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7화
10.
아히만트 백작은 기분이 싸했다.
‘대체 이것을 무엇이라 해야 할까?’
오랜 세월 그는 나름 실력 좋은 무장으로 살아왔다. 오직 황제에게만 충성을 받지는 귀족으로 살아왔다. 때문에 많은 이들이 아히만트 백작에게 정치적 감각이 부족하다고 말하지만 실제는 조금 다르다. 아히만트 백작이 정치적 감각이 정쟁을 일삼는 귀족들에 비해서 부족한 건 맞지만, 그렇다고 해서 정치적 감각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다.
오히려 중립적인 위치에서 나름 큰 무리 없이 지금까지 버텨온 건 어느 정도의 정치적 감각, 그것도 여러 세력들 사이에서 균형을 잡을 수 있는 감각이 있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서 본능적인 감각이 있다.
무언가가 아니다, 싶을 때 그것을 느낄 수 있는 감각.
지금이 그랬다.
‘저번과는 다르군.’
반면 저번 콩탄 왕국과의 전쟁에서는 이러다할 불안감은 없었다. 노운이 수시로 상황을 설명해준 것도 이유겠지만 까놓고 말해서 당시 아히만트 백작은 자신의 3배 급 기가스를 끌고 나오지도 않았으니까. 그건 달리 말하면 애초부터 아히만트 백작이 당시 전쟁에 대해서 큰 비중을 두지 않았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병력의 질부터 다르다.
심지어 이번 전쟁을 위해 참가한 기가스 파일럿들의 면면들이 보통이 아니다.
기본 백작 급들.
후작들도 보인다.
더군다나 그저 허울뿐인 백작, 후작들이 아니다. 페스로 제국의 실세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자들이다.
막말로 모든 황자들이 콩탄 왕국과의 전쟁에서 전공세우기에 실패하면서 황권이 막강해지지 않았다면, 절대 쉽사리 움직이지 않았을 자들이었다. 그런 자들이 모였다.
‘느낌이 안 좋아.’
절대 안 좋다.
무언가 큰일이 날 조짐이 느껴진다.
더불어 불길함이 커질수록 아히만트 백작은 노운의 낌새를 더 자주 살피기 시작했다.
어쩔 수 없는 일 아닌가?
‘노운 경은 본심을 언제 말해줄 생각이란 말인가?’
노운이 모든 열쇠를 쥐고 있다.
그러나 노운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고, 결국 페스로 제국의 군대는 왕성 근처까지 도달했다.
11.
필로스 왕은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았다. 그는 혹여 이제르트 후작군이 공격을 할까, 페스로 제국의 군대를 왕성 안으로 받아들였다. 무지막지한 숫자의 대군이 왕도로 들어왔다.
그 병력을 본 왕도의 귀족들은 기겁했다.
“맙소사…….”
“내가 지금 꿈을 꾸는 것인가? 아니면 정말 내 눈앞에서 일어나는 광경이 현실이란 말인가?”
일찌감치 제국의 군대가 온다는 소식을 들은 귀족들이다.
그러나 그들이 생각하는 군대는 3배 급 기가스 1대를 포함한 약 50여 대의 기가스 전력이 전부였다.
그런데 지금 보이는 페스로 제국의 군대들.
“3배 급 기가스들이 맞는 건가?”
“맙소사, 그럼 제국의 실세들이 왔다는 의미 아닌가?”
3배 급 기가스가 있다.
그것도 1대가 아닌 무려 5대가!
정말 대전쟁이 일어나지 않는 이상, 페스로 제국이 작정을 하지 않는 이상 모일 수 없는 전력이었다.
애초에 이 정도 병력을 구성할 수 있었다면 콩탄 왕국은 절대 페스로 제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 의문이었다.
“대체 왜 이제 와서야 이런 전력을 움직인단 말인가?”
“제국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군.”
이럴 바에는 차라에 진즉부터 이 정도 전력을 앞세웠다면 그런 치욕을 경험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오히려 안심했다.
“그래도 이 정도 병력이라면 이제르트 후작군과의 전쟁에서 패배할 가능성은 절대 없군!”
“오히려 이제르트 후작군을 확실하게 짓누를 수 있는 기회가 왔어.”
승리가 보장됐다.
그렇다면 더 이상 전쟁을 망설일 필요가 없을 터!
오히려 이제르트 후작군이 영지로 도망치기 전에 먼저 공격하자는 의견이 잽싸게 튀어나올 정도였다.
그러나 그들은 몰랐다.
지금 그들의 곁에 돌아온 페스로 제국의 군대가 자신들을 먹어치울 사자였다는 사실을 말이다.
12.
문수르는 연락을 받았다.
‘왔다.’
노운의 군대가 왕성 안으로 들어갔다.
‘3배 급 기가스가 5대라니?’
사실 문수르도 꽤나 놀랐다. 설마 3배 급 기가스가 5대나 포함된 전력일 줄이야?
더불어 그 이동과정이 정말 은밀하고 신속하기 그지없었다.
‘만약 저들이 앞서서 전장에 투입됐다면…….’
저번 전쟁에서 저들이 전선에 투입됐다면 제 아무리 문수르라고 해도 승리를 거두지 못했을 것이다.
오히려 큰 피해를 입은 채 많은 것을 제국에게 내주어야 했겠지.
생각만으로도 끔찍하다.
더불어 제국이 가진 저력은 문수르의 상상 이상으로 강력하기 그지없는 것이었다.
어쨌거나 그러한 건 예상에 불과한 사실.
‘그래, 지금은 내 아군이다.’
노운은 이제 문수르의 편이다. 노운이 끌고 온 군대는 단숨에 왕성을 점령해줄 것이다.
그 후에는 일사천리다.
필로스 왕과 제이머스 공작을 사로잡은 후에 문수르가 왕위에 오르면 된다. 본래대로라면 무수히 많은 과정을 거쳐야겠지만 문수르는 오랜 세월 왕으로 통치할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빠르게, 세상이 놀라기도 전에 빠르게 일을 처리한 후에 유유히 세상을 떠날 것이다.
‘좋아.’
그리고 밤이 왔다.
계획된 시간이 되는 순간 문수르는 지체 없이 움직였다.
13.
필로스 왕과 노운이 한 자리에 앉았다. 그 둘은 이러다할 정치적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카라카크가 할 말은 다 했겠지?”
노운은 필로스 왕을 보며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필로스 왕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이유도 없었다. 이미 필로스 왕은 카라카크의 꼭두각시가 된 상황이니까.
노운은 그런 필로스 왕을 유심히 지켜봤다.
‘어떤 수법을 쓴 거지?’
노운이 카이탄 황제를 꼭두각시 인형으로 만든 수법과 카라카크가 쓴 수법은 다르다. 단지 결과물만 같을 뿐.
아니, 결과물도 조금 다른 것 같다.
‘아예 속은 다른 인간인 건가?’
더불어 카라카크의 수법이 결과적으로 좀 더 낫다. 좀 더 잘 만들었다고 해야 할까?
‘신기하군.’
“아무 말도 안할 생각인가? 말을 못하는 건 아닐 텐데?”
노운이 슬그머니 필로스 왕을 자극했다. 일단 무엇이든 정보를 얻고자 할 생각이었다.
‘잡기 전에 얻어둬야지.’
밤이 되자마자 문수르가 움직일 것이다. 그럼 노운도 움직여야 한다. 필로스 왕과 제이머스 공작을 사로잡고, 곧바로 왕성의 문을 여는 것이다. 솔직히 치고 박고 할 필요는 없다.
‘이 전력 전부.’
노운의 계획에는 자신이 이끌고 온 병력은 물론 문수르의 병력에 필로스 왕의 왕군, 제이머스 공작의 군대가지 포함되어 있었으니까.
그 정도가 있어야 카라카크를 상대로 승부를 걸 수 있다.
‘비장의 수는 여전히 남겨두고.’
더불어 노운이 정말 카라카크를 처치할 수 있으리라 여기는 비장의 한수는 여전히 남겨둔 상황에서 말이다.
‘나쁘지 않아.’
노운은 카라카크를 처음 만났을 때 느꼈던 그 암담함과 더러움에 비하면 지금 상황이 굉장히 좋은 방향으로 흘러간다고 생각했다.
‘카라카크만 처치하면.’
더불어 카라카크만 처리할 수 있으면 문수르는 자연스럽게 세계를 떠날 것이고 노운은 모든 걸 자기 마음대로 처리할 수 있게 된다. 더 이상 노운의 앞날을 방해할 존재들은 사라지는 것이다.
‘그래.’
얼마 안 남았다.
‘조금 남았어.’
노운은 미소를 지었다.
그런 노운의 미소를 바라보는 필로스 왕의 표정은 묵묵부답, 그 어떤 변화도 없었다.
“그럼.”
노운은 더 이상 필로스 왕과 대화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카라카크의 꼭두각시가 되어버린 그와 무슨 대화를 나누든 의미가 없을 테니까. 굳이 대화를 하고 싶으면 카라카크와 하면 되는 거다.
“다음에 만나서 이야기합시다.”
자리에서 일어나는 노운.
“그쪽이 멀쩡하다면.”
비릿한 미소를 지은 채 등을 돌리는 노운의 모습은 누가 보더라도 필로스 왕을 향해 비아냥거림을 날리고 있었다.
실제로도 그랬다.
‘이 세계 인간들은 멍청하고 무능력하지.’
한 나라의 왕이란 작자가 카라카크라는 흑마법사의 꼭두각시가 되어버리다니?
노운이라면 차라리 혀를 깨물고 자결을 했을 것이다.
‘병신 같은 왕이로군.’
필로스 왕에 비웃음을 머금었다.
한편으로는 이런 필로스 왕에 막혀 아무 것도 이룩하지 못한 문수르를 향해서도 비웃음을 날렸다.
‘멍청한 새끼. 그렇게 어수룩하니까 해답을 놓고도 그 해답을 고르지 못하는 거지.’
그 순간.
노운이 필로스 왕으로부터 등을 돌리는 순간.
노운의 등을 바라보는 필로스 왕의 눈에서는 소름끼치는 불꽃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14.
노운이 아히만트 백작을 비롯해 주요한 귀족들을 한 자리에 모였다.
그리고 그곳에서 노운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이 이야기는.”
그 순간 노운에게서 흘러나오는 분위기는 다름 닳고 닳은 귀족들마저 등골을 싸늘하게 만들 정도로 무시무시한 것이었다. 이루 말할 수 없는 긴장감이 조성됐다.
꿀꺽!
누군가는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침이 넘어가는 소리가 무척 컸다. 모두가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아히만트 백작 역시 그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만약 평소의 그였다면 비웃음을 머금었을 것이다. 고작 이런 상황에서 긴장감 때문에 침 삼키는 소리나 내다니…….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아히만트 백작도 정말 긴장감에 저도 모르게 침이 넘어가고 있는 상황이었으니까.
그 정도였다.
노운이 아직 본론을 꺼내지도 않았음에도 그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분위기, 그리고 그 분위기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긴장감은 말이다.
그 순간!
“절대 역사에 남겨서는 안 되는 이야기입니다.”
노운이 입을 열었다.
“이곳에 계신 분들은 제가 과거 카이탄 폐하의 병을 치료했다는 걸 알고 계실 겁니다.”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병을 치료하는 정도가 아니었다. 죽어가던 황제를 되살렸다고 한다. 그 이후 노운이 황제의 최측근이 되었으며 황제의 곁을 맴돌았다. 제국의 실세들이라면 그 정도 이야기는 안다.
“당시 폐하께서는…… 외람된 말씀이옵니다만 흑마법사의 수작에 의해 목숨이 위험하시던 차였습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폐하께서는 자결을 택하셨습니다.”
그러나 이곳에 모인 그 누구도 모르는 진실.
그 진실에 대한 말이 노운의 입에서 나왔다.
“흑마법사의 사악한 흑마법 앞에 꼭두각시 인형이 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폐하는 세상을 위해서, 그리고 제국을 위해서 인형이 되어 살아남기보다는 차라리 자신이 죽는 게 낫다고 여기셨습니다. 그러던 차에 제가 폐하를 살리게 되었습니다만…… 폐하의 몸에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악마가 잠들어 계셨습니다.”
“으음!”
“그런 일이…….”
“폐하께서 이후 다급하게 후계자를 뽑으려 하신 것도 그러한 이유 때문입니다. 폐하께 주어진 시간이 많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더 큰 문제는…… 이제 폐하의 시간이 전부 끝났다는 겁니다.”
그 말과 함께 노운은 다섯 장의 서찰을 꺼냈다.
그리고는 그 서찰들을 지금 모인 다섯의 귀족들에게, 제국의 실세들이 건네주었다.
“폐하께서 마지막까지 자신의 의지를 가진 채 남기신 서찰입니다. 여러분들 각자께 쓰신 편지이기도 합니다.”
서찰의 내용은 다 달랐지만 그것이 황제의 친필이라는 것과 황제의 인장이 곳곳에 찍혀있다는 것만큼은 똑같았다. 동시에 그들 모두가 황제과 교감을 나눌 수 있는 어떠한 사실이 언급되어 있기도 했다.
카이탄 황제가 쓴 것이 맞다.
그 사실을 부정하는 자는 다섯 귀족 중에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런 그들에게 노운은 마지막 결정타를 날렸다.
“이제부터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흑마법사의 수작에 넘어간 황제 폐하를 물리치고 제국을 지키는 것입니다.”
노운의 시나리오가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