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9화
<86화. 복권.>
1.
페스로 제국이 패배했다!
그 소식은 마치 들판에 번진 불길처럼 단숨에 대륙 전체를 휩쓸고 지나갔다. 그리고 모든 이들이 그 소식을 들었을 때 가장 먼저 한 말은 하나였다.
“그 말이 사실인가?”
모두 믿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페스로 제국이었다. 기가스의 시대가 시작된 이후로 페스로 제국의 전력은 정말 한 나라가 어찌할 수 있는 수준을 벗어난 상황이었다.
반대로 콩탄 왕국은 그런 페스로 제국에 기댄 채 오히려 군비는 감축한 상황!
아무리 생각해도 콩탄 왕국이 이길 수 있는 가능성은 정말 제로에 수렴하고 있었다.
그런데 제국이 졌다?
콩탄 왕국이 승리했다?
납득할 수 없다. 이해할 수 없다.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하지만 그건 분명한 사실이었다. 때문에 그 소문이 거짓이 아니라 진실임을 파악한 국가들은 대부분 똑같은 생각을 했다.
‘콩탄 왕국에 사신을 보내야 한다.’
콩탄 왕국에 무언가가 있다. 그 무언가를 이용해서 무려 페스로 제국을 무너뜨린 것이다. 쉽게 말해서 콩탄 왕국과는 화친을 해야 할 때가 온 것이다. 뭐든 간에 콩탄 왕국과 좋은 관계를 맺어서 나쁠 건 없었으니까.
그러나 아직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2.
콩탄 왕국은 축제분위기였다. 페스로 제국과의 전쟁에서 콩탄 왕국 전체가 보유한 전력의 절반 이하로 줄었지만, 콩탄 왕국 곳곳에서는 승전에 대한 파티가 벌어졌다.
그리고 모두가 기다렸다.
“조만간 필로스 전하께서 논공행상을 하겠군.”
“아무렴!”
“이번 논공행상의 핵심은 이제르트 백작가겠군.”
“최소 후작의 자리는 보장된 상황이지.”
“후작의 자리가 문제인가? 어쩌면 공석이나 다름없는 공작의 자리에 이제르트 백작가를 올릴 지도 모르지!”
“아무리 그대로 그렇지 백작이 단숨에 공작의 작위에 올랐던 전례는 없지 않은가?”
“이렇게 압도적으로 불리하던 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것 역시 전례를 찾아보기 힘든 건 매한가지!”
“이제르트 백작가가 쌓은 공을 생각하면 공작의 위는 물론 공왕으로 추대되어도 이상할 게 없지!”
공왕!
공작의 작위를 주되, 왕에 가까운 권력을 보장해주는 자리!
그런 말이 언급될 정도로 이제르트 백작가가 쌓은 공이란 건 엄청난 것이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콩탄 왕국에서 이제르트 백작가는 정말 핫이슈, 그 자체가 됐다.
이제르트 백작은 매일 아침에 일어날 때마다 자신의 책상을 가득 채우는 편지를 보며 한숨을 내뱉었다.
“기뻐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겠군.”
“기뻐하시면 됩니다.”
그런 이제르트 백작과 함께 이제르트 백작가의 집무실에 들어온 문수르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제르트 백작 역시 화답하듯 미소를 지었다.
“그렇지, 기뻐해야지.”
편지는 단순히 콩탄 왕국 귀족들에게서만 온 게 아니었다. 온 대륙의 왕국들, 그곳의 귀족들이 보내는 편지들이었다.
내용은 여러 가지였다. 그저 인사차 편지를 보낸 이도 있었지만, 반대로 굉장히 중요한 거래를 제시하는 편지도 있었다. 중요한 건 그 편지들 내용 중에서 이제르트 백작가에 손해가 되는 건 없다는 점이었다.
아마 이 편지들에 있는 내용들 중 반의 반만 성사시켜도, 이제르트 백작가는 평생 이룩해도 얻기 힘든 이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정치적 입지는 견고해진다.’
문수르는 이 사실에 기뻐했다.
하지만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건 여전히 있었다.
“그보다 전하께서는 아직 아무런 소식이 없으셨습니까?”
“별 다른 이야기가 없으시군.”
“조만간 논공행상이 이루어져야 할 텐데…….”
“너무 공에 집착하지 말도록 하지. 솔직히 말해서 이제까지 이룩한 것만으로도 대단한 수확 아니던가?”
“백작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난 이미 충분히 만족하네. 더 이상 테블스 산은 영지의 위협이 되지 못하고 영지는 날이 갈수록 부유해지네. 솔직히 말해서 이 이상 무언가를 얻는 건 내 그릇을 벗어나는 일이 될 것 같군.”
이제르트 백작은 푸념 아닌 푸념을 뱉었다. 그런 이제르트 백작을 보며 문수르는 옅은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 미소는 오래 가지 않았다
3.
그건 파격이었다.
“제이머스 공작은 무죄다. 그는 더 이상 반역죄인이 아니다. 그러함으로 그는 다시 본래의 작위와 모든 권리를 소유할 수 있다. 이 모든 것을 콩탄 왕국의 군주인 나의 이름으로 명한다.”
필로스 왕.
그는 왕명으로 선언했다.
제이머스 공작의 무죄를!
세상이 경악했다.
“아니, 왕을 암살하려고 했던 자에게 무죄라니?”
“대체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명분은 간단했다. 제이머스 공작이 카라카크와 손을 잡은 것이 사실이 아니었으며, 그가 하려던 건 암살이 아니라 사전에 필로스 왕과 계획된 작전이었다는 것이다. 자세한 내막은 밝히지 않았지만 일단 콩탄 왕국을 지키기 위해서 제이머스 공작이 잠시 동안 반역죄인인 것처럼 연극을 했다는 것이다.
물론 그 말을 곧이 대로 믿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명백한 정치적 노림수로군.”
“제이머스 공작을 목줄을 채운 채 복권시킨 후에 제이머스 공작가를 이용해 이제르트 백작가를 견제한다!”
“무모하긴 하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명안이군.”
말 그대로다.
제이머스 공작을 이용해 이제르트 백작가를 견제하는 것! 그것이 바로 필로스 왕의 선택지였다.
4.
제이머스 공작의 복권 소식은 콩탄 왕국 전체를 흔들었다. 왕이 왕명으로 모든 귀족들에게 말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이제르트 백작가의 분위기도 뒤숭숭해질 수밖에 없었다.
특히 문수르의 분위기는 최악이었다.
언제나 미소를 지으며 여유가 넘치던 문수르다. 그러나 지금 문수르의 상황은 최악, 그 자체였다.
때문에 그 누구도 쉽사리 문수르에게 말을 걸지 못했다.
‘문수르 경이 엄청 고민 중이군.’
‘분위기가 장난이 아니야.’
‘건드리면 폭발한다!’
일촉즉발!
현재 문수르의 상황을 설명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표현이었다.
‘젠장!’
문수르는 일을 갈았다.
‘설마 그런 패를 꺼내들 줄이야!’
제이머스 공작의 복귄…… 상상도 못했다. 설마 왕을 암살하려던 자를 살려주는 건 물론 그 모든 권한을 다시 복구시켜준다니? 그것도 그 누구도 아니 암살 당할 뻔했던 필로스 왕이?
하지만 한편으로는 정말 문수르 스스로도 감탄이 나올 정도로 좋은 방법이었다.
그리고 충분히 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어차피 제이머스 공작과 필로스 왕 사이에는 카라카크라는 접점이 있다.’
카라카크과 손을 잡은 제이머스 공작. 그리고 이후 어찌된 일인지는 모르지만 카라카크와 손을 잡은 필로스 왕.
결과적으로 현재 콩탄 왕국 내에는 필로스 왕과 제이머스 공작 그리고 카라카크, 세 존재가 같은 울타리 안에서 손을 잡은 채 있는 상황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런 상황에서 필로스 왕에게 제이머스 공작의 암살기도, 반역 같은 건 아무래도 좋을 것이다.
‘그래서 살려둔 거로군.’
제이머스 공작을 계속 살려둔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 더군다나 제이머스 공작은 잃은 게 많지 않다. 제이머스 공작가의 기사들 대부분은 제이머스 공작을 배신한 대가로 전부 살아있는 상황!
얼마 걸리지 않을 것이다.
제이머스 공작은 순식간에 자신의 전력을 온전하게 다시 구축할 수 있을 것이다.
그 후에는?
‘젠장, 제이머스 공작이 나서서 이제르트 백작가를 견제하면 귀족들의 힘이 분산된다.’
이제르트 백작가를 찍어 누르기 위한 작전들이 펼쳐질 것이다.
일단 당장 제이머스 공작가가 앞장서서 이제르트 백작가의 대항마가 될 것이다. 자연스럽게 그런 제이머스 공작가 중심으로 귀족들이 파벌을 형성할 터.
동시에 이렇게 두 개의 파벌이 나뉘게 되면 자연스럽게 중립을 고수하는 귀족들이 생긴다. 어떻게든 필로스 왕과 귀족 세력의 대립구도를 구축하려고 했던 문수르 입장에서는 중립 귀족의 등장 역시 탐탁지 않다.
또한 이런 모양세가 나오면 자연스럽게 한 귀족이 부각 받기 시작할 것이다.
‘불스 후작이 핵심이군.’
그렇다.
불스 후작.
이제르트 백작가의 힘과 정치적 역량은 이미 불스 후작을 넘어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만약 제이머스 공작과 이제르트 백작가가 세를 나누고 정쟁을 시작한다면, 불스 후작이 가지게 되는 정치적 이점, 역할은 정말 엄청나게 커질 것이다.
불스 후작이 이 사실을 모를 리 만무하다. 때문에 불스 후작은 이 대치 국면 속에서 최대한의 이익을 뽑으려 할 터.
문수르에게 좋은 건 하나도 없다.
‘카라카크가 문제야.’
더군다나 가장 큰 문제는 결국 흑마법사 카라카크다. 필로스 왕과 제이머스 공작의 배후에 카라카크가 있다는 것. 결과적으로 필로스 왕과 제이머스 공작가의 영향력이 더 커질수록 콩탄 왕국은 카라카크란 늪 속에 점차 빠지는 것이다.
종국에는 콩탄 왕국이 무너지겠지.
페스로 제국은 다시금 카라카크를 빌미로 콩탄 왕국을 비난하고, 공세를 준비할 테고 콩탄 왕국의 왕실과 제이머스 공작가가 흑마법사와 손을 잡았다는 이야기가 알려지면 페스로 제국뿐만이 아니라 콩탄 왕국의 모든 주변국들이 콩탄 왕국을 향해 칼을 겨눌 것이다.
‘그 전에 처리해야 한다.’
내부적으로 카라카크의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그것이 지금 당장 문수르 앞에 생긴 숙제였다. 그러나 절대 풀리지 않는 숙제이기도 했다.
‘카라카크, 대체 어디에 있는 거냐?’
다시금 흔적조차 사라진 카라카크.
어떻게든 놈을 세상 밖으로 끌어내야 한다. 그러나 이제까지 모습을 감추었던 놈을 과연 어떻게?
‘방법.’
문수르의 표정이 좋지 못한 이유는 바로 그것 때문이었다.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내야 돼!’
5.
노운은 카이탄 황제를 바라보고 있었다. 카이탄 황제의 겉모습은 변한 게 없었다.
노운은 그런 카이탄 황제 앞에 섰다. 노운은 바닥에 무릎을 꿇지 않았다. 꼿꼿하게 허리를 편 채 카이탄 황제를 바라봤다.
그건 엄청난 무례였다.
하지만 주변에는 보는 눈이 없었다. 카이탄 황제는 노운과의 독대를 허락한 것이다.
그렇게 잠시 침묵이 흐르고 난 뒤.
“모습을 드러내는 게 어떤가?”
노운이 입을 열었다.
그러자 카이탄 황제의 머리가 푹 내려갔다. 마치 실이 끊긴 꼭두각시 인형처럼 말이다.
카이탄 황제.
페스로 제국의 부흥기를 가지고 왔던 그는 이제 더 이상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죽었다?
그렇게 표현해도 무방할 것이다. 노운, 그가 카이탄 황제의 모든 걸 무너뜨렸으니까. 그저 껍데기만 있을 뿐이다. 속 알맹이는 하나도 없다. 그저 노운이 명령어를 입력하면 그에 맞추어 움직이는 로봇에 불과할 뿐이다.
노운이 그리 만들었다.
자신의 이상을 위해서!
그런데 지금 그 황제가 자신의 명령을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다른 누군가가 황제를 조작하지 않고서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네 녀석이 황제를 인형으로 만든 자였군.”
이윽고 황제의 뒤편에서 누군가 모습을 드러냈다.
젊은 사내였다. 적어도 20대 초중반으로 보이는 굉장히 젊은 나이의 사내였다.
그런 사내의 몸에서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어두컴컴한 기운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노운, 그게 내 이름이다.”
“흐음!”
그 순간 젊은 사내의 코가 들썩거렸다.
킁킁!
그 사내는 냄새를 맡기 시작했다. 노운의 냄새를 그리고 이 공간을 가득 채운 냄새를 말이다.
이윽고 사내의 입에서 정말 노운으로서는 생각지도 못했던 이름이 튀어나왔다.
“이 냄새.”
긴장하는 노운.
“문수르란 놈에서 나는 냄새와 비슷하군. 네 녀석도 할루이 이제르트 보낸 놈이냐?”
젊은 사내의 정체는 바로 카라카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