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5화
<88화. 찬탈.>
1.
이제르트 후작은 감옥에서 수시로 소식을 듣고 있었다. 왕도에는 필로스 왕을 위한 이들만 있는 게 아니었다. 겉으로는 필로스 왕의 편인척 하지만 이제르트 후작을 돕는 이들도 있었다. 그들이 여러 연줄을 이용해 외부의 정보를 가져다주었다.
‘문수르 경.’
모든 걸 들었다.
‘그래, 문수르 경이 결단을 내렸구나.’
문수르, 그가 스스로를 카스트로 왕태자의 자식이라고 밝혔다는 것마저 들었다.
사실 그건 우스운 일이었다. 카스트로 왕태자를 곁에서 오랫동안 모신 이제르트 후작이기에 알 수 있다. 카스트로 왕태자의 나이와 활동 등을 고려하면 절대 문수르와 같은 자식이 있을 수 없다. 문수르도 그 사실을 모를 리 만무하다.
아니, 이 세상에서 이제르트 후작은 문수르의 진정한 정체에 대해서 알고 있는 몇 인간 중 한 명이다.
그렇기에 알 수 있었다.
‘문수르 경이 정말 가슴 아픈 결정을 내렸어.’
문수르는 전면에서 일을 처리했지만 본인을 이 세상의 일원으로 두지는 않았다.
언젠가 사라질 사람이니까.
그런 여지를 언제나 남겨두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 여지를 남겨두지 않은 것이다.
‘이번 일이 마지막이겠군.’
모든 걸 걸었다.
아마도 그건 이 세상을 떠나겠다는 각오를 배경에 둔 결정일 것이다. 콩탄 왕국의 모든 걸 정리한 다음, 그는 다시금 본래의 세계로 떠날 생각인 것이다.
그리고는 아마도 다시는 돌아오지 않겠지. 문수르의 성격을 생각하면 그러할 것이다.
이제르트 후작은 그런 문수르가 안쓰러웠다. 동시에 문수르의 의견을 언제든 존중해줄 생각이 있었다.
단지.
‘아쉽구나.’
한 가지 사실이 안타까울 뿐이었다.
‘이리아와 짝을 맺어주고 싶었는데.’
이리아.
이제는 대체 살아있는 건지 아니면 죽은 건지, 그조차 알 수 없는 처지가 되어버린 소중한 딸.
그러나 그런 이리아와 문수르가 이어지는 꿈은 지금도 꾼다. 이제르트 후작의 소원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이제르트 후작은 대단한 명성을 떨치거나 하고 싶은 생각이 별로 없었다.
단지 자신의 영지를 지키고, 영지 내의 영지민들이, 자신의 부하들과 수하들이, 가족들이 배를 곯지 않고 언제나 평화로운 삶 속에서 풍요로움을 누리면 충분하다. 분에 넘칠 정도의 금은보화 같은 건 오히려 줘도 사양하고 싶다. 그건 욕심을 부르고, 싸움을 부르고, 피를 부르니까.
그런 의미에서 이리아와 문수르가 맺어지는 것이 후작의 작위 따위보다 이제르트 후작에게는 더 소중했다.
‘그래, 이제 결단을 내려하지.’
하지만 지금 이 순간.
‘결정적인 순간 내가 인질이 되어서는 안 된다.’
이제르트 후작은 이제까지 가졌던 모든 미련을 버렸다.
죽음을 각오했다.
문수르가 결단을 내린 이 순간 이제르트 후작이 그 결단의 걸림돌이 될 수는 없으니까.
더군다나 단순히 한 개인을 위한 일이 아니다. 이제르트 후작가와 관련된 모든 이들의 미래가 걸린 일이다. 더 나아가 콩탄 왕국의 미래가 걸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일 앞에서 제 목숨만을 소중히 여기는 건 귀족의 도리가 아니다. 대의 앞에 기꺼이 희생할 수 있는 것이 바로 귀족의 의무이며 동시에 귀족만이 누릴 수 있는 대단한 권리였다.
그 권리를 행사한다.
‘그래, 이 대의를 위해 희생할 수 있다는 것만큼 아름답고, 숭고한 일이 있을까?’
이제르트 후작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2.
문수르는 이제르트 후작을 죽은 것으로 취급했다. 그렇게 하려고 했다.
하지만!
‘방법이 있다면 찾아보자.’
그래도 방법이 있는데 무조건 이제르트 후작의 목숨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혹시 모르니까.
문수르는 사람을 시켜서 이제르트 후작을 빼놓을 수 있는 방법을 찾아봤다. 백방으로 알아봤다.
‘아주 방법이 없는 건 아니야.’
그 결과 몇 가지 가능성 있는 방법을 찾기도 했다.
‘빼낼 수 있는 틈이 있다.’
필로스 왕은 필시 이제르트 후작군의 병력이 가시권에 들어오면 이제르트 후작을 상대로 협상을 하려고 할 것이다. 그러나 문수르는 그 협상을 받아들일 생각이 없다.
그 전에!
그 협상이 이루어지기 전에 이제르트 후작을 빼내야 한다. 그것만이 유일무이한 기회다.
그렇다면 어떻게 빼내야 할까?
‘사람들을 매수할 수는 있다.’
돈 그리고 몇 가지 루트를 이용해서 왕도 내 사람을 매수하는 건 어느 정도 가능하다.
그러나 사람을 매수한다고 해서 이제르트 후작을 백퍼센트 구할 수 있다는 건 아니다. 오히려 확률로 따지면 10퍼센트가 채 되지 않는다. 더불어 만약 이제르트 후작을 빼내려고 하다가 실패해서 들키게 되면 그 순간 이제르트 후작의 목숨은 없어지는 셈이다.
문수르는 고민했다.
그러나 어느 순간 느꼈다.
‘고민은 무의미해.’
선택지는 제한되어 있는 상황. 어차피 이제르트 후작의 목숨도 포기한 상황.
그렇다면 고민할 필요가 없다.
그냥 지르면 된다.
‘실행한다.’
3.
페스로 제국의 군대가 은밀하게 이동하기 시작했다. 병력의 숫자는 그다지 많지 않았다. 기가스 50대가 전부였다. 물론 기가스 50대란 병력은 절대치로 봤을 때는 엄청난 숫자지만 페스로 제국의 병력으로 놓고 봤을 때는 소소한 수준이었다.
문제는 기가스의 면면이었다.
모두가 최소 2배 급 기가스다. 그뿐만이 아니다. 2배 급 기가스를 업그레이드해서 만든 2.3배 급 이상의 기가스도 다수 있었다.
무엇보다!
“이렇게 모이는 것도 처음이군.”
“3배 급 기가스 3대 이상이 한 자리에 모이는 것도 정말 신기한 일이로군.”
3배 급 기가스가 있었다.
그것도 1대가 아닌 5대나!
그건 정말 보기 힘든 광경이었다. 3배 급 기가스들은 페스로 제국의 실세들에게만 주어졌으니까. 그리고 그 실세들은 이제까지 서로 황자들을 앞세운 채 파벌의 중심에 있었다. 적대적인 관계로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아니다.
콩탄 왕국을 놓고 벌인 황태자 위 싸움에서 모두가 패자가 됐으니가.
이황자가 황태자 위에 가장 가까운 인물이 되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황제가 곧바로 이황자를 황태자 위에 임명한 건 아니었다.
이런 상황에서 황제가 은밀하게 말했다.
콩탄 왕국으로 향하라고!
극히 제한된 최고의 실력자들로 구성된 병력을 모은 채 콩탄 왕국으로 이동하라고.
전쟁을 하라는 의미는 아니었다. 단지 최고의 실력자들이 모여 적은 숫자의 군대를 모은 채 콩탄 왕국으로 이동하라는 말만 했다.
더불어 이후 모든 일은 노운의 지휘에 따르라고 했다.
“노운 경, 대체 폐하의 심중이 무엇이오?”
개중에는 아히만트 백작도 있었다. 아히만트 백작은 너무 궁금해서 참을 수가 없었다. 너무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갔다. 콩탄 왕국과 막 전쟁을 끝낸 후인데 다시 전력을 모아서 콩탄 왕국으로 향하라니? 더군다나 전쟁을 하라는 것도 아니고 그냥 이동하라고 한다.
무언가 암약이 있긴 하다.
콩탄 왕국과 페스로 제국 사이에서 긴밀한 거래가 있었을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페스로 제국의 군대가 지금처럼 민감한 상황에서 콩탄 왕국의 영토를 소란 없이 밟는 것 자체가 불가능할 테니까.
혹자는 카이탄 황제가 필로스 왕의 편에 서는 게 아닌가, 하는 의견을 제시했다.
간단하다.
과거 필로스 왕이 제국의 힘을 빌려 왕위에 오른 것처럼, 지금도 제국의 힘을 빌려 이제르트 후작가라는 막강한 세력을 물리치려고 하는 것이다. 사실 그건 매력적인 제안이었다. 페스로 제국은 콩탄 왕국에 패배하며 엄청난 손해를 본 상황이다. 그런데 여기서 다시 필로스 왕이 알아서 제국에 고개를 숙인다? 먼저 제국의 속국이 되기를 자청한다?
아쉬울 게 없다.
아니, 바라던 일이다.
하지만 단순히 그렇게 상황을 보기에는 지금 상황이 너무 어지러웠다. 다른 무언가가 있다. 아히만트 백작은 바보가 아니다. 세상의 흐름 그리고 세상의 분위기를 모르는 양반이 아니다.
그래서 노운에게 물어봤다.
노운은 아히만트 백작을 보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폐하의 명에 따라 콩탄 왕국의 영토를 밟기 전까지는 그 어떤 것도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노운은 단호했다.
아히만트 백작은 신음만 흘렸다.
그러는 사이 그 병력들, 페스로 제국군의 정수라고 할 수 있는 그 군대가 콩탄 왕국으로 향하고 있었다.
4.
이제르트 후작.
그는 어느 순간 낌새를 느꼈다. 언제나 철통같았던 자신의 감시에 틈이 생긴 걸 느낀 것이다.
그 틈을 보는 순간 이제르트 후작은 길게 고민하지 않았다.
‘움직인다.’
이 틈.
필로스 왕의 함정일 수도 있고 혹은 문수르가 만들어준 천금 같은 기회일 수도 있다.
그러나 무엇이든 간에 이제르트 후작은 각오를 다진 상황! 죽어도 본전이다.
이제르트 후작이 잠기지 않는 감옥의 문을 열고 나왔다. 마침 자신을 감시하던 기사들이 잠시 동안 자리를 비운 상황. 이제르트 후작은 머릿속으로 감옥의 위치를 떠올렸다.
이제르트 후작은 감옥에 들어오는 순간부터 자신이 온 모든 길을 외우고 있었다.
그 정도는 할 줄 안다.
이제르트 후작이 이제까지 문수르의 말만 듣고 따르던 자였지만 그 전까지만 하더라도 테블스 산을 앞에 둔 이제르트 자작령을 수 년 동안 지킨 인물이었다.
무능력한 자가 아니다.
오히려 반대다.
이제르트 후작은 복잡하기 그지없는 지하 감옥 내에서 놀라울 정도로 올바른 길을 찾았다.
그리고 어느 순간!
“이제르트 후작?”
“어떻게 나온 거지?”
“잡아!”
이제르트 후작을 발견한 기사들이 달려들었다. 그 순간 이제르트 후작은 자세를 잡았다.
찰나였다.
기사들은 망설였다. 상대는 이제르트 후작. 적어도 당장 여기서 죽이기에는 너무 거물이 된 자다. 검을 제대로 잡지 않았다. 검을 함부로 휘두르지 않았다.
그 틈을 이제르트 후작은 귀신 같이 찾아냈다. 이제르트 후작의 주먹이 기사의 인중을 정확히 가격했다.
퍼억!
이제르트 후작의 주먹은 송곳처럼 기사의 인중을 꿰뚫었고 기사의 고개가 뒤로 크게 젖혀졌다. 남은 기사는 둘! 이제르트 후작은 그 순간 쓰러진 기사의 허리춤에 있는 검을 잽싸게 훔쳤다.
츠릉!
그리고 검을 꺼내 들고 기사들과 대치했다.
이 순간 이제르트 후작의 눈빛은 살벌한 빛을 내뿜고 있었다.
5.
문수르는 소식을 기다리지 않았다.
‘주사위는 던졌다.’
할 만큼 했다.
물론 할 만큼 했다는 말 하나로 책임을 지지 않을 생각은 아니었다. 모든 책임을 질 것이다.
문수르는 고개를 들었다.
‘이제 간다.’
이제르트 후작은 이제 어떤 식으로든 움직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건 전쟁뿐이다.
“5일 후 밤.”
날짜도 정해졌다.
“왕성으로 전력으로 진격합니다.”
이제까지 멈춰있던 병력들.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하기 위해 왕도 근처에서 주둔하고 있던 군대들.
그들이 5일 후 움직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