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3화
4.
왕도는 소란스러웠다. 하지만 그 중심에 위치한 필로스 왕은 조용하기 그지없었다.
“전하, 이제르트 후작이 잘못을 했다 하여도 이런 식이면 상황이 좋지 못하게 흘러가옵니다.”
“보다 뚜렷한 증거가 필요합니다.”
필로스 왕을 믿고 따르는 귀족들은 수시로 필로스 왕을 찾아가 읍소를 했다. 그들도 다급했다. 나름 필로스 왕을 믿고 필로스 왕의 편에 섰는데 지금 돌아가는 왕국의 정세는 필로스 왕에게 굉장히 불리한 방향으로 기울어지고 있었으니까.
필로스 왕이 무리하게 이제르트 후작을 가두면서, 그 전까지만 하더라도 나름 저울질을 하던 중립 귀족들이 갑작스레 이제르트 후작의 편에 서기 시작했다.
까놓고 말해서 필로스 왕이 정당한 정치가 아니라, 제 마음대로의 정치, 즉 폭군정치를 시작한다면 귀족들 입장에서는 자기 이익을 위해서라도 그에 반대되는 위치에 설 수밖에 없었으니까.
하물며 필로스 왕이 반역죄랍시고 내놓은 이제르트 후작과 관련된 증거들은 빈곤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이쯤 되면 거의 노골적이라고 할 수 있다.
“필로스 왕이 이제르트 후작을 견제하기 위해 정말 하수를 꺼내들었구나.”
“혹여 필로스 왕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이제르트 후작을 억지로라도 처형시킨다면 필로스 왕의 자리는 오래가지 못할 것이다.”
필로스 왕이 억지를 써서 이제르트 후작의 기를 죽이기 위해 수작을 부렸다! 지금 정세에 대한 콩탄 왕국 그리고 주변국의 평가는 딱 이러했다.
더 나아가 모두가 눈치를 채고 있었다.
“필로스 왕은 절대 이제르트 후작을 처형하지 못한다.”
“필로스 왕이 이제르트 후작을 처형하는 순간이 왕위의 주인이 바뀌는 시작점이 될 것이다.”
필로스 왕은 자신의 지위를 위해서라도 이제르트 후작을 죽이지 못한다.
필로스 왕은 그저 기다릴 뿐이다. 이제르트 후작이 이 상황에서 먼저 고개를 숙이는 일을.
반대로 말하면 이제르트 후작이 끝까지 고개를 숙이지 않고 버티면 결국 승자는 이제르트 후작이 되는 것이다.
모두가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종국에 승자는 이제르트 후작이 되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들의 예상이, 세상이 예상이 빗나갔다.
5.
문수르는 하늘을 봤다.
‘왕이 된다.’
갑작스레 세운 계획이다. 솔직히 말해서 문수르는 이곳, 케르빈 월드에 온 이후로 단 한 번도 왕이 되고 싶었던 적이 없다. 그런 꿈도, 상상도 해본 적이 없다. 더 나아가 무슨 대단한 작위를 받는 것조차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는 그저 이제르트 가문을 보필하여 이제르트 가문을 반석에 올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제 왕위를 찬탈해야 하는 자가 됐다.
‘거짓된 신분.’
모든 것은 거짓이다.
이제부터 문수르가 내세우는 모든 것은 진실이 아니라 거짓이다. 새빨간 거짓말이다.
그 거짓을 들고 문수르는 왕위에 오르는 것이다.
‘쓰리다.’
장밋빛은 없다. 눈에 보이는 건 그저 추잡하기 그지없는 시커먼 어둠뿐이다. 무수히 많은 자들이 피를 흘릴 것이다. 거짓뿐인 명분을 위해서 말이다. 케르빈 월드의 역사에도 거짓이 진실마냥 포장되어 기록되겠지. 후세는 그 거짓을 진실로 믿을 것이고.
물론 그렇게 먼 미래의 일을 문수르가 신경 쓸 필요는 없을지도 모른다.
죽은 자는 말이 없고, 생각 또한 하지 않으니까.
그러나 걱정이 됐다.
문수르는 다른 차원의 사람이다. 그런 그가 과연 케르빈 월드를 망쳐도 되는 걸까?
‘빌어먹을.’
모르겠다.
문수르는 지금 자신이 무슨 일을 하는지, 무엇을 위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아니, 어쩌면 문수르는 해야 할 모든 일을 한 것일 수도 있다.
노운도 말했다.
노크맨의 임무는 끝났다고. 이제르트 후작가는 반석에 올랐고, 이제 노크맨이 굳이 이제르트 후작가를 위해 무언가를 할 필요는 없다고. 더군다나 한석균 회장마저 죽었다.
‘내가 더 이상 여기에 있어도 되는 걸까?’
그 모든 것들이 문수르를 복잡하게 만들었다.
그 순간.
“문수르 경.”
“마구르. 무슨 일입니까?”
“전부 모였습니다.”
마구르가 문수르를 찾아왔다. 마구르의 등장에 문수르는 모든 고민을 접었다.
‘그래.’
마구르를 보니 한 가지는 확실히 알 수 있겠다.
‘이들을 위해서라도 내가 전진해야 한다.’
노크맨의 임무가 아니더라도, 한석균 회장의 명령이 아니더라도 문수르는 본인을 위해서 지켜야 할 것이, 해야 할 일이 있다.
6.
모든 이들이 모였다.
엘프들의 대표와 드워프들의 대표 그리고 이제르트 후작가의 중요한 기사들까지.
그들 앞에서 문수르는 짧게 말했다.
“이제르트 후작님을 구해야 합니다.”
반문은 없었다. 모두가 제 자리에서 주먹을 불끈 쥐며 문수르의 말에 동의를 표할 뿐이었다.
“하지만 이제르트 후작님을 구한다고 해서 모든 것이 끝나지 않습니다. 결국 주사위는 던져졌습니다. 필로스 전하는 이제르트 후작가를 적으로 규정했습니다. 더 이상 이제르트 후작가와 타협할 생각이 추호도 없다는 걸 이번 일로 증명하셨습니다.”
그 말에는 대부분 이들의 표정이 굳었다.
제 아무리 이제르트 후작가가 강해졌다고 해도 결국 콩탄 왕국의 귀족인 이상 필로스 왕의 이름 앞에서는 자유로울 수 없으니까.
이제르트 후작을 구한다는 건 그런 필로스 왕과 싸운다는 것이다.
그러나 말이 싸움이지, 귀족 한 명이 왕과 싸울 경우 과연 무엇을 해야 승리했다 말할 수 있을까?
필로스 왕을 죽인다?
그래, 그것이 확실한 승리의 방법이 되겠지.
그러나 왕이 없는 국가가 과연 국가라고 할 수 있을까? 그 후의 후폭풍은? 그건 어찌할 생각인가? 왕을 죽인다는 건 말 그대로 공멸을 택하는 것이다. 동귀어진의 수법이다.
여기 모인 자들.
지금은 이루 말할 수 없는 풍요를 누리고 있지만 몇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콩탄 왕국에서…… 아니 세상에서 가장 궁핍하고 가난하게 그리고 나약하게 살아가던 자들이다.
약자들이었다.
이루 말할 수 없는 약자들이었다.
때문에 그들은 다시금 그때로 돌아가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나약해진 때로, 아무 것도 없던 때로 돌아가는 것을 원치 않았다.
문수르도 안다.
‘이제 이제르트 후작가는 잃을 것이 너무 많다.’
과거 이제르트 후작가는 막말로 잃을 게 없었다. 죽기 아니면 살기, 둘 중 하나였다.
때문에 과감한 결단이 가능했다.
그러나 이제는 아니다.
모두가 느끼고 있다. 특히 페스로 제국과의 전쟁이 끝나고 이제르트 후작가에 평화와 영광이 가득 차면서 다급하게 살아왔던 이제르트 후작가의 모든 이들이 뒤를 돌아보며 숨을 돌릴 수 있는 기회가 왔다.
문수르는 그걸 망쳐야 한다.
지금 이 순간, 다시금 이들을, 눈앞에 있는 자들을 격전의 소용돌이에 던져야 한다.
“이제부터 저는 여러분들에게 진실을 밝히고자 합니다.”
말과 함께 문수르, 그가 머리칼을 만졌다. 그러자 그의 검은 머리칼에서 재 비슷한 것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러자 모습을 드러낸 건 상쾌하기 그지없는 금발머리였다.
모두가 놀랐다.
설마 문수르의 머리색이 금발이었다니?
그러나 놀라운 건 그뿐만이 아니었다. 문수르가 눈을 깜빡이며 손으로 눈동자 근처를 훔치자 푸른 빛깔의 눈동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검은 머리칼 그리고 검은 눈동자…… 문수르의 상징이었던 두 가지 요소가 단숨에 사라졌다.
대신에 벽안의 금발 사내만이 자리하고 있을 뿐이었다.
“나는…….”
이윽고 문수르가 입을 열었다.
“카스트로 왕태자의 아들입니다. 피스언, 그것이 나의 진짜 이름입니다.”
7.
이제르트 후작가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왕도로 떠났던 이제르트 후작가의 병력도 적은 건 아니었지만 이제르트 후작가에 여전히 남아있는 병력의 숫자는 일개 영주가 보유했다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거대했다.
그 병력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노골적인 움직임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필로스 왕이 파악할 수 있을 정도로 노골적인 움직임!
당연한 말이지만 그건 도발이었다.
“드디어 이제르트 후작가가 움직이는군.”
“이제르트 후작가가 여기서 필로스 왕 앞에 고개를 숙일 필요는 하나도 없지.”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작금의 이제르트 후작이 목숨을 바친다면, 그 대가로 이제르트 후작가는 콩탄 왕국의 절대적인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존재가 된다.”
“내가 이제르트 후작이라면 차라리 이 순간 목숨을 버리는 선택을 하겠어.”
“이제까지 언제나 무시당하고, 핍박당하던 이제르트 후작가가 기어고 이 짧은 순간 만에 콩탄 왕국을 집어 삼킬 수 있는 기회를 얻었구나!”
그런 이제르트 후작가의 움직임에 대해서 많은 이들이 감탄을 아끼지 않았다.
필로스 왕의 왕군은 강하다.
까놓고 말해서 일개 영주의 군대가 왕군의 전력을 넘어서는 건 있을 수가 없다.
하지만 이제르트 후작가는 다르다.
“이제르트 후작가의 병력은 필로스 왕의 왕군을 넘어선다.”
이제르트 후작가의 병력은 당장 페스로 제국에 들어간다고 해도 최고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엄청나다.
무엇보다 드래곤 파이터의 존재는 절대적이다.
콩탄 왕국과의 전쟁에서 페스로 제국이 내놓지 않은 게 있다. 바로 3배 급 기가스들이다.
하지만 그 사실에 반해서 콩탄 왕국이 거둔 승리에 대해서 이러다할 말이 없는 건 드래곤 파이터의 존재 때문이다. 혹여 3배 급 기가스들이 전쟁에 참가했다고 해도, 과연 페스로 제국이 승리를 장담할 수 있었을까?
그 의문에 사람들은 대부분 비슷한 대답을 한다.
“이제르트 후작가가 어떻게 드래곤 파이터라는 희대의 기가스를 보유하게 됐는지는 알 수 없지만 드래곤 파이터의 위력은 절대적이다. 페스로 제국의 3배 급 기가스들을 뛰어넘는다!”
드래곤 파이터는 최강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드래곤 파이터의 기가스 파일럿, 문수르는 자타가 공인하는 최고의 기가스 파일럿이다.”
그 드래곤 파이터를 움직이는 문수르, 그는 최고다.
이제 그는 대륙 최고의 기가스 파일럿을 논할 수 있을 정도의 명성과 업적을 쌓았다.
반면 필로스 왕군에는?
비슷한 전력은 둘째 치고 진격하는 드래곤 파이터를 상대로 필로스 왕은 어떠한 대항마를 내놓을 수 있단 말인가?
제이머스 공작?
아니다.
제이머스 공작이 뛰어난 기사이며, 오러 마스터인 건 맞지만 그는 최강의 기가스 파일럿은 아니다. 무엇보다 제이머스 공작이 가진 기가스는 3배 급 기가스조차 아니다. 2배 급 기가스를 최대하 업그레이드 시키긴 했지만 3배 급에 비해서는 여전히 부족하기 그지없는 기가스다.
하물며 3배 급 기가스를 뛰어넘는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드래곤 파이터를 상대로 제이머스 공작이 승부를 낼 수 있을까?
결국 2배 급 기가스 다수가 붙어야 한다.
그러나 만약 그러고도 승리를 거두지 못한다면? 2배 급 기가스 다수가 한 번에 드래곤 파이터에 덤벼들었음에도 패배한다면?
패배다.
그 전쟁은 더 이상 고려할 가치가 없을 정도로 필로스 왕의 참패가 되는 것이다.
때문에 많은 이들은 생각했다.
“필로스 왕의 군대와 이제르트 후작군이 1대1로 붙는 일은 없다.”
“필로스 왕은 필시 이번 일은 어떻게든 키워서 파벌 항쟁으로 몰아 붙이겠지.”
정면승부는 없다.
필로스 왕에게 정면승부는 말 그대로 패배로 가는 지름길이나 다름없었으니까.
콩탄 왕국을 반으로 가르는 파벌항쟁이 이루어질 것이다. 이제르트 후작조차도 쉽사리 전쟁을 일으키기 힘든 상황을 만들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 소식이 그 모든 예상들을, 당연하리라 생각됐던 그 예상들을 부정했다.
문수르, 그가 자신의 정체를 세상에 공개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