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2화
<87화. 왕위.>
1.
이제르트 후작은 감옥에 있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의 대우가 나쁘다는 건 아니었다. 감옥이지만 모든 것이 주어졌다. 단지 이제르트 후작가의 기사들이 그의 곁을 지키지 못한다는 것만 제외하면 딱히 왕궁에서의 생활과 차이점을 느끼지 못할 정도였다.
더군다나 이제르트 후작은 언제나 호사만을 찾아 누리는 귀족들과는 차원이 다른 인물이었다.
‘내가 이곳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은 무엇인가?’
이제르트 후작은 이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당황하거나 분노하기보다는 침착하게 상황을 분석했다.
‘내 죄목이 반역죄라니?’
반역죄!
모든 귀족들이 두려워하는 죄목이다. 그 누구도 반역죄인으로 처형 당하는 걸 원치 않는다. 때문에 대부분의 귀족들이 반역죄라는 말만 나오면 신경질적이다 못해 감정적인 대응을 하고는 한다. 하지만 이제르트 후작은 아니었다.
‘흑마법사 카라카크와 내가 손을 잡았다는 증거는 없다. 그 외에 내가 반역을 도모했다는 증거 역시 제시할 수 없을 터.’
냉정하게 보자.
흑마법사 카라카크! 놈과는 이제까지 보이지 않는 전쟁을 해왔다. 그런데 놈과 손을 잡았다고? 그것을 빌미로 반역죄로 이제르트 후작을 처형하는 건 불가능하다.
증거가 없으니까!
제 아무리 필로스 왕이라고 해도 확실한 증거가 없는 상황에서 귀족을 반역죄 명목으로 처형하는 건 불가능하다. 아니, 가능은 하다. 단지 그런 짓을 했다가는 그 어떤 귀족도 왕의 권한을 인정하지 않겠지. 제 목을 언제 칠지 모르는 폭군이 머리 위에 있는 걸 허락할 정도로 귀족들은 바보도 아니고, 힘 없는 약자는 더더욱 아니다.
결국 이제르트 후작은 핵심을 꿰뚫었다.
‘시간 끌기다.’
이 모든 것.
시간을 끌기 위한 수작이다. 필로스 왕이 정치적 손해를 감수하고 이제르트 후작가의 시간을 끌려고 하는 것이다.
이제르트 후작의 고민은 여기서부터 시작이었다.
‘무엇을 위해?’
과연 필로스 왕은 무엇을 위해 자신의 시간을 빼앗으려고 하는 걸까? 그것도 적지 않은 정치적 손해를 감수하면서?
‘문수르 경의 말처럼 필로스 왕과 제이머스 공작은 카라카크와 손을 잡았다.’
이 순간.
‘아!’
이제르트 후작의 머릿속이 번뜩였다.
‘카라카크가 이곳에 없구나.’
만약 카라카크, 놈이 이곳에 있었다면 놈은 모습을 드러냈을 것이다. 놈이 등장해서 몇 가지 연출을 한다면 이제르트 후작이 카라카크와 손을 잡은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 건 얼마든지 가능할 테니까.
하지만 카라카크는 그러지 않았다.
자신을 감추기 위해서?
자신을 감추고자 했던 놈이면 애초에 세상에 등장하지도, 흑마법사가 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놈이 없는 거다.
지금 콩탄 왕국에 흑마법사 카라카크가 자리를 비우고 있는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기회다.
‘카라카크의 공백은 큰 기회다.’
어찌 됐건 카라카크가 가진 능력은 엄청나다. 일개 왕국조차 흔들 정도니 무슨 설명이 필요할까? 아무리 많은 힘을 잃었다고 해도 카라카크가 가진 단신의 힘! 그의 마법만으로도 한 나라를 공포에 몰아넣기에는 절대 부족하지 않다.
그런 그가 없다는 것.
‘속도가 생명이다.’
여기서 이제르트 후작은 정말 단호한 결단을 내렸다. 그건 다름 아니라…….
‘필로스 전하를 폐위한다. 콩탄 왕국을 지키기 위해서는 이제는 이 방법이 유일한 방법이다.’
당장 전력을 이끌고 왕도를 공격해 필로스 왕을 왕위에서 폐위시키는 것!
‘문수르 경 고민하지 마시오. 내 목숨은 버려도 되는 카드, 내 목숨이 아닌 콩탄 왕국의 미래와 이제르트 가문의 모든 이들을 우선하시오.’
2.
노운에게 연락을 했다. 노운에게 연락을 하는 방법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어스 월드에서 온 그 둘에게는 너무나도 편리한 통화 시스템이 얼마든지 있었으니까.
연락은 금방 이루어졌다.
- 먼저 연락을 할 줄은 몰랐는데.
노운의 말에 문수르는 제법 많이 준비했던 단어들, 표현들을 그냥 꿀꺽 삼켜버렸다.
통하지 않는다.
노운, 놈의 목소리를 들으니 알 수 있다. 녀석에게는 그 어떤 잡설도 통하지 않을 것이다.
단도직입!
지금 필요한 건 바로 그것이었다.
“필로스 왕을 폐위시킬 생각입니다.”
문수르가 본론을 말했다.
- 오, 제대로 하는데?
노운은 짧게 감탄했다.
“동시에 당신의 거래를 받아들이겠습니다. 이 세계는 당신이 가지시지요.”
- 말이 갑자기 빠르게 통하는군.
노운의 제안. 자신이 이 세계의 지배자가 될 테니 문수르는 본래 세계인 어스 월드로 떠나라는 제안이다.
- 그런데 그거 알고 있어? 방금 전 롬에게 말해보니까 내 역할이 끝났다는 거야.
“무슨 소리입니까?”
- 노크맨의 역할이 끝났다는 거지. 이제르트 가문이 후작가가 되는 순간 이야기가 끝났다고.
“아…….”
그 순간 문수르는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로이드.”
- 죄송합니다, 주인님. 묻지 않으시기에…….
문수르는 아차 싶었다.
드디어 끝난 것이다. 이제르트 가문을 반석에 올리는 퀘스트가, 한석균 회장과의 거래가 끝난 것이다. 이제 문수르가 무엇을 하든, 제지할 사람이 없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반가운 일이다.
그러나 문수르 입장에서는 최악이었다.
‘노운.’
결과적으로 노운, 저 포악하고 음흉한 짐승의 목을 잡고 있던 유일무이한 목줄이 사라졌다는 의미니까.
- 내가 왜 이런 말을 꺼낸 지 알겠지? 막말로 내가 굳이 이번 일을 도와줄 필요는 없다는 거야. 즉, 난 아쉬울 건 없다. 이제르트 후작가가 이제 어떻게 되든 내 알바 아니니까.
“그럼 거래는 못하는 거겠군요.”
- 당연히 아니지. 그냥 튕겨본 것뿐이야. 거래를 원하는 건 내 쪽이니까. 길게 대화하지 말라고. 나한테 도움을 요청했다는 건 제국의 힘이 필요하다는 거겠지? 시나리오를 불러봐.
문수르의 시나리오는 간단했다.
페스로 제국에서 발표하는 것이다. 필로스 왕과 제이머스 공작이 카라카크와 손을 잡았다고 말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당연히 페스로 제국이 패전에 대한 책임을 콩탄 왕국에 떠넘긴다고 생각할 것이다.
여기서 이제르트 후작가가 말하는 것이다. 이제르트 후작가는 카라카크와 손을 잡은 적이 없으며 제이머스 공작과 필로스 왕이 카라카크와 손을 잡았다고., 그럼 당연히 이제는 진실공방이 시작될 것이고, 진실공방이 시작됨과 동시에 콩탄 왕국은 두 개의 세력으로 나뉠 것이다.
여기서 페스로 제국이 이제르트 후작 쪽에 힘을 실어준다면?
제국은 결국 제국이다. 콩탄 왕국과의 전쟁에서 많은 피해를 입었지만 제국의 저력은 여전히 엄청나다.
더군다나 필로스 왕은 제국의 힘을 이용해 왕위에 오른 자!
또 다른 자가 제국의 힘을 이용해 왕위에 오른다고 해서 특별하게 여길 필요는 없다.
- 그럼 누구를 왕위에 오를 생각이지?
노운과 문수르가 손을 잡으면 간단한 일이다.
원하는 자를 왕위에 올리는 것쯤은 말이다. 그렇다면 그가 누가 되어야 할지, 그게 핵심이다.
“제가.”
- 응? 뭐라고?
그리고 문수르가 내놓은 대답.
“제가 왕위에 오를 것입니다.”
3.
문수르.
그는 왕위에 대한 욕심이 하나도 없었다. 왕이 되고픈 생각도 없었고 혹여 된다고 해도 오히려 거절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아니었다.
‘내가 최선이다.’
지금 상황에서 어설픈 자를 왕위에 올리는 것보다 문수르 본인이 왕위에 오르는 게 최선이다.
정확히 말하면 정해진 시간 내에, 그리고 가장 빠르게 콩탄 왕국의 상황을 정리할 수 있는 방법은 그것뿐이었다.
더불어 문수르에게는 나름 자격이 있었다.
- 왕이 애들 장난도 아니고, 최소한 왕가의 핏줄이 섞였다는 명분이 있어야 소란이 적을 텐데? 새로운 왕조가 되겠다, 이건가?
“제 출신성분은 모호하지요.”
- 그렇지. 우린 다른 차원에서 왔으니까.
“적당히 출신을 각색하면 됩니다. 더군다나 저에 대해서 몇 가지 소문도 있습니다.”
콩탄 왕국의 미스터리 중 하나.
과연 콩탄 왕국의 영웅 문수르의 출신성분은 어떠한가? 이에 대해 많은 가설들이 있었다.
누군가는 그저 비루한 출신이라 말하는 자들도 있었지만 가장 그럴싸한 가설 중 하나는 바로 출신을 밝힐 수 없는 고귀한 핏줄의 계승자란 가설이었다.
출신을 밝힐 수 없는 핏줄의 계승자.
여기에 카스트로 왕태자의 왕위계승을 주장하며 끝까지 카스트로 왕태자를 향한 충심을 지킨 이제르트 후작.
그런 이제르트 후작가에서 마치 연기처럼 등장한 문수르의 존재.
그리고 이제르트 후작의 이루 말할 수 없는 성세!
이 모든 이야기들을 적당히 버무린다면?
그렇다.
문수르, 그는 다름 아니라 카스트로 왕태자의 숨겨둔 아들 중 한 명일 숟 있다!
물론 가설이며 소문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래도 충분히 그럴싸한 이야기였다. 더군다나 이곳, 케르빈 월드는 왕족은 선택 받은 존재라는 느낌이 지배적이다. 즉, 신에게 선택 받았다고 볼 수밖에 없을 정도로 엄청난 능력을 가졌다는 사실이 문수르가 선택 받은 존재로 보이게 만들어주는 것이다.
몇 가지 수작만 부리면 된다.
- 재미나군.
이야기를 들은 노운은 묘한 표정을 지었다.
- 설마 처음 이 세계에 올 때부터 염두에 둔 계획이었나? 응? 처음부터 왕이 될 선택지도 마련해두었던 건가?
“아닙니다.”
이건 문수르 역시 우연찮게 떠올린 시나리오였다. 아마 문수르가 소설가가 아니었다면 쉽사리 떠올리지 못했을 것이다.
물론 문수르가 이 사실을 밝히면 모두가 그 사실을 믿지는 않을 것이다. 문수르가 허무맹랑한 소리를 한다고 손가락질 하는 자들도 굉장히 많을 것이다.
그러나 결국 이 세계는 힘이 지배하는 세계 아닌가?
더군다나 문수르가 자신의 편에 선 귀족들에게 충분한 대가를 약속해주면 그들은 문수르의 편이 되어줄 것이다.
여기에 마지막으로 페스로 제국이 나서서 문수르의 존재를 인정해준다면?
콩탄 왕국 최강의 세력인 이제르트 후작가와 페스로 제국이 힘을 합쳐 문수르의 즉위를 도와준다면?
가능하다.
못할 건 없다.
노운 역시 문수르가 밝힌 시나리오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허점은 분명 많다. 하나하나 짚고 넘어가면 정말 허술하기 짝이 없는 부분들이 넘치는 시나리오다.
하지만 그럴싸하다.
대충 보면 충분히 그럴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 정도로 말이다.
- 왕이 된 후에는?
그렇기에 노운은 다음 이야기를 했다. 왕이 된 후의 이야기를 말이다.
즉, 노운은 문수르의 시나리오에 맞추어 연기를 해주겠다는 의미였다.
“적당한 주변정리.”
노운이 문수르의 부탁을 들어주면 당연히 그 후에는 문수르가 노운의 부탁을 들어줘야 한다.
기브 앤 테이크.
“그리고 카라카크를 처치한 다음.”
왕이 된 후에 콩탄 왕국을 바꿀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무슨 민주주의 실현이니, 그런 말도 안 되는 이상향을 지껄일 생각은 없다. 단지 이제르트 후작가에 유리한 방향으로, 지금의 이제르트 후작가가 몇 십 년 후에도 지금처럼 남을 수 있도록 환경만 조성할 것이다.
더불어 그와 동시에 카라카크를 처치할 것이다. 어떤 수단과 방법을 써서라도 놈을 처치할 것이다.
그리고 카라카크가 죽으면!
“곧바로 이 세계를 떠나겠습니다.”
케르빈 월드를 떠날 것이다.
일말의 망설임도, 미련도 두지 않은 채 노크맨의 역할을 마칠 것이다.
- 좋아.
노운이 그 조건마저 받아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