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9화
4.
노운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 왕도로 들어와라. 혼자.
해가 떴을 무렵이었다.
문수르는 그 연락을 받는 순간 오히려 반문했다.
“제가 왜 가야합니까?”
문수르의 얼굴색은 좋지 못했다. 밤중에 이루어진 작전 이후 한숨도 못잔 채 맞이한 태양.
그러나 그것 때문에 피곤한 건 아니었다. 문수르를 괴롭힌 건 다름 아니라 그의 머릿속을 가득 채운 고민이었다.
특히 이리아의 등장…… 이미 죽었으리라 치부해던 그녀의 등장은 문수르의 모든 것을 흔들었다.
더불어 이리아의 얼굴을 다시 봤을 때 문수르는 보다 확실하게 인정해야 했다.
그녀가 좋다.
적어도 그녀를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는 처지가 됐다.
물론 그 사랑 때문에 모든 걸 바칠 생각은 없었다. 특히 다른 누군가의 희생을 담보로 그녀를 구할 생각은 더더욱 없었다.
하지만!
구할 수 있다면, 다른 누군가의 희생이 아닌 방법으로 그녀를 구할 수 있다면 그 방법마저 마다할 생각은 없었다.
어쨌거나 그런 고민 속에서 고생하던 문수르는 적어도 완전히 망가지진 않았다.
- 들어와.
“내가 왜 함정일지도 모르는 곳에 제 발로, 그것도 혼자서 들어가야 하는 겁니까?”
노운의 말.
곧바로 수락하는 병신 같은 짓은 하지 않았다. 문수르는 나름 합리적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왕성 내에서 무슨 문제가 생겼다면, 노운의 작전이 실패했다면…… 지금 필요한 건 전 병력을 이끌고 영지로 돌아가는 것이다.’
최악의 상황에서 믿을 수 있는 건 결국 힘이다.
지금 이곳에 있는 병력마저 잃는다면 문수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어진다.
특히!
‘내가 중요하다.’
이제르트 후작가에서 가장 큰 전력, 가장 중요한 존재는 그 누구도 아닌 문수르다.
자기만 살겠다고 이런 소리를 하는 게 아니다.
최악의 상황에서 적어도 문수르만큼은 살아야 한다. 그래야 반격을 도모할 수 있다.
이제르트 후작? 이리아?
문수르는 안다.
지금 이제르트 후작가에 필요한 건 그들이 아닌 바로 자기자신이라고!
그렇기에 움직일 생각이 없었다.
정말 합당한 이유를 듣기 전에는 말이다.
그 순간.
- 역시 카라카크 말대로 나오는군.
노운이 비릿한 냄새를 풍기며 말을 뱉었다.
- 카라카크가 거래를 제시했다. 네가 이곳에 들어오면 그 대가로 이제르트 후작과 이리아 이제르트를 비롯한 모든 이들을 밖으로 풀어주겠다고 말이야.
그 제안.
문수르는 거절했다.
“거절합니다.”
잔인한 말이다.
정말 무자비한 말이기도 하다.
하지만 한 무리를 이끄는 수장으로서는 당연히 해야 하는 말이고, 결단이었다.
왕성 안에 있는 것보다 지금 왕성 밖에 있는 것이 더 중요하다.
더불어 그들보다 문수르의 목숨이 더 중요하다.
더군다나 카라카크가 언급된 상황 아닌가? 이 순간 문수르는 어느 정도 상황을 파악했다.
‘카라카크가 왕성 안에 있었구나.’
노운은 사전에 말했다. 카라카크가 현재 그 어디도 아닌 제국의 황도에 있다고.
그러나 문수르는 살짝 의심을 하고 있었다.
온갖 마법을 자유자재로 쓰는 카라크카라면, 순간이동 마법 따위를 이용해서 단숨에 콩탄 왕국의 왕도로 오지 않을까? 하는 의심 말이다.
물론 노운의 시나리오를 따르기로 했기에 그 사실에 대한 의구심은 제시하지 않았다.
하지만 아무래도 문수르의 그 막연했던 의심이, 불안감이 현실이 된 모양이다.
왕도 안에 카라카크가 있었다.
쉽게 말해서 카라카크가 노운의 계획을, 그의 시나리오를, 그의 의도를 파악했다는 의미다.
결과적으로 노운은 현재 포로가 되었거나 혹은 현재 카라카크와의 협상 테이블에 앉은 셈이다.
거기에 문수르가 초대된 것이다.
적어도 여기까지가 문수르의 예상. 더불어 문수르는 이 협상 테이블에 앉고 싶지 않았다.
‘영지로 돌아가서 전력을 재정비한 후에 다음을 기약하는 게 최선은 아니더라도 차선은 될 수 있을 터.’
카라카크는 협상이 가능한 대상이 아니다. 그는 그저 무자비하고 독선적이고 이기적이고 난폭한 짐승일 뿐이다. 그가 만든 건 협상 테이블이 아니라 그저 만찬을 위한 식탁이다. 노운과 문수르, 이 두 노크맨을 한 자리에 놓고 동시에 포식하겠지.
그것 만큼은 피해야 한다.
막말로 지금 이 세게에서 노운과 문수르, 그 둘을 제외하고 카라카크를 막을 자가 있기나 할까?
심지어 한석균도 죽은 상황이다. 더 이상 새로운 노크맨은 나오지 않는다. 노운과 문수르, 그 둘이 카라카크의 음모에 종지부를 찍어야 한다.
최소한 둘 중 하나는 살아야 하는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다.
그 순간.
- 카라카크가 말하는군. 일주일을 줄 테니까 그 안에 결정하라고. 만약 그 이후에도 결정을 내리지 않는다면 이제르트 후작과 이리아 이제르트를 비롯한 이제르트 후작가의 모든 이들을 죽이겠다고.
노운이 마지막 통보를 했다.
“알겠습니다.”
대화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일주일의 시간이 주어진 것이다.
동시에 노운의 노림수가 문수르에게 도착했다.
5.
노운은 카라카크와 대면하고 있었다. 필로스 왕의 얼굴을 뒤집어 쓰고 있는 카라카크의 모습은 이질적이었다.
“후후후, 참 재미난 계획을 세웠어.”
카라카크의 말에 노운은 어깨를 으쓱했다.
“성공할 줄 알았는데.”
“노운이라고 했나?”
“부르고 싶은 대로 불러도 상관은 없지.”
“네 녀석의 머릿속은 나하고 비슷하더군. 문수르란 놈하고는 다르게 말이야.”
“그래?”
“덕분이었지. 네 녀석이 어떤 수작을 부릴 지는 너무나도 쉽게 답이 나왔으니까.”
“그럼 그냥 진즉에 나를 처리하지, 문수르를 그냥 놔두는 건 이해가 안 되는군. 만약 내가 당신 처지였다면 나를 쥐도 새도 모르게 처치한 후에 문수르를 처리했을 텐데.”
“말 그대로 거래를 하고 싶으니까.”
카라카크가 고개를 까닥였다.
“할루이 이제르트, 그는 어찌 지내는가?”
“한석균 회장을 말하는 건가?”
“한석균…… 그것이 그의 이름인가?”
“저쪽 세계에서는.”
“참 재미있군. 할루이 이제르트, 그 자가 종국에 신의 울타리마저 벗어났을 줄이야.”
“저쪽에서 잘 지내고 있지. 너무 잘 지내서 문제야. 우리가 실패하는 순간 우리들의 목숨은 가차 없이 버리고, 곧바로 새로운 노크맨을 보낼 준비를 하고 있으니까.”
거짓말이다.
카라카크를 견제하기 위한 거짓말. 일단 지금 할루이 이제르트, 한석균이 죽었다는 진실을 말해줄 필요는 없으니까.
“노크맨이라고 하는군.”
“노크를 하면 차원이동이 가능하거든.”
“그래, 그게 내가 원하는 부분이다.”
카라카크.
이제까지 정말 그 의중을 알 수 없었던 인간.
그런 그가 드디어 말했다.
“내가 원하는 건 그 능력이다.”
“뭐?”
“아무리 해도 신의 울타리를 벗어나 다른 세계로 가는 방법을 내놓을 수가 없더군.”
“그래서 뭐?”
“노운, 네 녀석에게 제안해주지. 문수르란 놈의 육체를 내게 넘기는 거다. 그럼 나는 깔끔하게 이 세계를 떠나줄 것이다.”
카라카크의 계획.
그건 다름 아니라 차원이동이었다.
사실 처음부터 그것이 카라카크의 숙원이었던 건 아니었다. 카라카크는 그저 세상을 파괴하고, 무너뜨려서 자신의 존재가치를, 존재감을 증명하고 싶었을 뿐이다.
그걸 위해 많은 걸 준비했다.
하지만 그 계획들이 문수르란 존재의 등장으로 인해서 무너지기 시작했다.
카라카크는 그 상황에서 분노하지 않았다. 오히려 문수르가 할루이 이제르트가 다른 세계에서 보낸 존재임을 파악했을 때 카라카크는 다른 생각을 품기 시작했다.
가지고 싶다!
저 능력!
차원을 넘나드는 능력을 가지고 싶다!
그렇게 기회를 노렸다. 조금씩, 시간을 들여 하나씩 필요한 것들을 챙기기 시작했다.
시간은 충분했다. 카라카크에게 넘치는 건 그 무엇도 아닌 시간이었으니까.
수작을 부려 문수르가 소중히 여길 만한 것들을 하나둘씩 훔치기 시작했다. 이리아 이제르트는 개중에서 가장 쓸만한 대어였다.
또한 수작을 부려 문수르의 행보를, 그의 움직임을 적당히 조작하기 시작했다. 제이머스 공작을 이용해서, 필로스 왕을 이용해서 그리고 카이탄 황제를 이용해서! 문수르로 하여금 카라카크의 의도대로 움직이게 만들었다.
물론 모든 게 카라카크의 의도대로 풀린 건 아니었다. 하지만 백퍼센트 계획이 성공할 필요는 없었다. 차츰 하나씩 문수르의 것을 빼앗으면 되는 일이었다.
그러던 와중에 등장한 노운이란 존재.
여기서 카라카크는 승부수를 건 것이다.
“문수르를 내게 주면 깔끔하게 이 세계를 떠나주지.”
“그래서 어디로 갈 생각이시지?”
“내가 원했던 곳! 흑마법사들의 낙원! 위대한 나의 힘이 잠들어 있는 그곳! 이제가지 그 어떤 흑마법사도 도달하지 못했던 세상!”
카라카크는 목에 힘을 주며 말했다. 말을 뱉는 그는 마치 흥분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오히려 노운은 그런 카라카크를 의심했다.
‘흥. 구라도 정도껏 치시지.’
카라카크의 제안을 노운은 절대 믿지 않았다. 오히려 반대로 더 강한 의심을 품었다.
‘문수르를 주면 알아서 이 세계를 떠나주겠다고?’
지금 카라카크는 노운이 가장 혹할 만한 제안을 했다. 그렇기에 노운은 의심부터 한 것이다.
‘그럴 놈이 아니지.’
카라카크는 절대 남 좋은 일을 시키는 족속이 아니다. 오히려 반대다. 놈이 주는 사과는 그냥 사과가 아니라 독사과다. 보기에는 먹기 좋고 탐스러워 보여도 먹는 순간 목숨을 잃는 독사과!
‘문수르를 넘겨주면 놈은 가차 없이 내 목숨도 가지고 갈 놈이야. 더군다나 다른 세계로 떠난다고? 흥, 내가 보기에는 무슨 대단한 악마라도 소환할 수작인 것 같은데?’
그러나 이 순간 노운은 자신의 속마음을 드러내기 보다는 오히려 미소를 지었다.
“좀 더 자세히 듣고 싶군. 그 제안 말이야.”
노운에게도 있다.
‘나도 아직 비장의 카드가 있다고.’
숨겨둔 비장의 한수가 말이다.
더불어 지금 그 비장의 카드를 이곳으로 가져오기 위해 문수르가 움직였을 것이다.
‘카라카크, 노크맨이 가진 능력은 네놈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기상천외하다.’
카라카크는 눈치 채지 못하는 수법으로 문수르에게 정보를 전달했으니까.
6.
문수르는 눈앞에 있는 물건을 보며 이를 물었다.
‘노운 네놈은…….’
노운.
그는 긴급한 순간에서 다른 방법을 통해서 카라카크 몰래 자신의 의사를 문수르에게 전달했다.
노운은 말했다.
비장의 카드가 있다고!
제 아무리 강력하고, 신출귀몰한 카라카크라고 해도 확실하게 끝장낼 수 있는 방법이 있다고!
그 방법이 지금 문수르의 눈앞에 있었다.
“핵탄두…….”
폭탄이다.
그것도 핵폭탄!
“로이드.”
- 예, 주인님.
“이 폭탄 위력이 어느 정도지?”
- 반경 10킬로미터 내의 모든 건 확실하게 파괴할 수 있습니다.
“강력한 건가?”
- 지구의 문명이 이룩한 기술력에 비하면 꽤나 조촐한 수준의 녀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세계에서는 모든 걸 뒤집을 수 있는 놈이겠지.”
핵무기.
고려해보지 않은 적은 없다. 정말 이루 말할 수 없는 적을 만났을 때 솔직히 어스 월드의 강력한 무기에 대한 유혹을 받았다.
제 아무리 많은 숫자의 대군이라도 눈앞에 있는 핵무기 하나면 깔끔하게 처리할 수 있으니까.
그러나 그러지 않았다.
심지어 총마저도 이 세계에 가져오지 않았다.
뭐라고 해야 할까? 이 세계에 넘어와 깽판을 부리면서 최소한의 예의는 지키기 위해서라고 해야 할까? 좋게 보면 신사적인 모습이고, 나쁘게 보면 그냥 멍청한 짓이었다.
그래, 멍청한 짓이었다.
정말 최선의 효율을 위해서라면 기가스 따위의 부품보다는 그냥 핵탄두나 가져와서 미사일 만들어서 쏘는 게 더 나았을 것이다.
그리고 노운은 그게 가장 합리적이고 편한 방법이라고 생각했으며, 결국 실천을 한 것이다.
핵탄두를 가져왔다.
혹시 모를 상황에서 써먹기 위해서!
아마도 죽어가고 있던 한석균 회장은 노운의 이 행동을 묵인해줬을 것이다.
최후의 상황에서 쓸 수 있는 비장의 카드 하나쯤은 있어서 나쁠 게 없을 테니까.
“빌어먹을.”
그러나 그 모든 것은 결국 이제까지 문수르가 해온 노력에 대한 부정이기도 했다. 문수르가 정말 단숨에 병신이 됐다.
‘나는 그동안 무엇을 위해…….’
무언가가 뒤틀렸다. 속이 뒤틀리고, 영혼이 뒤틀렸다.
그러나 문수르의 머릿속은 그 어느 때보다 빠르게 회전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