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능력자들 쇄도-100화 (10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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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한 감정이라뇨. 좋아하는 건 아니에요. 좋아하고 의지하지만 좋아하는 건 아니라고요. 무슨 말인지 알죠?”

“조심해. 너도 무슨 말인지 알지?”

진한은 여전히 싱글거렸다.

아미는 샐쭉해져서 정인에게로 가버렸다.

그런 모습들을 바라보다가 항이 그들을 다시 재촉했다.

“지명이가 연우한테 전화를 해 봐. 다들 어디에 있는지. 가능한한 빨리 한국으로 돌아가자.”

“그냥 가도 되는 걸까요?”

진한이 걱정스럽다는 듯 말했다.

“이렇게 많은 사람이 죽었고 우리 흔적은 어디에든 있을 텐데 말이에요.”

그러자 지명이 입을 열었다.

“사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던칸 의원과 얘기가 돼 있었어요. 붉은 번개의 틈은 던칸의 커다란 오점이기도 하고 던칸은 야욕이 많은 사람이죠. 제단 아래에서 살아있는 사람들을 상대로 생체 실험까지 이루어졌다는 게 밝혀진다면 던칸 의원은 재기 불능이 되도록 나락에 빠질 거예요. 그 사람이 이 일을 덮을 거예요.”

“덮다니. 어떻게?”

“법익을 침해당한 피해자가 없으면 사건이 성립되지 않지 않겠어요?”

“하지만 이미 일어난 일을 어떻게…….”

진한이 말했다.

“기억을 지우는 알약을 만드는 기술이 이곳에 있다는 걸 잊은 건 아니죠? 던칸의 위치라면 붉은 번개의 틈에 소속된 신도들의 거주지는 알 거예요. 비밀리에 움직알 수 있는 조직도 가지고 있을 거고.”

“죽은 사람들의 유해는 숨기고 기억을 가진 사람들에게서는 기억을 훔쳐버리겠다는 거군. 우리가 그 사람의 오점을 알고 있다는 걸 알 텐데. 우리는 안전한 거야?”

항이 물었다.

“우리를 두려워하니까 함부로 건들 생각은 하지 못할 거예요. 우리한테 해를 끼치려고 준비하다가는 희영 누나한테 들킬 거라는 걸 알테니까요.”

“그럼 우선은 여길 떠나자. 뒤처리를 해 줄 사람이 있다면 고마운 일이지.”

진한이 말했다.

정인이 채영과 사요를 의식하며 항에게 다가왔다.

“두 사람은…….”

“일단 여기서는 같이 나가야 하지 않겠어? 다음 일은 그 후에 논의하기로 하고.”

항이 의외로 간단하게 대답하자 정인도 안심하는 표정을 지었다.

현실감이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 B급 영화 세트장 같은 현장을 떠나면서 더 이상 입을 여는 사람이 없었다.

처음 그곳으로 향하던 때와 거의 비슷한 모습이었다.

진한은 애스턴 마틴과 이별해야 한다는 것을 무척이나 아쉬워했다.

“한 번도 네 차였던 적이 없었던 물건에 그렇게 애착을 갖다니. 도둑놈 심보!”

소명은 이제 완전히 정신이 들었는지 부지런히 진한을 놀렸다.

떠날 준비가 될 동안은 사이크가 마련한 거처에 머물기로 했기에 모두는 그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던칸이 기꺼이 지원을 하겠다고 나섰지만 던칸에 대한 깊은 믿음은 없었던 탓에 사이크에게 알아보도록 했던 것이다.

입구에 있는 두 그루의 나무를 지나자 사이크가 지명과 같이 포치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다시 우리한테 기다리는 일을 맡기면 가만히 안 있을 거야. 초마다 100그램씩 빠지는 기분이었다고.”

지명이 그렇게 말하면서 정인에게 다가왔다.

정인의 어깨에 팔을 얹은 후에야 다른 사람들을 하나씩 둘러볼 생각을 했다.

“다들 괜찮은 거죠?”

지명이 물었다.

“그렇게 말할 것 없어. 우리도 별다를 게 없었어. 일찍 시즌 아웃 당해버렸거든.”

연우가 아쉬운 듯이 말했다.

“알 기회가 없긴 했지만 우리가 가진 능력이라는 게 소모자원 이었던가봐. 각자가 능력을 발휘하고는 곧 방전이 돼 버렸어. 직접 봤어야했는데. 정말 대단들했거든.”

지명이 말했다.

아, 그러니까 히나타의 지명이.

“참. 서림 언니한테 인사했어?”

정인이 지명에게 물었다.

지명은 그제야 서림을 발견하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세상에! 정말 이렇게 살아……!”

지명은 자기가 실언했다고 생각하고 입을 다물었다.

그렇다고 뭐라고 말을 이어야할지 알지 못해서 머뭇거리는데 서림이 활짝 웃으면서 지명에게 손을 흔들어보였다.

지명은 서림의 곁에 서 있는 항의 표정이 무겁게 가라앉아있는 것을 보고 이상하게 여겼지만 무슨 일인지는 묻지 못했다.

사이크도 서림에게 인사를 했다.

“모두들 무사히 돌아오셔서 다행이에요.”

사이크가 말했다.

“피가 말라서 죽어버리는 줄 알았어요. 저도 다음부터는 웬만하면 남아있는 역할은 사양할래요.”

사이크의 말에 모두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여기. 사요와 채영씨.”

정인이 두 사람을 소개했다.

어쩌자고 두 사람을 여기까지 데려온 거냐고 묻고 싶었지만 지명은 이미 합의가 이루어진 상황에 자기가 가타부타할 것은 없겠다는 생각에 입을 다물고 가볍게 고개만 끄덕였다.

사요와 채영도 고개를 끄덕였다.

“항공편을 알아봤는데 내일 새벽에 떠날 수 있어요. 방은 충분하니까 각자 쉬다가 저녁 식사를 하는 걸로 하죠. 모두들 엄청 지쳐 보여요.”

사이크의 말에 모두들 드디어 큰 일을 마쳤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남아있는 역할을 싫어하는 아버지한테 전화는 드렸어?”

정인의 지명이 미래에서 날아온 자신에게 물었다.

히나타의 지명은 고개를 저으며 스마트폰을 꺼냈다.

신호가 오래갔지만 전화 연결이 되지 않았다.

“너무 불태우고 계신 건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기는 했다.

여기에서 무슨 일이 생길지도 모르는데 전화를 받지 않는다는 건.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니겠지?”

정인의 지명이 물었다.

히나타의 지명도 똑같은 표정으로 정인의 지명을 바라볼 뿐이었다.

희영이 근심어린 표정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는 것을 두 사람은 알아차리지 못했다.

“설마 무슨 일이 있겠어? 내일이면 돌아갈 거니까 걱정하지 말고 기다려.”

사이크가 말했다.

“그렇겠지?”

어느새 모두들 두 지명을 둘러싸고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그래. 별 일 없을 거야. 신경쓰지 말고 모두들 방으로 올라가세요. 샤워도 좀 하고.”

지명이 연우와 기선을 밀었다.

그때 멀리에서 크랙션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

삐익, 삐익, 삐익, 삐익.

한 번 시작한 울림이 끝없이 일정하게 울려왔다.

저런 짓을 하는 고약한 운전자는 어딜 가든 있는 모양이라고 생각하며 피식 웃고 돌아서려다가 정인은 사요의 상태가 이상해지는 것을 깨달았다.

“젠장!”

정인의 곁에 있던 지명이 곧바로 알아차리고 작은 소리로 뇌까렸다.

사요는 참아내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자신에게 호의를 베풀어준 사람들에게 불필요한 짐이 되지 않기 위해서 그 상황을 버티려고 했다.

하지만 크랙션 소리는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사요의 팔과 턱이 격렬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러면서도 사요는 끝까지 버텨내려고 이를 악물었다.

악문 입술에서 살덩어리가 떨어져버리는 바람에 사요는 그것을 핏덩이와 함께 뱉어냈다.

사요는 제 목에서 터져나오는 찢어질듯한 비명을 참으려고 주먹을 입속으로 밀어 넣으려 했다.

사요의 몸은 이내 뻣뻣하고 부자연스럽게 뒤틀렸다.

사요는 두 손으로 귀를 막으며 웅크리고 앉아 헐떡였다.

채영이 사요를 감싸고 사요의 귀에 대고 높고 커다란 목소리로 노래를 불렀다.

그 노래를 들은 사람들은 세상에서 그렇게 슬픈 노래는 들어본 적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때 기선이 사요에게 다가갔다.

“사요.”

기선의 음성에 사요가 반응을 보였다.

핏발이 선 눈으로 사요가 기선을 바라보았다.

“괜찮아요. 사요는 괜찮을 거예요. 사요한테는 주체적으로 평안을 되찾을 힘이 있어요. 사요는 이미 그걸 갖고 있어요.”

사요는 의심스럽다는 듯이 기선을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귀에 들리는 노랫소리를 새겨요. 그리고 그 볼륨을 키워요. 듣고 싶지 않은 소리가 들려서 괴로울 때 귓가에서 들렸던 노래를 기억하고 그 볼륨을 높여요. 해봐요. 할 수 있어요.”

사요는 멍하니 입을 벌린 채 기선을 바라보았다.

크랙션 소리는 계속되었다.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이 그것을 참고 있다는 것이 의아하게 여겨질 정도였다.

사요는 심호흡을 했다.

채영은 사요의 심장이 조용히 제 속도를 찾아가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가서 어떤 놈인지 찾아내서 손목을 부러뜨리고 올까?”

진한이 말했다.

하지만 곧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는 것이 밝혀졌다.

사요는 놀랍다는 표정으로 기선을 바라보았다.

“괜찮아? 괜찮은 거야?”

채영이 사요에게 물었다.

사요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채영을 바라보았다.

배경음악이 깔리는 것처럼, 채영의 말에 집중을 하는 그 순간에도 채영이 불러주었던 노래소리가 들렸다.

사요를 괴롭혔던 반복적인 소음은 사요에게 영향력을 끼치지 못한 채 멀어져갔다.

“다행이야. 사요한테도 통해서.”

소명이 말했다.

사요에게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놀랍고 감격스러운 일이었는데 다른 사람들에게는 감격할 여유도 남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저 안심한 표정으로 한 사람씩 안으로 들어갔다.

“TV뉴스에서 붉은 번개의 틈에 대한 기사가 나오면 알려줘.”

항이 사이크에게 부탁을 해 두었다.

“그렇지 않아도 계속해서 체크하고 있는데 전혀 안 나와요. 던칸이 미리 움직였던 것 같아요. 어쩌면 안에서 일이 벌어지는 동안 바깥에서 같이 움직인 건지도 모르죠.”

사이크의 말에 연우가 뭔가 짚이는 게 있다는 듯 생각에 잠기더니 말을 했다.

“맞아요. 교통 통제가 이루어졌었어요. 그래서 차들이 바로 빠져나가지도 못하게 길게 늘어서 있었죠.”

서림도 연우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뒷받침해 주었다.

“검문을 지날 때는 이미 사원에서 본 일들에 대한 기억을 잃은 건가?”

항이 말했다.

“대단한 사람들이군. 무시무시한 사람들이기도 하고 말이야.”

진한이 말했다.

“아직 사원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잖아요. 상주하던 신도들도 있고 살아남은 연구원들도 있고요.”

아미가 말했다.

“던칸의 다음 목표가 그 사람들이겠지. 그 사람들도 일부분의 기억을 침탈당하게 될 거야. 그리고 준 맥브라이언을 잃었다는 걸 깨닫게 되면 스스로 흩어지겠지. 다시 사회에 적응할 용기가 없는 사람들은 자살을 선택할 수도 있고.”

시영이 말했다.

“타이라의 활약 덕에 사원에서의 안정된 삶은 이제 거의 불가능해졌지. 붉은 번개의 틈은 순식간에 천문학적인 빚더미 위에 올라 앉았으니까.”

사이크가 말했다.

“이래저래 빠르게 붕괴되겠군.”

항의 말에 연우가 항을 밀었다.

“그 이야기는 나중에 해도 되니까 빨리 누나를 따라서 올라가세요. 누나가 형을 얼마나 기다렸는데요.”

연우의 말에 항이 머뭇거렸다.

진한과, 사정을 아는 몇몇 사람들은 못 본 척 고개를 돌리다가 휙휙 방을 찾아 들어갔다.

항은 크게 심호흡을 했다.

이제는 마주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그도 알고 있었다.

“3층이에요.”

사이크가 그의 등 뒤에 대고 말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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