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4화
7.
노운은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서 일어나는 전쟁을 바라보고 있었다. 두 눈으로 보는 건 아니었다.
“아주 개박살이 나는구나.”
준비해온 안경.
그 안경을 쓰자마자 GPS시스템을 통해 전황을 실시간으로 파악할 수 있었다.
“아무리 좋지 못한 요소가 가득하다고 해도 이렇게 개박살이 나는 건 좀 그렇군.”
호요 백작.
사황자를 모시는 귀족 중 한 명이다. 나름 배경이 튼실하다. 호요 백작가라면 페스로 제국에서도 명문으로 불리는 곳이니까. 더군다나 호요 백작가는 다수의 광산들을 소유한 가문이었는데, 그 중 몇몇 광산에서는 기가스를 만드는데 굉장히 중요한 금속들이 채굴됐다. 그 덕분에 호요 백작가는 막대한 부를 쌓는 건 물론, 무려 40대가 넘는 기가스를 보유할 정도였다. 어마어마한 숫자다.
정말 대단한 가문이다.
그러나 그런 호요 백작가가 그저 명문으로만 남고, 실세가 되지 못한 이유는 간단했다.
호요 백작, 그의 평범한 때문이다.
노운 입장에서는 그가 가진 능력은 정말 보잘 것 없다. 결국 그 보잘 것 없는 능력이 지금 상황을 만든 것이다.
‘대충 봐도 2배 이상이나 병력으로 많았거늘.’
병력차는 2배 이상이었다. 호요 백작의 군대가 2배 이상이나 더 많은 상황이었다.
하지만 충돌 순간부터 호요 백작의 군대는 밀렸다.
더 큰 문제는 그 다음이다.
한 번의 격돌 이후 제대로 전열을 가다듬기보다는 오히려 우왕좌왕 흔들리는 모습을 보여줬다.
반면 이제르트 백작군은 곧바로 틈을 찾아냈고, 그 틈을 마치 송곳처럼 파고 들어왔다.
그 공격이 다시 우왕좌왕하는 호요 백작의 군대.
그런 과정이 서너 번 반복되자, 몇몇 병사들은 부리나케 도망치기 시작했다.
애초에 패잔병들이다. 전쟁에 대한 승리보다는 공포가 더 많은 자들, 그저 살아남는 것이 삶의 전부인 자들이다.
그들에게 탈영에 대한 공포는 없었다. 어차피 이래 죽나, 저래 죽나 일단 살고 보자라는 마음이 가득했다.
병사들의 이탈.
기가스들의 전투에서는 별 의미가 없어 보이지만, 의외로 병사들의 이탈이 주는 충격은 엄청났다.
전쟁 중에 탈영이다.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나고 있다.
이 상황에서 기가스 파일럿들의 심정이 어떨까? 기가스를 탑승한 채 높은 곳에서, 병사들이 도망치는 걸 뻔히 보는 기가스 파일럿들이 전투에만 오롯하게 집중할 수 있을까?
“저 빌어먹을 놈들이!”
누군가는 분노에 눈이 돌아갔고.
“젠장, 어쩌다 이 지경까지!”
누군가는 푸념을 뱉었으며.
“그래, 이렇게 됐구나.”
누군가는 동정 섞인 탄식을 뱉었다.
그리고 그들이 저마다 전투와 관계없는 감정을 품을 때마다, 이제르트 백작군은 그 틈을 비집고 들어왔다.
콰직!
이제르트 백작가의 기가스들이, 2인 1조로 합을 맞춘 그들의 검이 적군의 기가스를 사정 없이 후려쳤다.
틈을 보인 대가는 컸다.
보통 경우라면 여러 번 공격을 허용해도 충분히 버틸 수 있었던 상황.
그러나 기가스 파일럿이 한 눈을 파는 사이, 방심을 하는 사이 날아온 공격은 기가스 파일럿을 당황케 만들었고, 결과적으로 반응속도가 느려질 수밖에 없었다.
틈이 더 큰 틈으로 번졌다.
더군다나 그런 틈 자체가 필요 없는 자도 있었다.
“진격하라!”
목소리 높여 이제르트 백작군의 사기를 하늘을 찌를 때까지 올리는 자!
“나를 따르라!”
최전선에서 무신(武神)이나 다름 없는 위엄을 보이는 자!
문수르.
그리고 그가 조종하는 드래곤 파이터!
그 두 가지 조합 앞에서 적의 방심이나, 틈이나, 약점 같은 건 아무래도 좋았다.
절대적인 힘!
압도적인 출력에서 나오는 압도적인 드래곤 파이터의 공격력을 막을 수 있는 건 없었다.
드래곤 파이터의 창은 정말 모든 걸 꿰뚫었다.
드래곤 파이터가 지나간 자리에는 이미 박살이 나버린 기가스 수십여 대가 시체마냥 늘어져 있었다.
일기당천!
정말 그렇게 밖에 표현할 도리가 없다.
결국 전투가 시작된 지 다섯 시간 정도가 흘렀을 때, 호요 백작이 이끄는 카라카크 제3 토벌대는 소수의 인원만이 살아남은 채 도망치는 수밖에 없었다.
대승이었다.
이루 말할 수 없는 대승!
그리고 그 순간.
“이제 한 번 만나봐야지.”
전투를 보고 있던 노운, 그가 움직였다.
8.
처음이었다.
“정말입니까?”
문수르는 보고를 받은 후에 재차 물었다. 부하는 다시금 말했다.
“예. 제국 쪽에서 서신을 보냈습니다.”
“제국 쪽에서…….”
문수르는 길게 고민하지 않았다. 전쟁 도중에 적과 서신을 나누는 경우가 아예 없는 건 아니다.
더군다나 이 세계에서는 귀족들이 인질로 잡혔을 경우, 귀족을 죽이기보다는 그에 합당한 값을 치르고 풀어주는 게 전쟁의 기본예의로 인정 받는 세계다.
전투가 끝난 후, 몸값 협상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서신이 오고 가는 건 이상하지 않다.
하지만 이제까지 페스로 제국은 그런 기본적인 예의를 보여주지 않았다.
쉽게 말해서 제국의 귀족을 포로로 잡았음에도 이러다할 합의의사를 보이지 않은 것이다.
자존심 때문이었겠지.
제국이 시작한 전쟁인데, 제국이 먼저 아쉬운 소리를 하는 건 정말 제국의 자존심을 나락으로 떨어뜨리는 일이었을 것이다.
더군다나 페스로 제국은 패자에 대해서는 가차없다. 패배한 귀족 따위에게 보여줄 아량 같은 건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왜?’
그런 제국이 지금 처음으로 손을 내밀었다.
더군다나 필로스 왕이 아니라 이제르트 백작가에게 직접 말이다. 이게 핵심이었다.
귀족들의 몸값 문제를 상의하고 싶다면 이제르트 백작가가 아니라 필로스 왕을 찾았어야 했다. 그게 일반적인 일이다. 그런데 이제르트 백작가, 그것도 전장에 나온 문수르에게 서신을 보낸다고?
무언가 있다.
‘일단.’
문수르는 고민을 멈추고 서신을 받았다. 그리고 그 서신을 받는 순간 표정이 굳을 수밖에 없었다.
“빌어먹을.”
서신의 내용은 금방 이해됐다.
“결국 그런 것이었나?”
서신에 쓰인 글자는 다름 아니라 한글이었으니까.
9.
문수르는 처음 그를 보는 순간, 그가 자신과 똑같은 세계에서 온 인물임을 알 수 있었다.
냄새.
정말 골초들만이 내뿜을 수 있는 독한 담배냄새가 온몸에 가득 베여있었으니까.
제대로 된 담배가 없는 이 세계에서 그 냄새는 그 무엇보다 확실한 증거였다.
그가 두 번째 노크맨이란 증거.
“이렇게 만나는 건 처음이군.”
“문수르라고 합니다.”
“하하, 만나자마자 자기 소개부터 하는군. 그보다 날 보고 당황하지 않는 걸 보니, 한 회장에게 내 이야기는 들은 모양이지?”
“듣진 않았습니다.”
“너무 말투가 공손해서 거슬리는데? 어차피 나이 같은 거 서로 신경 쓸 필요도 없을 텐데 말 놓지?”
“괜찮습니다. 이게 편해서.”
“내가 좀 불편한데 말이야.”
기싸움이 시작됐다.
문수르는 담담한 표정을 지었다. 노운은 같잖다는 듯한 표정으로 문수르를 바라봤다.
그 둘이 잠시 동안 말없이 서로를 바라봤다.
“담배 한 대만 피우지.”
이내 노운은 품에서 담배 한 개비를 꺼내 입에 문 후에 라이터로 불을 붙였다.
문수르는 눈살을 찌푸렸다.
‘무슨 의미지?’
이 행동.
필시 의미가 있을 것이다. 의미 없는 행동을 하기에 이 만남이 가지는 의미는 너무 컸으니까.
“후우!”
이윽고 노운의 입에서 긴 담배연기가 나왔을 때, 노운이 먼저 말을 꺼냈다.
“길게 이야기 할 필요는 없지. 이번 전쟁, 네 녀석이 가져가라.”
문수르는 대답하지 않았다. 노운의 말은 계속됐다.
“적당히 싸우다가 적당히 물러나주지. 이제르트 백작가는 그 과정에서 영웅이 되는 거고.”
“원하는 게 뭡니까?”
“이제르트 백작가를 반석에 올리는 것. 그게 우리들이 여기에 온 가장 큰 이유 아닌가?”
맞다.
노크맨이 생긴 이유는 그 무엇도 아니라 이제르트 가문을 반석에 올리는 것, 단지 그것뿐이다.
“그것뿐입니까?”
“이제르트 백작가가 반석에 오르면 그 순간 우리들이 할 일은 사라지는 셈이지. 뭐, 특별한 이야기는 아니잖아? 더불어 내가 제국 쪽에서 적당히 수작을 부려주면 일은 더 쉽게 풀릴 테고.”
“일이 그리 간단하지 않습니다.”
“왜?”
문수르는 결국 말했다.
“카라카크, 그가 필로스 왕의 뒤에 있습니다. 지금 콩탄 왕국은 카라카크의 농간에 놀아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런 카라카크를 처치해야만 진정한 임무가 끝나는 겁니다. 그 전까지는 일이 끝났다고는 절대 말할 수 없습니다.”
아직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진실.
지금 문수르는 그 진실을 말했다. 노운은 그럴 만한 상대였으니까. 동시에 그를 상대로 무언가를 얻어내기 위해서는 이 정도 정보는 대가 없이 꺼낼 필요가 있었다.
한편으로는 궁금했다.
지금 문수르를 괴롭히는 이 난제, 과연 이 난제를 노운은 어떤 식으로 해결할까?
이윽고 노운이 말했다.
“그래? 그럼 일단 전쟁을 끝낸 후에 네가 직접 카라카크를 잡아 죽이면 되겠군.”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닙니다. 카라카크는…….”
“죽이기 힘들다고? 그럼 어쩔 수 없이 임시방편으로 필로스 왕을 죽이면 되는 문제군.”
노운은 핵심을 봤다.
“필로스 왕이 카라카크와 손을 잡았다, 그러면 필로스 왕을 무너뜨리고 이제르트 백작가의 입맛에 맞는 인물을 왕위에 올리면 이야기는 깔끔하게 해결되겠지.”
정답이다.
더불어 문수르의 계획이기도 하다.
“그 과정에서 제국 쪽에서 몇 가지 도움을 주면 더 좋을 테고. 뭐, 그건 나중의 이야기니까.”
노운은 순간 이야기를 단숨에 넘겨버렸다.
“좀 더 생산적인 이야기를 해보자고. 예를 들면 이제르트 백작가가 반석에 오른 뒤의 상황 말이야.”
노운의 진심.
“모든 일이 끝난 뒤에, 특별한 이유가 없다면 이 세계를 떠나줬으면 좋겠어.”
“그게 무슨 말입니까?”
노운은 씨익, 웃었다.
“한석균 회장이 지금 어떤 상황인지 너는 알고 있어?”
그 질문 후에 나온 노운의 대답.
그건 문수르에게 너무나도 충격적인 대답이었다.
“한석균 회장은 죽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