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화 (5/7)

-으음...- 

그는 별로 대답하고 싶지 않은 듯이 내게서 등을 돌린다. 볼일이 끝났으니, 가봐라 이런 

뜻인가? 

-나, 괜찮았어?- 

일부러 경식의 등에 팔을 휘감으며 교태를 부려보았다. 고등학교 때는 그의 발소리만 

들어도 겁먹은 개새끼처럼 벌벌 떨었었는데.. 나도 나름대로 발전한 셈이다.  

-...- 

-이만, 갈께. 종종 불러줘. 날 창녀로 만든 건 너네들이니, 굶어죽진 않게 해 줘야지.- 

아무리 고상한 척 해봤자 너도 나같은 쓰레기나 끼고 자는 놈이야. 

-새끼가 정말..- 

갑자기 날라온 주먹에 얼른 얼굴을 가렸지만, 이미 코피가 흐르고 있었다. 본능적으로 

팔로 몸과 얼굴을 가리고 달팽이처럼 몸을 말고 웅크렸다. 

-때리지마, 잘못했어. 때리지마, 잘못했어. 때리지마..- 

고장난 오르골 인형처럼 되뇌인다. 그래, 7년 전이다. 7년 전 이렇게 맞곤 했다. 

그러나 한참이 지나도 두번째 주먹이 날아오지 않아 슬몃 고개를 들어보니 경식이 

참으로 이상한 표정을 지은 채 날 내려다보고 있었다. 

-닦아.- 

그가 실크 손수건을 떨어뜨려주었다. 피를 닦기엔 너무 비싸보이는 손수건. 

대강 몸을 추스리고 그의 눈치를 살피며 옷을 걸치자 경식이 바지를 입고 자켓을 걸친다. 

-먼저 나가. 좀 있다 나갈께.- 

남창 따위와 같이 방을 체크 아웃하는 손님은 없을 테니.. 

-데려다줄께.- 

-안 그래도 돼. 그냥 버스타고 가면..- 

-나와.- 

그가 먼저 성큼 성큼 걸어나가며 아주 작게 중얼거린다. 때려서 미안해. 환청일까? 

원룸까지 오는 동안 그는 한 마디도 안한다. 하긴 섹스 외에 경식과 나 사이에 공통 

화제가 있을리 없다. 고등학교의 추억이래봤자, 언제 어느 장소에서 어떻게 맞고 어떻게 

당했나 정도? 생각하면 우습다. 

-너 말야... 다른 아르바이트라도 해 볼 생각 없어?- 

-뭐?- 

-서른이 넘도록 몸 팔면서 살거야? 넌 그 정도 매력도 없어. 나니까 옛정을 생각해서 

10만원에 널 사지, 요즘 십대 애들도 널렸는데, 누가 널..- 

-너, 그런 애들이랑 많이 자 본 사람처럼 얘기하는구나.- 

경식이 인상을 찡그렸다. 

-왜, 또 때릴거야? 고등학교 때처럼 네 말에는 한마디도 토달면 안되는 거야? 너 정말 

웃겨. 할 짓 다 해놓고 갑자기 왜 걱정해주는 척이야?- 

-말로 해서 안된다면 때릴 수 밖에.- 

-뭐라고?- 

-일 나가지 마. 가끔 들려서 확인해보겠어. 몸 파는 거 들통나면 아주 죽을 줄 알아.- 

-네가 뭔데? 네가 왜 또 내 인생에 간섭인데? 네가 그럴 자격이 있어? 날 이 꼴로 

만든건.. 너야!- 

-그래, 내 책임이 있으니까 간섭하는 거야. 고등학교 때 내가 했던 일... 방금 전 까지만 

해도, 내가 무슨 짓을 했는 지 몰랐는데, 아까 네가 방구석에 엎드려서 부들부들 떠는 거 

보고 내가 한 짓을 알았어. 나 지금 기분 정말 드러워. 새꺄, 미안하단 말야. 그러니 

앞으론 사는 것처럼 살아 보라구.- 

경식이 갑자기 나를 강하게 끌어안는다. 눈물이 조금 비집고 나오는 것은 A와 헤어진 

탓에 감상적이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자식... 이 자식이 나한테 어떻게 했는데. 

내가 어떻게 당했었는데. 

-놔! 미친놈, 놓으란 말야. 너 정말 쉽구나, 아주 쉬워. 사람 죽여놓고서도 미안하단 말 

한마디면 다지? 그래, 그걸로 네 잘난 품위가 지켜진다면 가만히 있어줄께. 과거에 잘난 

최경식께서 밟았던 걸레로서 최경식의 잘나신 사과말 정도 못 들어주겠어?- 

-...- 

-잘났어, 최경식. 정말 끝까지 잘났어. 너 같은 새끼보단 그래도 서진성이 나.- 

-아직도 진성일 못 잊은거야? 그만 포기해. 진성이 자식은 너 같은 애한테 절대 관심 

없어. 내가 알아.- 

-그 서진성이 나 같은 놈 끼고 자는 거 좋아한다면, 아니 나 같은 놈 밟아 놓는 거 아주 

즐긴다면 어쩔래? 응?- 

-네가 무슨 말 하던 들어주겠지만, 진성이 모욕하는 것은 못 참는다.- 

-왜? 혹시 너도 서진성 보면서 자위하냐? 걔랑 하고 싶냐?- 

-새끼가!- 

번쩍 올라간 경식의 주먹이 정확히 내 코 바로 앞에서 멈추었다. 당장 어디 하나라도 

부러질 줄 알았는데, 미안하다더니 그러긴 한 모양이었다.  

부들부들 떨리는 주먹이 그 딴에는 얼마나 초인적인 인내를 발휘하고 있는가 알 수 

있었다. 하긴 이런 모욕을 참을 놈이 아니다. 적어도 내가 아는 최경식은.. 

-쿡. 경식이랑 해후하니 어땠어? 예전처럼 널 죽여주디? 너 걔랑 할 때마다 암캐처럼 

헉헉거렸었잖아.- 

대낮부터 서진성이 찾아와 제 욕심을 채우곤 하는 말이었다.  

그의 섹스는 여전히 난폭하고 거칠지만 이젠 그런대로 익숙해졌다. 

-생활비 떨어졌어. 나 돈 좀 줘.- 

-돈? 생활비는 스스로 벌라고 했을텐데.- 

-아무도 안 찾아오던데. 경식도 그 때 한 번 뿐이야. 딴 놈들은 얼굴도 볼 수 없고.. 

길거리에 서기는 싫어. 난 이미 그럴 나이도 아니고.- 

-결국 넌 내가 돌봐주지 않으면 굶을 팔자다? 훗...- 

진성이 막 일어나려하는 나를 다시 끌어당긴다. 그의 말 마따나 진성마저 날 버린다면, 

정말 이젠 갈 곳도 없다. 게이바에서 아르바이트하며 하루하루 연명하는 생활로 

돌아가고 싶지도 않다. 그냥, 진성의 노리개 취급을 받으면서라도 한 동안 편하게 쉬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나중 일은 나중에 생각해야지..  

난 지쳤다.  

구질구질하게나마 살려고 발버둥치느라 너무 지쳐버렸다. 

여전히 거친 놈. 하지만, 어쨌거나 지금 이런 나를 먹여살려주는 놈이다.  

애초에 나란 놈에게 자존심이란 꿈일 뿐. 날 이꼴로 만든 진성에게라도 엉겨 붙어서 

최소한 겨울이라도 난 후 내 비루한 목숨을 어떻게 영위해 나갈 것인지 생각해 봐야겠다. 

진성은 그야말로 밥이나 겨우 끓여 먹을만한 돈만 집어 주고 나갔다. 

다시 생각해봐도 정말 나쁜 놈이다. 제 할 건 다 하면서도 숫제 거지 취급이라니. 

지폐를 집어 넣고 일어서는데 초인종이 울린다. 

경식이다. 빌어먹을. 

문득 내 꼴을 본다. 흐트러진 침대에 티슈. 바닥에 떨어진 진성의 정액. 바지 자크도 

제대로 못 올리고 서 있는 나. 경식의 눈에 경멸이 스쳐가는 것을 보며 가만히 서 있었다. 

-왜 왔어?- 

-말했지, 가끔 들러보겠다고.- 

-...- 

-옷이나 걸쳐.- 

-그런 눈으로 보지마.- 

-뭐?- 

-그렇게 더럽다는 눈으로 보지 말란 말야, 새꺄. 넌 깨끗한 줄 알아? 이런 날 끼고 

뒹굴었던 거 기억안나?- 

-더럽다고는 생각 안한다. 한심하다고 생각할 뿐이지. 나, 벤처 하나 차렸다. 너 낼부터 

거기로 출근해.- 

-뭐에 쓸려고? 사무실에 비상용 정액받이 하나 갖춰 놓을 셈이야? 아님 사원용 위완부?- 

나는 일부러 천박하게 웃어주었다. 경식이 알아들을 수 없는 욕을 하면서 발로 허리께를 

한번 걷어 찼다. 익숙한 폭력에 방구석으로 기어가서 몸을 움츠렸다. 

-기어 나와.- 

-싫어..- 

-나와. 안 때릴 테니까. 너 그렇게 웅크리고 있는 거 보기 싫어.- 

-나, 네 회사 안 나가. 나 내버려 둬. 이렇게 살다가 쥐죽은 듯이 사라지게 내버려둬 

달라구.- 

-웃기지마.- 

-나 할 줄 아는 거도 없어. 컴맹이구, 정말 아무것도 몰라.- 

-배우면 돼.- 

경식의 협박으로 나는 25년 만에 처음으로 '사무실'이라는 곳에서 일하게 

되었다.  경식은 대학 동기 3명과 회사를 차렸다고 했다. 뭐하는 곳인지는 몰라도 

상당히 바쁜 것을 보니 돈은 벌리는 듯 했다. 내가 하는 일은 사무실 청소, 간식, 야식 

준비. 서류 복사, 짐 나르기, 심부름. 한마디로 머슴 겸 여자 사무 보조원 대용인 듯 

싶었다. 그래도 월급 액수는 세자리수를 준다니, 최경식 정말 돈 잘버는 모양이다. 

경식은 문서 작성하는 거부터 배우라고 성화였지만, 나는 잡일 하는 것이 마음이 편했다. 

경식이 자선을 베푸는 데 언제 싫증날 지 모르는데, 섣불리 기대 따위는 하고 싶지 

않았다. 경식의 친구들이자 회사 직원들은 처음엔 나를 '윤정현씨' 라고 꼬박꼬박 경칭을 

붙여서 불렀지만, 며칠 지나 나란 존재의 하는 일이 분명해지자, 날 경식에게 빌붙어서 

용돈이나 타쓰는 놈 쯤으로 알기 시작했다. 

여기, 커피 두잔. 이봐, 배고픈데 라면이나 끓여 봐. 

경식이 없을 때면 그들은 나를 숫제 지네들 식모쯤으로 아는 것 같다. 하지만, 이런 

관계가 차라리 편하다. 요즘 경식을 보면 숨이 막힐 것 같다.  

내게 도대체 무엇을 원하는 것인지, 그의 자선에 장단 맞춰주는 것도 슬슬 힘이 딸리기 

시작한다. 

-라면 끓여 왔어요.- 

안경을 낀 키 큰 사람이 야식을 부탁했다. 오늘은 이 사람 혼자서 야근을 하는 것 같다. 

경식은 먼저 퇴근하라고 했지만, 집에 가봤자 할 일도 없다. 요즘들어 회사 컴퓨터로 

이것저것 검색해보는 데 취미를 들인 참이다. 민철이란 사람은 피곤하지도 않은지 벌써 

몇시간 째 자판을 두드리고 있다. 둘만 있는 사무실이지만, 혼자 있는 것과 마찬가지. 

이따금 심심해서 말이라도 붙이려고 하면 돌아오는 것은 단답형의 짧은 대답뿐. 경식의 

친구들은 모두 돈독이 올랐는지, 그저 꾸역꾸역 일만하는 워커홀릭들이다. 

-음. 거기도 앉아서 먹어. 먼저 퇴근해도 괜찮은데, 지금은 할일도 없고.- 

-아니에요.- 

-참, 근데.. 어제 그 남자는 누구야?- 

-네?- 

-어제, 밑에서 만나던 사람.- 

진성은 내가 경식의 사무실에 나간다고 하자 매우 재미있어 했다. 그는 순진한 최경식이 

나에 대한 죄책감으로 요즘 괴로워하고 있다고 넌지시 귀뜀을 해주었다. 원래 몰래 하는 

것을 좋아하는 그는 회사 업무 시간에 나를 불러내 섹스를 하는 게 아주 자극적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밑에 깔려 신음을 하면서 잠깐이나마, 내가 은행에 심부름 다니러 간 줄 

알고 있을 최경식이 떠올랐던 것도 사실이다. 

최경식이 서진성의 실체를 알면 어떻게 반응할지 궁금하다.  

하지만, 아마 그는 믿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서진성이 마음 먹고 기만하려하면 기만하지 

못할 사람이 누가 있을까.  

-그냥, 아는 사람이에요.- 

-분위기가 심상치 않던데.- 

-네?- 

-글쎄, 그냥 아는 사람 같지 않던데. 경식이한테 조금 얘기 들었어. 독특한 취향을 

가졌다고..- 

-...- 

   

나쁜 새끼. 

-경식이랑도 잤어?- 

-무슨 상관이죠?- 

남자가 안경을 벗더니 기지개를 켰다. 

-남창이라며? 얼마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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