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5화
10.
한석균 회장.
그를 설명할 수 있는 단어는 너무 많다. 그가 이룩한 업적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다.
위대한 마법사였던 그는 종국에 신과 신이 만들어낸 이치마저 뛰어넘는 절대자의 반열에 올랐다. 그러한 자신의 능력을 기반으로 차원을 넘나들 수 있는 노크맨을 만들었다.
그 외에도 그는 두 개의 각기 다른 차원에서 최고의 경지에 오른 자이기도 했다.
만약 역사에서 꼭 한 명의 이름을 남겨야 한다면, 한석균 회장은 충분히 그 후보군에 들만한 자였다.
그런 그가 죽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
‘죽은 건가?’
처음 문수르는 그 소식이 보통 소식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충격적인 소식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래, 죽은 거로군.’
크게 놀라진 않았다. 충격적인 사실이지만 어떻게 보면 문수르는 어느 정도 그럴 수도 있다, 라는 감을 느끼고 있었다.
처음부터 그랬다
처음 문수르가 한석균 회장을 만나는 순간부터, 한석균 회장은 적어도 건강이란 단어와는 굉장히 먼 거리를 두고 있었다.
굳이 표현하자면 오늘내일…… 솔직히 말해서 당장 내일 죽어도 이상할 게 없는 처지였다.
정말 차원을 뛰어넘을 정도로 위대한 마법 그리고 지구라는 문명에 존재하는 가장 위대한 과학기술을 손에 넣은 그였지만, 그가 다시 건강을 되찾을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그런 방법이 있었다면 애초부터 나약한 모습으로 문수르 앞에 등장하지 않았을 것이다. 반대로 그 마법과 대단한 기술력 덕분에 이제까지 숨이 붙어있던 거겠지.
결국 한석균 회장의 죽음은 그 무엇보다 가까이에 있었던 셈이다.
그런 한석균 회장이 죽었다는 사실에 크게 놀랄 필요가 없다. 담담하게 그 사실을 받아들이면 된다.
담담하게.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뭡니까?”
문수르는 정말 스스로도 놀랄 정도로 자신의 마음을, 심정을 담담한 방향으로 컨트롤했다.
그런 문수르의 모습에 노운은 묘한 미소를 지었다.
뭐라고 해야 할까?
동질감을 느꼈을 때 나오는 미소라고 해야 할까? 적어도 문수르 입장에서는 꽤나 반갑지 않은 미소였다.
“뭐, 간단한 거야. 이제부터 우리 무슨 짓을 해도 한석균 회장은 더 이상 우리가 하는 행동에 제지를 할 수 없다는 의미지.”
“그래서? 한석균 회장의 명령을 무시하고 이제는 제멋대로 살아가겠다, 뭐 그런 말입니까?”
“반은 맞고, 반은 틀리지.”
노운이 어깨를 으쓱했다.
“간단한 거야. 이제르트 백작가를 반석에 올리는 순간 우리 목을 죄고 있는 목줄이 끊어지는 거지.”
“목줄?”
“인공지능 말이야. 넌 뭐라고 부르지? 참고로 난 이 녀석은 롬이라고 부르지.”
“로이드.”
“로이드라…… 롬과 로이드. 작명센스는 비슷하군. 뭐, 우스갯소리는 여기까지 하고.”
툭툭!
노운은 제 손가락으로 제 머리를 건드렸다.
“알다시피 이 인공지능이 단순히 우리들을 도와만 주는 게 아니잖아?”
맞는 말이다.
로이드는 문수르의 몸에 영향을 미친다. 유사시에 문수르의 몸에 전기충격을 줄 정도의 기능을 가지고 있다.
반대로 말하면 로이드는 문수르에게 어떠한 순간 제약을, 제재를 가할 수도 있다는 의미다.
목줄이라는 표현, 틀린 표현은 아니다. 실제로 한석균 회장은 문수르가 혹여 자신이 의도한 방향 외의 방향으로 틀어질 때를 막기 위해 로이드를 감시책으로 이용했고 그 사실을 문수르에게 숨기진 않았다.
하지만 이제까지 문수르는 그 부분에 대해서 고민이나 걱정을 해본 적이 없었다.
할 필요가 없었다.
로이드가 문수르에게 해를 끼치는 건 적어도 문수르가 한석균 회장을 배신했을 때뿐일 테니까. 문수르는 한석균 회장을 배신할 생각이 눈곱만큼도 없었다.
아니, 오히려 이제르트 백작가의 모든 이들을 위해서라도 문수르는 악착 같이 이제르트 백작가를 위해 희생할 각오가 준비되어 있었다. 한석균 회장이 하지 말라고 해도 할 것이다.
그러나 노운은 달랐다.
“충성심 좋은 너와는 다르게, 난 이 목줄이 사라지면 그때부터 신나게 내 하고 싶은 일을 할 거거든. 그래서 말인데.”
이제부터 나오는 말.
“아까도 말했지만, 우리 이렇게 하는 게 어때?”
본론이다.
“넌 지구로 돌아가. 모든 일이 끝난 후에 깔끔하게 지구로 돌아가는 거지. 돌아가서 한석균 회장이 남긴 유산으로 마음껏 즐기는 거야. 아마 상상조차 하기 힘들 정도의 호사를 누릴 수 있겠지. 난 한석균 회장이 남긴 유산에 관심이 없어.”
“그러는 그쪽은?”
“네가 떠나면 난 뭐하겠어? 당연히 난 여기에 남을 거야.”
알겠다.
노운이 하고자 하는 말이 무엇인지, 그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황제라도 될 생각입니까?”
씨익!
노운은 그 대답에 웃었다.
“비슷했어. 조금이지만 비슷했어.”
노운의 그 말.
남들은 이해하기 힘들겠지만 문수르는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문수르는 판타지 소설 작가였으니까. 그가 쓴 소설 중에는 별 볼일 없는 인간이 황제가 되는 성장물도 있었다. 그 과정에서 글을 쓰면서, 문수르는 주인광에게 본인을 투영할 때가 있었다.
어떤 느낌일까?
판타지 세계에 떨어져서, 밑바닥부터 시작해서 대제국의 황제가 된다면, 그건 어떤 느낌일까?
적어도 그 어떤 마약으로도 감히 느낄 수 없을 정도로 강렬한 희열감을 느낄 수 있겠지.
더불어 그 성취감도 어마어마할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한석균 회장의 유산을 이어 받는 것보다 더 강렬한 경험일지도 모른다.
이해한다.
문수르는 노운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왜 그것을 원하는지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황제가 된 후에는? 그 후에는 뭘 하실 생각입니까?”
“그건 여기서 말해줄 수 없지. 지금까지 말해준 것만 하더라도 내 입장에서는 크게 인심을 쓴 거나 마찬가지거든.”
“혹여 이제르트 백작가에…….”
“걱정 마. 이제르트 백작가를 건드리는 일은 없을 테니까. 이제르트 백작가가 전력으로 내 앞을 가로막지 않는 이상은 말이야. 하지만 그런 일은 없겠지. 안 그래?”
문수르는 고민했다.
노운의 제안, 쉽게 말해서 노운은 자신이 이제르트 백작가가 반석에 오르는 걸 도와주겠다는 의미다.
물론 공짜는 아닐 것이다.
그만한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그 대가를 지불하는 건 그 누구도 아닌 문수르, 그다.
“내가 여기서 거절하면……?”
“거절해도 뭐, 내가 이제르트 백작가를 당장 공격할 리는 없지. 아직 목줄은 유효하니까. 내가 이제르트 백작가에 적의를 품고 공격을 하는 순간 내 머릿속에 있는 인공지능 롬이 나를 죽이려 들 테니까.”
“그렇다면 거절하겠습니다.”
“그래?”
노운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뭐, 그럼 그렇게 하지.”
노운은 재차 문수르를 설득하려 한다거나, 그러지 않았다. 깔끔하게 자리에서 물러났다.
문수르는 그런 노운을 게슴츠레한 눈으로 바라봤다.
문수르가 제안을 거절한 이유.
‘어차피 한 번 더 협상 테이블은 마련된다.’
당장 답을 내릴 필요가 없으니까. 기회는 다시 올 것이다. 그럼 그때 정답을 내놓으면 된다.
노운 역시 그것을 알았기에 지금 상황에서 문수르를 설득하려 무리한 배팅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일단 앞으로 일정을 말해주지. 이황자의 군대는 콩탄 왕국의 영토에서 떠나 황도로 돌아갈 거야. 남은 무리들이 콩탄 왕국을 노리겠지만…… 굳이 내가 조언을 해주지 않아도 그 정도는 막을 수 있겠지.”
정답이다.
“그럼 다음에 다시 기회가 되면 보자고.”
노운은 그렇게 말을 남긴 채 훌쩍 떠났다.
문수르 역시 그 자리에 더 이상 미련을 가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 순간 그 둘은 몰랐다. 그 둘이 다시 만나게 됐을 때, 그들이 어떤 상황에 처하게 됐는지.
11.
노운은 미소를 지었다.
‘적당해.’
이번 일.
어떻게 보면 노운이 거둔 수확은 하나도 없어 보였지만, 절대 아니었다. 노운은 꽤나 좋은 수확이 있었다.
‘이걸로 문제없이 황도로 돌아갈 수 있겠어.’
적당한 구실은 마련했다. 이대로 황도로 돌아간다고 해도, 큰 문제는 없을 것이다.
‘콩탄 왕국을 이용해서 일단 일황자, 삼황자는 제거했군.’
더불어 이미 수확은 컸다.
콩탄 왕국과의 전쟁으로 인해 일황자와 삼황자의 파벌은 이제 다시는 황태자 위를 노릴 수 없는 처지가 됐다.
그뿐인가?
카라카크를 토벌한다는 명분하에 온 사황자 이하의 황자들 역시 소득을 거두지 못할 것이다.
오히려 대패 그리고 연패를 경험하면서 일황자나, 삼황자들과 다르지 않는 처지가 될 터.
동시에 제국은 이루 말할 수 없는 패배감과 절망감에 휩싸이기 시작할 것이다.
때가 온 것이다.
페스로 제국의 모든 이들이 영웅을 받아들일 수 있는 때가!
‘문제는.’
단지 지금 황제의 상황, 카이탄 황제가 자신의 손아귀에서 벗어났다는 사실이 문제였다.
가장 큰 변수다.
만약 그 변수가 없었다면 노운이 문수르와 직접 만나는 일은 절대 없었을 것이다.
“좋아.”
그때였다.
반사적으로 품에서 담배를 찾던 노운은 담배가 없다는 사실에 눈살을 찌푸렸다.
“젠장, 하필이면 이때. 진짜 일이 꼬이려니, 다 꼬이는군.”
노운의 표정이 구겨졌다.
12.
노운과의 만남.
문수르에게는 큰 충격이었지만 동시에 큰 수확을 한 자리이기도 했다.
가장 큰 수확은 그동안 의문으로만 남았던 두 번째 노크맨을 직접 볼 수 있었다.
‘그 얼굴.’
절대 잊지 않을 것이다.
두 번째 수확은 전쟁에 대한 승리다. 이 전쟁은 무조건 콩탄 왕국이 승리하게 된다.
이유?
노운이 이미 시나리오를 그려두었으니까. 그가 그린 시나리오대로 이야기가 흘러갈 것이다.
승리가 보장된 전쟁!
그것만큼 마음 편한 전쟁은 없다. 이 세상에서 가장 황홀한 전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더불어 페스로 제국과의 전쟁에서 승리를 거둔다면, 자연스럽게 기회가 올 것이다.
‘전쟁이 끝난 후 병력은 백작가가 아니라 곧바로 왕도로 향한다.’
필로스 왕을 무너뜨릴 것이다.
더 나아가 카라카크도 처치해야 한다. 그래야만 정말 모든 일이 끝났다고 할 수 있다.
그 다음은?
‘마지막은…….’
하나가 남는다.
‘노운과 다시 협상 테이블에 앉는 거겠지.’
노운.
그와 다시 협상을 해야 한다. 정말 문수르가 이 세계를 떠나게 될 것인지 아니면 다른 결과가 나올 것인지.
결국 둘이 합의는 해야 한다. 그 둘은 노크맨이니까. 이제르트 백작가를 위해 이 세계에 파견된 요원이니까. 이제르트 백작가에 대한 일이 모두 끝나면, 뭐든 결정을 해야 한다.
‘끝.’
문수르는 그 다음을 생각하지는 않았다.
단지.
‘끝이구나.’
이 순간 이상하게도 문수르의 머릿속에 떠오른 건 다름 아니라 한석균 회장, 그의 얼굴이었다.
많은 걸 받았다.
물론 그건 단순히 받는 것이 아니라 기브 앤 테이크, 받는 만큼 주는 것이었지만 한석균 회장이 아니었다면 문수르는 여전히 취업준비생으로 비루한 삶을 살았을 것이다.
한석균 회장 덕분에!
정말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대단한 경험을 했다. 그리고 그 무엇보다 소중한 사람들을 만났다.
자신의 운명을, 인생을 송두리째 바꿀 수 있는 정말 천금보다 더 귀한 기회를 얻었다.
더불어 한석균 회장은 스승이기도 했다. 그에게 정말로 많은 것들을 배웠다. 그리고 그때 배운 것은 수시로 문수르의 목숨을, 인생을 구해주었다.
그런 그가 죽었다는 것.
“빌어먹을.”
이제 와서야 느껴진다. 문수르에게 한석균 회장이란 인물이 어떤 의미였는지 말이다.
노운 앞에서 애써 지었던 담담한 표정, 그 표정들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문수르는 하늘을 봤다. 어두컴컴한 하늘 위에 뜬 별들이 유난히 밝아보였다.
문수르는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감사했습니다.’
문수르는 그렇게 한석균, 그를 떠나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