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6화
<85화. 소식>
1.
문수르는 길게 생각하지 않았다.
‘이제부터는 전력으로 간다.’
노운과의 만남. 그 이후 문수르는 승리에 대한 명확한 확신을 가지게 됐다. 동시에 조급함도 느꼈다.
‘시간이 끌리면 내가 불리해져. 최대한 빨리…… 가능한 최대한 빨리 콩탄 왕국 내 상황을 마무리 지어야 해.’
노운의 의도가 심상치 않다. 적어도 그는 평화를 사랑하는 비둘기 같은 인간은 아니다. 모든 일이 끝나면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목적을 위해서 무엇이든 할 인간이다. 그런 그가 무슨 일을 저지르기 전에 최소한의 방책은 마련해두어야 한다.
‘녀석 마음대로 일이 진행되는 건 용납지 못한다.’
그게 아니더라도 전쟁이 길어져서 나쁠 건 없다.
또한 노운이 이끄는 이황자의 군대가 물러난다면, 이번 전쟁은 훨씬 더 쉬어질 것이다.
그런 문수르의 의지는 곧바로 작전으로 표현됐다. 이제까지는 치고 빠지는 작전이 주를 이루었다면 노운과의 만남 이후에는 공격적이면서도, 적을 찌른 후에 밀어내는 식의 작전이 짜이기 시작했다.
그러자 자연스럽게 이제르트 백작군의 기사들도 느꼈다.
“외람된 말이옵니다만, 끝장을 보실 생각이십니까?”
“맞습니다. 이제 승기 대부분은 우리 쪽에 넘어왔습니다. 여기서 어설프게 시간을 끄는 건 제국이 다시 전력을 추스를 기회를 주는 것밖엔 되진 않습니다. 우리의 적은 제국입니다. 이제까지는 제국답지 못한 모습을 보여줬지만, 그들은 이제까지 전쟁으로 모든 걸 이룩한 페스로 제국입니다.”
문수르의 말에 반대를 표하는 자는 없었다.
단지 이런 전면전 그리고 결사를 품을 수밖에 없는 전쟁에서 생길 큰 피해가 우려될 뿐이었다.
반대로 말하면 피해가 두려워 나가야 할 때를 모르고 소극적으로 나선다면 그거야 말로 더 멍청한 생각이었다. 그런 생각을 할 거였으면 차라리 전장에 나오지 말았어야 한다.
“모두들 각오를 단단히 하세요.”
그런 기사들의 마음을 알기에 문수르는 그들에게 다시금 마음을 바로 잡을 기회를 줬다.
기사들의 눈빛이 달라졌다.
문수르는 그들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강해졌다.’
진심이다.
처음 이제르트 백작가의 기사들을 만났을 때, 솔직히 말해서 그들은 기사라고 표현하는 게 미안할 정도로 나약한 자들이었다.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정말 나약하고 비루했다.
더군다나 그들은 이제르트 백작가가 직면한 가장 큰 문제, 테블스 산 앞에서는 그나마 나약하던 육체와 정신은 더 나락으로 떨어뜨렸다. 정말 그 무엇으로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추레했다.
그러나 지금 이들은 그 누구보다 강해졌다. 그 어떤 영지의 기사들보다, 대륙에서 명성을 떨치는 이름난 기사들보다 정신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더 뛰어나다. 더 강하다.
‘이들이라면.’
이런 이들을 볼 때면 문수르는 언제나 큰 기쁨과 동시에 무엇인든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는다.
그렇다.
‘뭐든 할 수 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이들이 구제 가능하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이 세상에는 분명 구제불가능한 인간들이 존재한다.
하지만!
세상 모든 이들에 구제 불가능한 쓰레기는 아니다. 많은 이들에게는 가능성이 있다. 단지 그 가능성을 터뜨릴 기회가 없었을 뿐이다. 기회만 주면 된다.
‘그러고 보니…….’
이 순간 떠오른 하나의 이름.
‘지미.’
지르미오.
이 세계에서, 왕이 존재하고, 귀족이 존재하는 계급사회에서 평등을 외치던 사내.
그에게도 기회를 줬다.
그의 뜻을 펼칠 수 있는 작은 땅을 줬다. 그러나 그 이후에는 관심을 가지지 못했다. 간간히 소식은 들었지만 크게 의미를 둘 필요가 없을 정도의 내용이었다. 문수르가 받은 보고에 따르면 지미가 이끄는 영지는 정치적으로 큰 문제가 없었으며, 오히려 다른 영지들보다 영지민들이 더 기뻐한다는 내용뿐이었으니까.
그러나 그게 지미가 이룩하고자 하는 것의 전부는 아닐 것이다. 절대 아니다.
‘어쩌면.’
이 순간.
‘어쩌면 새로운 왕이…….’
문수르의 머릿속이 복잡하게 움직였다.
2.
노운은 아히만트 백작을 불렀다.
“폐하께서 은밀하게 서찰을 보내셨습니다.”
노운은 길게 말하지 않았다. 자신이 황제로부터 받은 서찰을 아히만트 백작에게 건네줬다. 아히만트 백작은 그 서찰을 받자마자 곧바로 내용을 탐독하기 시작했다.
‘폐하의 필체는 확실하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필체를 일단 확인했다. 노운을 의심하는 게 아니다. 혹여 다른 누군가가 수작을 부렸을 가능성이 있으니까. 하지만 대충 봐도 카이탄 황제의 필체가 많았다. 힘이 넘치면서도 적당한 기교를 섞인 이 필체는 카이탄 황제가 아니고서는 쓸 수 없는 필체였다.
의심은 거기서 끝이었다. 아히만트 백작은 서찰의 내용에만 집중했다.
내용은 충격적이었다.
‘그렇구나.’
아히만트 백작은 모든 내용을 읽은 후에 짧게 탄식했다. 그 후에야 간신히 입을 열었다.
“폐하의 혜안이 참 깊었소.”
“그동안 자세한 사정을 알려드리지 못한 점 죄송합니다.”
“아니오. 절대 노운 경께서 잘못하신 게 아니외다. 허허…… 역시 폐하는 참 대단하신 분이오.”
서찰의 내용.
“결국 이황자가 모든 걸 손에 넣었구려.”
이제까지 모든 것이 연극이었다는 것. 자신의 의견에 반기를 들었던 일황자와 삼황자 그리고 그 외 황자들을 스스로 몰락하도록 만들기 위해 콩탄 왕국을 이용했다는 것이었다.
실제로도 그렇게 결과가 나왔다. 이번 콩탄 왕국과의 전쟁에서 가장 많은 이득을 본 세력은?
이황자 파벌이다.
더 웃긴 건 이황자 파벌은 제대로 된 전투를 단 한 번도 치르지 않았다. 그저 전선 뒤에 위치한 상황에서 적당한 수준의 전투만 치렀을 뿐이다. 그럼에도 가장 큰 이득을 봤다. 지금 눈치 빠른 귀족들은 어떻게든 이황자 파벌에 줄을 대기 위해 어떤 식으로든 수작을 부리는 중이었고, 심지어 중립을 표방하던 귀족들마저 이황자에 손을 들어주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로써 후계자구도는 확실해진 것이다.
황태자의 자리에 오르는 건 이황자다.
아히만트 백작은 이 모든 사실에 헛웃음이 나왔다. 설마 전쟁이 눈가림일 줄이야?
하지만 동시에 아히만트 백작의 눈빛은 날카롭게 변하기 시작했다.
‘이제 됐구나.’
아히만트 백작, 그는 중립을 표방하던 귀족이다. 오직 한 명, 황제만을 섬기던 귀족이다. 그런 그가 갑자기 이황자 파벌 속에서 검을 든 이유는 오직 한 가지 뿐이었다.
앞서 말했듯이 황제를 위해서였다.
‘이제 더 이상 후계자를 걱정할 필요가 없어.’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아히만트 백작은 이황자를 섬기지 않는다. 단지 이황자를 위해 잠시 자신의 힘을 빌려줬을 뿐. 아히만트 백작이 원한 건 카이탄 황제의 후계자가 확실해지는 것, 그것뿐이었다.
황제가 보다 강한 권력을 힘 쓰기 위해서는 확실한 후계자가 존재해야만 했으니까. 이제까지 카이탄 황제가 가진 가장 큰 문제점 역시 바로 후계자가 확실하지 않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이제 그걸 신경 쓸 필요가 없어졌다.
더 이상 제국의 그 누구도 이황자가 황태자의 자리에 오른다는 사실에 불만을 가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이제 다시 제국은 오롯하게 카이탄 황제를 중심으로 뭉치기 시작할 것이다.
다시금 황제의 시대가 오는 것이다.
“혹여 폐하께서 다른 명령은 내리지 않으셨소?”
“그 부분 때문에 이렇게 아히만트 백작님을 찾아왔습니다.”
“무슨 말이오?”
“폐하는 이 서찰의 내용 외에 이러다할 말씀은 없으셨습니다. 하지만 필시 폐하께서는 어떠한 의중을 품고 계실 겁니다.”
아히만트 백작은 당연히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보면 카이탄 황제가 그동안 관심을 두지 않았던 후계자 다툼에 대해서 갑자기 개입한 건 필시 다른 무언가를 노리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다른 무언가를 하기 전에 자신의 권력과 지지기반을 보다 견고하게 만들기 위해 자신의 약점이었던 후계자 부분을 확실하게 처리하는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솔직히 말해서 어떠한 리스크를 짊어진 채 이렇게 무리하게 일을 진행할 필요가 없다. 더군다나 어떤 의미에서는 그저 방관자 자세를 취해서 황자들이 알아서 후계자를 결정할 수도 있지 않은가? 오히려 강한 후계자를 뽑기 위해서는 개입보다는 방관을 택하는 게 나을 수도 있었다. 실제로도 많은 이들이 황제의 의중을 그리하다고 생각했었다.
그럼 대체 카이탄 황제는 무엇을 노리는 걸까?
“아히만트 백작님은 과연 폐하께서 무엇을 원하시기에 이리도 큰 그림을 그리신다고 보십니까?”
“허어…… 나는 아무래도 머리보다는 몸을 쓰는 자라 잘 모르겠소.”
그 순간 이채를 보이는 아히만트 백작의 눈.
“노운 경께서는 어찌 생각하시오?”
아히만트 백작은 노운의 생각이 궁금했다. 노운이라면 그 누구보다 정확하게 카이탄 황제의 속마음을 볼 테니까.
노운은 옅은 미소를 지었다.
“어디까지나 제 예상입니다.”
“노운 경의 혜안을 나는 믿소.”
“폐하께서는…… 이제까지 모든 제국의 황제 폐하분들이 꿈꾸었으나 이루지 못했던 것을 원하시는 것 같습니다.”
“무슨 소리오?”
아히만트 백작은 곧바로 이해하지 못했다. 그런 아히만트 백작에게 노운이 되물었다.
“페스로 제국의 평생 숙원이 무엇입니까?”
“그야 당연히…….”
제국의 평생 숙원.
오래 생각할 필요도 없다. 이제까지 제국이 가장 원했던 것은 결국 그것, 하나뿐이니까.
“설마?”
아히만트 백작의 눈이 커졌다.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당장 터질 것처럼 커졌다.
“설마가 아닙니다.”
“아니, 정말이오?”
재차 묻는 아히만트 백작. 그런 아히만트 백작에게 노운은 마치 확신한다는 듯 말했다.
“맞습니다.”
노운, 그의 눈빛이 빛났다.
“폐하께서는 대륙통일을 꿈꾸고 계십니다.”
대륙통일!
그 단어에 아히만트 백작은 저도 모르게 짧게 휘청거렸다. 아찔함에 휘청거린 게 절대 아니었다.
‘대륙통일.’
그 반대였다.
‘드디어!’
오히려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렬한 희열이 아히만트 백작의 머릿속을 헤집고 있었다.
대륙통일이란 단어!
이제까지 모든 제국의 황제들이 꿈꾸었던 일이다. 그러나 이제까지 그 누구도 성공하지 못했던 일이기도 했다. 페스로 제국은 언제나 강국이었지만, 반대로 그런 페스로 제국이 야망을 펼칠 때마다 세상 모든 이들이 힘을 모아 반격을 시도했으니까.
더군다나 카이탄 황제는 이제까지 제국의 황제들과 다르게 검을 휘두르기 보다는 자애와 평화를 통해서 더 많은 이득을 취하는 인물이기도 했다. 솔직히 말해서 대륙통일이란 단어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런데 오히려 그런 카이탄 황제가 대륙통일을 마음에 두고 있었다.
아히만트 백작은 노운을 바라봤다.
그는 눈빛으로 말하고 있었다. 어째서 그런 답이 나왔는지 제발 답변을! 이해를 시켜달라고!
노운은 웃으며 말했다.
“이건 어디까지나 제 생각일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