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노크맨-286화 (284/293)

286화

6.

노운은 필로스 왕에게 몰래 서찰을 보냈다. 문수르가 아직 왕도에 도착하기도 전의 일이었다.

서찰의 내용은 간단했다.

- 카라카크와 손을 잡았습니다. 페스로 제국은 그 누구도 아닌 필로스 왕의 편이 되어줄 겁니다. 그러니 왕도까지 가는 길을 열어주십시오.

필로스 왕은 의구심을 가지지 않았다.

아니, 이미 세상이 기억하는 필로스 왕은 더 이상 없었다. 지금 존재하는 건 필로스 왕의 껍데기를 뒤집어 쓴 카라카크의 충실한 수하뿐이었다. 필로스 왕이 귀족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왕도로 오는 페스로 제국의 군대를 막지 말라고!

오히려 그들에게 물자를 보급하고, 그들이 보다 빨리 왕도에 도달할 수 있도록 도우라고!

귀족들은 무어라 말하고 싶었다.

아니, 그들은 필로스 왕의 명령을 도무지 쉽사리 납득하지 못했다.

“대체 왜?”

“전하께서는 대체 무슨 생각이시란 말인가?”

“페스로 제국의 입김에서, 그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토록 애쓰셨던 분이 결국 다시 페스로 제국의 품 안에 스스로를 던지다니? 과연 지금 전하가 내가 아는 전하가 맞는 것일까?”

필로스 왕.

본래 그는 나름 좋은 왕이었다. 더불어 정말 진심으로, 충심으로 필로스 왕을 따르는 귀족들도 상당 수 있었다.

막말로 이제르트 후작에게 허접한 증거로 반역죄를 뒤집어씌우는 말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났을 때 적지 않은 귀족들이 필로스 왕의 편을 들어준 건 다름 아니라 필로스 왕에 대한 믿음과 충심 때문이었다. 이제까지 필로스 왕이 이룩한 업적, 그의 행동에 대한 믿음과 충심 말이다.

그런데 지금 필로스 왕의 행보는 그런 믿음과 충심마저도 외면하게 만들 정도였다.

이해가 되지 않는다.

대체 왜 필로스 왕이 자꾸 이런 선택을 하는지, 계속 잘못된 선택을 하는지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필로스 왕을 한 번 믿은 이상 끝까지 믿을 수밖에!

필로스 왕이 죽지 않는 이상 그를 배신하고 이제르트 후작의 편에 선다는 건 귀족의 명예를 아주 시궁창에 버리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때문에 귀족들은 길을 내주었다.

누가 보더라도 페스로 제국의 기가스인 것이 분명한 그들에게 문을 열어주고 심지어 귀족들의 사비를 털어 그들이 요구하는 모든 것을 들어줘야만 했다.

그건 이루 말할 수 없는 굴욕이었다.

7.

노운.

‘흥.’

그는 기분이 좋지 못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지금 그가 계획했던 모든 일이 한 사내 때문에 완전히 망가졌으니까.

그 사내란 문수르가 아니다.

‘카라카크, 네놈이 감히.’

그 존재는 바로 카라카크였다.

그는 카라카크와 타협할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그런 그가 가장 먼저 떠올린 건 자기 목숨을 구하는 것이었다.

명분을 구했다.

황제를 인질 아닌 인질로 삼은 카라카크로부터 일단 멀어질 수 있는 명분 말이다.

동시에 강력한 힘을 마음껏 다룰 수 있는 명분도 필요했다.

콩탄 왕국에서의 내전 그리고 문수르의 존재는 그 명분을 단숨에 만들어주었다.

정예 중의 정예들을 모았다.

그리고 콩탄 왕국으로 향했다.

그 다음 계획은?

‘이 병력을 가지고 카라카크를 친다.’

그렇다.

문수르가 정예 중의 정예들만을 뽑은 것은 그것으로 하여금 콩탄 왕국을 점령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들의 검이 노리는 건 바로 카라카크다.

노운은 자신했다.

‘이 병력 그리고 문수르의 병력.’

콩탄 왕국의 왕도를 순식간에 함락시킨다. 이후 노운이 이끌고 온 병력과 문수르의 병력을 합친다면?

이 세상 최강의 군대가 만들어진다.

무엇이든 할 수 있는 병력이 완성되는 것이다. 그 힘으로! 그 무지막지한 힘으로 카라카크를 처치하는 것!

그렇다.

노운은 카라카크와 단 한 번의 만남만으로 단숨에 상황의 본질을 파악한 것이다.

‘어떻게든 카라카크를 죽여야 돼.’

만약 노운이 좀 더 일찍 카라카크를 만났다면 아마도 노운은 그 무엇보다 카라카크를 죽이는 것만을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 노운은 카라카크란 존재가 가지는 무시무시함을 알고 있었으니까.

‘이 세계에서 놈은 치트키나 다름없어.’

카라카크가 가진 힘은 너무 크다.

물론 힘의 총량을 놓고 본다면 지금 노운이 가진 군대가 훨씬 강하다고 할 수 있다.

문제는 카라카크가 단신, 제 혼자 가지고 있는 무지막지한 힘이다.

그는 도망치고자 한다면 얼마든지 도망칠 수 있는 자다. 더불어 카라카크가 어둠 속에서 타깃을 노린다면 과연 어느 누가 안심하고 잠을 잘 수 있을까?

그는 너무 강하다.

이 세계를 뒤집을 순 없지만, 이 세계를 지배하는 지배자들을 공포에 질리게 만들 수는 있다.

더군다나 이 세계는 소수의 지배자들이 다수를 지배하는 세계다. 지배자들만 제 손아귀에 넣어도 세상을 지배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이런 상황에서 노운이 카라카크를 좋아할 리 만무하다.

손을 잡는다?

어림도 없다. 놈은 그 누구와도 동등한 관계를 맺지 않는다. 세상 모든 걸 자기 아래로 보는 놈이니까.

또한 그건 노운도 마찬가지다. 노운은 절대 다른 누군가와 동등하게 거래를 할 생각이 없다.

결국 노운과 카라카크, 둘 중 하나는 죽어야 한다.

둘 중 한 명만이 이 세계, 케르빈 월드의 주인이 될 수 있으니까.

‘문수르, 놈은 대체 뭐를 한 거야?’

이쯤 되자 노운은 문수르를 살짝 탓했다. 카라카크와 가장 먼저 조우한 건 문수르다. 그렇다면 문수르는 파악했어야 했다. 그 무엇보다 카라카크가 가장 무서운 적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모든 전력을 다해서 카라카크를 처치하거나 그를 고립시켜야 했다.

그러나 문수르는 그러지 못했다. 당장 눈앞에 닥친 폭풍에만 정신을 집중했다.

결국 그것이 지금의 상황을 부른 것이다.

세상의 혼란 속에서 카라카크는 야금야금 자신이 원하는 바를, 원하는 것을 이룩했다.

종국에 카이탄 황제마저 손아귀에 넣었다.

‘젠장.’

노운이 손에 넣은 그 카이탄 황제가 이제는 카라카크의 손아귀에 들어간 것이다.

최악이다.

세상을 움직일 수 있는 가장 훌륭한 카드를 빼앗겼다는 것!

노운에게는 이루 참을 수 없는 일이었다.

‘오냐.’

그러나 노운, 그는 절대 어수룩한 자가 아니다. 아무런 것도 없이 이 세계에 온 것도 아니고, 아무런 생각도 없이 계획을 실천하는 자도 아니다.

‘나도 비장의 카드는 있다.’

최악의 상황에서 쓰기 위해 나둔 비장의 한 수.

노운에게도 그런 한수 정도는 있었다.

8.

이제르트 후작은 숨을 골랐다.

‘상처가 깊군.’

지하 감옥에서 만난 기사들과의 일전. 이제르트 후작은 그 일전에서 승리했다.

단순히 이제르트 후작만의 솜씨 덕분은 아니었다.

‘문수르 경이 준 것이 큰 도움이 됐어.’

문수르는 정말 혹시나 하는 마음에 몇 개의 호신무기를 주었다. 개중 하나가 다름 아니라 섬광탄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수류탄이라도 쥐어주고 싶었지만 차마 그러지 못했다.

어쨌거나 섬광탄은 위력적이었다. 가득이나 컴컴한 어둠 속에서 섬광탄이 터지자마자 기사들은 시각을 잃어버렸다. 제 아무리 실력 좋은 기사라고 해도 눈이 보이지 않으면 그 전력의 반의 반조차 되지 못하는 법!

더불어 이제르트 후작은 굳이 눈이 먼 기사들과 싸울 생각이 없었다. 기사들을 놔두고 재빨리 도망칠 생각이었다.

하지만 거기서!

“후우!”

이제르트 후작의 기척을 느낀 기사가 용케 검을 휘둘렀고, 그 검이 이제르트 후작의 옆구리를 제법 깊게 스치고 지나갔다.

피가 뚝뚝 떨어졌다.

상처의 깊이가 얕지 않았다. 때문에 출혈도 적지 않았다. 이제르트 후작은 상처를 손으로 압박하며 천천히 감옥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감옥 밖으로 나왔을 때.

“이곳입니다.”

누군가가 이제르트 후작을 납치하듯 끌고가기 시작했다.

9.

왕도가 소란스러워졌다.

“이제르트 후작이 도망을 쳤다고?”

“기사들은 대체 무엇을 했단 말인가!”

이제르트 후작의 도주!

그 철통 같은 감시과 경계를 뚫고 이제르트 후작이 기어코 도주에 성공한 것이다.

최악이었다.

막말로 이제르트 후작군을 막을 수 있는 최후의 보루이자 카드가 이제르트 후작 아니었던가?

그런 이제르트 후작이 도망을 쳤다는 건 결과적으로 굉장히 중요한 패를 잃어버렸다는 의미였다.

동시에 내부에 적이 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이제르트 후작이 혼자 힘으로 도망쳤을 리는 만무하지.”

“필시 이제르트 후작가와 내통하는 자가 우리 내부에 있다는 의미일 터!”

“빌어먹을, 이제는 내부의 적과도 싸워야 하다니?”

이제르트 후작군만으로도 골치가 아파오는데 내부에 이제르트 후작과 한통속인 자들까지 있다는 걸 생각하면 말 그대로 머리가 아파서 터질 지경이었다.

그런 혼란 속에서 문수르 역시 소식을 들었다.

‘피신하셨구나!’

이제르트 후작이 도주소식에 문수르는 미소를 지었다. 비단 문수르만 그런 건 아니었다.

“후작님을 구하기만 하면 되는군요.”

“빨리 움직이도록 합시다.”

“선봉을 제게 맡겨주시면 단숨에 왕성의 성벽을 무너뜨리겠습니다.”

이제르트 후작가의 모든 이들이 기뻐했다. 그들은 당장이라도 왕성을 향해 달려들 준비를 했다.

이제 걸릴 게 없었으니까.

이제르트 후작이 목숨을 잃을까봐 두려워할 필요도 없다. 오히려 반대로 지금 당장 왕성을 함락시키는 것이 이제르트 후작을 보다 확실하게 구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나 다름없었다.

사기가 올랐다.

이제르트 후작의 도주 소식에 모든 병사들과 기사들의 몸이 저절로 예열됐다.

이 순간!

‘조만간 온다.’

문수르는 다급하게 움직이지 않았다.

‘조금만 더 기다리면 노운이 온다.’

비장의 카드는 하나 더 있다. 필로스 왕에게 결정적인 한 방을 먹일 수 있는 확실한 카드가 있다.

바로 노운의 군대!

더군다나 노운은 말했다.

‘필로스 왕은 노운이 자신을 도와주는 줄 알 것이다. 때문에 노운의 군대를 맞이하는데 일말의 망설임도 없을 터.’

노운이 이곳가지 무사하게 오는 건 필로스 왕이 노운을 도우미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당연히 성문을 열 것이다.

노운의 군대에 대해서 필로스 왕은 일말의 저항감도 가지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노운의 군대가 왕성 안으로 들어가는 순간!

‘완승이다.’

낙승 정도가 아니다.

그 어떤 피해도 없이 왕성을 함락시키고, 필로스 왕과 제이머스 공작을 잡을 수 있다.

그 후에는?

‘내가 왕이 된다.’

모든 건 문수르의 시나리오대로.

문수르가 왕이 되고 모든 것을 정리할 것이다. 더 나아가 카라카크도 정리할 것이다.

그 후에는 깔끔하게 이 세계를 떠나면 된다.

‘좋아.’

문수르는 다시금 자신이 만든 시나리오를 복기했다. 혹여 부족한 점은 없는지, 실수한 부분은 없는지, 마치 원고를 검토하듯 자신의 계획을 검토했다.

그리고 노운의 군대가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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