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3화
<에필로그.>
1.
노운은 말했다.
“전쟁이 시작됩니다. 모든 병력들을 국경에 집중시키십시오.”
노운의 말에 모든 귀족들이 고개를 숙였다.
그런 그들을 바라보던 노운은 이내 등을 돌린 후에 높은 자리에 앉은 젊을 사내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폐하, 이제 폐하께서 명하시면 됩니다.”
그 말에 젊은 사내는 굳은 표정으로, 마치 꼭두각시 인형의 그것 같은 표정으로 말했다.
“모든 건 노운 경의 뜻대로.”
말을 뱉는 젊은 사내의 목소리에서는 그 어떤 힘도, 기운도 느껴지지 않았다.
페스로 제국, 이 대국의 새로운 황제의 이름에 어울리지 않는 목소리였다.
노운은 고개를 숙인 채 미소를 지었다.
‘드디어 시작이다.’
그 순간.
“속보이옵니다! 무례를 용서해주시옵소서.”
갑자기 누군가 이 대전에, 엄중하기 그지없는 분위기가 가득 흐르는 이 장소에 찬물을 끼얹었다.
노운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러나 이내 제 표정을 되찾은 노운이 말했다.
“무슨 일입니까?”
“이제르트 후작가가 협상을 제안했습니다. 만약 협상 테이블이 앉지 않는다면 전쟁을 각오하랍니다.”
그 말에 노운은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다.
‘빌어먹을!’
그 순간 노운의 눈앞에 과거의 나날들이 스쳐지나갔다.
‘젠장, 그냥 그때 끝장을 냈었어야 했어!’
2.
문수르가 사라졌다.
동시에 카라카크도 사라졌다.
왕성의 정원에 남은 건 오직 한 명, 노운 뿐이었다. 노운은 슬그머니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이윽고 모두가 사라졌다는 걸 파악했을 때.
“하하!”
노운은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 연기력이 잘 먹힌 모양이야.”
툭툭!
말과 함께 자신의 옷에 묻은 흙먼지들을 털어내는 노운의 얼굴에는 미소가 걸려 있었다.
“문수르 말이 딱 맞았군. 카라카크가 그 무엇도 아닌 문수르의 육체를 노리고 있었다니?”
말을 뱉던 노운은 고개를 들었다.
그 순간 몇 시간 전의 이야기가 노운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3.
문수르는 말햇다.
카라카크, 그의 목적은 자신의 몸을 노리는 거라고.
거기서 문수르는 재차 말했다.
“카라카크가 내 몸을 반쯤 차지하는 순간 내가 노크 클락으로 차원이동을 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 것 같습니까?”
노크 클락!
차원이동을 가능케해주는 신비의 시계!
거기까지 설명을 들었을 때 노운은 문수르의 시나리오를 그대로 따라가기로 했다.
핵폭탄을 터뜨리는 것보다 훨씬 더 저렴하면서도 핵폭탄을 쓰는 것보다 더 확실한 방법이었으니까.
더군다나 노운을 만족시킨 건 결국 문수르는 어떤 식으로든 희생된다는 점이었다.
모든 일이 끝나면 카라카크와 문수르만 사라지는 것이다.
노운 입장에서는 정말 앓던 충치 두 개를 동시에 뽑는 것과 똑같은 일이다. 그런 일을 마다할 이유 따위는 없었다.
받아들였다.
그리고 적당한 자리가 마련되는 순간 카라카크의 의심을 풀기 위해 몇 가지 연기를 했다.
사소한 부분이었지만, 흔히들 말하지 않은가? 작은 차이가 디테일의 차이를 만든다고!
노운의 행동은 카라카크의 의심을 줄였다.
종국에 카라카크는 정말로 문수르를 육체를 노렸고, 문수르는 자신의 몸속에 카라카크가 들어오는 순간 노크 클락을 사용했다.
두 번의 노크.
그것으로 문수르는 사라졌다.
“하하하!”
노운은 웃었다.
“이제 끝이군. 정말 끝이야!”
모든 게 끝났다.
남은 건 노운, 그가 이 세계에서 역사에 길이 남을 전설을 써내려가는 일뿐이었다.
“아, 그 전에.”
그 순간 노운이 슬그머니 핵폭탄을 집었다.
“이건 챙겨야지.”
그러나 노운은 핵폭탄을 드는 순간 이루 말할 수 없는 가벼움에 고개를 갸웃했다.
“어? 이거 왜 이렇게 가벼워?”
불현듯 머릿속을 스쳐 가는 생각.
“설마?”
노운의 표정이 굳어졌다.
“문수르, 이 자식! 해체했구나!”
그제야 핵폭탄이 해체됐고 주요 부품들이 사라진 걸 파악한 노운이 눈살을 찌푸렸다.
‘젠장.’
최후의 카드.
비장의 한 수라고 할 수 있었던 핵폭탄이다. 그러나 이제 더 이상 그 핵폭탄은 쓸 수 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
‘아니, 그냥 값을 치른 셈하지.’
그러나 노운은 큰 미련을 두지 않기로 했다. 어쨌거나 카라카크와 문수르는 사라졌으니까.
이제 그들은 더 이상 세상에 없다.
핵폭탄 하나를 대가로 그 정도 성과를 얻었다면 충분히 수지 맞는 장사였다.
“좋아.”
노운은 다시 미소를 지었다.
그로부터 3년 후.
노운은 카라카크와 문수르와 헤어졌던 그 장소에 다시 한 번 돌아와야만 했다.
3.
카라카크와 문수르가 사라진 이후 페스로 제국과 콩탄 왕국에는 큰 소란이 있었다.
페스로 제국의 황제가 죽었다.
표면적으로는 병사였지만, 내부적으로는 노운과 다섯 귀족들, 훗날 역사에 결사대로 기록되는 그들이 흑마법사의 수작에 넘어간 황제를 처치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당연히 카이탄 황제가 죽은 후에 제국은 대대적으로 개편되기 시작했다.
모든 권력이 재편됐다.
그 중심에는 노운이 있었다.
모든 것은 노운의 뜻대로 움직였다. 심지어 이황자가 황위에 오르는 것 역시 노운의 뜻대로였다.
노운은 이러다할 작위도, 영지도 받지 못했지만 반대로 페스로 제국에서 가장 높은 명성과 가장 강력한 권력을 손에 쥐게 되었다.
콩탄 왕국도 소라스러웠다.
필로스 왕과 문수르가 동시에 사라졌다. 갑자기 왕과 그 왕위를 노리던 자가 사라진 것이다.
그 무렵 제이머스 공작이 무언가 수작을 부리려고 했다.
하지만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불스 후작이 이제르트 후작가의 편에 서면서 이야기는 쉽게 종료됐다. 제이머스 공작은 바보가 아니었다. 불스 후작가와 이제르트 후작가가 손을 잡은 이상, 제이머스 공작이 그들과 맞서 싸운다는 건 미련한 짓이었으니까.
협상 테이블이 마련됐다.
콩탄 왕국의 일왕자가 왕위에 올랐으며, 콩탄 왕국의 권력은 제이머스 공작, 이제르트 후작, 불스 후작을 중심으로 재편됐다. 물론 가장 큰 득을 본 건 이제르트 후작가와 불스 후작가였고, 제이머스 공작가는 이빨과 손톱이 빠진 사자 취급을 받았다.
그리고 얼마 후.
이제르트 후작가에 그가 등장했다.
4.
“볼 때마다 늙는 것 같군. 제국에서의 생활에 썩 몸에 맞지 않는 모양이야?”
노운은 자신의 면전에서 비아냥거림을 날리는 사내를 보며 이를 꽉 물었다.
“빌어먹을.”
눈앞에 있는 사내.
“그때 네놈도 같이 죽어버렸으면 좋았을 텐데.”
“이런 자리에서는 말은 좀 가려서 하는 게 어때?”
“흥! 문수르 네놈은 그 날 이후로 정말 말 같지도 않은 말만 지껄이는 놈이 됐군.”
문수르다.
카라카크와 함께 차원이동을 했던 그가 다시금 노운 앞에 등장한 것이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아무래도 죽을 고비 한 번을 넘기게 되니까 여러모로 사람이 바뀌게 되더군.”
“그냥 죽지.”
“나도 그냥 죽을 줄 알았지. 설마 지구로 돌아가는 순간 카라카크가 알아서 소멸될 줄은 몰랐으니까.”
간단한 이야기였다.
문수르와 카라카크는 동시에 어스 월드, 지구로 차원이동을 했다.
그리고 지구로 이동하는 순간 카라카크는 사라졌다.
카라카크, 그가 인간의 범주를 넘어서 막강한 힘과 생명력을 가질 수 있었던 건 악마와의 거래 때문이었다.
그러나 지구로 이동하는 순간 그 모든 거래가 끊긴 것이다.
카라카크의 악마로부터 받던 모든 힘이 사라졌다.
더군다나 어스 월드는 케르빈 월드에 비해서 마나가 극도로 적은 차원이었다.
그런 세계에서 카라카크는 그 어떤 것도 할 수 없었다.
결국 카라카크를 찾아온 건 다름 아니라 그동안 그가 거역하고 있던 시간이었다.
멈추었던 카라카크의 시간이 제대로 작동하기 시작했다.
이미 수백 년 넘게 살았던 그의 시계가 제 위치를 찾는 순간 카라카크는 소멸될 수밖에 없었다.
그 이후.
문수르는 자연스럽게 몇 가지 과정을 거치고, 한석균의 유산을 받은 후에 이곳 케르빈 월드로 다시 돌아온 것이다.
“이건 엄연히 계약 위반이야. 그때 일이 끝나고 나면 다시는 여기 오지 않는다고 했잖아!”
노운은 재차 말했다.
그런 이야기가 있긴 했다. 모든 일이 끝난 후에 문수르는 케르빈 월드를 영원히 떠나기로 노운과 약속했다.
“계약 위반이라니. 그렇게 말하고 싶으면 내 사인이 들어간 계약서를 제시하던가.”
그러나 말 그대로 구두 뿐인 약속이었다.
문수르의 말에 노운은 표정을 구겼다.
‘이 빌어먹을 새끼.’
다시 케르빈 월드로 돌아온 문수르는 단숨에 콩탄 왕국을 강국으로 만들기 시작했다.
거칠 건 없었다.
이미 콩탄 왕국 최강의 세력이 되어버린 이제르트 후작가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는 문수르였으니까. 그가 원하면 원하는 대로 됐다.
그러는 사이 콩탄 왕국은 정치적 안정을 되찾음과 동시에 엄청난 속도로 힘을 키우기 시작했다. 더블어 칼란 왕국처럼 엘프와 드워프를 보통의 국민으로 받아들인 콩탄 왕국은 기술적으로나 문화적으로도 급격한 성장을 이루었다. 정치적 안정, 그리고 이제 대륙 최고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마법과 기술력을 이룩한 콩탄 왕국의 성장은 무시무시한 것이었다.
종국에는 페스로 제국 입장에서는 절대 쉽사리 승부를 장담할 수 없는 세력이 되어버린 것이다.
더 나아가 지금 문수르는 이 콩탄 왕국을 이용해서 수시로 페스로 제국을 견제하고 있었다.
지금 이 자리도 그 때문에 생긴 자리였다.
“긴말하지 말고 3개월만 줘.”
“미안하지만 제국이 치려는 상대가 일단은 우리하고 동맹국이거든.”
“3개월만 달라니까.”
“그럼 우리 쪽에는 뭘 줄 건데?”
“젠장, 이렇게 나오면 콩탄 왕국과 전면전을 치르는 수가 있어?”
“자신 있으면 와봐. 콩탄 왕국이 제국보다야 힘이 약하긴 하지만 아마 우리랑 싸우려면 기본 10년은 잡아야 할 걸? 그동안 제국의 다른 근접국들이 가만히 있을지는 의문이지만.”
노운은 이를 갈았다.
그의 계획대로라면 페스로 제국은 진즉에 대륙통일을 위한 정복전쟁을 햇었어야 한다.
그러나 문수르의 계속되는 방해에 전쟁은 계속 나중으로 미뤄지고 있었다.
더 큰 문제는 이제 노운이 문수르를 막을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점이었다.
왜냐하면 노운은 더 이상 노크맨 역할을 할 수 없었으니까.
노운보다 먼저 어스 월드로 넘어간 문수르가 한석균의 모든 것을 자기 것으로 만들었다.
노운을 위해 만든 노크 센터도 이제는 문수르의 것이다.
막말로 지금 노운이 어스 월드로 돌아가는 순간 노운은 다시 이곳, 케르빈 월드로 돌아올 수가 없었다.
노크 클락을 충전시킬 수가 없으니까!
한석균의 마지막 노림수였다.
한석균은 죽기 직전 노운이 아닌 문수르를 믿고 모든 걸 문수르에게 준 것이다.
어쨌거나 여전히 노크맨으로서 원하는 모든 걸 할 수 있는 문수르는 노운에게 가장 큰 적이었고, 결국 이런 논쟁 속에서 고개를 숙이는 건 노운이 될 수밖에 없었다.
“두고 봐.”
노운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내가 기필코 네 녀석을 짓누르고 이 세상의 왕이 될 테니까.”
“잘 해봐.”
떠나는 노운.
그런 노운을 바라보는 문수르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