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2화
12.
문수르는 전황을 바라봤다.
페스로 제국의 군대는 마치 물에 잉크를 떨어뜨린 것처럼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점령을 하며 그 세력을 넓히고 있었다.
전투 방법도 간단했다.
기가스를 이용해 대치국면을 만든 후에, 후방을 치든 아니면 그냥 그대로 대치국면은 유지하는 사이 다른 쪽에서 전투를 일으키든, 모든 것은 그 군대를 이끄는 이의 개인역량에 따라 달라졌다.
‘정석이다.’
수뇌부는 큰 그림만 그리고, 나머지 세세한 것은 개인에게 맡긴다.
여기에 압도적인 병력과 확실한 보급루트의 확보는 그 무엇보다 확실한 승리의 보증수표나 마찬가지였다.
틈이 없다.
어째서 페스로 제국이 이제까지 전쟁의 제국으로 불렸는지, 확실히 알 수 있다.
특별한 게 있는 게 아니다.
가장 기본적인 걸 가장 확실하게 할 수 있으니까, 이제까지 그들은 전쟁에서 승리해온 것이다.
‘정석엔 정석.’
이런 정석 방법에는 정석 방법으로 승부를 거는 수밖에 없다.
‘보급루트의 차단.’
가장 좋은 건 역시 보급루트 차단이다. 이 세상에 먹지 않고 싸울 수 있는 군대는 언데드 군단을 제외하면 없다.
‘레인저를 이용하면 되겠고.’
어렵지 않다.
GPS시스템으로 적의 보급루트를 전부 파악하고 있고, 실시간으로 그 정보를 얻을 수 있는 문수르에게 기습은 가장 쉬운 일이다.
‘보급을 흔든 후에는 전면전.’
보급이 끊긴 군대는 초조해진다. 제 아무리 대단한 강군이라고 해도 하루만 제대로 먹지 못하면 그 전력이 급감한다. 이틀을 굶기면 사기도 확실히 꺾을 수 있다.
전력 그리고 사기.
이 두 가지 모두를 잃은 군대를 상대하는 것만큼 쉬운 일도 없다. 힘으로 부딪치는 것이다.
‘이 과정들을 반복하면 끝.’
어렵지 않다.
지금 앞서 말한 계획들, 시나리오들을 착실하게 실행만 하면 된다.
물론 문제가 되는 건 그 중간중간 튀어나오게 될 변수들일 것이다. 날씨 혹은 적의 장수, 적의 참모, 내부의 문제…….
문수르는 짧게 한숨을 쉬었다.
그런 문수르를 기쁘게 하는 소식 하나가 왔다.
13.
마구르로부터 연락이 왔다.
- 성공했습니다.
짧은 말이었지만 문수르 입장에서는 가장 기다리고, 고대하던 말이기도 했다.
마구르가 교섭에 성공한 것이다.
페서 왕국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노골적이진 않아도 국경 근처의 병력들의 움직임을 보여준 것이다.
‘페스로 제국은 절대 가만히 있지 못한다.’
국경에서의 움직임이 보이면 페스로 제국은 긴장할 수밖에 없다. 페스로 제국의 가장 큰 문제점이라고 할 수 있는 부분은 바로 대륙에 너무나도 적지 않다는 점이었으니까.
애초에 카이탄 황제가 화친 정책을 사용한 것도 그런 페스로 제국의 어쩌면 유일무이하다고 할 수 있는 근본적 약점을 해결하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어쨌거나 타국의 움직임에 제국은 백퍼센트 반응한다.
콩탄 왕국 입장에서는 적어도 숨통이 어느 정도 트일 수 있는 기회가 오는 것이다.
그리고 문수르의 예상은 정확했다.
페서 왕국의 움직임.
페스로 제국과 마주보고 있는 그 얼마 안 되는 국경 근처에 병력이 집중된다는 이야기가 들렸을 때, 페스로 제국의 귀족들의 움직임이 분주해질 수밖에 없었다.
“페서 왕국이 움직여?”
“설마 페서 왕국 따위가 제국을 노리려고 수작을 부리는 것인가?”
페스로 제국 입장에서 당연히 페서 왕국은 딱히 위협적인 적이라고 여겨지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페스로 제국은 너무나도 많은 병력을 콩탄 왕국에 집중하고 있는 중이었다.
더불어 귀족들이 앞 다투어 병력을 콩탄 왕국 쪽으로 보내는 중이기도 했다. 최소한의 방비는 해둔다고 해도, 그 수비병력이 평소 때보다는 훨씬 줄어든 상황.
더군다나 페스로 제국의 귀족들이 바보도 아니고, 이런 민감한 상황에서 페서 왕국이 의심을 사면서까지 병력을 움직이는 것이 오직 페서 왕국 혼자만의 독단적인 행동이라고 생각할 리는 만무하지 않은가?
콩탄 왕국과 페서 왕국의 동맹.
“혹시 콩탄 왕국과 페서 왕국이 손을 잡은 것 아니오?”
“흥! 감히 페서 왕국 따위가 이번 기회를 노려 제국을 노리겠다는 건가?”
“신경 쓸 가치고 없는 일이오. 오히려 콩탄 왕국을 무너뜨린 후에 곧바로 페서 왕국으로 진격하게 되겠군!”
말은 그렇게 했지만 페서 왕국과 국경 근처에 자리 잡고 있는 귀족들의 입장은 달랐다.
어쨌거나 이 민감한 일이다. 적어도 그냥 좌시하고만 있을 수는 없는 일 아닌가?
더군다나 지금 제국은 겉으로는 강한 힘을 가지고 있지만 내부적으로는 여러 갈래로 분열된 상황! 파문이 일어나면 한 번에 그치지 않고, 연쇄적으로 일어나는 상황이다.
결국 틈이 생겼다.
문수르가 기다리던 틈이 말이다.
14.
전선에서의 병력 중 일부가 이탈하기 시작했다. 이탈한 병력은 대략 전체병력의 2할 정도. 또한 후방에 위치한 병력들이었기에 당장 전선에 있는 병력의 숫자는 준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보통 전쟁이었다면 눈치 채지 못했을 변화.
그러나 GPS시스템을 소유한 문수르는 그 변화를 그 누구보다 빠르고 정확하게 포착했다.
병력이 빠졌다는 것.
흔들린다는 의미다.
‘왔다.’
문수르는 지체 없이 움직였다. 병력을 직접 이끌고 적의 보급루트를 정말 초토화시켰다.
신출귀몰하게 치고 빠지는 이제르트 백작군 앞에서 페스로 제국의 군대가 할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었다.
더군다나 문수르는 어느 순간부터 이황자의 군대와 삼황자의 군대 그리고 그 외의 군대를 구분할 수 있게 됐다.
같은 페스로 제국의 군대지만 그들은 각기 다른 군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상황. 그런 그들의 상황을 적절하게 이용했다. 효과는 확실했다. 문수르의 활약 덕분에 페스로 제국의 보급루트를 새로 만들 때마다 박살이 나기 시작했고, 보급에 문제가 생긴 페스로 제국군의 진격 속도가 처음으로 늦춰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여기서 문수르는 좀 더 과감하게 나갔다.
‘다시 보급이 이루어지면 제국 쪽도 승부수를 걸겠지.’
제국도 병신이 아닌 이상, 상대가 보급루트를 계속 노리는 건 좌시할 리 만무하다. 병력 일부를 돌리고, 점령한 진지의 숫자를 줄이는 한이 있더라도 보급루트에 대한 병력을 강화할 것이다.
동시에 보급이 이루어지면 곧바로 어느 정도의 희생을 감수하고 제대로 된 공격을 재차 시작할 터.
제국은 그런 선택을 무리 없이 내릴 수 있을 만큼의 군사력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페서 왕국이 움직여주면서, 2할이나 되는 병력이 줄어든 사실. 그 사실은 아마 제국의 그 어떤 지휘관도 예상하지 못했던 변수였다.
‘문제는.’
시나리오는 확실하다.
아군의 피해는 최소화.
적군의 피해는 최대화.
그것을 위한 모든 작전, 계획, 공격루트, 공격시간은 물론 후퇴시기까지! 모든 건 정해져 있다.
‘카라카크의 움직임이겠군.’
단지 마음에 걸리는 건 이 전황 속에서 보여줄 필로스 왕과 카라카크의 움직임이었다.
이제까지 카라카크는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문수르는 그것이 자꾸 마음에 걸렸다.
‘무슨 의미지?’
어차피 이미 수작을 부리지 않았는가? 그렇다면 기왕 할 거 계속 하는 게 나을 터.
‘또 무슨 꿍꿍이를 부릴 생각인 거냐?’
문수르의 눈빛이 차갑기 가라앉았다.
그러나 그 순간 문수르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일이 제국측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15.
아히만트 백작이 다급하게 노운을 찾아왔다.
“노운 경! 큰일났소!”
아히만트 백작의 다급한 모습에 노운은 당황하지 않았다. 그는 담담하게 질문했다.
“백작님, 무슨 일이십니까?”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오.”
“천천히 진정하고 말씀하시지요. 일단 무슨 일인지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폐하께서 페서 왕국을 향해 군대를 보내셨소.”
“아, 그렇습니까?”
이번에도 담담한 노운의 반응. 그런 노운의 반응을 본 후헤야 아히만트 백작은 진정할 수 있었다.
‘설마?’
아히만트 백작이 다시 되물었다.
“노운 경은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이오? 혹여 폐하께서 노운 경에게 따로 말을…….”
“폐하께서 제가 따로 해주신 말씀은 없으셨습니다만, 적어도 어느 정도 감은 잡고 있었습니다.”
“아! 역시 노운 경이오.”
“크게 당황하실 일은 아닙니다. 무엇보다 페서 왕국의 행동이 가당치 않았던 건 사실 아닙니까? 오히려 다른 국가들마저 제국을 업신 여기기 전에 페서 왕국을 확실하게 짓누르는 게 상책일 수도 있지요.”
아히만트 백작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사이비 종교에 빠진 신도의 그것처럼 말이다.
“크게 신경 쓰실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이런 때일수록 보다 확실하게 콩탄 왕국을 점령하면 됩니다. 어차피 이황자께서 황태자 위에만 오르시면 모든 게 끝납니다. 후계자가 정해지면, 결국 다시 제국은 폐하만을 위해 오롯하게 존재할 테니까요.”
“그렇지. 노운 경이 맞소.”
아히만트 백작이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바쁜 노운 경에게 정말 말도 안 되는 무례를 저질렀소.”
“제국을 향한 백작님의 충성심 때문이지요. 큰 흠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하, 고맙소.”
말과 함께 아히만트 백작이 자리를 떠났을 때.
“롬.”
노운은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 예, 마스터.
“어떻게 된 일이지?”
- 현재 파악 중입니다.
“파악 중이라고 말하지 말고. 어째서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진행된 거지?”
- 마스터, 현재 파악…….
쿵!
순간이었다.
노운은 온힘을 다해 제 옆에 있던 나무 탁자를 주먹으로 내리쳤다. 탁자는 가루가 되듯 박살이 났고, 탁자 위에 있던 컵은 바닥에 떨어지며 산산조각이 났다.
그 사이로 나오는 액체에서는 정말 깊은 커피 향이 풍겨져 나왔다. 단숨에 천막 안이 커피 향으로 가득 찼다.
“왜?”
그 순간 노운은 저도 모르게 품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담배를 보관하는 고급스런 금색 담배케이스.
팅!
그리고 지포라이터.
그렇게 순식간에 담배에 불을 붙이고, 담배를 입에 문 노운은 손으로 머리를 감싼 채 고뇌했다.
“왜 이런 일이 생긴 거지?”
카이탄 황제가 페서 왕국을 공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내릴 수도 있는 일이다.
하지만!
‘황제는 지금 꼭두각시 인형이나 다름 없을 터.’
지금 황제는 절대 그 결정을 내릴 수 없다. 노운의 허락 없이는 말이다.
그런데 이번 일을 노운이 모른다고?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필시 제국의 황도에서 어떤 엄청난 일이 노운도 모르는 사이에 일어난 것이다.
‘어떻게 하지?’
노운은 긴장했다.
어느 순간 그의 손바닥 안에는 땀이 맺히기 시작했다.
이제까지 모든 것이 노운의 마음대로, 계획대로만 흘러온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런 변수는 어디까지나 용납 가능한 수준의 변수였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수준의 변수.
있어서는 안 되는 문제가 터진 것이다.
“빌어먹을.”
이 순간 노운의 눈빛은 먹잇감을 빼앗긴 맹수의 그것처럼 정말 섬뜩하기 그지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