가 그럴 생각이 있다면요.”
“저는….”
의준은 도헌이 아직 그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왜 저를 채용하려 하십니까?”
학력도 경력도 기준에 미치지 못했다. 5년 전에 연락이 끊겼던 사이에 인맥이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헌이 그가 근무하는 회사에 의준을 채용하려는 이유가 알고 싶었다.
아니, 이유에 기대하고 있다는 표현이 옳을지도 모르겠다.
‘혹시 도헌이 형이 아직 나를….’
심장이 두근거리려던 찰나.
“아까부터 계속 왜냐고 묻는 이유는 원하는 대답이 있어서입니까?”
“아니요, 저는….”
“당신을 채용하는 데 특별히 어떤 이유가 있으리라 믿는 모양이군요. …유감스럽게도 그런 건 없습니다.”
“그게 무슨….”
의준은 당황했다. 도헌은 무심하게 말을 이었다.
“알던 사람이 취업 활동 중이고 마침 회사에 자리가 났다면 이력서를 추천하는 정도는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상대가 이의준 씨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어도 그 정도 친절은 베풀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
“이의준 씨가 면접을 볼 수 있었던 이유는 때마침 우리 회사에 이력에 맞는 자리가 비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더불어 면접을 제가 직접 본 이유 역시 특별 취급이 아니라 그렇게 뽑는 자리여서입니다.”
도헌은 굳어진 의준을 향해 천천히 마지막 말을 내뱉었다.
“그 외에는 어떤 특별한 이유도 없습니다.”
당신은 전혀 특별하지 않습니다.
도헌의 말이 이렇게 들려왔다면 지나친 피해 의식일까. 의준은 입술을 깨물었다. 생각지도 못한 재회에 들떠서 잊었던 사실이 떠올랐다.
이 남자는 그를 버리고 떠났다.
‘그런 사람에게 뭘 기대했어?’
의준은 짧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렇게 말씀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안심이 되네요.”
“……?”
“특별한 이유가 없었다는 말씀으로 미루어 보아, 오늘 이 면접 자리는 온전히 제 ‘능력’으로 이루어졌다는 의미가 되니까요. 덕분에 마음의 짐을 덜었습니다.”
의준은 도헌을 향해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기꺼이 입사하고 싶습니다. 아직도 저를 뽑을 생각이 있으시다면요.”
마지막 말은 의준 입장에서는 최대치로 비꼬는 것이었다. 표정은 변하지 않았지만 도헌도 그 정도는 알아들었으리라.
“물론입니다. 그러려고 면접에 불렀으니까.”
도헌은 무심하게 대꾸한 후에 의준을 향해 손을 뻗었다. 깜짝 놀란 의준의 옆을 지나친 도헌의 손이 사무실 문을 열었다.
“김 과장. 이의준 씨 채용 결정했으니 수속을 부탁합니다.”
“네, 전무님.”
김하나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대답했다. 도헌은 의준을 돌아보았다.
“입사일은 빠를수록 좋지만 개인 사정에 맞춰 조율하세요.”
“아, 네.”
의준은 얼떨결에 대답한 후에 사무실 밖으로 나왔다. 김하나가 다가왔다.
“의준 씨, 그러면 회의실로 가서 인사팀장님을….”
“저, 잠깐만요.”
뒤늦게 한 가지 사실을 깨달은 의준은 김하나의 말을 가로막았다. 왜 그러냐는 표정을 짓는 그녀를 향해 의준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 그런데… 제가 어떤 직책으로 입사하는 겁니까?”
“네? …못 들으셨나요?”
김하나는 시선을 도헌에게로 향했다. 문가에 기대어 섰던 도헌이 말했다.
“수행 비서입니다.”
의준은 고개를 돌렸다.
“임원과 동행하며 업무를 보조하는 비서지요.”
“…….”
임원과 동행. …어느 임원을? 의문과 동시에 답이 떠올랐다.
‘설마?’
도헌은 말을 이었다.
“내 수행 비서가 되는 겁니다.”
“…….”
살짝 눈썹을 찡그리는 의준을 본 도헌이 입을 열었다.
“내키지 않으면 사퇴해도 괜찮습니다.”
“기꺼이 입사하겠습니다.”
의준은 울컥해서 대답했다. 고용주인 자신에게 의준은 특별하지 않은 피고용인이라고 말한 입으로 의미 없는 선택지를 제안하다니. 저런 사람인 줄 몰랐다.
상관없었다. 이보다 더한 직장에서도 낮은 연봉을 받으며 버텼다.
‘5천만 원을 주면 그 정도 버티는 건 일도 아니라고!’
의준은 그날로 고용 계약서에 서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