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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력자들 쇄도-92화 (92/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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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선이가 이쪽으로 왔어야 됐어. 최면을 풀어야 하는 거였어.”

소명이 뒤늦게 후회했지만 꼭 후회할 필요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저쪽에서 익숙한 랜드로버가 꼬리 하나를 달고 오는 것이 보였다.

워낙 많은 차들이 속속 들어오는 중이라 랜드로버에 주의를 기울이는 사람들은 없는 것 같았다.

“벌써 끝낸 모양인데요?”

지강은이 말했다.

“사람들이 거의 이쪽으로 몰려와 있으니까 오히려 저쪽 일은 수월했겠어.”

소명은 아예 도중에 기선들과 접선을 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하고 차를 돌리게 했다.

항이 가장 먼저 내렸다.

그의 얼굴은 터질 것 같은 붉은 색이 되어 있었다.

소명은 그에게 축하한다고 말해 주었고 항은 붉어진 얼굴을 더욱 붉히면서 고맙다고 말했다.

“최면에 걸려 있기도 하겠지만 저 사람들 상당수는 자기들의 의지와 믿음으로 보트에 오를만한 사람들이에요. 모든 걸 다 걸었기 때문에 물러설 곳이 없는 사람들인 거예요.”

아미가 말했다.

“어떻게 할까? 내가 나서는 건 그다지 효과가 없을 것 같은데.”

항이 말했다.

“제가 말할까요? 보트에 타지 말고 물러서라고. 집으로 돌아가라고요.”

시영이 말했다.

모두가 수긍하는 분위기였지만 지명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 사람들은 사이비집단에 오랫동안 믿음을 바쳐온 사람들인데 거부감 없이 형의 말에 복종하려고 할까요?”

지명의 말에 연우도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시도를 해 보기는 해야겠지만 다른 상황하고는 다를 거야. 관리자들과 신자들은 또 입장이 달라. 여기에 몰두하는 강도도 다를 거고.”

“신자들이 더 몰입해 있을 거라는 건가요?”

기선이 물었다.

“그러지 않겠어?” 연우가 말했다.

“그리고 기선이가 최면을 푼다고 해도 준 맥브라이언의 힘도 만만치 않아. 다시 최면을 걸 수도 있는 문제고. 아무튼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돌아갈 거라는 걸 이해하고 집중하자고.”

항이 말했다.

“일단 저 행사를 멈출 수 없을까? 그리고 맥브라이언이랑 소수를 다른 곳으로 유인해서 그 사람들만 상대할 수 있게 된다면 좋겠는데. 어중이 떠중이를 전부 다치게 하고 싶지 않아. 그러기에는 너무 벅차기도 하고.”

소명이 말했다.

“다시 선우 형이랑 시영이가 나서야 할 때가 아닐까? 모여있는 사람들을 제단으로 가도록 설득해 봐. 때에 따라서 내가 겁을 줄 수도 있을 거야.”

항이 말했다.

항도 정말 그 방법이 통할지 확신은 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각자 케미 맞는 사람들끼리 같이 움직여. 우린 그럼 맥브라이언에게 다가가 볼 테니까.”

소명이 말하자 지강은과 진한이 서둘러 차에 올랐다.

이제 호수 주위에 몰려든 사람의 수는 백 명을 훌쩍 넘었다.

한 때는 백 삼, 사십 명 정도나 될까 했지만 그 수가 순식간에 불어서 거의 이 백 명은 될 것 같았다.

그렇게 수가 많다 보니 오히려 뒤에서 뭉텅이를 떼내는 일은 순조롭게 진행이 되었다.

선우 형과 시영의 설득에 넘어간 사람들이 순순히 제단 쪽으로 발머리를 돌렸다.

크레이그와 준은 아직 위기를 감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히나타.”

지명이 히나타에게 다가왔다.

“히나타가 할 수 있지 않을까?”

지명의 말에 진한이 히나타를 바라보았다.

히나타는 지명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일무리의 동양인들이 호수 가까이로 향하자 불만스러운 표정을 하고 바라보는 사람들이 생겨났지만 일단 진한이나 지강은의 눈에 스캔을 당한 후에는 시선을 돌리고 딴청을 피웠다.

두 사람에게는 능력이라고 할 것 까지는 아니겠지만 항이 가지고 있는 능력과 비슷한 효과를 아주 가끔 내기도 했다.

그리고 애초에 그들의 걸음걸이 자체가 워낙에 당당해서 자격을 부여받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처럼 보였다.

준 맥브라이언의 모습이 가까이에서 보였다.

그는 보트에 사람들이 올라가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크레이그가 준을 주시하다가 준의 신호를 받고 보트에 올랐다.

준은 가까이 다가오는 발소리를 분명히 들었다.

단지 그 소리에 자신이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는 것을 알지 못했을 뿐이었다.

소명과 진한은 지강은의 표정을 살폈다.

지강은은 눈 앞에서 사람들이 죽어가는 것을 봐야 한다는 사실 때문에 크게 동요했다.

“지강은. 할 수 있는데까지는 할 테니까 제발 인상 좀 펴, 이 새끼야!”

진한이 말했다.

기습을 감행할 기회는 포기해야 할 듯했다.

보트에 탄 사람들은 약에 취한 것처럼 몽롱한 표정이었다.

그 모습이 얼핏, 정말로 접신이라도 한 것처럼 보였다.

“보트를 멈춰야 하잖아요. 그렇지 않으면 저 사람들은 모두 죽어요!”

지강은이 말했고 나무 널빤지가 빠개지는 소리가 들렸다.

진한은 손바닥으로 지강은의 뺨을 후려치고 우와, 씨발, 이라고 일갈하며 팔을 털었다.

맞은 지강은보다 때린 진한이 더 아파하는 것 같았다.

“계속 징징거리면 준 맥브라이언에 앞서서 네 목먼저 따버리는 수가 있어. 버릴 패는 버려야 되는 거야, 개새끼야.”

진한의 말에 지강은은 입을 다물었다.

억울하거나 분하다는 표정은 아니었다.

그는 뭔가를 깨달은 듯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지강은이 깨닫는데 시간이 꽤 오래 걸린 덕분에 준이 진한의 목소리를 들었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 웅성거렸지만 그 와중에 진한의 목소리가 준의 귀에 정확하게 꽂혀들어간 것이다.

준은 흥미롭다는 듯 그쪽을 바라보았다.

“젠장. 저 새끼. 눈치챘어. 귀가 좋다더니 그냥 좋은 정도가 아니었던 거야.”

소명이 말했다.

“듣게 됐다는데 이렇게 함부로 말해도 돼?”

진한이 지강은을 노려보면서 소명에게 말했다.

지강은은 제 잘못 때문에 일을 그르쳤다는 생각에 어쩔 줄을 몰라했다.

준 맥브라이언이 고개를 기웃거렸다.

하지만 너무 많은 인파 때문에 진한을 찾는 것은 쉽지가 않았다.

그가 사람들을 밀면서 진한 쪽으로 다가오려 했지만 준의 옷자락이라도 붙잡고 싶어하는 사람들 때문에 한 걸음을 옮기는 것도 쉽지가 않았다.

“연우씨라고 했나요?”

서림이 물었다.

“네.”

연우가 작게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멀리가지는 못했다.

멀리 갈 수가 없었다.

서림은 가까이에서 항의 안녕을 기원하며 믿으며 기다리고 싶어했다.

그것은 연우도 마찬가지였다.

누군가 자신을 필요로 해준기만 한다면 당장이라도 뛰어 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두 사람은 기껏해야 커피숍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그들이 최대한으로 떨어질 수 있는 거리였다.

두 사람 다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당신만 괜찮다면 나는 돌아가고 싶어요, 라는 말을 전달하고 싶었다.

아무 말 없이 서로의 존재를 불편해 하고 한편으로는 원망하면서 애꿎은 빨대만 이로 구기고 있던 두 사람 사이에서 드디어 침묵의 균형이 깨졌다.

“아는 사람 중에 카레이서가 있었는데.”

서림이 말했다.

한국에 있는 동안 알았던 사람이냐고 연우가 물었다.

서림은 그렇다고 대답했다.

항도 그 사람을 알았다고.

연우는 그러냐고 했다.

“추월당할 때의 고통에 대해서 그 사람이 말하곤 했어요. 그래도 우리는, 아니, 우리라고 하면 안 되겠다. 남편은 그때 바로 이해했을지도 모르니까. 하지만 나는 이해하지 못했어요. 그 마음을. 추월당하는 사람이 느끼는 고통. 절망감. 패배감, 무기력한 기분. 그런 걸.”

연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서림이 왜 지금 그 얘기를 하는지도 알 것 같았다.

연우도 지금 자기가 그런 처지인 것 같았다.

전력을 다해서 지키고 있는 순위를 막 뺏긴 것 같은 느낌.

이어서 한 대, 두 대, 그의 옆으로 다른 차들이 치고 나가는 것 같은 느낌.

그런데도 자신의 한계를 알고 있는 사람의 기분.

“어떻게 하고 싶으세요?”

연우가 물었다.

“어떻게 하고 싶은지 말하면 나를 보내줄 건가요?”

서림이 물었다.

“아뇨.”

연우가 웃었다.

“어쩌면 우리는 가장 강도 높은 싸움을 하고 있는 건지도 몰라요. 어차피 사람들은 모두 무사할 거예요. 우리 중에는 리셋 맨이 있거든요. 만약 누군가가 죽는다거나 우리의 싸움이 실패로 돌아간다면 그 사람이 과거로 돌아가서 상황을 되돌려 놓을 거예요. 승리가 보장된 싸움을 싸우는 거라고 보면 되는 거죠. 이길 때까지 다시 싸울 수 있을 테니까요. 그런데 우리는. 이렇게 무기력하게 기다리고 있어야 돼요.”

“불공평해요.”

“그렇죠. 불공평해요. 하지만 우리가 가장 대단한 사람들이라서 불공평하게 어려운 이 일을 우리가 맡게 된 건 아닐까요?”

연우가 말했다.

“아. 사무장님이라고 하셨죠.”

서림은 이해가 된다는 듯 웃었다.

“변호사님이 잔뜩 의지하는 유능한 사무장님.”

서림이 다시 말했다.

어느새 그런 얘기까지 주고받았는지 모르겠다고 연우는 생각했다.

“내가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몸 속에 갇혀 영혼만 방황해야 했을 때, 희영씨가 내 말상대가 돼 주곤 했어요. 희영씨는 한 사람 한 사람을 깊은 애정으로 사랑하고 신뢰하고 있어요.”

“네, 그럴 거예요. 우리 모두가 그런 식의 관계로 연결도 있죠.”

연우가 흐뭇해하며 말했다.

“추월당한다고 생각하지 말자고요. 기회를 봐서 다시 추월할 수 있을 거예요. 전략적으로 때를 기다리는 것 뿐이라고, 그렇게 생각하자고요.”

연우가 말했다.

“우리가 알던 그 사람도 그 얘기를 했어요. 그런데도 기다리는 게 그렇게나 힘이 들다고.”

“기다리는 건 정말 힘들죠.”

“직선 구간에서 다시 자신을 추월할 게 뻔한 상대를 추월하고 싶은 욕구를 억누르면서, 곡선 구간이 나올 때까지 기다리는 마음을 그 사람은 묘한 말로 표현했었는데 그 말이 지금은 생각나지 않네요.”

서림이 말했다.

포크로 양상추를 찍어서 입에 넣었지만 그것이 고역처럼 느껴졌다.

“기다리는 건 정말 싫어요.”

두 사람은 거의 동시에 그렇게 말을 했고 웃었다.

그리고 악동 같은 표정을 하고 서로 마주 보았다.

하지만 독려하고 넘어가서는 안 된다는 것을 둘 다 알고 있었다.

“안 되는 거겠죠?”

서림이 말했다.

“그러게요. 안 되는 거겠죠?”

연우도 말했다.

두 사람은 비맞은 개처럼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양상추만 우걱우걱 집어 넣었다.

긴박한 시간이 흘러갔다.

보트는 이미 호수의 정중앙 부근을 향해 다다르고 있었다.

“시간이 없어.”

진한이 말했다.

뒤쪽에 있던 기선과 선우 형도 서로 눈길을 주고 받았다.

이제는 전면전을 펼치지 않을 수 없겠다고 서로가 말하는 듯했다.

시영이 그들의 표정을 살핀 후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기선은 사람들에게 걸린 최면을 풀었다.

그것이 어떤 메커니즘에 의해서 되는 것인지는 몰랐지만 그는 자신이 최면을 풀었다는 것을 확실히 알고 있었다.

선우 형과 시영은 자기들이 할 수 있는 일들을 했다.

이미 그들에 의해서 수 십 명의 사람들이 대열에서 이탈해 빠져나가고 있었다.

준 맥브라이언과 크레이그도 이 이상한 분열을 감지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맥브라이언은 크레이그를 부르고 싶었지만 그는 너무 멀리 있었다.

보트에 탄 채로 크레이그는 맥브라이언에게 자신이 필요한 그 순간에 자기가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는 사실에 분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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