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8화
7.
노운.
그는 단 한 번도 의심한 적이 없다.
‘나는 신이 될 수 있다.’
자신에게 주어진 이 기회.
노크맨으로 활동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순간, 노운은 자신이 또 다른 차원의 지배자가 된다는 사실에 눈곱만큼의 의심도 품지 않았다. 그건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라고 여겼다.
더 나아가 가장 큰 호적수라고 생각했던 문수르를 만나는 순간에도 그 생각은 변함이 없었다.
오히려 확신이 들었다.
문수르, 그는 유능하긴 해도 절대 자신의 앞길을 막을 수 있을 만한 기질의 소유자가 아니었으니까.
그런데 오늘!
‘젠장.’
다시금 황도에 발을 들여 놓는 지금!
‘아무래도 문제가 생겼군. 그것도 아주 큰 문제!’
노운은 처음으로 자신의 머릿속을 가득 채웠던 거대하다 못해 무식하기까지 느껴지는 자신의 자신감이 한없이 줄어드는 기분이 들었다.
황도를 가득 채운 건 칠흑 같은 어둠이었다. 아니, 어둠이라기보다는 그건 더러움이라고 표현해야 할 것이다.
‘대체 뭐지?’
정말 추잡하고 비루한 기운이 황도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코로 숨을 쉬지 않아도 시체 썩은 냄새가 머릿속을 가득 채우는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였다. 노운은 고개를 돌렸다. 아히만트 백작을 바라봤다. 자신과 함께 성으로 돌아온 아히만트 백작은 노운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노운 경 표정이 좋지 않소. 무슨 문제라도 있소?”
아히만트 백작은 노운과는 다르게 담담하기 그지없는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이렇게 나온다, 이거지?’
눈치 채지 못한 게 아니다.
이 모든 것, 황도를 가득 채운 그 추잡하고 더러운 기운은 오로지 노운, 그만을 향하고 있었을 뿐이다.
꿀꺽!
노운은 침을 삼켰다.
‘내 정체를 아는 놈인가?’
자신만을 노리고 들어오는 이 기운은 필시 노운의 정체를 아는 자만이 뿜을 수 있는 기운일 것이다.
‘일이 틀어졌어. 그것도 굉장히!’
전후사정을 정확히 파악하지 않아도 느낄 수 있었다. 자신이 나름 전력을 다해, 심혈을 기울여 만든 성이 무너졌다. 성벽 한 쪽이 크게 붕괴된 것 이상으로 무너졌다.
그리고 지금 노운이 바라보는 곳에, 드높게 솟아오른 제국의 황성에 그 원흉이 있다. 노운이 이룩한 성을 무참하게 박살낸 자가 저 안에 있다.
그 순간.
‘오냐.’
노운은 역으로 미소를 지었다. 억지로라도 미소를 지었다.
“아닙니다.”
“혹시 문제가 있다면 뭐든 말하시오. 노운 경을 위해서는 무엇이든 할 수 있으니.”
“감사합니다.”
그런 노운의 모습에 아히만트 백작이 호기로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반면 노운은 재차 각오를 다졌다.
‘그래, 이 정도 위기는 있어야지.’
이 공포, 더러움, 추잡함, 칙칙함!
노운은 전부 받아들였고 꿀꺽 삼켜버렸다. 뱃속에 가득 채웠다. 그 상태로 걸음을 내딛었다.
8.
“후퇴하라!”
지휘관의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모든 병사들과 기가스들이 전열조차 제대로 가다듬지 못한 채 꽁무니가 빠지도록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 순간 반대편 진영에서 소리쳤다.
“추격하지 마라! 도망치는 적은 그대로 놔두어라. 쓰러진 동료들을, 부상자들을 먼저 돌보아라. 또한 적의 시체를 발견할 경우 예의를 갖추어라. 특히 귀족의 시체는 절대 건드리지 마라.”
그 소리는 결국 이 전쟁이 끝났음을 알리는 소리였다.
우아아아!
함성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승자들의 입에서 터져 나오는 함성이었다. 엄청난 함성이었다. 그 함성은 도망치는 이들의 고막마저 미치도록 두드릴 정도였다.
“빌어먹을!”
그 함성을 들은 도망자들은 이를 갈았다.
“제국이 패배하다니! 이건 말도 안 되는 일이야! 아무리 상황이 좋지 못했어도 고작 콩탄 왕국 하나를 넘지 못해서 이렇게 분을 삭혀야만 하다니! 이게 무슨 꼴이란 말인가!”
패배자.
그들의 또 다른 이름은 다름 아니라 페스로 제국이란 이름이었다.
그렇다.
이제까지 전쟁에서 언제나 승자로만 남았었던 페스로 제국이 콩탄 왕국과의 전쟁에서 패배한 것이다.
‘끝났다.’
승자는 콩탄 왕국이었다.
“이제야 계단 하나를 넘었구나.”
그리고 콩탄 왕국의 승리, 그 중심에는 그 누구도 아닌 바로 문수르가 자리하고 있었다.
문수르는 드래곤 파이터에 탑승한 채로 눈을 감았다.
- 주인님, 여기서 잠들면 안 됩니다.
그런 문수르의 귓속으로 로이드의 목소리가 들렸다. 문수르는 그 목소리에 눈을 뜨지 못했다. 눈을 감은 채로 말했다.
“너무 힘들어.”
- 이미 예전에 한계에 도달하셨습니다. 이제 당장 쓰러져도 이상할 게 없는 상태입니다.
“그러니까 한숨만 잘게.”
- 여기서 주무시는 건 그다지 추천하지 않습니다. 좀 더 힘을 내시는 게 어떻습니까?
“좀 더?”
- 지금 밖에서 기사들이 대기하고 있습니다.
기사라는 말에 문수르는 무거운 두 눈꺼풀을 간신히 들어 올릴 수 있었다. 지독한 피로감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이제가지 간신히 유지하고 있던 긴장감으로 막고 있던 피로감이었다. 그런데 방금 전 제국의 군대가 전격적으로 후퇴를 하는 순간 그 긴장의 끈이 풀어진 것이다. 홍수에 댐이 무너지는 것처럼, 피로감은 거침없이 몰려왔다.
하지만 문수르는 일어나야 했다.
‘이제 시작이다.’
계단 하나를 올라갔다.
아직 정상까지, 꼭대기까지 오르기에는 여러 개의 계단이 더 남아있는 상황이었다.
여기서 멈춰서는 안 된다. 이를 악 물로, 오히려 한 걸음 더 내딛어야 한다.
문수르가 움직였다.
그가 천천히 기가스에서 내려왔다.
그리고 문수르가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문수르!
모든 이들이 문수르의 이름을 부르짖기 시작했다. 모든 병사들, 기가스 파일럿들이 앞 다투어 목소리를 높였다.
그들은 직접 봤으니까.
무신처럼 전장에서 불패무적의 모습을 보이며, 모든 적을, 그 무서운 페스로 제국의 기가스들을 무너뜨리던 드래곤 파이터의 모습을!
그건 전율이었다.
동시에 그 무엇보다 확실한 동기부여였다. 콩탄 왕국의 병사들과 기가스 파일럿들은 그런 문수르의 모습을 보며 그 무엇보다 확실한 동기부여를 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무엇보다 강력한 자신감도 얻을 수 있었다.
문수르와 함께 있는 한, 절대 전쟁에서 지지 않으리란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전쟁에서 이길 수 있다는 확신이 생긴다는 것! 그것이 사기에 미치는 영향을 절대적이다 못해 극단적으로까지 보일 정도다. 그 덕분이었다. 일진일퇴를 거듭하던 전투에서 기어코 콩탄 왕국이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것은 말이다.
한편 문수르는 자신을 향한 환호와 외침 속에서 옅은 미소를 지었다.
‘완성됐다.’
이들의 모습.
자신을 향한 이들의 눈빛!
‘이 정도면 적어도 필로스 왕과 대립각을 세워도 충분할 정도의 정치적 입지를 만들었다.’
필로스 왕과의 전쟁은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문수르는 지금 이 순간 어느 정도의 자신감을 가질 수 있었다.
그러는 사이 여러 귀족들이, 문수르의 명령을 따랐던 귀족들이 문수르 근처로 모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알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 이 순간이 가장 중요한 순간이란 것을 말이다.
“문수르 경, 수고하셨소!”
“대승이오! 문수르 경 덕분에 우리들이 페스로 제국을 물리칠 수 있었소!”
“과연 누가 상상이나 했겠소? 우리 콩탄 왕국이 페스로 제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하는 장면을!”
쏟아지는 칭찬들.
그 칭찬들과 함께 귀족들은 앞 다투어 문수르와 악수라도 하기 위해 문수르 근처로 접근했다.
문수르는 그들과 일일이 악수를 했다.
그냥 악수를 한 게 아니었다.
“하우겐 자작님 수고하셨습니다. 하우젠 자작님이 측면에서 계속 공세를 퍼부어주신 덕분입니다.”
“허허, 난 그저 자네 명령을 따랐을 뿐이네. 자네의 작전이 탁월했을 뿐이지.”
악수하는 귀족들마다 그들의 이름을 언급했으며.
“조르디아 백작군의 희생 잊지 않겠습니다. 전면에서 그 누구보다 장렬하게, 콩탄 왕국을 위해 싸우신 그 모습은 모든 기사들의 귀감으로 남을 것이며, 역사에는 영웅으로 남으실 겁니다.”
“……고맙소. 아버님도 그 말씀에 무덤에서 웃으실 것이오.”
그들이 이룩한 전공도 언급했다.
그런 문수르에게 이름이 언급되고, 전공을 칭찬 받은 귀족들의 눈빛과 표정은 시시각각 달라졌다.
그들은 문수르를 귀신 보듯 봤다.
‘과연 이자는 하늘에 눈이라도 달렸단 말인가? 모든 것을 알고 있구나!’
한편으로는 이루 말할 수 없는 희열감이 들었다.
‘이토록 대단한 자가 나의 이름과 나의 전공 모두를 기억해준다니? 참으로 그릇이 거대한 자로다.’
희생은 그 희생한 자의 가치를 알아줄 채 가장 큰 가치를 지니는 법이다.
이번 전쟁에서 무수히 많은 자들이 죽어갔다. 개중에는 가문이 정말 끝장날 정도의 피해를 본 자들도 있었다. 왕국은 그들에게 어느 정도의 보답을 해주겠지만, 입은 피해 전부를 복구하는 건 불가능할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문수르가 해주는 위로의 말 그리고 감사의 말.
그것은 그 무엇보다 가치 있고, 따뜻한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문수르는 그 누구보다 확실하게 자신과 이제르트 백작가를 밀어줄 정치적 후원자들, 기반들을, 지지자들을 만들음과 동시에 그들 사이에 그 무엇으로도 쉽게 끊을 수 없는 끈을 연결시켰다.
그러나 모든 이들이 그런 문수르를 좋은 눈으로 바라본 건 아니었다.
문수르를 아니꼽게 생각했던 자들.
‘무서운 자다.’
‘벌써 이번 전쟁에 참가한 귀족들 중 절반 이상이 문수르란 자에게 매혹되고 말았군.’
그들은 이 장면에서 소름이 돋았다.
눈에 보이는 것이다. 문수르와 악수를 하고 그와 짧은 대화를 한 귀족들의 눈빛이 마치 약에 취한 듯 몽롱하게 변하는 장면을 말이다. 그들은 문수르란 인간에 취한 것이다. 반한 것이다.
‘조만간 왕국에 다시 폭풍이 불겠구나.’
더군다나 조만간 논공행상이 이루어질 것이다.
페스로 제국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다. 콩탄 왕국 역사에 길이 남을 만한 전공이다.
그렇다면 그에 합당한 상을 줘야 한다. 정말 대대적인 작위 수여가 있을 것이다. 까놓고 말해서 얻은 것 없는 전쟁에서 왕가가 무리해서 금은보화나 영토를 하사하는 건 부담스러웠으니까. 왕가가 가장 저렴하지만 가장 확실하게 보상을 해줄 수 있는 건 바로 작위수여다.
‘이제르트 백작가가 후작가가 되는 건 당연한 일이겠군.’
일단 이제르트 백작가는 후작가가 될 것이다.
‘어쩌면 이제 조만간 공석이 될 공작의 작위가…….’
최소 후작위.
그러나 그 이상도 가능하다. 이제르트 백작군이 세운 전공이란 그 정도로 대단한 것이었다.
더군다나 지금 공작의 자리는 거의 공석이나 다름없는 상황! 제이머스 공작에 대한 처형이 이루어지면 어떤 식으로든 공작 위에 대한 수여가 있을 테고, 그렇게 된다면 불스 후작이나 이제르트 백작, 둘 중 한 명에게 그 자리가 주어질 것이다.
더불어 그 결과에 따라 콩탄 왕국의 정세가 달라질 것이다.
이제르트 백작가에 공작의 위를 하사한다면, 그건 파격적이지만 동시에 필로스 왕이 이제르트 가문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싶다는 화해의 제스처가 될 것이다.
반대로 전공이 그다지 대단치 않는 불스 후작에게 공작 위를 주고, 이제르트 백작가에게 후작 위를 주는 정도에서 논공행상이 끝난다면 불스 후작으로 하여금 이제르트 백작가를 견제토록 만들고자 하는 모양세가 될 것이다.
‘전하의 결정에 달랐군.’
결국 이제 주사위를 던지는 건 필로스 왕에게 넘어간 것이다.
필로스 왕은 골라야 한다.
이제르트 백작가와 손을 잡던가 그게 아니면 오히려 반대로 이제르트 백작가와 담판을 짓던가! 뭐든 간에 콩탄 왕국의 정세가 뒤집어지는 건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런 만큼 다른 귀족들은 잘 가늠해야 했다.
‘과연 여기서 이제르트 백작가에 손을 내미는 게 현명한 결정일까, 아니면 이제르트 백작가와 적이 되는 게 현명한 결정일까?’
어느 편에든 서야 한다.
폭풍이 몰아칠 정세 속에서 무언가를 얻기 위해서는 그에 합당한 선택과 리스크를 짊어저야 한다.
그 사실을 깨달은 귀족들은 문수르를 착잡한 눈빛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그리고 그런 귀족들의 생각을 문수르는 당연히 읽고 있었다. 문수르는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서 간을 보듯 자신을 바라보는 자들의 얼굴 면면을 머릿속에 각인시켰다.
‘이제 남은 건 적 아니면 아군이다.’
그러나 문수르는 몰랐다.
필로스 왕, 그가 문수르와 이제르트 백작가를 상대하기 위해 어떤 결정을 했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