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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력자들 쇄도-75화 (75/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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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사이크로부터 이상한 전화를 받은 타이라는 정신을 차려보려고 애썼다.

다크써클이 스모키 화장처럼 늘어져 있었지만 얼굴은 좀비같을지언정 청량한 뇌는 활발하게 움직였다.

‘뭔가 꾸미는 거지? 얘들은 재미없는 일은 안 하는 녀석들이고. 그럼 지금부터 나도 신나게 달려봐야겠는데? 기껏 나를 믿고 도움을 청했는데 쌩깔 수는 없지?’

타이라는 멍하니 앉아 있다가 사이크에게 전화를 걸었다.

“내가 누구랑 움직일 수 있는지 확실하게 말해 줘.”

“움직이다니?”

“사람들을 만나려면 누가 먼저 그 길을 가기로 결정했는지 보여주는 게 좋잖아. 듣보잡 말고 뜨악, 소리가 날만한 사람으로.”

“스크루업 CEO라면 먹힐까?”

“그 기인?”

“나는?”

“기인 둘을 데리고 로드쇼를 하라고?”

“별로 입맛에 안 맛나보지?”

“일단은 뭐. 중간중간 다시 전화할 테니까 전화는 바로바로 받아.”

“예쓰, 맴!!”

“좋아, 해 보자고.”

“너만 믿는다.”

“그런 소리는 하지 마. 매력 없어 보이니까.”

“나한테 매력 느껴서 뭘 하려고. 그리고 나는 임자 있는 몸이 돼 버렸고.”

“오오. 그렇단 말이지. 알았어. 일단 접수했으니까. 나중에 다시 통화해.”

“응.”

타이라는 머리를 돌돌 말아올려 묶고 옷장을 열어 옷 몇 벌을 꺼내 침대 위로 던졌다.

만날 사람들의 리스트는 이미 머릿속에 정리가 되었고 그들의 취향에 따라 어떤 옷을 입는 게 좋을지 오분 안에 결정을 끝내기로 해 놓고 샤워를 하러 욕실로 들어갔다.

잠시 후에는 콧노래가 흘러나왔다.

전투 의욕이 고취된 날에는 여러 가지로 기분이 좋아졌다.

타이라는 샤워를 하다말고 손만 닦은 채로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렸다.

글로벌 M&A를 총괄하는 마크 드베인이 머릿속에 떠올랐을 때 타이라는 망설일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그가 단 잠을 이루고 있을 시간이라는 것도 타이라라는 탱크가 전진하는데 방해가 되지는 않았다.

일단 자기 잠은 다 깼으니까.

“이야. 내가 타이라 전화를 받고 있는게 맞아?”

드베인은 꿈결에서 아직 확 빠져나오지 못한 목소리로 말했다.

자기 목소리가 얼마나 섹시하게 들릴지를 아는 사람의 목소리였다.

“마크. 저한테 좋은 생각이 났어요.”

“타이라와 내 몸의 연결에 대한 생각이라면 좋겠는데. 얘길 들으면서 내 안테나를 바짝 세울 수도 있어. 흥분하면 진득한 우유를 쏟아내기도 하는 안테나지.”

“그걸 성희롱으로 받아들이고 내가 마크를 상대로 소송을 건다고 했을 때 마크가 나한테 얼마를 줘야 할 것 같아요?”

“그런 일은 상상하고 싶지 않은데 왜?”

“내가 소송을 제기하지 않을 테니까 그 돈을 나한테 투자해요.”

“그래서. 뒤에서 들려오는 물소리도 전부 연출이었던 거군.”

“엄청난 프로젝트가 있어요.”

“내가 리무진을 보낼 테니까 와서 얘기하면 어떨까? 아직 침대를 떠나기에는 너무 이른 시간인 것 같아 그러는데. 자기도 들어와서 같이 얘길 해 보자고. 백만 달러쯤은 아무렇지 않게 투자할 수 있다는 건 알지?”

“장난해요, 마크? 일억 달러 이상을 투자할 여력이 없는 사람이 지금 내 전화를 받고 있는 거라면 애초에 당신은 전화가 잘못 걸렸다고 말하고 끊었어야 되는 거였어요.”

“호오. 일억 달러? 그게 얼만지 감은 잡혀? 그만한 돈이면 어지간한 회사 몇 개를 사고 팔 수도 있어.”

“그렇겠죠. 구멍가게 같은 회사를 사서 그 회사가 그대로 쓰러져서 폭삭 망할지 아니면 인공호흡을 받고 겨우 정신을 차릴지 알지 못하는 채로 조마조마하면서 몇 년간 노심초사하다가 겨우 제 구실을 하면 다섯 배에서 열 배 정도나 남기고 되팔 수 있을까요?”

그 정도가 되자 드베인은 큰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좋아. 내가 졌어. 뭔가 대단한 걸 쥐고 있군. 그렇지?”

“당연하죠.”

“그렇다면 한심한 농담이나 할 게 아니라 내가 직접 알현을 하러 가야겠군.”

“오래 시간을 내 주지는 못하니까 서두르는 게 좋을 거예요.”

종료버튼을 누르자마자 캐서린 홀튼의 번호를 찾았다.

7년간 최고의 자리를 지키고 돌연 은퇴를 선언한 테니스 스타였던 캐서린은 치료약이 없는 희귀병에 걸린 아버지를 두고 있었다.

안타깝게도 그 병은 유전이어서 세 살 터울의 언니가 이미 그 병으로 세상을 떠났고 캐서린도 언제 그 병이 자신을 찾아올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그런 사람이라서 그녀는 도전하는 것을 미루지 않았다.

하고 싶은 것이 생기면 언제나 곧바로 그 일을 시작했다.

내일 하겠다고 미뤘다가 그 다음날에 손가락을 움직일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지도 모른다는 것 때문에 캐서린은 하루하루를 값지게 살았다.

그런 상황을 잘 알고 있어선지는 몰라도 캐서린과 전화 통화를 하다보면 어느 때보다 서두르게 되었고 캐서린은 그 사실을 깨우쳐주면서 웃곤 했다.

‘내 시간을 뺏는 것에 죄책감을 가질 필욘 없어.’ 라고 말하면서.

캐서린은 그 시간에 맑은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자던 중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고 타이라는 마음을 놓았다.

“캐서린. 잠을 깨운 건 아니죠?”

“그렇다고 하더라도 별로 미안해 할 것도 아니면서.” 캐서린이 웃었다.

“아니에요. 다른 사람한테는 미안해 하지 않지만 캐서린의 잠은 웬만하면 방해하고 싶지 않단 말이에요.”

“왜 나만 특별대운데?”

책망하는 듯한 어조로 말하면서도 캐서린은 피식 웃는 소리를 냈다.

“캐서린. 들어봐요. 저한테 미친 친구가 있거든요. 이 녀석 이름을 한 번쯤을 들어봤을 거예요. 스크루업의 수석 오즈 메이커 사이크라고.”

“들어본 것 같기도 해.”

“그 녀석이 나한테 프로젝트 하나를 맡겼어요. 뒷받침 될만한 자료랄 건 별 게 없어요. 그 녀석은 원래 직관에 따라 움직이는 앤데 뭔가 냄새를 맡은 것 같아요. 저도 이런 식으로 말하는 건 정말 좋아하지 않거든요. 뭔가가 있어요, 뭔가가, 라는 말. 이건 결국 나는 이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아무 것도 몰라요 라고 하는 것밖에는 안 되니까. 그런데. 결국 이 말밖에는 못 하겠네요. 나는 이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아무 것도 몰라요. 하지만 뭔가가 있는 것 같아요.”

캐서린은 조용히 타이라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나는 캐서린과 이 기회를 나누고 싶어요. 캐서린이 나를 믿고 이 프로젝트에 캐서린의 돈을 투자해 달라고 부탁하고 싶어요.”

“얼마 정도나요?”

“유동자금의 전부를 투자해 달라고 말하고 싶어요.”

“그렇게 믿을 수 있는 친구예요?”

“사이크요? 두 말 할 것도 없어요. 그 녀석이 악령에 빙의돼서 미친 짓을 한다고 하더라도 그 녀석은 내가 맡긴 신의를 지키려고 악령하고 협상해서 잠깐이라도 제 정신을 차릴 녀석이에요. 그리고 나와 했던 약속을 지키고 다시 악령에게 영혼을 내주겠죠.”

“대단하네요, 그 사람. 타이라가 누군가를 전적으로 그렇게 믿는 걸 본 적은 없는 것 같은데. 늘 몇 발자국쯤 떨어져서 거리를 뒀고 늘 마지막 순간까지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잖아요. 갑자기 땅이 꺼질 가능성에 대해서도 생각하고 온갖 불운한 일들이 일어날 가능성에 대해서까지 안테나를 세우는 사람이었는데.”

“안테나. 그 단어를 오늘 자주 듣네요.”

타이라가 웃었다.

“그래요?”

“네.”

“그래서. 음. 얼마를. 아, 유동자금의 전부라고 했죠?”

“결정은 캐서린이 하면 돼요.”

“그야 물론 그렇죠.”

그리고 잠시 침묵이 흘렀다.

“오늘 아버지랑 요트를 타고 낚시를 하러 가기로 했어요.”

“그렇군요.”

정중하고 우회적인 거절이라고 생각하며 타이라는 아쉬워했다.

그래도 머릿속에는 열 명도 넘는 이름이 있었고 이것은 겨우 첫 번째 거절일 뿐이라는 생각에 너무 심하게 상심하지는 말자고 생각하며 다시 의욕을 다지려 애썼다.

“그러니까 수표를 받으러 오려면 오후 1시 이전까지는 와야 돼요.”

“아……!”

“미안하지만 유동자금이 그리 많지 않아요. 타이라가 올 때까지 조금 더 생각해 보긴 할게요. 2주전에 두 동의 별장을 계약했는데 생각을 좀 더 해보고 타이라가 오기 전에 그 건에 대해서 위약금을 물고 계약을 파기할지 결정을 해야겠어요. 그렇게 되면 8백만 달러 정도가 더 굳어요. 그러면 대충 3천만달러나 3천 오백만 달러까지는 투자할 수 있을 것 같군요.”

“고마워요, 캐서린. 고마워요. 절 믿어줘서요.”

“나는 다른 사람을 믿지 않아요. 내 몫의 운을 믿을 뿐이죠.”

캐서린이 말했다.

“당신 시간은 정말 중요하니까 이만 끊을게요. 좋은 투자자들을 찾길 바라요. 그럼 있다 보도록 하죠.”

얏호, 하고 소리를 지르다가 재채기를 했다.

자기가 옷도 입지 않고 욕조에 걸터앉아서 벌써 두 명의 투자자를 확보했다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출발이 지나치게 좋았던 탓이었는지 그 후에는 조금 난관에 부딪쳤다.

그래도 초반에 적지 않은 액수를 확보해 둔 턱에 타이라에게는 여유가 넘쳤다.

타이라가 독자적인 행보를 하는 동안 스크루업의 CEO와 퓨쳐 컨트롤의 현지법인 대표, 그리고 사이크까지 타이라의 소규모 로드쇼에 참여했다.

타이라가 미리 연락을 해서 불러놓은 사람들이 호텔 옥상에 마련된 파티 장소로 슬슬 모여들었다.

“절대로 먼저 나오려고 하지 않을 걸? 서로가 앙숙이라서.”

티아라가 사이크에게 말했다.

“그나저나 오늘 정말 근사하다. 티아라.”

사이크가 티아라를 추켜 세웠다.

“너도 나쁘진 않아.”

“뭐야, 그거. 근사하다는 말을 해 줬으면 너도 비슷한 말을 해 줘야지. 나쁘진 않다니.”

“그런가? 하지만 나쁘지 않다는 말 정도가 딱 적당한데?”

“그렇다면 나도 근사하다는 말은 회수하겠어.”

“어림없는 소리. 한 번 들은 칭찬은 절대로 안 뺏겨.”

그렇게 유치한 소리를 할 수 있는 것도 어린 시절의 친구라는 것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타이라는 지명에 대해 궁금했지만 왠지 지명에 대해 묻는 것이 꺼려졌다.

사이크도 타이라가 지명의 근황을 궁금해한다는 것을 알기는 했지만 웬만해서는 그의 얘기를 꺼내려 하지 않았다.

무슨 일이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데 괜히 지명에 대해 아련한 감정을 키우게 하고 싶지가 않았다.

그러기에 지명은 너무 위험했다.

하긴.

그 위험한 상황에 사이크도 이미 몸을 깊이 담가버리긴 했지만.

한 사람 한 사람, 투자자들이 모여들자 타이라가 사이크에게 눈짓을 하고 그들에게 다가갔다.

타이라는 누구에게랄 것 없이 살가운 표정을 지으면서 거부감이 들지 않도록 자연스럽게 얘기를 시작했다.

“서로들 굉장히 싫어하신다는 거 알아요. 그렇지만 상대방한테만 좋은 기회가 주어질까봐서 오지 않을 수가 없었다는 사정도 알죠. 올해는 재수보기로 매출이 600퍼센트 이상 늘었다고 해도 갑자기 경쟁업체에서 신기술을 개발하거나 고객이 변심을 일으켜서 매출이 곤두박질치다가 기업이 사라질 수도 있잖아요? 이럴 때를 위해서 보험을 들라는 거예요. 보험이라고 하기에는 위험성이 커 보이기는 하죠. 그건 저도 알아요.”

타이라가 언급했던, ‘매출이 600퍼센트 이상 늘었’다는 포털업체의 CEO는 처음에 우쭐했다가 곧 이어지는 악담에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것은 시소 같아서 그의 표정이 일그러지면 주위의 다른 사람들의 얼굴에는 저절로 웃음 꽃이 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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