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뜩이나 깔깔한 입에 피자 같은 게 들어갈 리 없다. 뜨거운 국에 밥이나 말아
먹었으면...
경식이 말없이 혼자 피자를 먹더니 부엌을 치우고 다가온다. 또 뭔가 트집을 잡으려는
건가 싶어 섬찟했다. 겁에 질린 눈으로 시트 밖으로 얼굴만 빼꼼히 내밀어 그를 쳐다보자
씩 웃으면서 나를 덮은 시트를 한번에 벗겨 내린다. 볼 거 다 보여준 몸이지만 갑자기
알몸이 드러나자 나는 얼굴을 붉혔다. 깨끗하게 씻은 경식의 눈 앞에 두들겨 맞아 생긴
멍과 상처 자욱, 흘러내린 정액등으로 더럽혀진 몸을 보이는 것이 비참했다. 경식은
자기가 내 몸에 한 짓을 보고 조금 당황한 듯 했다.
-...많이 아프냐.-
-...-
-그러길래, 내 성질 건드리지 말랬지.-
-...미안해.-
뭐가 미안하다는 건지 나도 모르겠지만, 일단, 빌고 본다. 저도 사람이면 이 지경이 된
나를 다시 어떻게 하지는 않겠지. 시트나 덮어줬으면.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도 없다.
경식이 말 없이 나를 안아서 들어올렸다.
-뭐..할려고...-
-일단 씻고 약 발라줄께.-
욕실에 안고 들어가서 욕조에 눕힌 뒤 샤워기와 바디 샴푸로 씻겨 준다. 경식의 손놀림은
의외로 섬세했다. 특히 멍이 든 부분을 씻길 때는 지극히 부드러웠다.
몸을 씻기고 약을 발라준 뒤 옷까지 입혀준다.
배고프겠다며 백반도 주문해 주었다.
밥을 먹고 그는 컴퓨터를 붙잡고 일을 한다며, 움직일 수 있으면 잠깐 산책이라도
다녀오라고 했다. 뭐 사고 싶은 거 있으면 사라고 돈까지 집어 준다. 이런 그에게 나는
고마워서 눈물이라도 흘려야 하나? 정말 밖에 나가고 싶지만, 도저히 움직일 수가 없다.
됐다고 말하고 다시 침대에 누웠다. 열심히 일하고 있는 경식과 대조적으로 그에게
두들겨 맞아 운신도 못하고 누워 있는 나, 마치 그의 잠자리 시중을 들려고 준비하고
있는 것 같은 나를 생각하자 눈물이 났다. 소리내서 울면 들킬까봐 몰래 훌쩍이는데,
갑자기 타는 듯한 시선이 느껴져 돌아보자 경식이 노려보고 서 있었다.
-왜 또 이 지랄이야!-
-아냐.. 그냥... 정말 아무것도 아냐...-
-어제 좀 맞았다고 싸고 드러누워서 시위하는 거냐?-
-그런 거 아냐... 그냥 갑자기 눈물이 나서...-
-에이 씨발.-
경식이 내 머리채를 잡아 일으켰다. 또 두들겨팰까봐 무서웠다. 두 손을 모아 말그대로
정말 싹싹 빌기 시작했다.
-잘못했어... 잘못했어요...-
-이게 정말! 누가 빌래?-
뺨에서 불이 번쩍한다. 이제 또 시작할 것이다. 경식의 폭력이...
거의 패닉 상태에서 경식의 발 아래 몸을 던지고 엎드려서 빌었다. 내가 무조건
잘못했다고, 제발 한 번 봐달라고 빌었다.
-너 같은 건... 너 같은 건...이렇게-
경식이 방금 입혀 준 내 바지를 다시 벗겨낸다. 그래, 차라리 섹스가 낫다. 나는 얼른
다리를 벌리며 경식의 목에 감겼다.
-네 마음대로 해... 때리지만 마.-
-더러운 남창 녀석...-
-으흑....흑...-
경식이 나를 들어 자신의 다리 사이에 앉혔다.
그의 눈에 이상한 빛이 반짝한다.
-맞기 싫지? 그럼 네가 스스로 넣어.-
허리와 다리가 아프다. 엉덩이 사이는 말할 것도 없다. 하지만, 공포에 질린 나는 이미
커다랗게 부푼 경식의 물건위에 나의 애널을 겨냥하고 주저 앉는다. 찌르는 듯한 통증이
몸 전체를 감싼다.
-하악...-
-움직여.-
그가 내 허리와 엉덩이를 움켜잡고 냉혹하게 명령했다.
-하악... 하악...-
앉았다 일어나면서 나는 스스로 그의 것을 만족시키기 시작한다. 아파서 미칠 것 같다.
잠시 멈춘 눈물이 다시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가 내 눈물을 보고 이맛살을 찌푸리더니,
움켜잡은 손에 힘을 더한다.
-더 빨리.-
아무리 빨리 해도 그는 만족할 것 같지 않다. 허리가 끊겨져 나가는 것 같은 통증을
느끼면서 나는 자동인형처럼 앉았다 일어난다.
-하악....학...제발....-
-기분 좋지? 이 창녀야?-
-네....제발.... 제발... 끝내 줘....-
-넌 이런 걸 즐기는 더러운 놈이야. 난 널 만족시켜주고 있을 뿐이라고. 알겠어?-
-으응.... 제발... 이젠...-
-네 더러운 몸안에 더 있고 싶은 생각도 없어.-
그가 갑자기 난폭하게 나를 들어올려 빠져나갔다. 아랫도리가 갑자기 시원해진 느낌과
함께, 밑이 다물어지는 고통이 느껴졌다. 그가 내 아래를 들어올려 그것을 보면서
비웃었다.
-마치 더 넣어달라는 것 같군.-
-흐흑... 흑...이젠... 그만...-
-빨아.-
바닥에 주저 앉아 여전히 사정하지 않고 있는 그의 것을 입에 물었다. 엉덩이가 너무
아파서 무릎을 세워 엉덩이를 들어올렸다. 그가 내 우스꽝스러운 자세를 보고 내
머리카락을 잡아 자신의 눈을 보게 했다.
-네 스스로를 봐! 네가 어떤 자세로 내 아래에 앉아있는지. 네가 나한테 자존심 따위를
내세울 수 있는 입장이라 생각해? 넌 내 개야. 난 내가 하고 싶은 데로 너한테 할거야. 넌
그런 취급을 받아 마땅해!-
나는 대답하지 않고 눈물만 흘렸다. 그가 내 고개를 다시 그의 아래로 처박았다.
-네가 할일을 해!-
부들부들 떨면서, 그의 것을 핥자 곧 그가 사정했다.
-한 방울이라도 흘리면 죽을 줄 알아!-
나는 시키는 데로 모두 삼키고 그의 페니스 끝에 남아 있는 정액까지 핥아주었다. 사정을
끝내자마자 그가 날 밀쳐냈다. 나는 지푸라기 인형처럼 맥 없이 쓰러졌다. 바닥에 얼굴을
파묻고 흐느꼈다.
경식이 소리쳤다.
-울음 그쳐, 이 걸레야!-
그러나 갑자기 눈물이 멈춰줘 줄리 만무했다. 입을 틀어막고 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애쓰는데, 허리께에 발갈질을 당했다. 경식이 나를 발로 차면서 욕을 퍼붓고 있었다.
그가 거의 이성이 나간 듯 해서 더 무서웠다. 나는 죽어라하고 그의 발에 매달렸다.
어깨며 등에 주먹이 쏟아졌다. 비명도 나오지 않았다.
한참 나를 두들겨패던 경식이 문득 조용해졌다.
그는 자기 발에 매달린 채 정신을 잃기 일보 직전인 나를 보더니 팔로 머리를 감싸고
주저 앉았다.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한참 몸부림을 치던 경식이 나를 끌어안으면서 속삭였다.
-미안하다.... 나... 널.... 사랑하는 것 같다...-
그의 말 끝에 울음이 섞였다.
미친 새끼... 간신히 한 마디 중얼거리고 나는 정신을 잃었다.
그 일이 있고 난 후 경식과 나의 관계는 사뭇 달라졌다. 경식은 더 이상 내게 함부로
손대지 않았다. 나는 나대로 경식이 언제 다시 폭발할까 봐 두려워서 계속 그의 눈치만
살피고 있다.
7년 전 그렇게 무섭게 나를 폭행했던 사람이 나를 사랑한다니, 아이러니칼하다.
나를 굳이 자기 오피스텔로 끌어들여 먹이고 입히고 섹스를 강요하는 이유가 정액받이를
사육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랑 때문이라고?
나는 혼란스러워졌다.
내가 아는 사랑의 감정과 경식의 감정은 많이 다른 것 같았다. 문득 A를 사랑했던 내
마음을 돌이켜 보았다. 나는 지극히 조심스럽고 섬세하게 A를 몰래 사랑했다. 하지만
경식은 어떤가... 날 때리고, 강간하고 욕설을 퍼붓는... 그게 사랑일까? 그런 사랑이라는
것이 과연 존재하는 것일까?
경식과 나 사이에 무서운 침묵이 흐르고 둘다 그것을 견뎌내기가 힘들어지기 시작했다.
그와 나의 관계는 일방적인 명령과 복종의 관계였다. 그런데, 경식이 '사랑'이라는
지극히 평등한 관계를 요하는 감정을 거기 부여함으로써,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
행동해야 할 지 알 수 없게 되어 버린 것이다.
경식과는 여전히 같은 침대를 쓰고 있다. 단지 섹스를 할 때만 아무 생각도 할 필요가
없이 편했다. 경식은 전처럼 나를 함부로 취급하며 범하거나 억지로 하지도 않지만,
습관적으로 자기전과 잠에서 깬 직후 섹스를 하는 것이 버릇이 되어버렸다.
경식은 나 같은 것에게 고백을 한 자신을 수치스러워하는 것 같았다. 나는 나대로 경식이
무서웠다.
아르바이트라도 구해서 자립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경식의 펫으로서가 아닌 연인으로서 경식의 곁에서 지낼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오랜만이야.-
-네...-
A를 다시 만났다. 사람을 구한다는 게이 바에 면접을 보려고 찾아갔다, 정말 영화처럼
우연히 만난 것이다. 하긴 고급스러워 보이는 분위기의 바가 A가 자주 찾을 만한
곳이었다. 당연히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그 옆에는 새카만 머리에 어려 보이는 이제 막
대학이나 들어갔을까 싶은 남자애가 앉아있었다. 남자애가 너무 예쁘게 생겨서 마치
인형같다. 고양이하고는 끝난 것 같다.
-얼굴이 많이 상했다.-
-그냥... 그럭저럭 살아요.-
-혼자?-
-아뇨...-
-그래... 너 그렇게 나가고 나서 많이 찾았다.-
-왜요?-
-그야 걱정되서지. 그래도 어떻든 잘 지내고 있는 거 같아 다행이군.-
-...-
-...-
-나, 배고픈데. 아저씨 여기 계속 있을 거야?-
예쁜 남자애가 어리광을 피우듯 A에게 안긴다. A가 사랑스럽다는 듯이 남자애의 머리를
쓰다듬어준다. 가슴 한 구석이 아릿해져 온다. 아직 A를 완전히 잊지 못했나보다.
-돈은 있니?-
-있어요.-
-같이 사는 사람은, 애인?-
-...그냥, 같이 사는 사람이에요.-
-...그래. 그 때 네게 심하게 말했던 거..-
-괜찮아요. 그런 거. 화나서 나간 거 아니에요. 그냥 그 때 제 상황이 좀 그랬어요. 그 일
아니어도 나가긴 나갔어야 했을 거예요.-
-나, 곧 호주로 갈 거 같다.-
-이민이요?-
-그래. 떠나기 전에 넌 꼭 한 번 만나고 싶었는데... 이렇게 만났으니.-
남자애가 갑자기 눈을 휘둥그레 떴다. 내 눈에 눈물이 흐르고 있었나보다. 입가에 짠
맛이 느껴졌다. A가 시선을 피하며 손수건을 건넸다.
-넌, 괜찮은 애야. 나 같이 성질 더러운 놈이 얘기하는 거니까 틀림 없어. 그러니, 꼭
행복해져라.-
-....-
남자애가 연신 A의 옆구리를 찌르며 불편하다는 기색을 보이자, A가 일어섰다. 언제나
그렇듯, 그는 관심있는 사람에게 지극히 섬세하고 다정한 사람이었다. 아마 한 때나마
그의 그런 관심이 내게 쏟아진 적이 있을 것이다. 아니 있었다. 아주 잠깐, 내가 내 아픈
과거를 그에게 털어놓았을 무렵. 그 때.
그의 변하기 쉬운 사랑을 영원히 차지한다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지금 이 예쁜
남자애도 언젠간 버림 받을 것이다. 나는 나와 같은 고통으로 괴로워할 남자애를
동정어린 시선으로 쳐다보았다. 남자애는 순진하게 씩 웃으며 A의 팔짱을 꼈다.
-그럼.-
-잠시만요.-
A가 돌아보았다.
-....아니, 아니에요.-
사랑한다고 말하려고 했다. 하지만, 더 이상 그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돌아서는 A의 등을 보아도 죽을 거 같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사랑했다고 말하면 사실이겠지만, 그렇게 말하고 싶지는 않았다.
A가 돌아서며 손을 번쩍 들었다 내렸다.
그가 떠나고 한참 동안 바에 앉아 있다가 나갔다. 면접은 보지 않았다.
오피스텔로 돌아오니 경식이 진성과 술을 마시고 있었다. 의외의 장면에 놀랐지만
외투를 벗어 걸고 안주거리를 마련하러 부엌으로 갔다.
-야, 이리 와서 앉아 봐.-
진성이 짜증난다는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무슨 일이야? 갑자기 술을...-
내키지 않았지만, 진성의 옆에 앉았다. 잔이 비었기에 술병을 집어 따르려는데, 경식이
테이블을 주먹으로 쳤다.
-네가 작부야?-
-...미안해.-
나는 술병을 다시 내려 놓았다.
진성이 경식을 노려 보며 내게 술잔을 들었다.
-한 잔 따라.-
-서진성.-
-술 따르란 얘기 안들려?-
눈에 핏발이 선 경식이 나를 노려 보았다. 이것저것 다 진절머리가 나서 그냥 일어섰다.
그러자 진성이 번개같이 술잔을 내 얼굴에 던졌다. 유리에 살짝 긁히면서 피가
배어나왔다.
-이 걸레새끼가 술 따르란 말 안들려?-
테이블이 뒤집히고 경식이 미친듯이 진성에게 달려드는 것이 보였다.
방 한 구석으로 가서 다리에 머리를 묻고 몸을 웅크렸다.
경식이 진성의 멱살을 잡았다. 진성이 기가차다는 듯이 웃었다.
-넌 날 기만했어, 서진성.-
-웃기지도 않는군. 데리고 놀던 걸레한테 사랑 고백까지 했다고? 최경식 너도 쟤처럼
더러운 호모새끼냐?-
-너...널 위해서 쟬 그렇게 만든 거였어!-
-쿡... 너도 은근히 즐긴 거 알고 있어. 날 위해서라고? 그래, 내가 널 속인 것은
인정한다. 하지만, 난 네게 그냥 구실이었을 뿐이야. 너도 나처럼 녀석을 짓밟으면서
쾌감을 느낀 거라고. 인정해, 최경식.-
-아니야!-
-그럼, 쟤 몸에 난 이 상처는 뭐야?-
갑자기 진성이 내게 다가와 셔츠를 찢어냈다. 난 울면서 그의 손을 뿌리치려 했으나
진성은 내 벗은 몸을 잡아 경식에게 들이댔다.
-쿡.. 잘도 요리해 놓으셨군. 이 상처, 이 멍들은 이게 스스로 넘어져서 생긴건가?
아니지. 너야. 이 야들야들한 몸을 때리면서 즐거웠겠지? 얜 저항도 거의 안하거든.
신기하게도 일단 한 번 주먹을 들이대면 양처럼 온순해지니까. 때리고 나면 그짓하는
것도 더 좋았을 테지? 아주 잘 알지. 이건 약간 때려주면 더 길이 잘드는 장난감처럼
움직이니까. 아주 즐거웠겠어, 이런 물건을 독차지하고서.-
-그만해!-
-인정해, 최경식. 너도 이 더러운 걸레를 걸레처럼 사용해줬을 뿐이라고. 사랑? 내가
아는 최경식은 좀더 자존심이 있는 남자야.-
머리가 흔들렸다. 경식이 복잡한 표정으로 진성과 진성에게 붙들린 나를 번갈아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멍하니 그를 쳐다보았다. 사랑...A, 경식... 걸레처럼 취급해. 아니 사랑이야.
존중하지 않는 것은 사랑이라 할 수 없어. 존중받기에는 너무 하찮아. 이걸 사랑한다는
것은 돼지를 사랑한다는 것과 똑 같아... 머리 속이 마구 엉켜들어갔다. 어디까지가
생각이고 어디까지가 그들의 대화인지도 알 수 없었다. 진성이 말하고, 경식이
소리지른다. 그들은 나를 사이에 두고 말로 나를 강간하고 있었다. 나는, 나란 존재는
진성의 손에 잡힌 채로 흔들리는 인형과도 마찬가지였다.
-잘 봐. 네가 사랑한다는 것의 실체를. 얘가 자기를 모욕하는 나에게 어떻게 울면서
매달리는 지를.-
진성이 사악하게 웃으며 내 바지를 벗기고 다리를 벌려 자기 허리에 감았다. 천국으로
보내주지, 이 암캐야. 그가 속삭였다. 나는 고개를 돌려 경식을 쳐다보았다. 그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눈에는 고통과 나에 대한 연민, 진성에 대한 분노와 함께, 분명
쓰디쓴 회의가 어려있었다. 그는 나를 사랑한다고 말했지만, 내가 자신의 사랑을 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지, 이제껏 회의해 온 것이 분명했다. 나에 대한 죄책감 때문에
괴로워한다고 생각했던 것은 착각이었다. 사람이란 것은 진정으로 타인을 위해 괴로워할
수 없는 존재였다. 깊숙한 곳을 들여다보면 그곳에는 항상 '자기 자신'만이 쓸쓸한
표정으로 끝나지 않을 의문을 품고 서 있을 뿐인 것이다.
경식이 괴로워한 것은, 한 때 인간 이하로 취급했던 나란 존재를 사랑함으로 인해 자신
역시 나와 동격으로 떨어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 자기가 하고 있는 것이 과연
사랑인지에 대한 의문. 자기가 천격으로 망쳐버린 존재를 사랑하여 그 망쳐진 모습을
참을 수 없게 되었다는 아이러니.
나는 비로소 경식이란 사람을 알 것만 같았다.
7년 전 나를 때리고 강간하던 그는 어렸다. 분명 변태적인 쾌감을 얄팍한 정의감으로
숨기고 즐겼던 그는 어렸다. 그렇다면 지금 이렇게 망가진 나를 사랑한다는 그는
성숙했는가? 지금 그의 눈에 나에 대한 사랑과 연민이 어림과 함께, 내 굴욕을 즐기는
7년 전 그의 모습이 남아있는 것이 아닐까?
진성은 한순간에 내 안에 깊숙히 들어왔다. 경식의 눈 앞에서 나를 범하며 그는
어느때보다 흥분하고 있는 것 같았다. 허리를 흔들어 봐, 암캐. 넌 이런 대접을
좋아하잖아? 진성의 움직임에 흔들리며 나는 경식을 바라보던 고개를 돌렸다.
사람의 눈을 너무 깊이 들여다보는 것은 좋지 않다. 결국 발견하게 되는 것은 그
어두움의 깊이 뿐인 것이다. 너무 깊이는 말고, 그렇다고 진실을 아주 회피하지도 않는
것. 그러나 그것은 언제나 너무 힘들다.
나는 더 이상 나의 몸을 함부로 유린하는 이들에게 맥 없이 나를 맡겨두고 그들이
자신들의 영혼의 어두운 부분을 함부로 드러내도록 놓아두지 않기로 결심했다.
A는 떠났다. 한 번쯤 사랑 고백을 해봤어도 좋을 법했던 그와는 결국 그렇게 끝났다.
내가 7년 전 나 자신에 비참함에 매몰되어 그렇게 쉽게 쓰러지지만 않았어도, 나는 다른
인생을 살았을지도 몰랐다.
아무도 도와주지 않은 것은 사실이지만, 나조차 나를 도우려 하지 않았다. 결국 내
정체성을 가장 경멸하고 있었던 것은 바로 나 자신이었다.
진성이 가차없이 스피드를 높이기 시작했다. 그의 뜨거운 숨이 어깨에 와 닿는다. 나
역시 느끼기 직전이었다. 사람의 섹스는 진흙구덩이 속에서도 본능적으로 움직이는
것이다.
나는 이런 상황에서 내가 느낀다는 것에 대해 더 이상 스스로를 질책하지 않기로 했다.
그러나, 더 이상 유린당하지 않을 것이다. 짓밟히지도 않을 것이다. 지금 내 몸을
강간해서 내게 원하는 반응을 이끌어내려는 진성이든, 나를 사랑한다면서도 정신적으로
나를 간음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경식이든, 더 이상 누구도 나를 범할 수는 없다.
아주 잠깐, 나는 경식을 돌아보았다. 그의 시선과 내 시선이 마주쳤다. 그러나 눈물로
가려져서 그가 어떤 표정을 하고 있는지 볼 수가 없었다. 차라리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며
나는 있는 힘을 다해 혀를 깨물었다.
거의 동시에 경식이 진성에게 주먹을 날리는 것이 보였다. 어떤 일이 먼저였는지는, 알
수 없게 되어 버렸다.
정신이 들었을 때는 병원이었다.
경식이 쾡한 눈으로 서 있었다. 나는 사흘 동안 잠들어 있었고 자신은 사흘 동안 자지
못했다고 했다.
그는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었다. 자기가 내게 자행한 모든 일의 의미를 이제 알 것
같다고 했다. 자신은 나를 사랑한다고 말할 자격도 없지만, 내가 기회를 준다면 평생동안
속죄하는 기분으로 살겠다고 했다.
그는 나의 부모님에게 찾아가 모든 사실을 말했다고 했다. 어머니는 우셨고, 아버지는
식칼을 빼드셨지만, 다행히 유혈 사태는 없었다며 멍든 눈으로 웃었다. 나는 170센티가
채 안되는 아버지에게 일방적으로 얻어맞고 있었을 190센티의 거구의 경식을 생각했다.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그리고, 진성은...그가 말을 이으려고 했으나, 내가 제지했다. 그만해,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아.
그러나 경식은 부드럽게 내 손을 잡았다.
걔도 무척 놀랐나봐. 너 깨어나고 있지 않은 동안에 걔도 밤을 샜어. 나 그 자식 그렇게
창백해진 것은 처음 봤다.
살인죄로 잡혀갈까봐 놀랐나보지. 나는 냉소했다.
...날...용서못하겠지....?
경식이 고개를 떨구었다. 용서할 수 없다고 해도 날 돌보는 것은 허락해 달라고 그는 그
커다란 체구로 무릎꿇은 채 애원했다.
너랑 살았던 거... 그 오피스텔에서...언제나 싫었던 것은 아니었어. 네가 때리지만
않으면.
경식은 내가 '때리지만 않으면'이라고 말 할 때 고통스러운 눈빛을 했다.
혀를 깨물기 직전에 보았던 눈빛이 어쩌면 이런 눈빛이었을지도 모른다.
많은 일을 겪어도, 따뜻한 체온을 열망하는 것은 나의 본능일 것이다. 지금 내 옆에 있는
그를 믿어보고 싶다는 기대가 생기는 것은 내가 아직도 어수룩하기 때문일까.
한참 동안 그와 나는 서로 말 없이 바라보기도 하고, 말을 나누기도 했다. 나중에는 그도
나도 모두 울었던 것 같다.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전환점은 원래 기억이 나지 않는
법이다.
하지만 분명한 건 마지막에 경식이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키며 속삭였던 말이다.
-눈물 닦아. 밑에 어머니가 와 계셔.-
그 때 비로소, 어둑해진 실내가 꽃처럼 환해지고 새로운 세상이 내게 열린 것 같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란 인간도 사랑을 꿈꾸어 보는 것이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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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지트 소설 (구:아지툰 소설) 에서 배포하였습니다.
웹에서 실시간으로 편리하게 감상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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