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화 (2/7)

몸이 심하게 굳어지자 그가 짜증을 낸다. 두둑, 전에 없이 수축된 애널이 그의 거친 

동작에 살짝 찢어지고 있다. 찢기는 고통... 이건, 너무나, 너무나 익숙하다. 빌어먹게도 

몸은 여전히 기억하고 있다.   

-...하아..- 

쿡쿡쿡 암캐처럼 흔들어 봐. 캬... 얘 뒤에서 흐르는 거 봐. 굉장한 데. 더러운 호모 

주제에 감히 반항해?  야 사양할 거 없어, 이 새끼는 이런 거 못 해서 환장한 새끼니까. 

너, 체육 시간에 우리 옷 벗는 거 보고 자위했지, 그렇지..? 

아냐, 그런 적 없어.. 나는..!!! 

나는..나는...그냥... 

-으흑....- 

몸부림을 친다. 악몽이 나를 포획하는 건가..? 

-으음... 뭐야... 갑자기?- 

네 얼굴 보기만 해도 아주 역겨워 죽겠어. 뭐, 날 좋아한다고? 더러운 새끼. 결국 나랑 

이런 짓 하고 싶었다는 거 아냐? 좋아, 오늘 아주 실컷 사내맛을 보여주지.  

-안... 돼....- 

지금 생각나면 안 돼. 벌써 8년이나 지난 일이야. 왜 아직까지 날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 

거야.  

-야, 너 갑자기 왜 이래. 야..!- 

A가 놀란 눈으로 나를 흔들고 있다. 한 순간 과거에서 현실로 돌아왔다.  

-나 참... 별... 그렇게 싫어? 울 정도로? 그럼 말을 하지.- 

A가 기분 잡쳤다는 얼굴로 몸을 일으키더니 담배를 피워 문다. 어둑해진 거실에서 

라이터 불빛이 번뜩이고, A의 날카로운 콧날이 음영처럼 드러난다. 그는 정말로 

아름다운 골격의 소유자..   

그래 난 그의 집에 있다. '그 때' 가 아냐.   

-으흑....으으...- 

-너 뭔가 문제 있는 거 아냐? 아님 내가 울 정도로 널 함부로 다룬 거야? 말을 해. 말을..- 

-으흑....아니... 그냥...- 

-정말 답답해 미치겠군. 너, 나랑 자는 거 싫어? 그러면 앞으로 털끝 하나 안 건드려 

줄께. 이건 마치 내가 강간범이라도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잖아.- 

A는 벌떡 일어나서 가버리려고 한다. 얼른 그의 다리를 붙잡고 늘어졌다. 

-뭐야, 이건?- 

그가 황당하다는 듯이 나를 내려다본다.  

-흐흑....- 

-놔. 이게 사람 정말 짜증나게 만드네.- 

-....나쁜 기억이.... 났어요... 무서워...제발 옆에 있어... 흑.... 싫어서 그런 게 

아니....가지 마세요...- 

간신히 말을 짜내 그에게 호소한다. 애원한다. 울부짖는 추한 얼굴을 남김 없이 드러낸 

채... 

지금 그가 나를 떨치고 가버리면 죽을 것 같았다. 세상에 나 혼자 내팽겨쳐지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더 강하게 그의 다리를 부둥켜 안았다. 8년 전의 악몽에 온 몸이 떨렸다. 

팔에 느껴지는 A의 체온이 사라지면, 살 수 없을 것 같다. 

-...알았어. 자... 일단 이거 놔라. 오늘 밤 옆에 있어줄 테니까, 이거 놓으래도. 야...- 

그러나 나는 A가 보기드문 참을성을 발휘해서 10여분에 걸쳐 설득하고 마침내 억지로 

떼어 내어 침실로 이끌 때까지 그의 다리를 놓지 않고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A는 약속대로 내가 잠들 때까지 옆에 있어주었다. 나는 그의 옷깃에 꽉 들러붙어 

강아지처럼 부들부들 떨었다. 그는 뭐라고 욕설을 낮게 내뱉는 듯 하더니, 

투덜거리면서도 내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그의 침대는 넓고 아늑했다. 담배 냄새가 은은하게 나는 것은 아마 A의 몸에서 밴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섹스를 하지 않고 그의 곁에서 잔, 더구나 그의 침대에서 잔 첫날밤이었다. 

-깼냐...?- 

A의 목소리. 햇살이 눈이 부시다. 눈을 뜨니 내 방과는 다른 천장이 보인다. 그래, 어젯밤 

나는 그의 침실에서 잤다. A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왠지 그의 눈을 바로 볼 수 없어 

나는 시선을 피했다.  

-...어젯밤엔...- 

-내 잠옷 구겨진 거 보이지? 네가 밤새 움켜잡고 잤다.- 

A가 짐짓 얼굴을 찌푸려 보인다. 

어젯밤...이성을 잃고 그에게 필사적으로 매달렸던 기억이 나자, 얼굴이 타오르는 것 

같다. 

-...땀을 많이 흘리더군. 너...- 

-....죄송해요...나...- 

-....- 

-....- 

-...강간당했던 모양이지...?- 

-....고등학교 때...이젠, 잊었어요. 그런 일.- 

-그래서 중퇴한거구나.- 

-....으응...- 

나쁜 새끼들. 그가 욕을 한다. 잘못들은 게 아닌가 싶어 멍하니 그의 얼굴만 바라봤다. 

날 위해 화내주는 건가? 

갑자기 희망이 생긴다. 

-저.... 그냥 있어도 돼요? 여기... 나가야 된다면...당장 갈 곳도 없고.- 

-....- 

그가 대답이 없다. 강간 콤플렉스에 시달리는 나 같은 애를 집에 놔두고 싶지 않는 

것이다. 우울하고 어두운 그림자를 대하기 부담스러운 것이다. 내 과거를 아는 사람들은 

언제나 그런 반응을 보였다. 사귀었던 남자들도 하나같이 그랬다. 그리고 A는 착한 

사람은 아니다. 상관 없다. 난 그의 도덕성에 반한 것이 아니니까..  

혼자 살 수 있다. 이제껏 혼자서 살아오지 않았던가? 아르바이트 자리 정도는 

알아봐달라고 부탁해도 괜찮겠지. 이따금 만나달라고 전화 정도는 해도 괜찮겠지. 나는 

억지로 웃는다. 

-...이번 주 내로 나갈께요.- 

-...됐어.- 

-네...?- 

-신경 안 쓰니까 그냥 있어. 너 갈 데 없는 거 알고 있고, 지금 나가면 몸파는 일밖에 

없다는 거 알아. 너 같이 몸집에 걸맞지 않게 예민한 애한테 그런 일 하게 내버려둘 수는 

없지. 걱정 말고 그냥 있어.- 

게다가, 그가 실쭉 웃으면서 덧붙였다. 너처럼 살찐 애는 가정부가 제격이지, 나가서 그 

몸으로 길거리에서 애교 떨며 서 있는 걸 어떻게 보냐. 

언제는 쿠션 있어서 좋다면서요. 웃으면서 그의 가슴에 안겼다.  

잠시만, 잠시만이라도 이대로 있었으면... A는 왠일인지 안겨드는 나를 뿌리치지 않고 

끌어당겨준다.  

동정이던 무엇이던 간에 그의 체온이 없으면 지금 나는 미칠 것 같다. 

요즘들어, A가 외박하는 회수가 뜸해지고 있다. 사귀던 파트너에게 싫증이 난 모양이다. 

A는 사귈 때는 다정하지만, 금방 쿨하게 식는다. 그는 그런 타입이다. 하지만 전보다 

훨씬 자주 A와 저녁을 먹고 A의 침대에서 정사를 하고 잠이 드는 요즈음, 나는 세상에서 

제일 행복하다. 요즈음 A는 내가 그의 품에 안겨 잠드는 것을 허용해주고 있다. 

예전같으면 어림 없었을 일인데... 끈적끈적한 것은 질색인 A가... 

-저...요즘엔 바에 잘 안가세요?- 

잠자리에 들었을 때 조심스럽게 물어보았다. A는 아무 말 없이 내 머리칼을 

쓰다듬어준다. 정사를 끝낸 후의 그는 섬세한 애무를 곧잘 해준다. 그는 정말 바텀들이 

가장 열망하는 그런 남자다. 그가 혹시라도 떨쳐낼까봐 두려워하면서도 부득부득 품 

속으로 파고 든다.  

-...저 너무 기대하게 만들지 말아요. 회사 가 계신 동안에도 당장이라도 집 구해서 

나가랄까봐 저 얼마나 불안한지 몰라요.- 

솔직하게 한 번 말해 보았다. 눈을 꼭 감고. 

-넌 내가 그렇게 몰인정한 놈으로 보이냐? 이렇게 끼고 자던 놈을 하루 아침에 길거리로 

쫓아낼 그런 인간으로 보이냐고. 걱정 말고 찬밥 남은 거나 꾸역꾸역 먹지마. 불안하다는 

애가 어떻게 하루 종일 먹기만 하는지...- 

-....그렇게 쫓아내도 절대 원망 안 해. 지금까지 있게 해 준 것만도 감사한걸요.- 

-너무 걱정하지마. 설사 사정이 변해서 네가 나가게 된다 하더라도 길바닥에 서게는 

안할 테니까...- 

나 그렇게 의지 약한 놈 아니에요. 몸 팔아서 산 적 없다구. 꼭 그것 때문에, 따뜻한 

잠자리가 필요해서  여기 있고 싶은 게 아니라는 거 모르나요.... 그러나 또 입 밖으로 

말이 나오지 않았다. 내가 사랑한다고 말한다면 A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지금 그의 

다정한 표정이 바뀌게 될까 두려워 나는 그의 말에 깔린 희미한 경멸을 

묵인한다.  기대해선 안 돼. 너만 상처받게 돼.  

-안아 줘요. 더...- 

-보채긴...- 

그가 비쭉 웃으면서 살집이 많은 내 배를 장난스럽게 움켜잡았다. 아퍼요...쿡쿡... 넌 

지방이 많아서 피부가 꼭 여자 같애. 면도 안 했죠, 따가워요. 어제 야근했잖아. 너 진짜 

마누라같이 구는구나. 

그의 수염이 정말 따가워서 살짝 찡그리며 키스를 피하니, A가 다짜고짜 내 손목을 잡고 

침대 위에 개구리처럼 펼쳐 놓는다. 위로 쳐다보는 A의 몸이 아찔할만큼 섹시하다. 그가 

말 없이 아래에 깔린 날 쳐다볼 때, 행위를 하기 직전을 나는 가장 사랑한다. 이지적인 

그의 표정에 잠시 욕망이 어리는 그 순간, 그의 미끈한 몸이 살짝 긴장하며 내려 앉는 그 

순간을... 

몸 안에서 그가 움직이기 시작하는 것을 느끼며 나는 눈을 감았다.   

  

  

돈을 헤프게 쓴다는 A의 말을 들은 터라 대형 할인 마켓에 가보기로 했다. 1주일 분의 

식료품을 미리 사 놓으면 생활비를 절약할 수 있겠지.  

대형 마켓은 어지럽다. 천장까지 쌓여 있는 엄청난 물량. 나도 모르게 또 필요 없는 것에 

혹해서 이것 저것 집게 된다. 잔뜩 쌓여 있는 와인 코너를 지나다 보면 싼 맛에 레드 

와인을 한 병 집게 되고, 와인을 집었으니, 왠지 수입 치즈 한 덩어리쯤 사 보고 싶다. 

새로운 통조림이나 레토르트 식품은 한 번쯤 사 먹어줘야 하는 게 아닐까? 저 

'아보카도'란 과일은 무엇일까.. 희한하게 생겼네. 맛도 있을까? 녹색을 띈 그 과일에 

손을 뻗다 아는 얼굴과 마주쳤다.  

한 눈에 들어 오게 잘 생긴 훤칠한 남자가 아보카도를 든 채 나를 보고 있었다. 차갑게 

다듬어진 골격이 눈에 확 들어오는 서구적인 미남이라 지나가는 쇼핑객들이 한 번씩 

흘끔거린다.  

서진성... 7년 만에 다시 보는 그는 여전히... 희랍의 신같이 당당하고 아름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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