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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력자들 쇄도-45화 (45/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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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한의 공포가 가진 실체를 본 사람만이 지을 수 있는 표정을 하고 죽은 하루토는 자신을 죽인 게 무엇인지, 누구였는지 알지 못했지만 기선은 주저하지 않고 장 항을 떠올렸다.

"가자고. 안 갈 거야? 장지까지 따라갔다 올 생각이야?"

장 항이 말했다.

그 일은 희영에 의해 히나타의 신사에서 실시간 중계가 되었다.

희영은 골치를 썩게 생겼다는 듯이 손으로 이마를 짚고 고개를 저었다.

“딱 하루를, 아니, 하루도 아니고 반나절을 떨어져 있었던 건데 그 시간동안 일을 저지르다니!!”

희영이 분개한 말투로 말하자 아미와 지명은 할 말이 없다는 표정으로 희영을 바라보았다.

“누나. 누가 봐도 저건 기선이 형이 저지른 짓은 아니잖아요!! 하루토라는 남자가 들고 있는 물건 못 봤어요? 그 남자는 무기를 들고 있었다고요. 그 사람이 막 출발하려는 케이블카에 뛰어든 건 우연이 아니었을 거고 그 사람은 형들을 노린 거잖아요. 분명히 봤으면서! 그리고 만약에, 아주 만약에 책임이 우리 쪽에 있다고 해도 기선이 형한테 책임이 있다고 할 순 없죠. 장 항 형이라면 모를까.”

지명이 말을 해도 소용이 없었다.

희영은 이미 마음을 굳혔다.

“기선씨를 위해서 변명하려고 할 필요 없어. 어쨌거나 확실해 졌으니까. 기선씨를 믿고 놔두면 안 되겠어.”

“에엥? 그 말은……?”

아미가 희영을 바라보았다.

아미가 인간 감정의 흐름을 배우는데 가장 어려움을 초래하는 것은 희영이었다.

희영을 이해하려면 인간 감정을 이해할 뿐만 아니라 굉장히 이상한 '여성 언어'라는 것도 함께 이해해야만 했다.

지명이 웃으면서 희영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누나가 아니면 기선이 형을 지켜줄 사람은 없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형을 혼자만 내보내는 건 걱정이 돼서 안 되겠다는 말을 하는 거죠?”

지명이 말하자 희영은 곧바로 얼굴을 붉혔다.

“그런 말이 아니라.”

“그렇잖아요. 형이 나가고 나서 누나가 제대로 앉아 있는 걸 보질 못했는데. 형이 있는 동안은 아프다는 핑계로 거의 누워 있는 것 같더니. 앓더라도 형 옆에서 앓는 게 좋죠?”

“지명씨, 뭘 알지도 못하면서 까불지 마라.”

“그럼 알면서 까불게 누나가 말해줘 보세요. 제가 알아야 되는 게 뭔데요?”

지명은 신이 나서 희영의 수인한계를 벗어날 정도로 까불다가 기어이 머리를 쥐어박혔다.

“내 주먹은 여전히 맵다는 거? 그건 알아야 되겠지?”

“너무해요, 누나.”

그러면서도 지명은 안심이 되었다.

“안 되겠어. 당장 기선씨한테 전화를 해야지. 아휴, 정말 이 사람은. 나하고 떨어진지 얼마나 됐다고 곧바로 사고를 치고 다니냐고. 사고를. 아휴. 내가 정말 기선씨 때문에 못 살겠어. 이러니 내가 기선씨를 내보내 줄 수가 있겠어?”

그러면서 괜히 아미와 지명의 눈치를 살폈다.

아미는 지금 웃었다간 죽는다는 생각으로 필사적으로 입술을 꽉 물고 웃음을 참았다.

하지만 지명은 관장약을 넣고 못 참는 사람처럼 비실비실 웃음을 흘리다가 결국 희영에게서 도망쳐 나가며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희영 자신도 그 복잡미묘한 감정을 설명할 수가 없었다.

계속 같이 있는 동안에는 숨이 막힐 것 같고 자기가 이런 고통을 겪는 게 기선 때문인 것 같아 원망스런 마음까지 들더니 기선이 보이지 않자 그때부터는 불안해서 죽을 것만 같았다.

기선의 옆에 있는 자신의 빈 자리는 장 항이나 다른 사람들로 금방 부족함 없이 채워질 거라는 생각에 우울해져서 미칠 것만 같았다.

히나타가 여러 모로 신경을 써주었지만 전혀 고맙지가 않았다.

누가 어떤 배려를 해 주어도 같은 공간에 기선이 없다는 사실을 지우게 할 수가 없었다.

깊은 한숨만 지으며 기선에 대한 생각을 지우지 못하고 있는데 갑자기 영상이 떠올랐던 것이다.

희영은 놀라서 숨을 제대로 쉴 수도 없는 상태로 히나타를 보내서 지명과 아미를 불러오게 했다.

연우와 시영은 마침 선우 형과 함께 장을 보러 나가서 신사에 없었다.

지명과 아미도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은 그들의 눈 앞에서 펼쳐지는 광경에 할 말을 잃었다.

위험하다는 게 뻔히 보이는 상황에서 장 항이 왜 모르는 척 하고 딴청을 피우는지 처음에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형한테 전화라도 해 줘야 되는 것 아니에요?”

지명이 말했다.

아무 장면이나 희영에게 보이는 것은 아니었다.

희영에게 어떤 장면이, 어떤 사건이 보인다는 것은 그 장면이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뜻이 되었다.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들의 유유자적한 일상을 보여주려고 영상이 떠오르는 일은 없었다.

지명은 기선에게 전화를 걸려고 했고 바로 그 순간에 일이 일어났다.

하루토가 바닥에 나뒹굴기 시작했던 것이다.

어떤 전조도 없었다.

그저 심장발작을 일으킨 것 같았다.

평소에 심장질환을 앓고 있는 사람인지도 몰랐다.

장 항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들이 봤다면 아마도 그런 결론을 내렸으리라.

하지만 그들 모두는 장 항이 어떤 사람인지 알았다.

그들은 장 항이 아내의 붉은 물감에 대해서 얘기하는 것도 들었다.

“장 항 형이 사별한 줄은 모르고 있었어.”

희영을 두고 방을 나오면서 지명이 아미에게 말했다.

“그래요? 나만 빼고 다른 사람들은 서로에 대해서 전부를 아는 줄 알았더니. 그럼 나도 크게 뒤처진 건 아니군요?”

“그래. 많이 뒤처진 건 아니야. 그러니까 부지런히 쫓아와.”

지명은 아미에게 느긋하게 어깨동무를 하고서 기선과 장 항의 귀환을 기다렸다.

장 항은 기선을 챙겨서 내려오고 있었다.

“그래서 말야. 내가 아까 하던 얘기를 마저 하자면.”

장 항의 말에 기선은 아주 질려버렸다는 표정을 지었다.

“형. 사람이 죽었잖아요.”

그는, ‘형이 사람을 죽였잖아요!’ 라고 말하고 싶은 것을 가까스로 참고 있었다.

기선이 어떤 말을 참고 있는지는 장 항도 알고 있었다.

“무슨 일이 일어날 거였는지 너도 알고 있잖아. 다시 죽어버리고 미래에서 또다른 지명이를 소환해야만 했던 거야? 무슨 일이 생길 줄 안다면 우리 힘으로 그걸 막을 수도 있는 것 아니야?”

“하지만, 마지막 순간에 그 남자가 마음을 바꿀 수도 있는 거였잖아요.”

기선은 바로 다음 순간에 깨달았다.

장 항은 말로 푸는 스타일이 아니라는 것을.

하늘을 보고야 깨달았다.

기선은 하늘을 보고 드러눕고서야 자기가 장 항에 대해서 아는 것이 그다지 많지 않은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턱과 볼이 얼얼했다.

이가 나간 것 같지는 않았다.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그렇게 때려서 쓰러뜨려 놓고 장 항이 손을 내밀어 기선을 일으켰다.

기선은 너무 굴욕적으로 느껴져서 그 손을 붙잡고 싶지 않았지만 괜한 고집을 부렸다가 한 대를 더 얻어터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개소리를 지껄이려면 개를 만났을 때나 해.”

장 항이 말했다.

기선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네가 신이야? 히나타랑 같이 사니까 너도 신이 된 것 같냐? 신이 사는 집에 신이 사는 방 옆에서 사니까 너도 뭔가 대단한 존재가 된 것 같아? 한 번만 더 그런 헛소리를 지껄이면 그땐 죽여 버린다.”

“…….”

“마지막에 가서 마음을 바꿀지도 모른다는 가능성 때문에 최후까지 봐 줘야 되는 거라고? 마지막 순간까지 기다려 줘야 되는 거라고? 마지막 순간에도 판을 뒤집을 수 있는 실력이 너한테 있다고 생각하나 보지? 개소리 하지 마, 병신 새끼야. 기회가 언제나 올 것 같아? 운이 언제나 네 편일 것 같아? 너는 네가 너만의 강기선이라고 생각하나 보지? 하지만 나는 아니야. 나는 내 아이의 아버지야. 한때는 한 여자의 남편이기도 했지만 이제는 내가 지킬 사람은 내 아이밖에 없어. 내 아이를 위해서라도 나는 살아남아야 한다고. 이런, 말도 안 되는 곳에서 말도 안 되는 새끼한테 개죽음 당해버릴 순 없다고. 지명이한테 도움을 얻어서라도 살아나고 또 살아나고 또 살아나야 돼. 알았어?”

“…….”

“알았냐고, 이 씨발놈아!!”

“저도……. 저만의 강기선은 아니에요.”

“잘 됐군. 확 그냥 전부 다 희영이한테 말해 버리려고 했더니. 이딴 새끼는 잊고 선우 형이나 연우 중에 다시 골라보라고 말이다.”

“형!!”

“징징거리지 마. 개새끼야. 나는 너 같은 새끼들 정말 싫어해. 전에 만났다면 너는 벌써 내 손에 죽었을 거다.”

장 항의 말은 그냥 하는 말로 들리지 않았다.

기선은 자기가 지금 어떤 주먹에 맞은 건지 알지 못했다.

그 주먹에 맞고 나가떨어져서 끝내 의식을 찾지 못하고 죽은 사람이 몇이었는지 기선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내가 지금 하는 말, 새겨두는 게 좋을 거다."

장 항이 다시 한 번 힘주어 말했고 기선은 수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장 항은 그동안 많은 말을 하지도 않으면서 자기가 하는 말의 무게를 엄청나게 늘려 놓은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그렇게 말을 하면 정말 그런 거였다.

기선은 기가 완전히 죽은 채로 터덕터덕 장 항의 뒤를 따라왔다.

장 항은 기선을 위로해주는 대신 아내의 얘기를 끝맺었다.

“집에 돌아와서 보니까, 이유를 알 수는 없었는데 그 사람이 움직이질 못하더라. 죽은 사람처럼 늘어져 있었어. 재민이는 그런 엄마한테 매달려서 울고 있었고."

돈을 벌기 위해서 시합에 나갔다가 돌아오는 길이었다.

링에 올라 싸워주기만 하면 큰 돈을 주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다.

아내는 장 항이 다시 링에 오르는 것을 한사코 말렸지만 그는 자신에게 두 사람을 부양할 책임이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의 주먹은 한 번도 그를 배신한 적이 없었다.

"병원에 옮겼지만 뇌사판정을 받았어. 뇌사에 빠진 그 사람한테 계속 생명을 유지하게 하는 게 죄라는 생각이 들더군.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그 사람을 알았으니까. 그 사람이 어떤 삶을 원할지, 그리고 어떤 죽음을 원할지 나는 알았으니까. 그래서 선택해 줘야 했다. 그 사람을 죽게 한 건 나일 수도 있겠지. 생명유지장치를 떼달라고 부탁한 게 나였으니까.”

“…….”

“그 사람이 죽고, 나는 그 사람을 보지 못했어. 볼 용기가 안 났고. 죄책감에. 그렇게 된 거다. 거참, 꽃들, 더럽게도 붉다. 어어이, 꽃들~ 붉다고 그렇게 거들먹거릴 것 없어. 서림이가 그린 꽃이야말로 정말 예뻤는데.”

그는 괜히 꽃들까지 경멸해버렸다.

“그림들은, 어떻게 됐는데요?”

“장례식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누군가 찾아와서 서림이의 그림을 모두 사고 싶다고 했지. 전부 팔았어. 나는 재민이를 맡길 곳만 찾으면 서림이 뒤를 따라갈 생각이었거든. 그러려면 돈이 필요했어. 아이를 맡아줄 사람한테 그 돈을 주려고 했지. 그런데 아이가 가끔 한 마디씩을 툭툭 던지는데 그게 내 안에서 뿌리로 자라더라. 아빠. 나한테는 아빠만 남았어, 라든지. 사랑한다고 말하는데 그 말을 들어야 할 사람이 듣지 못하면 사랑한다고 말하는 사람이 정말 슬플 거라는 둥.”

“…….”

숨만 붙어 있었을 뿐 그는 이미 한참 전에 아내를 따라간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의 주먹조차도 그를 잊어가는 것 같았다.

그는 아내를 묻으면서 과거의 자신에 관한 기억도 전부 묻었다.

아이만큼은 지켜야 한다는 생각에 다시는 링에 오르지도 않았고 자신의 주먹이 지닌 영광의 기록들을 조용히 지워버렸다.

그렇게 산을 되짚어 내려오다보니 어느덧 택시를 잡을 수 있는 곳까지 이르렀고 그때는 두 사람 모두 침묵을 무겁게 지켜냈다.

한참을 기다린 끝에, 아래에서 기어올라오는 택시를 볼 수 있었다.

문이 열리자마자 아미 또래 정도로나 보이는 남자 아이 하나가 급하게 뛰어내렸다.

“산에서 내려오시는 거예요? 혹시 케이블카에서 사고가 났다는 얘길 들으셨어요?”

택시에서 내린 남자가 장 항에게 물었다.

장 항은 그에게 한 마디만 남기고 택시에 올랐다.

“나는 한국인입니다.”

이츠키는 장 항이 하는 한국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멍하니 두 사람을 바라보다가 케이블카를 타는 곳으로 전력으로 달려갔다.

"이츠키, 이 사람 어때 보여?"

몇 개월 전엔가, 이츠키는 누나가 내민 사진 속의 남자를 바라보았다.

세상의 성공 법칙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만이 지을 수 있는 표정을 여유롭게 짓고 남자가 웃고 있었다.

"하루토라는 남자야. 대학 공사현장에서 일해."

"관심 있어?"

"응, 아주아주아주아주 많이."

이츠키가 웃었다.

...

이츠키가 웃었다.

...

"좋아. 알아봐주지."

이츠키가 모르는 것이 있었다면 그것은 바로 하루토가 자기 자신에 대해 많은 것을 알려줄 시간을 갖지 못한 남자였다는 사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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