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7화
3.
문수르가 전면에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제까지는 이제르트 백작군만을 지휘했다면 전면전을 각오한 뒤에는 전선에 참가한 모든 군대에게 명령을 내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건 위험한 일이었다.
감히 이제르트 백작의 기사 따위가 다른 귀족들에게 명령을 내리다니! 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으니까. 물론 직접적으로 이래라 저래라 하는 건 아니었다. 이렇게 해줬으면 좋겠다, 하는 식으로 돌려 부탁을 한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무례한 일이건 변함없었지만.
하지만 문수르는 개의치 않았다. 자신에 뒤에서 욕을 먹던 말든 그건 알 바 아니었다.
‘빨리 끝낸다.’
전쟁을 보다 빨리, 보다 확실하게, 보다 완벽하게 끝낼 수만 있다면 뭐든 할 생각이었다.
그런 문수르의 명령을 받았을 때, 반응은 두 가지로 나뉘었다.
“제 아무리 실력 좋은 기사라고 해도 감히 내게 명령을 하다니? 그것도 제대로 된 작위도 없는 놈이? 흥! 어림도 없는 소리지. 내가 네놈 명령을 들을 것 같더냐?”
문수르를 욕하며 문수르의 명령을 무시하는 자들.
“나쁘지 않은 작전이군. 전쟁을 빨리 끝낼 수 있다면 무엇인들 못할까? 하물며 이제르트 백작가는 지금 왕국 최고의 가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상황. 그런 이제르트 백작가의 실세 중의 실세라고 볼 수 있는 문수르에게 좋은 인상을 남겨서 손해볼 필요는 없지.”
꺼림칙하긴 하지만 저울질 끝에 문수르의 말을 듣는 게 낫다고 생각하는 자들.
어쨌거나 둘 모두 움직이긴 움직였다. 제국이란 공동의 적을 앞에 두고 합의는 하지 못할망정 서로를 향해 검을 겨누는 멍청한 짓을 하는 인간은 없을 테니까.
반면 제국은 합쳐지지 못하는 정도가 아니라 여전히 서로를 견제하는 중이었다.
다급한 것이다.
전운이 좋지 못한 상황에서 어떻게든 공을 세우지 못한다면, 다시는 재기할 가능성이 없다는 걸 파악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제 아무리 제국이 압도적인 병력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콩탄 왕국의 상대가 될 리 만무했다.
무엇보다 콩탄 왕국에는 불패무적의 군대인 이제르트 백작군이 자리잡고 있었다.
이제르트 백작군이 아군에게 주는 용기 반대로 이제르트 백작군이 적군에게 주는 공포와 위압감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전면전이 시작됐다.
4.
콩탄 왕국의 왕도.
무수히 많은 귀족들이 자리에 모인 그곳에서 필로스 왕은 귀족들을 모아두고 말했다.
“제국과의 전쟁이 얼마 남지 않았구나.”
“전하, 이번 전쟁은 대승이옵니다. 필시 이것은 전하를 위한 하늘의 배려가 분명합니다.”
“맞사옵니다. 이번 승운은 곧 전하의 운이 하늘 높이 솟아오르는 징조임이 분명합니다.”
귀족들믄 저마다 아부를 하느라 바빴다.
그리고 그럴 만한 상황이었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페스로 제국과의 전쟁에서 승리라니?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보통 것이 아니었다. 전쟁으로 인해 많은 것을 잃었지만 그 이상의 것들, 보이지 않고 물질적인 것이 아니지만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을 얻을 수 있었다.
무엇보다 필로스 왕은 제국과 싸워 이긴 왕이 되는 것이다. 역사에 영광으로 남을 일.
동시에 이번 전쟁에서 피해 대부분은 아무래도 귀족들이 입을 수밖에 없었다. 필로스 왕의 군대는 전장에서 나름 활약하면서 피해를 최소화한 상황이었다.
여기에 제이머스 공작마저 현재는 반역자의 신분으로 감옥에 투옥된 상황 아니었던가?
귀족의 힘은 이미 약해질 대로 약해진 상황이었다. 결국 필로스 왕을 중심으로 권력이 재편될 것이 분명했다. 현명한 귀족들은 당연히 필로스 왕의 편에 서려고 할 것이다.
단 하나.
이런 상황에 찬물을 끼얹는 것이 있었다.
“이 모든 게 이제르트 백작가 덕분이군. 안 그런가?”
“이제르트 백작가의 공이 작지는 않습니다.”
이제르트 백작가.
어떤 의미에서 이번 전쟁의 모든 것을 좌지우지한 영웅이다. 이제르트 백작가를 배제하고 전쟁을 고려한다면, 아마 콩탄 왕국은 페스로 제국 앞에서 참담한 패배만을 맛보았을 것이다.
과장이 아니다. 이제르트 백작군이 해치운 기가스의 숫자만 4백대를 가볍게 넘기는 상황이다. 이 수치는 정말 어마어마한 수치다. 페스로 제국이 이끌고 온 기가스의 전력의 절반에 가까운 수치다. 영지 하나가, 한 명의 영주가 이끄는 군대가 국가의 병력 절반을 막은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 과정에서 이제르트 백작가가 입은 피해는 적진 않지만 쌓은 전공에 비하면 정말 가소롭다 못해 콧방귀가 나올 정도의 수준이었다.
말이 안 나올 정도.
혹자는 이제르트 백작가를 콩탄 왕국뿐만이 아니라 대륙 최강의 가문이라고 감히 말할 정도다.
그 누구도 이런 이제르트 백작가의 공이 작다고 말할 수 없다.
하지만.
“그래, 이제르트 백작가의 공이 작지는 않지. 아무렴.”
“하오나, 이제르트 백작가는 결국 콩탄 왕국의 귀족! 전하의 신하에 불과하옵니다.”
“이제르트 백작가의 공은 곧 왕실의 곧이며, 전하의 업적이지요.”
필로스 왕 입장에서는 제이머스 공작조차 뛰어넘는 거대한 정치적 적이 등장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작위는 무의미하다.
필로스 왕이 작위를 주든, 주지 않든 이제르트 백작가가 마음만 먹는다면 이제르트 백작가를 중심으로 강력한 정치파벌이 형성될 것이다. 거슬리는 것도 없다.
불스 후작가?
대항마는 되겠지.
하지만 말 그대로 대항마가 된다는 거지, 불스 후작가가 이제르트 백작가를 짓누를 가능성은?
오히려 반대의 경우도 보자.
불스 후작가가 빠르게 계산을 끝낸 후에 이제르트 백작가와 손을 잡고 필로스 왕을 견제할 가능성은?
충분하다.
왕권이 너무 강해지면 귀족들은 경계를 한다. 불스 후작은 그 부분에 대해서 충분히 계산을 하고, 보다 이익이 나오는 방향으로 결정을 내릴 만한 위인이다.
무엇보다!
이제르트 백작가는 전력이 있다.
과거 필로스 왕이 왕위를 찬탈했을 때, 그것을 끝가지 용인하지 않고, 받아들이지 않은 전력이!
최근 몇 가지 일들로 인해서 필로스 왕과 이제르트 백작가가 화해를 했다는 것이 대부분의 의견이지만, 사람 마음이란 것이 그리 쉽게 풀리고, 열리는 게 아님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이런 상황에서 필로스 왕은 자신들에게 아부를 하기 위해 모인 귀족들을 보며 나지막하게 물었다.
“이제르트 백작가…… 참으로 큰 가문이 됐군. 이제 짐조차 버거울 정도로 말이야.”
그 말에 담긴 진짜 의미.
그 의미를 모르는 귀족은 그 자리에 없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모두가 동시에 똑같은 생각을 했다.
‘전하게서 이제르트 백작가를 치실 생각이구나.’
제국과의 전쟁이 끝나는 순간!
이제르트 백작가의 운명은 다시금 시험 받을 것이다.
5.
문수르는 제국과의 전쟁을 치름과 동시에 자신의 명령을 따랐던 자들을 분류하기 시작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새로운 왕을 세우는 건 지금 당장은 불가능하다.’
필로스 왕은 어떻게든 해치워야 한다. 그러나 막상 그걸 실행에 옮기는 건 말처럼 쉽지 않았다. 새로운 왕을 세우기 위해서는 두 가지 조건이 필요한데 개중 하나인 왕이 될 수 있는 명분을 가진 자를 찾는 게 지금 당장은 불가능했다. 어설픈 자를 꼭두각시로 세우는 것조차 지금은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마음 같아서는 필로스 왕의 목을 치고, 카라카크와 연결된 모든 것들을 잘라내고 싶지만 그렇게 한다면 결국 콩탄 왕국을 근본부터 다시 뜯어 고쳐야 했다.
시간도 시간이지만, 종국에 콩탄 왕국은 쪼개지고, 다시 쪼개질 게 분명했다.
그럼 결국 차선을 택해야 했다.
차선이란 다름 아니라 필로스 왕을 확실하게 견제할 정치적 세력을 만드는 일이었다.
지금으로써는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었다. 문수르는 이제르트 백작가가 만든 정치집단에 몸을 담가준 귀족들을 구분하기 시작한 것이다.
‘종국에는 불스 후작을 영입한다.’
제이머스 공작이 감옥에 있는 이 상황에서 불스 후작이 가장 높은 작위를 가진 자다.
더불어 불스 후작은 협상이 가능한 자이기도 하다. 그런 그에게 손을 내밀고, 적당한 이익을 보장해주면 절대 동맹을 거절하지 않을 것이다.
‘귀족의 힘으로 찍어 누른다.’
왕이 문제가 된다면 왕권을 한 없이 약하게 만드는 것이다.
더군다나 이번 전쟁에서 이제르트 백작가가 세운 공은 절대적이다. 필로스 왕은 결정해야 할 것이다. 이제르트 백작가에게 최소 후작의 작위를 주던가 아니면 그냥 아무 것도 주지 않던가.
전자의 경우라면 그것만으로도 이제르트 백작가는 모든 귀족들을 아우를 수 있는 자리에 오르는 셈이고, 후자라면 논공행상의 이유를 빌미로 필로스 왕을 공격할 수 있는 명분을 얻는 셈이다.
뭐든 좋다.
‘시간만.’
시간만 끌 수 있다면.
‘좀 더 시간이 필요해.’
카라카크의 흔적을 찾고 놈을 처치할 수 있는 시간만 끌면 된다!
‘어떻게든 한다. 안 되도 되게 한다.’
결국 문수르의 마지막 과제는 그 무엇도 아닌 카라카크를 처치하는 것! 바로 그것이었다.
6.
전쟁은 어려웠다. 제 아무리 사기나, 전황이 콩탄 왕국에 유리했다고 해도 상대는 제국이었다. 병력상으로는 여전히 제국이 압도하고 있었다.
더불어 전면전은 결국 병력 싸움이다. 이제르트 백작군이 제 아무리 대단하다고 해도 전면전과 동시에 일어지는 동시다발적인 전장 모두에서 등장해 활약할 수는 없었다.
선택 그리고 집중.
이제르트 백작군은 여전히 전장에서 불패무적의 모습을 보여줬지만 다른 한 쪽에서는 패전보가 들려왔다. 혹여 승전보가 오더라도, 피해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결과는 일진일퇴.
페스로 제국도 쉽게 물러나진 않았으며 콩탄 왕국도 더 이상 전선을 뒤로 무르지 않았다.
피해는 누적됐다.
더불어 이쯤 되자 문수르도 한계에 도달했다.
‘진짜 힘들어.’
꾀병이 아니다. 문수르는 최근에 밥을 먹다가 저도 모르게 구토를 한 적이 세 번이나 됐다.
몸이 견디지 못하는 것이다. 음식을 먹는 것조차 견디지 못해서 게워내기 시작한 것이다.
그나마 이것저것 약을 먹어서 어떻게든 몸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컨디션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솔직히 말해서 이제까지 문수르가 해낸 업적만 보더라도 문수르는 초인 이상의 업적을 세운 셈이었다. 까놓고 말해서 지금 당장 문수르가 전선에서 빠진다고 해서 문수르를 욕할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이미 문수르가 세운 공은, 그에게 어떤 작위를 줘도 이상할 게 없는 정도였으니까.
그러나 문수르는 멈출 수 없었다.
“문수르 경 괜찮으십니까?”
“괜찮습니다.”
“안색이 좋지 못하십니다. 문수르 경의 실력을 믿지 못하는 건 아니지만 솔직히 말해서 너무 무리하신 거 아니십니까?”
“저만 힘든 게 아니지 않습니까?”
“그래도 우리들 중 그 누구도 문수르 경만큼은 아닙니다. 문수르 경운 우리들보다 곱절, 아니 그 이상으로 행동하셨습니다. 솔직히 문수르 경이 초인이라고 해도…… 우려됩니다.”
“전 괜찮습니다.”
“겉으로 보이는 것만으로도 상태가 좋지 못하십니다. 이러지 말고 쉬시지요. 문수르 경은 이제르트 백작가의 보물이자, 콩탄 왕국의 영웅입니다. 혹여 이 전장에서 눈먼 검에 상처라도 입으신다면…….”
계속되는 기사들의 우려에 문수르는 미소를 지었다.
이들을 위해서라도.
‘내가 빠지더라도 전쟁은 이길 수 있겠지.’
멈출 수 없다.
‘하지만 내가 빠지면 더 많은 이들이 피를 흘릴 것이다. 내가 흘리는 땀만큼 이들이 흘리는 피는 줄어들 것이다.’
문수르는 이를 물었다.
‘거의 다 끝났다.’
끝이 얼마 남지 않았다. 문수르는 좀 더, 조금 더 힘을 내기로 했다. 여기서 멈추기에는 지금까지 한 것들이 아쉽기도 하다.
하지만 문수르는 이번 일이 끝난 후에 다시금 자신이 해야 하는 일들을 떠올리자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속이 쓰리다.’
절로 속이 쓰릴 정도다.
이번 일이 끝난 후에도 강행군은 여전히 남아있다. 이제는 필로스 왕과 다시 대립각을 세워야 한다.
‘빌어먹을.’
그 순간 문수르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얼굴.
‘노운, 네 녀석이 원하는 건 뭐지?’
그건 다름 아니라 노운의 얼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