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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 한 점 없이 맑고 푸른 하늘 아래로 따스한 햇볕과 시원한 바람이 어우러진 초여름의 상징과도 같은 날이었다. 연휴를 앞둔 주말 초입이기도 한 오늘, 높은 건물과 초록 가로수가 어우러진 시내에는 인파와 차량이 가득했다.
“헉, 10분 전!”
느릿느릿 목적지에 도달한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걸음을 서둘렀다. 식이 시작되기 전에 신랑을 만나 얼굴도장을 찍기 위해서였다. 웨딩홀은 길 맞은편이었고 식장은 2층이었다. 아슬아슬하게 시간 내에 도착한 의준은 숨 돌릴 새도 없이 신랑에게로 갔다.
“오제성, 결혼 축하한다.”
“어, 이의준! 왔구나! 고마워.”
신랑과 악수를 한 후에 옆에 있던 부모님에게도 인사를 드렸다. 아버지 쪽은 의준을 기억하고 있었다.
“이사장 아들이구나. 잘 왔다. 결혼은 했고?”
“아니요, 아직….”
“허허, 서둘러야지. 부모님… 아니, 어머님이 걱정하실 텐데.”
“네, 그래야죠.”
의준은 흠잡을 데 없는 대답을 끝으로 꾸벅 인사를 하고 자리를 떴다. 축의금을 내러 이동하자 앞서 온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상원아.”
“어? 아, 이의준!”
고개를 돌린 남자는 의준을 보더니 반갑게 어깨를 두드렸다.
“살아 있었냐. 얼마 만이야.”
“작년에 다른 결혼식에서 보고 처음이지, 아마.”
“준우 결혼식이었지, 맞아.”
남자는 웃다 말고 의준의 발을 내려다보았다.
“왜 절뚝거려?”
“아, 시간 맞추려고 뛰었는데, 물집이 터졌나 봐.”
“그래? 조심하지.”
되묻는 남자의 왼쪽 약지에는 결혼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작년에 만났을 때는 반지가 없었다. 의준의 시선을 눈치챈 남자는 머리를 긁적였다.
“아~. 올해 초에 결혼했어. 애가 생겨서 좀 급하게 하느라 연락도 못 했네.”
“그랬구나. 축하해. 그러면 애기는… 태어났어?”
“응? 아, 다음 달 말 예정이야.”
“그렇구나, 잘됐네.”
의준은 축의금을 내고 방명록에 이름을 적으며 물었다.
“혹시 은혁이 못 봤어?”
“김은혁? 아까 같이 왔는데. 아, 저기 있네.”
남자가 예식장 안을 가리켰다.
김은혁은 여자 하객과 대화를 나누던 중이었다. 의준은 대화가 잦아들기를 기다렸다가 김은혁의 팔을 가볍게 손가락으로 쳤다.
“은혁아.”
“어? 어… 이의준, 왔어?”
“잘 지냈어?”
의준은 인사치레를 하며 여자를 향해 눈인사를 건넸다.
“잠깐 괜찮아? 할 얘기가 있는데.”
“뭔데?”
의준은 김은혁을 입구 쪽으로 데려간 후에 입을 열었다.
“다름이 아니라, 지난달에 잠깐 만났을 때 왜, 네가 그랬잖아. 너희 회사에 자리 빌 것 같으니 이력서 넣어 보겠느냐고.”
“어? …어어, 내가 그랬어?”
김은혁은 당황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예감이 좋지 않았지만 의준은 억지로 웃었다.
“응, 그래서 네가 그때 알려 준 메일 주소로 다음날 이력서 보냈거든. 그런데 읽음 표시가 안 뜨더라고. 혹시 넌 확인했는데 나한테는 표시가 안 된 건가 싶어서.”
“미안, 내가 요즘 메일 확인을 잘 안 해서 말이야. …내일 출근하자마자 확인하고 인사부에 전달할게.”
“아직 구인 중이야?”
“그럴걸.”
어째서 불길한 예감은 틀리지 않는가. 의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귀찮겠지만 부탁 좀 할게. 고마워.”
“뭘.”
팡파르가 울렸다. 식이 시작된다는 안내 방송을 들은 사람들이 식장으로 모여들었다. 김은혁이 여자 하객에게 돌아가고 의준은 홀로 남았다.
신랑이 입장하고 단상에서 사회에 맞추어 인사를 했다. 의준은 슬그머니 밖으로 나갔다.
“…아야야….”
아무도 없는 화장실, 변기 칸에 들어가 뚜껑을 내리고 앉자마자 구두를 벗었다. 발뒤꿈치가 까져 양말까지 피가 배어 나와 있었다.
“오랜만에 신었더니….”
면접 볼 때와 경조사 때만 신는 10년 넘은 구두의 안쪽에 희미하게 핏물이 든 모습을 보며 의준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딱 맞는 구두가 아니었는데. 발이 커졌나? …살은 빠졌는데.”
살살 양말을 벗긴 후에 주머니에서 밴드를 꺼냈다. 오랜만에 구두를 신고 나가려던 의준을 보고 여동생이 혹시 모르니 가져가라고 건넨 것이었다.
‘자주 신으면 굳은살이 박이는데 안 그러면 뒤꿈치도 까지고 물집도 생기거든. 나도 명절 아르바이트하고 발이 피범벅 된 적이 있어.’
경험치로는 선배나 마찬가지인 여동생에게 마음속으로 감사를 전하며 의준은 밴드를 뒤꿈치에 조심스럽게 붙였다. 상처가 커서 다 가려지지는 않기에 그 위에 두루마리 휴지를 잘라 접어 대고 다시 양말을 신었다.
‘집에 갈 때까지만 버텨 다오, 내 발아.’
그래도 곧장 구두를 신을 용기는 없었다. 의준은 발을 무릎에 올린 채 천장을 바라보았다.
“휴우….”
식장에 오기 전에 면접을 보고 왔다. 급히 잡힌 면접이어서 준비도 제대로 못 했다. 문제는 상대도 마찬가지라는 점이었지만.
‘면접 연락을 해 놓고 잊어먹는 회사는 오랜만이었지.’
30분 정도 늦게 들어온 면접관은 의준의 이력서를 검토하기는커녕 받지도 못한 상태였다. 만일을 대비해 의준이 직접 가져간 이력서를 건넸을 때도 앞장만 보고 넘기지 않았다.
‘사람을 뽑을 생각도 없는데 왜 연락한 걸까. …버스비만 낭비했잖아.’
마지막 회사를 퇴직하고 세 달이 흘렀다. 빨리 취업하고 싶어서 아무 데나 이력서를 흩날린 반작용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다 또 생각지 않게 좋은 데가 걸릴 수도 있으니까.”
지난 일은 지난 일이다. 미래를 약간 희망적으로 바라본다고 손해 볼 일은 없지 않은가. 어쨌든 친구 결혼식에는 지각하지 않았고 어쩌면 김은혁이 이력서를 인사부에 넘겨서 면접이 잡힐 수도 있었다.
‘힘내자.’
의준은 짧게 숨을 내뱉은 후에 조심스럽게 양말을 끌어 올렸다.
“아까 이의준을 본 것 같았는데.”
자기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의준은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
“아, 왔어. 학교 다닐 때 제성이하고 친했잖아. 가족들도 아는 사이일걸.”
대꾸한 목소리가 낯익었다. 김은혁이었다. 다른 사람도 동창 중 한 명일까.
“그랬나? 오랜만에 봐서 인사나 할까 했는데 사라졌더라고. 걘 요즘 뭐 한대?”
“어, 글쎄. 구직 중인 것 같던데.”
“그래?”
대화를 나누며 용무를 마친 두 사람이 세면대로 향하는 소리가 났다. 물 트는 소리와 손 씻는 소리 사이로 김은혁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 자식은 여전히 고지식하더라고. 아깐 진땀 뺐어.”
“왜?”
“아니, 전에… 지난달인가? 우연히 우리 사무실 근처에서 마주쳤거든. 겸사겸사 커피 한잔했는데 구직 중이라고 하기에 아무 생각 없이 우리 회사에 곧 비공식 채용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말했는데… 대뜸 이력서를 보낼 테니 전달해 줄 수 있겠냐는 거야. 말 꺼낸 책임이 있으니 그러라고 했는데 진짜로 보냈다고 오늘 확인해 달라고 하더라.”
“그게 왜? 다들 그러잖아.”
“그 자식은 안 되지. 우리 회사가 어떤 회산데 고졸이 이력서를 들이미냐고.”
“이의준이 무슨 고졸이야? Y대 갔잖아. 상경인가? 그랬던 것 같은데.”
“가기야 갔지. 그런데 졸업 못 했어.”
“반수하다 실패라도 했대?”
“등록금 감당 못 해서 자퇴했지.”
“뭐? 왜….”
“걔네 집 망했잖아.”
“어….”
상대방은 놀란 기색이었다.
“한 몇 년 되었을걸. 걔가 동창회 안 나오기 시작했을 때가 언제더라…. 하여간, 그 뒤에는 어떻게 사는지 아무도 몰랐거든. 나도 우연히 만났고.”
김은혁은 말을 이었다.
“어쨌든 이의준은 고졸이라 우리 회사에는 서류 통과도 힘들어. 솔직히 나도 체면이 있는데… 고졸에 서른 다 된 녀석을 어떻게 내 이름으로 추천하냐. 인사부에서 비웃을걸.”
화장실 문이 열렸는지 떠들썩한 소리가 났다. 다른 손님이 들어온 모양이었다.
“너 2차 갈 거지? 제성이네 형이 하는 와인바 대절했대. 신부 친구들 중에 연예인 있다는데, 온다더라.”
김은혁이 화제를 바꾸었다.
“아, 난 못 가. 여자 친구랑 왔어.”
“야, 결혼 전부터 쥐여 사냐? 이런 데는 혼자 와서 의리를 지켜야지.”
난처한 웃음소리를 남기고 두 사람은 화장실을 나갔다.
“…….”
의준은 입술을 깨물었다. 알고 있었다. 메일을 한 달이나 확인하지 않았고 말을 꺼내자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기에 각오는 했다. 그래도 아주 약간은 기대했었다.
‘자주 회사를 옮기셨네요. 1년도 못 채우고 이직한 데가… 네 군데? 유달리 많군요.’
‘아무리 Y대라도 졸업을 못 했고 벌써 5년이 넘었으면… 최종 학력은 고졸이지요?’
오전에 면접을 볼 때 이력서 첫 장을 보자마자 이렇게 물었던 면접관이 떠올랐다. 타인이 보는 내 이력은 그런 것이려니 했지만 친구도 별 차이는 없었나 보다.
‘친구도 남이지. …아니, 솔직히 친구도 아니고.’
의준은 울컥하고 솟아오르는 감정을 다독이며 심호흡을 했다. 처음 겪는 일도 아닌데 매번 감정이 흐트러지다니, 아직도 멀었다.
“괜찮아, 이의준. …괜찮아.”
의준은 재차 심호흡을 한 후에 화장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엇.”
문밖에는 사람이 서 있었다. 그와 부딪친 의준은 뒷걸음질 쳤다.
“아, 죄송합니다.”
“…이…준?”
“예?”
의준은 고개를 들었다. 부딪친 사람과 그의 시선이 마주쳤다.
회색 눈동자. 의준의 눈이 커졌다. 이질적인 눈동자였지만 낯익었다.
‘그럴 리가.’
시야가 넓어지면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설마’는 ‘당연히’로 변했다.
“…도헌이… 형?”
의준이 이름을 부르자 그의 회색 눈동자가 일순 흔들렸다.
“…오랜만이군.”
낮고 묵직한 목소리가 귓가에 스며들었다. 눈동자만큼이나 그가 그임을 말해 주는 목소리였다. 이 목소리를 이렇게 가까이서 듣는 게 얼마 만일까.
‘다시는 듣지 못할 줄 알았는데.’
의준은 입을 열었다.
“그러네요. …귀국하신 줄 몰랐어요. 언제 들어오셨어요?”
“작년에.”
작년. 어머니가 쓰러져서 응급실에 실려 갔던 해였다. 수술과 입원 수속 그리고 간병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수라장 속에서 겨우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한 해가 지났었다. 그 시기에 이 사람이 같은 대한민국 하늘 아래 숨을 쉬고 있었다니 몰랐다.
“그러셨…구나. 여기는 웬일로….”
“아는 사람이 결혼했어.”
“아, 저도.”
“결혼했다고?”
예상치 못한 질문이 돌아오는 바람에 의준은 깜짝 놀라 그를 바라보았다. 곧은 콧등 위로 살짝 찌푸린 미간이 보였다.
“아니요, 제가 아니라. …친구, 아니… 고등학교 동창이 결혼해서요.”
침묵이 되돌아왔다. 어색해진 의준은 시선을 돌렸다. 때마침 다른 사람이 화장실로 들어섰다.
“아, 그럼… 전 가 볼게요.”
의준은 몸을 돌렸다. 의준보다 먼저 뒤에서 쑥 뻗어 나온 손이 먼저 문손잡이를 잡았다. 깜짝 놀란 의준이 고개를 돌리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구직 중이야?”
“예?”
그는 화장실 문을 열어 주며 말을 이었다.
“아까 그 친구들, 네 얘기 했잖아. ---구직 중이야?”
“아… 네.”
화장실 문 앞에 계속 서 있기도 민망해서 일단 밖으로 나간 후에 의준은 말을 이었다.
“여기저기 알아보다가 부탁했는데, 친구가 부담스러웠나 봐요. 별일 아니에요, 다시….”
“분야는?”
“예?”
“취업 희망 분야.”
“…경영… 지원 쪽이요.”
의준은 얼떨결에 대답했다. 도헌이 손을 내밀었다.
“그거 주고 가.”
“……?”
“이력서지? 가지고 있는 거.”
“아.”
의준은 서류 가방 지퍼 사이로 반쯤 나와 있던 이력서 파일을 급히 꺼냈다. 하지만 차마 건네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형… 제 이력서는 어디 쓰시게요?”
“전무님.”
한 여자가 그들에게로 다가왔다.
‘전무님?’
의준이 놀라서 지켜보는 사이에 여자는 도헌에게 말했다.
“김 대표님께서 따로 뵙자고 하시는데… 아, 죄송합니다. 대화 중이셨군요. 기다리시라고 할까요?”
“아니야.”
도헌은 의준을 돌아보았다.
“이리 줘.”
“아, 예.”
의준은 이력서를 건넸다. 그의 손이 의준의 손가락을 스쳤다.
“오전에 다른 면접 보느라 출력했던 건데요… 꺼내지도 않았어요. 가방에 잘못 넣어서 구겨졌나 봐요.”
뒤늦게 접힌 귀퉁이를 발견한 의준은 황급히 말했다. 도헌은 이력서 앞장을 흘깃 본 후에 입을 열었다.
“그럼, 나중에 봐.”
“네? 네. 나중에….”
의준은 얼떨결에 인사를 받았다. 가볍게 숙였던 고개를 들었을 때 도헌은 이미 떠난 뒤였다. 여자와 함께 걸어가는 그를 보며 의준은 멍하니 중얼거렸다.
“꿈인가?”
5년 전과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부드럽게 흘러내리는 검은 머리카락도, 표정 없는 짙은 이목구비도, 투명한 회색 눈동자도 그리고 손끝에 닿았던 온기도.
꿈이 아니었다.
분명히 서도헌이었다.
‘잊은 줄 알았는데….’
멀리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여자와 인사를 나누는 도헌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한 손에 이력서를 쥐고 있었다. 다행이었다.
‘다행이긴 뭐가 다행이야.’
예의상 받아 주었을 뿐이다. 김은혁이 그랬듯이.
도헌은 미소조차 짓지 않고 의준을 바라보았다. 말도 짧았다. 어떻게 보아도 재회를 반가워하는 모양새가 아니었다.
‘그야 그렇겠지. …좋게 헤어지지 않았으니까.’
의준은 씁쓸한 기분을 느끼며 몸을 돌렸다.
“…….”
도헌은 흘깃 시선을 돌렸다. 의준이 돌아서서 엘리베이터를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마르고 곧은 등. 부러질 듯이 가는 그림자를 드리우고 멀어지는 그 모습을 지난 5년간 단 하루도 잊은 적이 없었다.
‘이런 데서 만날 줄은.’
이력서를 받아 들자마자 연락처에 눈이 갔다. 휴대 전화 번호도 주소도 바뀌어 있었다. 언제 바꾸었을까. 어쩌면 그를 떠나자마자 바꾸었을지도 모르겠다.
“댁으로 가시겠어요?”
인사를 마치고 주차장으로 향하는 길에 여자가 물었다.
“아니, 사무실로. ---이거.”
도헌은 수행 비서인 그녀에게 이력서를 건넸다.
“이력서입니까?”
“인사부에 전달해 줘.”
“예. …음.”
차에 올라탄 후 이력서를 훑어본 수행 비서가 애매한 감탄사를 흘렸다. 도헌이 왜 그러냐는 표정을 짓자 그녀는 입을 열었다.
“이력이 다채롭네요. 29세에 이직 경력이 20회….”
“이직이 잦았군.”
“네. 그럴 만한 분야에 종사하지는 않았는데. 아, 저하고 동문이었네요. 그런데 3학년에 중퇴… 졸업을 한 해 남기고 왜 중퇴했을까요. 짐작 가는 데라도?”
“몰라. ---인사부에 넘기기 애매한 이력인가?”
“음, 공채는 통과하기 어렵겠네요.”
“그러면 김 과장이 직접 알아봐 줘.”
“분야는요?”
“경영 지원 중심. …비서실 포함해서.”
“알겠습니다.”
도헌은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예식장에서 만났던 의준을 떠올렸다. 계절에 어울리지 않는 도톰한 정장. 길들지 않고 사이즈가 맞지 않는 구두. 단정하게 빗어 넘겼지만 서툴게 자른 티가 나는 머리. 그리고 지친 티가 역력했던 크고 검은 눈동자. 생김새와 목소리는 여전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억 속의 모습과는 차이가 컸다.
‘5년 사이에 연락처와 주소만 변한 건 아니었나.’
소식조차 모른 채 흘려보낸 시간 동안 의준은 마냥 행복하고 걱정 없이 살지는 못했나 보다.
‘행복했어야지.’
기억 속에 남은 마지막 얼굴 그대로 구김 없이 행복하게 웃고 있었어야 했는데.
‘내 바람을 이루어 주지 않는 면에서는 여전하구나.’
도헌의 눈은 차창 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풍경 너머의 기억을 더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