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1화
7.
교전은 없었다. 이제르트 백작군은 무사히 전장에서 빠져나온 뒤 후방에 마련된 콩탄 왕국의 진지로 복구할 수 있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이제르트 백작군의 등장은 모든 콩탄 왕국 병사들의 환호를 이끌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이제르트 백작군이 돌아왔다!”
“영웅이 왔다!”
이루 말할 수 없는 환호가 이제르트 백작군을 맞이했다.
더불어 그건 이제르트 백작군에게 있어 어떤 의미로는 처음 맞이하는 환호이기도 했다.
이제까지 이제르트 백작군은 콩탄 왕국에서 왕따나 다름없는 처지였었으니까.
전장에서 승리를 거두어도 환호를 받기보다는 곧바로 영지로 돌아와 다음 전쟁을 준비했다.
그래서일까?
이제르트 백작군은 긴장 풀린 얼굴을 한 채 자신들에게 쏟아지는 환호에 응답해주었다.
그러나 그건 병사들의 이야기.
이제르트 백작군을 이끄는 포비어에게는 이제까지 쌓아온 적보다 더 힘든 상대가 기다리고 있었다.
“자네가 이제르트 백작가의 포비어 경인가?”
“전황에 대해서 설명하도록.”
귀족들.
제국의 공세 속에서 제대로 버티지도 못한 채 열심히 꽁무니를 뺐던 그들은 한껏 거드름을 피우며 포비어에게 부탁이 아닌 일방적인 명령을 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그들은 귀족이었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귀족으로 태어난 자.
반면 포비어는 평민 출신이었다. 기사 작위를 얻었다고는 하지만 귀족들 입장에서는 미천한 신분이었던 것이다.
그런 그들에게 포비어는 영웅이라기보다는 자신들의 명성과 인지도를 갉아먹는 기생충에 불과했다.
포비어는 이런 귀족들의 반응에 살짝 주먹을 쥐었다.
‘참는다.’
그러나 분노를 폭발시키지는 않았다. 여기서 포비어가 멋대로 행동하면 가장 곤란해지는 건 이제르트 백작일 테니까.
“모두 설명해드리겠습니다.”
포비어는 순순히 전장에서 일어난 모든 일들에 대해서 설명을 해주기 시작했다.
8.
노운은 현 상황을 정리했다.
‘일황자는 파멸. 삼황자의 피해도 적진 않군. 가진 병력의 2할 정도를 잃었고, 더불어 3할 정도 되는 병력이 이탈한 상황. 절반으로 줄었군.’
일황자는 말 그대로 파멸이었다.
일황자는 그저 몇몇 기사들 그리고 귀족들과 함께 간신히 복귀했을 뿐이었다.
곧바로 황도로 향하는 일황자를 마중하는 이는 한 명도 없었다. 일황자는 이제 평범한 황자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 누구도 더 이상 일황자를 위해 목숨을 바치고, 충성을 바치지 않을 것이다.
삼황자의 경우도 썩 좋진 못하다. 이제르트 백작군의 치고 빠지는 게릴라식 전투는 무시무시했다. 더불어 그 게릴라식 전투는 모두 삼황자의 세력만을 노렸다. 그 과정에서 삼황자의 군대는 대략 2할 정도의 피해를 입었다. 사실 이 피해는 그렇다고 쳐도 된다. 문제가 되는 건 눈치 빠른 몇몇 귀족들이 삼황자 파벌에 담고 있던 발을 잽싸게 뺀 것이다. 그로 인해 빠진 전력의 숫자가 무려 3할이었다.
‘배보다 배꼽이 컸지.’
말 그대로 배보다 배꼽이 큰 상황이었다.
덕분에 삼황자의 전력은 반타작이 난 상황. 그런 상황에서 이황자 파벌에 줄을 대기 위해 무수히 많은 귀족들이 번호표를 뽑고 대기를 하고 있는 중이다.
한편으로는 다른 수작도 보이고 있다.
일황자와 삼황자 그리고 다른 황자들은 아예 이번 일을 없던 일로 만들려고 하고 있다.
간단한 거다.
황태자 위의 주인을 다른 방법으로 뽑자는 거다.
이황자 파벌이 반발하는 건 당연한 일이겠지만 이황자 파벌을 제외한 나머지 파벌들이 일시적으로 손을 잡으면 못할 것도 없다.
‘그게 좋지.’
노운 입장에서는 그런 식으로 극도의 대립구도를 보여주는 게 나쁘진 않다.
더불어 이번 기회에 제국은 좀 더 흔들려야 한다.
‘슬슬 다른 나라들이 움직일 텐데.’
노운의 생각은 자연스럽게 페스로 제국 주변국으로 향했다. 주변국이 바보가 아닌 이상 지금 이 상황을, 이 호기를 절대 놓치지 않을 것이다. 제국을 압박할 수 있는 최고의 상황 아닌가?
더군다나 콩탄 왕국이 무너진 후에 페스로 제국이 그 상황에 만족하리라 생각하는 자는 없다.
오히려 반대다.
한 번 피를 보면 끝장을 보는 것이 바로 페스로 제국이란 존재다. 오히려 그들은 콩탄 왕국과의 전쟁을 시작으로 과거처럼 대전쟁을 시작할 것이다.
적어도 타국은 그렇게 생각한다.
그에 맞추어 대응을 하고자 할 것이다.
더군다나 필로스 왕이 바보가 아닌 이상, 이미 사신들을 각국에 보내 화친 도는 동맹을 맺으려 할 터!
‘좀 더.’
황자들은 무능력을 증명하는 가운데 제국은 패배하고, 제국의 주변국들은 그런 제국을 무너뜨리기 위해 힘을 합친다.
이 상황에서 페스로 제국이 원하는 건?
‘좀 더 혼란이 오면.’
바로 영웅이다.
‘나의 시대가 오겠군.’
노운이 바로 그 영웅이 되는 것이다.
‘좋아.’
노운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다시 일을 시작해볼까?”
9.
문수르는 다시금 이제르트 백작령으로 돌아왔다. 돌아오자마 일단 보고를 받았다.
“포비어 경이 무사히 병력을 이끌고 빠져나오셨습니다. 또한 많은 공을 세우셨습니다. 지금 왕국에서는 이제르트 백작가를 향한 칭송으로 귀가 시끄러울 지경입니다.”
“다행이군요. 그 밖의 소식은 또 있습니까?”
“말씀하신대로 2차 파병 병력을 준비해두었습니다.”
“마구르로부터 연락은 있었습니까?”
“아직까진 없었습니다만, 무소식이 희소식 아니겠습니까?”
“이제부터는 타국과의 화친을 도모할 때 필로스 왕의 허가를 받았다는 걸 명시하세요.”
“알겠습니다.”
문수르는 분주했다.
아직 전쟁은 진행 중이다. 더군다나 일황자 파벌만 물러났을 뿐 나머지 세력은 멀쩡하다.
삼황자 파벌의 전력이 절반이 되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막강한 군대이며, 이황자 파벌의 전력은 티끌의 손해도 없다. 더군다나 카라카크를 잡는다는 명분 하에 다른 황자들의 병력이 연합전선을 구축한 채 지금 콩탄 왕국을 상대로 점령전을 하고 있다.
전쟁이 끝나기는커녕 이제 막 시작한 셈이다.
더군다나 문수르에게는 또 다른 적이 생겼다.
‘필로스 왕.’
가짜.
카라카크의 수작에 의해 생겨난 가짜 왕.
이 전쟁이 끝남과 동시에 필로스 왕을 왕위의 자리에서 끌어내려야 한다. 그래야만 정말 진정한 이제르트 백작가의 시대가, 이제르트 백작가를 위한 콩탄 왕국이 세워지는 것이다.
‘어떻게 할까?’
여기서 한 가지 고민이 생겼다.
필로스 왕의 후계자로 누구를 왕위에 올려야 좋은 소리를 들을까?
일단 왕가의 피를 이은 자를 올려야 할 것이다. 하지만 직계는 부담스러울 수도 있다.
막말로 카라카크와 손을 잡은 필로스 왕 아닌가?
직계를, 공식적인 왕자들이 왕위에 오를 경우 타국, 특히 제국 같은 곳이 태클을 걸고 들어올 가능성은 충분하다. 흑마법사와 손을 잡은 자에 대한 처우는 반역죄와 비슷하다.
방계 쪽에서 올리는 게 괜찮겠지만 정통성이 그 무엇보다 중요한 게 바로 왕위 아닌가?
‘필로스 왕이 제국의 힘을 빌려 왕위를 찬탈하긴 했지만 혈통으로 봤을 때는 문제는 없겠지.’
방계는 피의 농도가 아무래도 옅다.
‘골치 아프군.’
더불어 마땅한 후보군이 아직 없다. 필로스 왕은 아직 후계자에 대해서 명확한 무언가를 설정해둔 것도 아니었으니까.
‘일단 전쟁이 우선이다.’
문수르는 곧바로 이제르트 백작을 찾아갔다.
10.
“곧 출발하겠습니다.”
문수르는 장황한 설명 따윈 하지 않았다. 담백하게 본론만을 말했을 뿐이다. 이제르트 백작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몸조심하게.”
“예.”
“자네가 제일 중요하네.”
이제르트 백작은 오직 문수르의 안위만을 걱정했다. 문수르는 미소로 대답을 대신했다이후 문수르가 병력을 이끌고 전선으로 향했다. 30대의 기가스가 포함된 전력이었다. 더불어 드래곤 파이터, 문수르의 기가스 역시 전력에 포함되었다. 이 병력이 포비어 경이 이끄는 병력과 합류한다면, 정말 막강하기 그지없는 군대가 나올 것이다.
더불어 문수르에게는 기가스 전투에서 절대적인 위력을 발휘하는 GPS시스템이 있다.
문수르는 다짐했다.
‘기필코 이긴다.’
패배는 허락되지 않는다. 오직 승리만을 향해 달려야 한다.
더불어 전쟁에서 이기는 순간 문수르의 병력은 이제르트 백작령으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그 전력 그대로!
왕도로 향할 것이다.
‘단숨에 점령한다.’
역사가 어떤 평가를 내리든 그건 이제 아무래도 좋다. 문수르는 일단 지금의 왕을 자리에서 끌어내릴 것이다. 혹여 카라카크, 놈이 자신을 방해한다고 해도 당해줄 생각은 없다.
오히려 카라카크가 모습을 드러낸 순간이 놈의 제삿날이 될 것이다.
11.
노운이 움직였다.
“이제부터 병력을 전진시키겠습니다.”
그런 노운의 말에 귀족들의 얼굴에 미소가 번지기 시작했다. 사실 그동안 귀족들 중 일부는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일단 노운의 말대로 있으니 저절로 세가 커지는 건 좋았지만 반대로 전쟁에 참가하지 않으니 전공을 쌓을 기회가 없었다.
오히려 역으로 이제르트 백작군의 습격을 받아 큰 피해는 아니지만 체면을 구긴 이들마저 있다.
이런 상황에서 노운이 드디어 전쟁참가를 선언한 것이다.
귀족들은 기대했다.
“노운 경, 작전이라도 있소?”
“노운 경의 작전이라면 지옥으로 들어가라고 해도, 내 일말의 망설임 없이 따르리라.”
이제까지 노운이 보여준 혜안은 대단한 것이었다. 그런 노운이 전쟁을 지휘한다면, 과연 어떤 일이 생길까?
상상만으로도 온몸이 뜨겁게 달아오른다.
더군다나 페스로 제국의 귀족들 아닌가? 전쟁으로 모든 걸 이룩한 이들의 후손이다. 온몸에는 전쟁을 갈망하고 탐미하는 피가 흐르고 있는 자들이다.
노운은 그들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지도를 봐주십시오.”
작전은 얼마든지 있다.
하지만 노운은 이 순간 작전을 말해줄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너희들은 패배해야 돼.’
이기면 안 되는 전쟁이니까. 여기서 제국이 승리를 거둬봐야 노운에게 좋은 일은 하나도 없다.
때문에 노운이 할 일.
“현재 콩탄 왕국의 병력 배치 상황입니다.”
그건 정보의 전달이었다.
“제 추측이긴 하지만 큰 차이는 없을 겁니다. 또한 가는 길목에서 주의할 요점들을 따로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정보는 준다.
그에 따른 판단, 작전수립, 작전 실행은 귀족들 본인의 몫이다.
더불어 노운은 이 모든 과정을 귀족들의 명예와 자존심을 위해서, 라는 명분으로 치장할 생각이었다.
쉽게 말해서 이래라저래라 하지 않고 정보만 줄 테니, 알아서 처리하라는 의미다.
귀족들은 오히려 이런 노운의 선택을 반겼다. 노운에 대하 호감을 가진 건 맞지만, 아무리 그래도 귀족출신인지 아닌지조차 확실하지 않은 노운의 말에 개마냥 끌려 다니는 건 썩 좋은 일이 아니니까.
더군다나 제국의 귀족들은 자신했다.
‘이 정도 정보만 있다면, 충분하지.’
‘병력이 압도적인 상황에서 적의 함정에만 빠지지 않는다면 전투에서 패배할 이유 따위는 없다!’
그들은 승리를 자신했다.
이제까지 승리만 해왔으니까. 앞으로도 당연히 승리자라 되리란 사실에 일말의 의심도 없었다.
노운은 그런 감정들이 얼굴에 드러나는 귀족들을 바라보며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김칫국부터 마시는군.’
그들은 제대로 된 정보가 있어도 패배할 것이다.
‘문수르, 이제 네 차례다.’
왜냐하면 콩탄 왕국에는 자신과 같은 노크맨 문수르가 있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