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노크맨-288화 (286/293)

288화

<89화. 노림수>

1.

이제르트 후작군이 움직이기 시작했을 때.

동시에 노운의 군대도 움직였다.

노운은 길게 끌 생각이 없었다.

‘제이머스 공작과 필로스 왕의 위치는 파악했다.’

이미 표적의 위치는 파악한 상황. 그럼 그 표적을 잽싸게 제압하면 이 전쟁은 끝나는 거다.

‘문수르의 도움도 필요 없지.’

까놓고 말해서 문수르의 도움 역시 필요 없다. 이미 페스로 제국의 정예 중의 정예들이, 페스로 제국을 대표할 수 있는 최고의 기사들과 실력자들이 왕성 안으로 들어왔다. 심지어 내성 안까지 들어왔다.

10분!

‘빠르게 끝낸다.’

긴 시간도 필요 없다. 단숨에 이 전쟁을 끝낼 것이다. 역사에는 전쟁이라고조차 기록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노운이 움직였다.

더불어 노운의 설득에, 계획에 넘어간 다섯 귀족들 역시 노운에 무조건적인 협력을 약속했다.

‘잘 됐어.’

사실 노운은 살짝 걱정했다. 다섯 귀족 중 한두 명은 노운이 설치해둔 계획을 무시할 수도 있었으니까.

그도 그럴 것이 노운이 나름 잘 포장해서 설명은 했지만 결국 그가 말한 건 이야기의 본질은 카이탄 황제가 지금 흑마법사의 주구가 되었다는 내용이다.

페스로 제국의 황제가 흑마법사의 주구가 됐다?

아무리 증거를 제시해서 쉽사리 받아들일 수 있는 내용이 아니다. 오히려 허튼 수작 부리지 말라고 반발이 나올 수도 있었다. 제 아무리 노운이 황제의 친필 서한과 황제의 인장을 제시했다고 해도 말이다.

‘이익관계가 맞아 떨어진 거지.’

그럼에도 다섯 귀족들이 이러다할 반발 없이 노운의 시나리오에 걸려든 건 저울질 때문이다.

여기 모인 다섯 귀족들.

까놓고 말해서 아히만트 백작을 제외한 나머지 귀족들은 저마다 황자들을 하나씩 점찍어 파벌을 형성하던 자들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저번 콩탄 왕국과의 전쟁에서 그들은 패배를 경험했다. 그 결과 그들이 가지고 있던 정치적 입지나, 권력이 작아졌다.

더 나아가 그들의 힘이 줄어들자 상대적으로 카이탄 황제는 더욱 막강한 권력을 쥐게 됐다.

카이탄 황제가 싫은 건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황제가 귀족들을 좌지우지할 정도로 막강한 권력을 쥐는 것이 귀족들 입장에서 마냥 달갑기만 할 리 만무하다.

그런 상황에서 황제가 불가피한 이유로 흑마법사의 주구가 되었으며 제국을 타락시키고자 한다면?

제국의 미래와 명예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카이탄 황제를 처치해야 한다면?

가슴은 쓰리다.

그러나 카이탄 황제를 쓰러뜨렸을 때 얻게 되는 메리트는 상상을 초월할 것이다.

일단 여기 모인 다섯 귀족들은 제국의 가장 핵심귀족이 될 것이다. 최강의 실세들이 될 것이다. 제국의 모든 것이 여기 모인 다섯 귀족을 중심으로 재편될 것이다.

반대로 그 이후 카이탄 황제를 대신해 새롭게 황위에 오른 자의 권력은 카이탄 황제의 반의 반조차 되지 못할 것이다. 귀족들이 더 활개 칠 수 있는 상황이다.

가장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었던 황제를 향해 검을 겨누는 것, 이 부분에 대해서는 이미 노운이 충분할 만큼의 명분과 근거를 제시해준 상황이다. 황제의 친필 서한, 황제의 직인…… 황제가 직접 부탁했다. 부디 제국의 미래를 위해 자신을 죽여 달라고.

역사에 배신자, 반역자로 남을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오히려 반대로 황제의 명예를 위해 몸을 받친 충심 넘치는 영웅으로 기록되겠지.

‘좋아.’

노운은 만족했다.

‘이제 카라카크만 죽이면 돼.’

이로써 카라카크를 향해 무시무시한 검을 마음껏 휘두를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됐다.

2.

이제르트 후작군이 움직임은 왕도에서도 금방 파악했다.

“이제르트 후작군이 전진한다!”

“대비하라!”

늦은 밤중이었지만 왕도에 머무는 왕군들과 제이머스 공작군은 어수룩하지 않았다.

그들은 오히려 밤이었기에 더 빠른 반응과 대응을 보여줬다. 이제르트 후작군이 움직인 이야기는 순식간에 필로스 왕과 제이머스 공작의 귀에도 들어갔다.

더불어 노운의 귀에도 들어갔다.

기회였다.

노운은 이 부분에 대한 문제 상의를 위해서 병력을 이끌고 필로스 왕과 제이머스 공작을 찾아갔다.

다섯 귀족을 포함한 스무 명의 기사들이 포함된 그 무리는 위협적이었지만 왕도의 그 누구도 그들의 앞을 막지 않았다. 그들이 필로스 왕과 제이머스 공작 앞까지 도달하는데 방해물은 단 하나도 없었다. 심지어 그들이 검을 차고 필로스 왕이 머무는 대전에 들어가는 순간까지도 이러다할 제지나 반항은 없었다.

그걸로 이야기는 끝이었다.

필로스 왕과 제이머스 공작의 주변에 있는 호위기사의 숫자는 열 명 남짓한 상황.

반대로 노운이 데리고 온 기사의 숫자는 스물다섯!

두 배 이상의 병력 차이.

더군다나 지금 데리고 온 다섯 귀족들 중에는 제이머스 공작과 같은 오러 마스터도 있었다.

양과 질, 모두에서 앞서는 상황!

노운은 필로스 왕을 보며 말했다.

“다시 만나자고 아까 말했듯이.”

노운이 손을 움직였다.

그러자 다섯 귀족을 비롯한 기사들이 번개 같이 움직이며 호위기사들을 단숨에 제압했다.

찰나의 시간만 걸렸다.

10분?

채 1분도 걸리지 않았다.

제대로 검 한 번 휘두르지 못한 채 제압되는 필로스 왕의 호위기사들. 반항하는 자에게는 가차없는 응징이 있었다.

“사정을 두지 마세요.”

노운은 이미 진즉부터 말했다.

“이제부터 우리는 전력을 다해 제국을 구해야 합니다. 자비나 용서 따위가 허용되는 일이 아닙니다.”

동정심 따위는 버려라.

지금부터 우리들이 해야 하는 건 그 무엇도 아닌 제국을 구하는 일이니까!

작은 틈조차 허용해서는 안 된다. 실패할 여지가 남을 만한 일은 절대 해서는 안 된다.

그런 이야기를 들은 제국의 기사들은 반항하는 기사들의 목을 가차없이 베어버린 것이다.

왕의 대전이 피로 물들었다.

필로스 왕과 제이머스 공작은 그 광경을 말없이 지켜보고 있었다.

그 순간.

“제이머스 공작, 본인은 아히만트 백작이라고 하오. 공작의 명성은 익히 들었소.”

아히만트 백작이 앞에 나섰다.

오러 마스터인 제이머스 공작을 상대하는 역할은 그 누구도 아닌 아히만트 백작의 몫이었다.

그건 가장 위험한 일이었다.

오러 마스터의 무시무시함은 따로 설명이 불가능하다. 제 아무리 기가스의 시대가 왔다고 해도 오러 마스터의 강함은 절대적이다. 그런 오러 마스터를 상대로 싸운다는 건 비슷한 경지의 실력자라고 해도 언제나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이다.

다섯 귀족들 중 대부분이 피하고자 했다.

하지만 아히만트 백작은 본인이 스스로 지원했다.

내가 제이머스 공작을 상대하겠다고!

그 이유?

‘페하를 위한 일이다.’

이루 말할 수 없는 사명감 때문이다. 카이탄 황제를 위해 모든 걸 바쳤던 아히만트 백작. 그런 그가 가장 믿고 있는 노운이 말해줬다. 더 이상 당신이 기억하는 황제는 없다고. 지금 황도에 있는 황제는 흑마법사의 주구가 되어버린 존재라고.

눈물이 났다.

그 사실을 이제 와서야 알게 된 스스로에게 화가 나기도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는 것에 모든 시간을 허비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오히려 황제를 향한 마지막 충성심을 발휘할 때였다.

황제가 자신을 위해 쓴 서찰에 쓰여있는 대로!

‘폐하를 위해 폐하를 죽일 것이다.’

황제의 부탁대로 카이탄 황제를 죽일 것이다. 그 과정을 아히만트 백작은 다른 그 누구에게도 떠넘기고 싶지 않았다.

제이머스 공작은 아히만트 백작의 등장에 고개를 들었다.

‘음!’

제이머스 공작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검은 여전히 뽑지 않은 채로.

싸울 의사는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뭐지?’

뭐라고 해야 할까? 싸울 의지는 없지만 온몸에서는 적의와 살의가 뒤섞인 감정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아히만트 백작은 그 느낌이 대체 무슨 느낌인지 도무지 쉽사리 해석할 수가 없었다.

‘싸우려는 건가, 아니면 항복을 하려는 건가?’

아히만트 백작이 지금 제이머스 공작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기세의 의미를 분석할 무렵.

“카라카크!”

제이머스 공작이 소리쳤다.

그 외침에 노운이 기겁했다.

‘설마?’

노운의 눈이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커지는 순간!

“네놈이 말한 대로 모든 연극을 해줬다! 이제 이걸로 네 녀석과의 거래는 끝이다!”

제이머스 공작이 소리치는 순간 조용히 왕좌에 앉아있던 필로스 왕이 미소를 짓기 시작했다.

“하하.”

그의 입에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카라카크.

그가 바로 필로스 왕의 몸속에 있었다.

3.

이제르트 후작군이 무시무시한 속도로 왕성의 성벽을 향해 돌진하고 있었다.

그러나 문수르는 이 군대로 무식하게 싸울 생각이 없었다.

‘내부는?’

이건 위협이었다.

이미 사전에 노운과 이야기가 되어 있어다. 이제르트 후작군이 움직이면 당연히 페스로 제국군의 도움을 필요로 할 테고 노운과 필로스 왕이 한 자리에 모일 테니까.

그때 노운이 필로스 왕을 잡는 것!

그것이 계획의 내용이었다.

더불어 이제르트 후작군이 강력하다고는 해도 왕성은 말 그대로 왕성이다. 해자의 깊이, 성벽의 높이가 보통 영주들과의 성과는 차원을 달리한다. 무식하게 싸웠다가는 패배 이전에 큰 피해를 감수해야 한다.

그럴 생각이 없었다.

‘좋아.’

문수르는 적당치 왕성 근처까지 도달한 후에 후퇴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음?’

문수르의 시선에.

드래곤 파이터에 탑승한 문수르의 시선에 무언가가 잡혔다. 그건 문수르만이 볼 수 있는 것이었다.

‘설마?’

문수르는 기겁했다.

보이는 얼굴.

“이리아 아가씨?”

말도 안 되는 상황이 일어났다. 지금 이 순간, 왕도의 성벽 위에 그 누구도 아닌 이리아가 있었다.

‘왜?’

대체 왜?

이미 죽었으리라 치부하고 있었던 그녀가 지금 이 순간 성벽 위에 있단 말인가?

문수르는 당황했다. 도무지 지금 상황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때문에 이 순간 문수르가 내린 결정.

“로이드, 내성을 비춰봐!”

그건 바로 무시였다.

어차피 이미 진즉에 이리아는 죽은 인간 취급했다. 카라카크의 손에 넘어간 그녀를 살리기 위해 다른 이들의 희생을 감수할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심지어 이제르트 후작의 목숨마저도 이미 반쯤은 포기했던 상황 아니었던가?

그런데 이제 와서 굳이 이리아에 대해서 신경을 곤두세울 필요는 없다.

무시하는 거다.

적어도 지금 그녀를 생각하는 것이 최우선순위는 아니다. 나중에 해도 된다.

문수르는 내성을 봤다.

‘지금쯤이면…….’

이제 노운이 필로스 왕과 제이머스 공작을 잡았을 것이다. 그리고 신호를 줄 것이다.

그러나.

‘아무런 신호도 없어.’

내성에서 이러다할 조짐은 없었다.

더불어 페스로 제국의 군대 역시, 기가스들 역시 이러다할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노운은 철두철미한 인간이다. 또한 자신이 세운 계획이 틀어지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 인간이다. 자기 시나리오대로 상황이 풀려야만 직성이 풀리는 자다.

그런 그가 허투루 계획을 세웠을 리 만무하다. 초 단위로 계획을 세웠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아무런 응답도, 대응도 없다는 것.

‘실패.’

실패했거나.

혹은 다른 변수 때문에 문제가 생겼거나.

무엇이 되었던 간에 적어도 지금 상황이 문수르가 원하는 방향과는 정반대 방향으로 가는 건 분명하다.

문수르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동시에 문수르는 명령을 내렸다.

“후퇴한다.”

어차피 왕성 근처까지만 이동한 후에 뒤로 물러나는 게 기존의 작전이었다.

좀 더 일찍 병력을 뒤로 물리는 게 지금은 최선이다. 왕성 근처에 어쩌면 문수르가 파악하지 못한 함정이 있었을 가능성도 있으니까.

문수르의 명령이 이제르트 후작군 전군에게 전달됐다. 그 누구도 의문을 제시하진 않았다.

“후퇴한다!”

명령은 빠르게 퍼졌고 이제르트 후작군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후퇴하기 시작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