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1화
10.
필로스 왕과 제이머스 공작.
그 둘이 한 자리에 모였다.
콩탄 왕국의 최고 실세들 두 명이 모이는 자리인 만큼 그 분위기가 예사 분위기가 아닌 건 당연한 일이었지만, 그 둘이 모인 자리의 분위기는 느낌이 좋지 못했다.
칙칙하고 어두컴컴했다.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말이다. 마치 늪에 빠져 머리까지 잠기게 된다면 눈에 보이는 풍경이 이러할까? 숨이 절로 막히는 곳이었다.
그곳에서 필로스 왕은 말했다.
“이제르트 후작이 오는군.”
“이제 주사위는 던져졌지.”
제이머스 공작의 대답. 그 대답이 이상했다. 제이머스 공작은 마치 필로스 왕과 동등한 위치의 사람인것마냥 말을 뱉고 있었다. 그 누구도 예상치 못한 광경일 것이다.
그러나 이곳엔 아무도 없었다.
오직 그 둘만을 제외하면 말이다.
“이제르트 후작을 처치한다.”
“모든 것은 그분의 뜻대로.”
말을 뱉는 그 둘의 눈빛은 음산하게 빛나고 있었다.
11.
마구르가 영지에 돌아왔다. 떠났을 때는 그저 보통의 수레와 마차 정도만을 타고 갔던 마구르가 돌아왔을 때에는 수십 대가 넘는 수레를 꼬리에 단 채였다.
“거절을 해도해도 이렇게 남았습니다.”
마구르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건 선물이었다. 마구르가 페스로 제국을 제외한 국가들을 오고가며 외교활동을 하면서 받은 선물 말이다.
물론 마구르는 대부분 거절했다. 그 선물의 의미를 모를 리가 없었으니까. 그냥 보통 경우에서 선물이라면 주는 걸 받으면 된다고 하지만 외교의 세계에서는 아니다. 받으면 줘야 한다. 그게 바로 외교에서의 선물이 가지는 절대적 가치였다. 많이 받으면 많이 줄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거절할 수 없는 선물도 외교의 세계에서는 있는 법이다.
문수르는 그 선물들을 보며 마음이 편해지기보다는 오히려 한숨부터 먼저 나왔다.
‘지금 상황에서는 결국 외국의 힘을 빌릴 수밖에 없지만.’
골치 아픈 일이었으니까.
‘이 선물을 준 인간들의 기호를 파악하고 그에 맞춰서 적당한 보답을 만드는 건…… 상상만으로도 현기증이 나는 일이군.’
일거리가 더 늘어버린 셈이다. 가뜩이나 일이 많아 죽을 것 같은 문수르 입장에서는 그냥 죽고 싶은 심정이다.
하지만 마구르의 얼굴을 보니 그나마 속이 편했다.
“마구르가 무사해서 다행입니다.”
“예?”
마구르는 자신을 보며 미소 짓는 문수르를 보며 살짝 울컥했다. 자신을 이렇게 걱정해주는 모습이라니?
“자.”
그러나 그런 마구르에게 문수르는 거침 없이 선물을 줬다.
“이건 제 선물입니다.”
“이게 뭡니까?”
“서류입니다.”
무지막지한 서류뭉치.
“미안한 소리지만 지금 당장 본업에 복귀해줘야겠습니다. 어지간한 건 그냥 검토하고 알아서 판단을 내리세요.”
그 말에 마구르는 어색한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어쨌거나 마구르는 훌륭한 일꾼이었다. 적어도 문수르가 인정할 정도로 말이다. 더불어 여러 경험을 이룩한 마구르의 시선은 문수르와 비슷해졌다. 문수르가 가장 원하는 인재가 된 것이다.
하지만 마구르가 왔다고 해서 일거리가 줄어든 건 아니었다.
‘테블스 산, 이번 기회에 아주 그냥 싹 밀어버려야겠어.’
일거리는 계속 생겨났다.
그러나 이런 문수르의 노력 때문에 이제르트 후작가에는 큰 소란이 일어나지 않았다. 더불어 그 어떤 영지보다 빠르게 안정을 되찾기 시작했다. 그렇게 이제르트 후작가에 새로운 겨울이 오기 시작했다.
12.
첫 눈이 내렸다.
문수르는 굳은 표정으로 이제르트 후작의 집무실에 앉아있었다. 그런 문수르의 곁에는 아무도 없었다. 문수르는 그저 고독하게 혼자서 앉아있을 뿐이었다.
단 한 명.
“로이드.”
- 예, 주인님.
“시뮬레이션을 시작한다. 지금 당장 이제르트 후작가의 전병력을 동원했을 경우 콩탄 왕국의 왕군과 제이머스 공작가의 병력을 상대로 승리할 가능성. 모든 경우의 수를 고려해라.”
- 알겠습니다.
로이드만이 지금 문수르의 곁에 있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빌어먹을.’
그 순간 문수르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필로스 왕, 그래 이런 식으로 아주 막 나가겠다, 이거지?”
필로스 왕, 그가 먼저 주먹을 날린 것이다.
이제르트 후작, 그가 왕도에 인질로 잡혔다.
13.
이제르트 후작이 왕도에 오르는 순간까지만 해도 딱히 문제는 없어 보였다. 그 누구보다 큰 업적을 세운 이제르트 후작의 등장이었고, 왕도의 모든 이들은 이제르트 후작을 찬양했다.
더불어 필로스 왕과 미리 와서 대기하고 있던 제이머스 공작 역시 이제르트 후작을 환대했다.
그 후 이루어진 몇 가지 대화들.
처음에는 잘 진행됐다. 이제르트 후작의 제안에 필로스 왕은 이러다할 반대를 하지 않았다. 엘프와 드워프에 대한 일도 잘 처리됐고, 그 외에도 필로스 왕은 이제르트 후작이 놀랄 정도로 이제르트 후작가에 대한 배려를 해주었다., 그 소식을 거의 실시간으로 듣고 있던 문수르는 필로스 왕이 이제르트 후작가와 반목을 하기 보다는 화해의 제스처를 취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할 정도였다.
어쨌거나 신나게 퍼주겠다는데 마다할 이유는 없었다.
거기서 문수르도 긴장을 살짝 풀었다. 하물며 정말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영웅대접을 받는 이제르트 후작과 그의 기사들의 마음도 풀어질 수밖에. 계속되는 파티는 기사들이 가진 긴장의 끈을 조금씩 녹였다. 한 번 녹아버린 긴장의 끈은 쉽게 잡히지 않았다. 포비어조차 이제르트 후작의 곁을 지키지 못하는 시간이 길어질 정도였으니, 다른 기사들은 두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그러다가 일이 터진 것이다.
필로스 왕, 그가 말도 안 되는 명분으로 이제르트 후작을 감옥에 투옥시킨 것이다.
그 명분이라는 것.
“이제르트 후작은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극악무도한 흑마법사 카라카크와 손을 잡고 콩탄 왕국을 무너뜨릴 간악한 계획을 세웠다. 이에 짐은 이제르트 후작가에게 반역죄를 선고한다.”
웃기지도 않는 일이었다
이제르트 후작가가 카라카크와 손을 잡았다는 것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이제르트 후작과 이제르트 후작을 지원하는 귀족들은 반발했다.
증거!
그들은 증거를 요구했다.
반역죄란 게 그냥 왕이 마음에 안 드는 귀족이 있다고 해서 내릴 수 있는 게 아니다. 막말로 필로스 왕은 과거에 이제르트 후작이 자신의 즉위를 반대했음에도 이제르트 가문에 반역죄를 내리진 못했다. 증거가 없었으니까. 때문에 다른 방법을 써서 이제르트 가문을 무너뜨렷을 뿐이다.
그런데 지금 이 순간 이제르트 후작에게 반역죄를 선고한 것이다. 그것도 아무런 증거 없이 카라카크와 손을 잡았다는 이유 하나로! 만약 여기서 이제르트 후작이 혹여 필로스 왕의 손에 목이 떨어진다면 그건 필로스 왕의 왕위가 공격 당해도 이상할 게 없는 대사건이 될 게 분명했다. 왕이 자기 마음에 안 드는 귀족을 제멋대로 반역죄의 굴레를 씌어 죽이는데 다른 귀족들이 가만히 있을 리 만무하지 않은가? 심지어 필로스 왕에게 우호적인 귀족들마저 반기를 들 게 뻔한 상황이었다.
증거가 필요했다.
필로스 왕은 자신의 말을, 자신이 뱉은 말에 대한 책임을 질 수 있는 증거가 필요했다.
그러나 그 증거는 나오지 않았다.
필로스 왕은 그저 이제르트 후작을 계속해서 감옥 속에 가두고만 있을 뿐이었다.
콩탄 왕국의 정치판이 아수라장이 된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14.
‘전쟁이다.’
이제르트 후작이 말도 안 되는 이유로 감옥에 투옥됐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문수르는 길게 고민하지 않았다.
이건 전쟁이다.
애초에 필로스 왕도 정치싸움을 할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같은 하늘 아래 필로스 왕과 이제르트 후작은 공존할 수 없다는 것! 필로스 왕도 느끼고 있엇고, 그가 결국 선공을 날린 것이다.
선공필승!
확실히 필로스 왕의 선공은 위력적이었다. 그는 우호적인 제스처를 취하는 척 하면서 결과적으로 이제르트 후작이라는 최고의 인질을, 가장 확실한 인질을 잡는데 성공했다.
‘포비어 경.’
여기서 문수르는 포비어 경이 걱정됐다. 그가 이제르트 후작을 지키기 못한 건 사실이지만 어쩔 수 없었다. 필로스 왕이 이 정도까지 함정을 파놓았을 줄은 문수르도 몰랐으니까. 설마 이 정도까지 아주 작정을 할 줄은 아마 문수르 뿐만이 아니라 세상 어느 누구도 몰랐을 것이다.
‘자책하면 안 됩니다.’
그러나 포비어는 자책할 것이다. 이제르트 후작을 지키지 못한 자신을, 하다 못해 그 상황에서 어떻게든 이제르트 후작을 데리고 왕도를 빠져나오지 못한 스스로에 분노할 것이다.
이 상황 속에서 포비어가 극단적인 생각을 할 가능성도 충분히 존재하고 있었다.
문수르가 우려하는 건 그 부분이었다.
‘젠장.’
그러나 문수르가 우려해야 하는 건 그것 외에도 너무 많았다.
어쨌거나 필로스 왕은 이제르트 후작가를 흑마법사와 손을 잡은 반역죄인의 가문으로 지정했다.
증거는 없다. 필로스 왕은 아직까지 이러다할 증거를 내세우지 못했다. 증거라고 내세우는 것들은 증거로써 가치가 거의 무의미한 것들이었다.
이런 와중에 귀족들이 필로스 왕의 반대하며 세력을 모으기 시작했다. 만약 필로스 왕이 극단적인 결정을 내릴 경우 왕위의 주인을 바꿀 각오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자 자연스럽게 콩탄 왕국의 이슈는 바로 필로스 왕이 아니라면 누구를 왕으로 세워야 하는가, 그 부분에 맞춰줬다.
“왕세자님을 올리는 게 정답 아니오?”
“필로스 전하께서 순순히 물러난다면 모를까 그게 아니라면…… 왕세자님을 옹립하려는 이들이 있겠소?”
찾아보면 마땅한 왕의 재목을 가진 자가 없었다.
심각한 문제였다.
왕은 끌어내려야 하는데, 왕위에 오를 만한 재목은 없다니? 그렇다고 왕위를 공석으로 둘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문수르의 고민도 마찬가지였다.
‘마땅한 재목이 도무지 없다.’
필로스 왕을 대신해 왕위에 올릴 만한 능력을 가진 자는 그 어디에도 없었다.
‘지미는…….’
한때 후보로 고려했던 지미.
그러나 그는 안 된다.
‘지금은 안 돼.’
그는 지금 세대에서 그저 혁명가로 남는 게 적당한 자다. 왕위에 오르면 너무 파격이 될 것이다. 파격이 나쁜 건 아니지만 극단적인 파격은 결국 대형사고를 부르는 법이다.
‘젠장.’
사실 이 상황에서 최고는 아니더라도 나름 최선이라고 할 수 있는 답이 있긴 했다.
‘이럴 바에는 그냥 싸그리 무너뜨리고 새로운 왕조를 세우는 게 가장 확실하겠어.’
새로운 왕조!
말 그대로다.
반역 수준을 넘어서서 콩탄 왕국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왕국을 세우는 것이다.
당연히 이 경우 새로운 왕조에 옹립되는 건 그 누구도 아닌 이제르트 후작이 될 것이다.
혹은!
‘차라리 내가 왕이 될까?’
문수르, 그가 왕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사실 지금 문수르에 대한 지지여론 역시 결코 적은 게 아니었다. 까놓고 말해서 이제르트 후작가의 공은 결국 대부분 문수르가 쌓은 것 아닌가? 실제로 많은 이들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페스로 제국에 가더라도 최소 백작 이상의 작위를 받을 수 있는 능력자가 문수르다.
그러나 콩탄 왕국 내에서 문수르는 이러다할 보상을 받지 못하고 있었다. 그에 다른 동정여론은 분명 존재했다.
어쨌거나 문수르가 왕이 된다면 이야기는 쉬워진다. 시간은 좀 걸리겠지만 문수르는 세상을 바꿀 수도 있을 테니까.
아니, 어쩌면 그게 가장 확실한 답일지도 모른다. 어설픈 자를 왕위에 올려 후환을 두려워하기보다는 문수르가 왕위에 올라서 깔끔하게 정리하는 거이다.
그러나 문수르는 그 결정을 내릴 수가 없었다.
‘나는 떠나야 할 사람.’
문수르는 이 세계의 사람이 아니니까. 언젠가는 이 세계를 떠나야 하는 사람이니까.
그 순간.
“어쩔 수 없지.”
문수르는 선택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노운, 녀석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수밖에.”
노운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것!
그게 문수르가 내놓은 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