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0화
<83화. 이면>
1.
필로스 왕과의 대면.
필로스 왕은 문수르를 보자마자 말했다.
“무엇을 말하고 싶은가?”
단도직입적인 질문이었다. 문수르는 그 질문에 당황하기보다는 오히려 곧바로 준비한 답을 꺼내놓았다.
“타국과의 화친이 필요합니다.”
“말하라.”
“본국의 전력만으로는 페스로 제국을 상대하는 데에 한계가 있습니다. 타국의 도움을 받지 않는다면, 혹여 전쟁에서 승리한다고 해도 그 피해가 적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누가 우리를 도와 제국을 상대해준단 말인가? 과연 어느 국가가 이 전쟁에 군대를 파병할까? 문수르 경, 자네는 그럴 왕국이 있다고 보는가?”
“파병까지는 필요 없습니다. 단지 제국의 국경 근처에서 병력을 적당히 움직여줄 정도면 됩니다.”
“자세히 말하라.”
“간단한 논리입니다. 지금 제국의 모든 귀족들이 우리에게 창을 겨누고 있습니다. 국경에 있는 귀족들마저 병력을 움직이는 이런 상황에서 타국이 적당한 병력의 움직임을 국경에서 보여준다면 제국은 어쩔 수 없이 그쪽으로 병력을 몰 수밖에 없습니다.”
“명안이군.”
필로스 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무엇을 해주면 되는가?”
“왕명만 내려주시옵소서. 전하께서 명하시면 이제르트 백작가가 목숨을 바쳐 수행하겠나옵니다.”
그것으로 이야기는 끝이었다.
2.
왕과의 독대를 마치고 나오는 문수르의 표정은 굳어있었다.
‘내가 아는 왕이 아니다.’
필로스 왕.
이번이 첫 만남이 아니다. 그와는 몇 번 만났다. 그렇기에 알 수 이다.
‘누구지?’
왕위에 앉은 필로스 왕은 진짜가 아니다. 기질이 바뀐 정도가 아니다. 모든 게 바뀌었다.
‘제이머스 공작.’
이쯤 되면 결국 한 명이 의심될 수밖에 없다.
필로스 왕을 암살하려고 했던 제이머스 공작! 그는 실패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반대다.
그는 성공했다.
카라카크와 손을 잡은 그가 필로스 왕을 죽였다. 그리고 필로스 왕의 자리에 무언가 이상한 것을 올려 놓았다.
‘차라리 이게 다행이다.’
문수르는 오히려 지금이 낫다고 봤다.
필로스 왕이 직접 카라카크와 손을 잡았다면 골치 아팠겠지만 지금 필로스 왕은 가짜다.
당장 목을 쳐도 문제될 건 없다는 의미다.
‘제국만 가면.’
문수르는 머릿속으로 시나리오를 그리기 시작했다. 제국이 물러나는 순간, 전선에 있던 이제르트 백작가의 군대를 곧바로 왕도로 돌릴 것이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필로스 왕의 가죽을 쓰고 있는 가짜를 처단할 것이다. 더불어 지금 지하 감옥에서 어떤 꿍꿍이를 꾸미고 있는 제이머스 공작 역시 처리해야겠지.
마지막으로.
‘그래, 모든 걸 처리한 후에 카라카크로 처리해야겠지.’
카라카크마저 처리하면 모든 게 끝이 난다.
문수르는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 그게 곧 끝이다.’
문수르는 그렇게 왕도를 떠났다.
3.
이제르트 백작가의 군대는 빠른 속도로 움직였다. 제법 먼 거리였음에도 단숨에 전장에 도달했다.
전장에 도잘한 이후 곧바로 작전에 들어갔다.
이제르트 백작가의 군대가 후방에 위치한 제국의 군대를 상대로 기습을 시도한 것이다.
표적은 삼황자의 군대였다.
효과는 엄청났다.
“물러난다!”
포비어 경의 명력에 모든 기가스들이 학살을 멈추고 빠르게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바람처럼 등장했던 이제르트 백작군이 바람처럼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으으…… 대체…….”
삼황자 군대 입장에서는 말 그대로 봉변이었다. 갑자기 등장한 이제르트 백작군은 일곱 대의 기가스를 파괴하고 이백여 명의 병사를 죽인 후에 떠났으니까. 이제르트 백작군의 피해는 전무했다. 그건 전투라기보다는 학살에 가까웠다.
그 이후에도 이제르트 백작군은 이곳저것을 귀신처럼 출몰하면서 삼황자의 군대는 야금야금 갉아먹기 시작했다. 결국 삼황자의 군대는 한 곳에 모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되자 자연스럽게 이제르트 백작군의 타깃은 삼황자에서 이황자로 넘어갔다.
그 무렵이었다.
황도의 귀족들이 보낸 군대가 국경 근처의 전선에 도착한 것은 말이다.
4.
일황자와 이황자, 그리고 삼황자가 아닌 다른 황자에게 줄을 선 귀족들.
그들은 연합전선을 구축했다. 그런 그들은 이미 전장에 오기 전부터 한 가지 합의를 한 상황이었다.
“폐하께서 무어라 말씀하시기 전에 앞뒤 재지 말고 곧바로 왕국으로 진격합시다.”
만약 황제가 돌아오라고 하면 곧바로 병력을 뒤로 물려야 하는 상황.
그 전에 최대한 빨리 공을 세울 필요가 있었다. 그렇기에 그들은 피해를 감수하고서라도 곧바로 콩탄 왕국 안으로 들어갔다. 더불어 그들의 목적은 왕도가 아니라 콩탄 왕국 전체였다. 일황자의 군대와는 다르게 차례차례 점령전을 펼치기 시작했다.
이제르트 백작군 입장에서는 최악의 상황이 펼쳐진 것이다.
어느 순간부터 제국의 점령지가 늘어났고, 자연스럽게 최후방에서 움직이던 이제르트 백작군은 고립되기 시작했으니까.
“포비어 경, 이대로 계속 싸웁니까?”
“위험하지 않습니까? 일단 뒤로 후퇴해서 전력을 가다듬는 것이…….”
이제르트 백작군 내에서도 후퇴가 언급됐다. 그 의견에 포비어 역시 동의를 표했다.
“마지막으로 이황자의 군대를 공격한 다음, 곧바로 우리들도 본진으로 복귀하도록 합시다.”
마지막 기습작전.
그러나 그 기습작전은 이미 읽히고 있었다.
5.
노운은 생각했다.
‘군대는 잘 키웠군.’
이제르트 백작군은 강했다. 그리고 신출귀몰했다. 단순히 성능 좋은 기가스 때문이 아니었다. 결국 기가스를 다루는 건 인간 아닌가? 잘 훈련된 파일럿과 병사들이 있었다.
더군다나 문수르는 보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이 정도 전력을 보여준다는 건 전투 경험도 어마어마하다는 의미다. 정말 훌륭한 군대를 키운 것이다.
하지만 그뿐이다.
‘잡으려면 얼마든지 잡을 수 있어.’
노운은 GPS시스템을 통해서 이제르트 백작군의 모든 움직임을 파악하고 있었다.
제 아무리 은밀하게 빠르게, 신출귀몰하게 움직인다고 해도 하늘 위의 눈을 피할 수는 없었으니까. 더군다나 기가스 아닌가? 숨고자 해서 숨을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래도 그냥 나뒀다.
우연인지 아니면 노린 건지 삼황자의 군대만 공격했으니까. 딱히 노운이 터치할 이유가 없었다.
문제는.
‘이제 우리 쪽인가?’
계속 당하던 삼황자가 어쩔 수 없이 군대를 하나로 모았다. 이제 기습이 통용되지 않는 상황이 온 것이다.
그럼 그 다음 타깃은 자연스럽게 이황자 파벌이 될 수밖에 없는 상황!
노운은 저울질을 했다.
‘당하면 좋지만.’
여기서 이황자의 파벌이 공격을 당해 세가 줄어드는 게 여러모로 제국의 혼란에 도움이 된다.
‘그냥 당하기만 하면 내 명성에 흠이 가지.’
하지만 여기서 당하면 노운의 명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을 터. 노운은 미소를 지었다.
‘그럼 적당히 수작을 부리면 되겠군.’
노운의 머릿속에 떠오른 건 다름 아니라 자기 자신을 탐탁지 않아하던 귀족들의 얼굴이었다. 대부분의 이황자 파벌 귀족들이 노운을 따르지만 그러지 않는 자들도 있었다. 사실 생각해보면 황제의 총애를 받는다고 해도 신분이 불확실하고 귀족 출신인지 아닌지도 모르는 노운을 무조건 따른다는 게 이상한 일이었다.
그들을 이용하는 거다.
‘그들에게 내가 명령을 전달하면, 적당히 움직여주겠지.’
노운의 계획.
이제르트 백작군의 기습 작전을 슬그머니 자신을 싫어하는 귀족들에게 뿌리는 거다.
그럼 그들은 자연스럽게 공을 세우기 위해서 이제르트 백작군을 잡을 준비를 할 터.
하지만 여기서 노운은 이제르트 백작군의 병력을 조금 더 축소해서 정보를 흘릴 것이다.
전력의 비대칭.
더불어 노운은 이제르트 백작군의 힘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이제르트 백작군도 피해를 입겠지만, 제국이 더 피해를 입을 터. 뭐, 혹여 이제르트 백작군이 전멸해도 문수르, 녀석이 가진 패가 이것 하나 뿐은 아닐 테니까.’
6.
포비어는 기습 순간 자신들이 포위됐다는 사실을 파악할 수 있었다.
‘작전이 드러났군.’
기습은 실패다.
하지만 포비어는 당황하지 않았다. 일단 적의 숫자를 파악했다. 눈에 보이는 기가스의 숫자는 대략 36대!
‘적다.’
적은 숫자다.
만약 이제르트 백작군의 병력을 정확하게 읽었다면, 훨씬 더 많은 병력을 보냈을 것이다.
이 부분은 사실 포비어가 어느 정도 의도한 사실이기도 했다. 포비어는 기습작전을 하면서 적이 자신들의 병력을 실제보다 적다고 착각하도록 몇 가지 수작을 부려 놓았다.
아마도 그게 지금 먹힌 모양이다.
“싸운다.”
피해는 있겠지만, 적어도 패배할 만한 전장은 아니다. 그럼 망설일 이유가 없다.
곧바로 전쟁이 시작됐다.
전쟁은 치열했다. 백 대에 가까운 기가스들이 서로 동시에 부딪치는 광경은 장관, 그 자체였다.
쿠웅!
기가스들이 움직일 때마다 땅이 울렸고.
콰직!
기가스들의 검이 기가스들의 몸뚱이를 후려칠 때 나는 소리는 천둥번개 소리와 똑같았다.
“으아아악!”
이 소란 속에서도 사람의 비명소리는 유독 선명했다.
격한 전투 속에서 기가스들이 파괴되기 시작했다. 바닥에 쓰러진 기가스들이 꿈틀거렸다. 그 상황에서 이제르트 백작군의 정예들이, 레인저라 불리는 자들이 움직였다.
그들은 쓰러진 기가스에게 빠르게 접근한 다음 기가스 파일럿을 확인사살했다.
기가스들이 부딪치는 전장 속에서 쓰러진 기가스에 접근하다는 건 말 그대로 미친 짓이었지만, 레인저들은 그 공포를 이겨내고 죽지 않은 제국의 기가스 파일럿들을 확실하게 끝장냈다.
기가스만큼이나 중요한 게 기가스 파일럿이다. 제 아무리 기가스가 있어도 파일럿이 없으면 무용지물이니까.
물론 제국 정도 되면 기가스보다 기가스 파일럿의 숫자가 더 많겠지만 적어도 일시적으로 적의 전력에 확실한 공백을 만들 수 있다. 예비 파일럿이 있다고 해도 그 정도가 있는 법이니까.
그렇게 새벽에 시작된 전쟁은 아침이 되어서야 끝이 났다.
이제르트 백작군을 공격했던 병력은 전멸.
더불어 이제르트 백작군 역시 18대의 기가스를 잃었다. 대부분이 출력이 낮은 아이언히트였다. 더불어 레인저들을 비롯해 158명이 사망했다. 기가스 파일럿도 13명이 죽었다. 대승이었지만 포비어는 기뻐할 수 없었다. 더군다나 지금부터가 문제였다.
‘어떻게든 전력을 최대한 보존한 채 후퇴해야 한다.’
기습이 읽혔다는 건 지금부터 움직일 동선 역시 파악 당할 가능성이 높다는 의미니까.
도주로에 제국의 군대가, 이황자의 군대가 대기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들을 뚫고 가는 것, 그것이 지금 치른 전투보다 더 힘든 일이 될 것이다. 어쩌면 여기서 전멸할 지도 모른다. 그 정도로 지금 상황은 굉장히 좋지 못했다.
‘만약 재차 전투가 치러진다면.’
그러나 포비어는 낙담하지 않았다.
오히려 반대였다.
‘최대한 많은 자들을 데리고 같이 지옥으로 가주지.’
이 순간 포비어는 그 어느 때보다 더 강력한 전투의지를 불태우고 있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