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9화
10.
카라카크가 다시금 움직였다. 일황자의 군대는 독에 대한 어느 정도 대비를 해두었지만 말 그대로 어느 정도의 대비에 불과했다. 그들은 설마 카라카크가 직접 움직이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사일런트 킬러들이 움직였고, 그들이 독을 뿌렸다.
이번 독은 좀 더 독한 놈이었다.
이제까지의 독이 단순히 복통, 설사 등을 유발하는 독이었지만, 지금의 독은 말 그대로 무시무시한 살상력을 가진 독이었다.
결국 아침이 왔을 때, 일황자의 군대 대부분은 떠오르는 태양을 보지 못했다.
차가운 시체가 되어 누워있을 뿐이었다.
11.
노운은 두 눈을 감았다.
‘독.’
소식을 들었다.
‘독을 썼어.’
일황자의 군대가 콩탄 왕국이 뿌린 독에 의해서 거의 전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었다는 소식을 말이다.
‘이건 아니야.’
전장에서 독을 쓰는 게 이상한 건 아니다. 이 세계에서는 독에 당하는 놈이 멍청하다는 소리를 듣는다. 그리고 독을 쓰는 게 생각처럼 쉬운 일도 아니다.
하지만 정도가 있다.
제 아무리 대단한 독이라도 해도, 그 수준이 있는 것이다. 어마어마한 살상력을 가진 독이 있을 순 있다. 하지만 그런 독으로 단숨에 수천여 명의 사람들을 죽이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압도적인 능력을 가진 누군가 움직였어.’
더군다나 일황자의 군대에는 오러 나이트들 다수가 포함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독을 뿌리는 자들에 대해서 조금의 대비도 하지 못했다?
말이 안 된다.
‘콩탄 왕국이 아니다.’
때문에 노운은 금방 결과를 도출할 수 있었다.
“카라카크가 움직였군.”
카라카크!
놈이 다시 등장했다.
노운은 머리를 부여 잡았다.
‘이쯤 되면 확실하단 말이야.’
어느 정도 감은 있었다. 카라카크가 필로스 왕과 손을 잡았을 가능성에 대한 감 말이다.
더 나아가 필로스 왕과 카라카크 그리고 제이머스 공작 사이에 어떠한 연계가 있을 가능성도 있었다. 생각해보면 제이머스 공작의 반역 사건은 너무 허무한 감이 많았으니까.
사실 카라카크가 움직이든 말든 노운이 알 바는 아니다. 어차피 이번 전쟁에서 이길 생각은 없으니까.
문제는 상황이 조금 달라졌다는 거다.
카라카크가 등장하면 신이 날 놈들이 있다.
‘이 정보가 퍼지면 황도에 남아있던 다른 파벌의 귀족들마저 콩탄 왕국 쪽으로 신나게 달려오겠지.’
카라카크를 명분 삼아 전쟁에 참가하려는 무리들.
그들에게 카라카크가 다시 표면에 등장했다는 것만큼 흡족한 사실도 없을 것이다.
‘꼬인다.’
노운의 계획이 조금씩 일그러지고 있었다.
물론 아직은 상정 범위다. 딱히 크게 당황할 필요가 없는 수준이기는 하다.
하지만 마음에 걸리는 건 어쩔 수 없다.
‘짜증나네.’
무엇보다 노운은 자신의 체스판에서 체스말들이 제멋대로 움직인다는 사실이 거슬렸다.
‘이대로 놔두는 건 그렇군.’
노운의 눈빛이 빛났다.
12.
필로스 왕을 향해 가던 문수르는 실시간으로 정보를 모으고 있는 중이었다.
그리고 보게 됐다.
‘이거.’
일황자의 군대.
거침없이 진격하던 그 군대가 갑자기 멈췄다. 그리고 무너졌다. 이러다할 전투도 없었음에도 말이다.
문수르는 직감했다.
‘흑마법사다.’
이런 수작을 부릴 수 있는 존재는 적어도 콩탄 왕국 내에서는 흑마법사 카라카크 밖에 없다.
‘젠장!’
여기서 문수르는 고민에 빠졌다.
‘결국 필로스 왕과 카라카크가 손을 잡은 건가?’
막연했던 의심. 그러나 지금에서야 확신이 들기 시작했다. 필로스 왕과 카라카크가 손을 잡은 것이다. 혹은 제이머스 공작과 필로스 왕 그리고 카라카크가 손을 잡은 것일 수도 있다.
그게 아니라면 지금의 일은 설명할 수가 없다.
카라카크가 아무런 대가 없이 필로스 왕을, 콩탄 왕국을 도울 이유가 없지 않는가?
문수르는 걸음이 멈췄다.
‘필로스 왕을 만나서.’
문수르의 계획.
‘설득을 하려고 했다.’
필로스 왕과 보다 확고한 동맹을 맺는 것이다. 이제르트 백작가가 필로스 왕에 대한 절대적인 충성심을 보여주는 대가로, 필로스 왕이 이제르트 백작가의 충언을 들어주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
‘필로스 왕이 카라카크와 손을 잡았다면, 더 이상 필로스 왕을 섬길 수는 없다.’
전제조건이 달라졌다.
필로스 왕이…… 본의든 타의든 카라카크와 손을 잡은 이상 더 이상 왕의 자격이 없다.
오히려 반대다.
필로스 왕이 카라카크와 손을 잡는 기간이 늘어날수록 콩탄 왕국의 존립이 위험하다.
문수르는 한숨을 내쉬었다.
“최악.”
상황이 최악으로 흘러가고 있다. 적어도 필로스 왕만큼은 카라카크와 손을 잡았으면 안 됐다.
‘남은 답은 하나.’
흑마법사와 손을 잡은 왕은 절대 왕위에 오를 수 있다.
즉, 결국 남은 선택지는 하나다.
‘필로스 왕을 왕위에서 끌어내려야 한다.’
왕위의 주인이 바뀌어야 한다. 하지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필로스 왕의 휘하에는 왕자나, 공주나 많은 후계자들이 있지만, 이런 긴박한 상황에 필로스 왕을 끌어내리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어떻게 보면 카라카크가 페스로 제국을 상대해주는 동안만큼은 눈감아주는 게 나을 수도 있다.
도의적으로는 그게 그른 일인 건 알지만 반대로 카라카크의 힘이 있다면 페스로 제국을 좀 더 쉬이 상대할 수 있을 테니까.
문수르는 이를 물었다.
‘빌어먹을.’
지금 이 생각.
‘지금 이 순간 흑마법사, 그것도 카라카크와 손을 잡을 생각을 하다니? 나도 이제 정말 갈 데까지 갔군.’
흑마법사 카라카크.
그 누구도 아닌 이리아, 그녀의 원수다. 그녀를 납치해간 아주 빌어먹을 새끼다. 시체를 토막 내 불태워도 시원치 않을 놈이다.
그런데!
지금 문수르는 계산기를 두드리고 있다. 흑마법사 카라카크가 가진 힘과 페스로 제국의 위협을 저울질하고 있다. 원수조차 이용해먹으려고 계산기를 두드리고 있다.
이 얼마나 속물적인 상황인가?
문수르는 입술을 깨물었다.
안다.
지금 자신의 모습은 정말 추레하고, 추악하다.
하지만 반대로 지금 자신이 가장 합리적인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 역시 알고 있었다.
‘카라카크를 이용한다면.’
간단한 거다.
페스로 제국과 카라카크, 둘을 싸움 붙이는 것이다. 이제르트 백작가 입장에서는 말 그대로 어부지리만 취하면 되는 것이다. 이게 가장 합리적인 방법이다.
더군다나 결과는 이미 나왔다.
카라카크는 온갖 수법을 동원해서 정말 은밀하기 짝이 없는 방법으로 일황자의 군대를 막았다.
전쟁이 아닌 수작으로 막았다.
결과적으로 일황자의 군대는 전멸했고, 동시에 일황자의 군대가 가져왔던 기가스들 중 상당수를 온전한 형태로 콩탄 왕국이 노획하게 되었다. 기가 파일럿만 충원되면 콩탄 왕국은 어마어마한 기가스 부대를 운영할 수 있게 되는 셈이다.
더불어 일황자의 몰락을 본 이황자나 삼황자의 움직임이 둔해지는 건 당연한 일!
긍정적인 시그널이 넘쳐난다.
이런 상황에서 문수르가 밥에 재를 뿌릴 필요는 없지 않은가?
‘오냐.’
문수르가 결단을 내렸다.
‘어차피 깨끗하고 정의롭게 살 생각은 진즉에 버렸다.’
고민할 필요가 없다.
더러워지면 되는 것이다. 추레하고, 비루하고, 더러운 오물을 뒤집어쓰면 된다.
어차피 정의의 용사로 역사에 길이 남을 생각은 애초부터 없었으니까!
‘좋아.’
문수르가 다시 걸음을 내딛었다.
‘적당히 농간에 넘어가주지.’
망설임이 사라졌다.
이리아, 그녀가 사라진 순간 문수르에게 남은 것은 독기, 단지 그것뿐이었다.
13.
일황자의 군대가 무너졌을 때 왕도에 있던 귀족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아니, 싸우지도 않았는데 일황자의 군대가 스스로 무너지다니?”
“그게 무슨 말이오?”
그들은 설마 카라카크가 나서서 제국의 군대를 막아주리란 생각은 꿈에서도 하지 못했으니까.
필로스 왕은 그런 귀족들에게 말했다.
“중요한 건 일황자의 군대가 물러났다는 것. 그것도 기가스들을 그대로 놔둔 채로. 일단 지금은 누가 우리를 도와줬는지 신경쓸 필요가 없다. 우리들은 그저 눈앞의 적을 처치하면 된다.”
또한 명령했다.
“일황자의 군대가 놓고 간 기가스를 회수하도록.”
“예!”
왕명은 지엄했다.
반문은 없었다. 귀족들과 기사들이 잽싸게 주인 없는 기가스들을 가지고 왕성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그 와중에서 퍼지는 소문이 있었다.
“일황자의 군대가 독에 당했다고 하더군.”
“그냥 독이 아니라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무시무시한 독을 사용했다던데.”
“흑마법사가 아니고서는 절대 만들 수 없는 독!”
흑마법사가 거론되기 시작했다.
자연스럽게 그 카라카크의 존재가 거론되기 시작했다.
그래서일까?
마치 기다렸다는 듯, 제이머스 공작이 수시로 했던 그 말이 다시금 표면 위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필로스 왕, 그가 카라카크와 손을 잡았다는 말!
물론 소문일 뿐이었다.
그리고 그 소문 속에서 문수르, 왕국의 영웅이 되어버린 그가 왕도에 도착했다.
14.
문수르는 왕성을 바라보며 숨을 골랐다.
‘드디어 왔다.’
문수르는 쥐고 있던 창을 등에 매달았다. 손에서 창이 떨어지자 허전한 마음이 들었다.
‘죽을 수도 있다.’
이곳 왕성.
지금 일황자와의 전쟁에서 정말 대승을 거둔 탓에 사기가 치솟고 있는 이곳에 카라카크가 있다.
언제 어느 순간 문수르의 목을 노릴 수 있는 그 잔혹무도한 괴물이 이곳에 있다.
더불어 그 괴물은 이곳의 주인인 왕과 손을 잡고 있다.
‘사지군.’
말 그대로다.
사지(死地), 왕성을 표현할 수 있는 단어는 이것 밖에 없었다. 제 아무리 오러 마스터의 경지에 접어든 문수르라고 해도 만약 필로스 왕이 그리고 카라카크가 작정하고 문수르를 죽이려고 한다면 혹은 문수르를 제압하려고 한다면 절대 쉽게 그 마수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빠득!
문수르는 이를 갈았다.
사실 이곳으로 오면서 각오를 했다. 제국과의 전쟁이 끝나기 전까지 흑마법사의 존재도, 그런 흑마법사와 손을 잡은 필로스 왕의 존재도 용납하기로 말이다. 그것이 가장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다른 생각도 들었다.
‘이리아 아가씨.’
아직 이리아의 생사는 확인되지 않았다. 어떻게 보면 카라카크는 이리아를 죽이기보다는 여전히 인질로 써먹기 위해 살려두었을 가능성이 충분했다. 그렇다면 카라카크를 여기서 잡는다면 혹은 그와 거래를 한다면 이리아를 살릴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자꾸 들었다.
솔직히 말해서 이리아를 구할 수 있으면 구하는 게 정답 아닌가?
문수르는 그 고뇌에 대한 대답을 지금도 내놓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왕성에 올랐을 때, 필로스 왕은 문수르와의 독대를 허가해주었다.
문수르는 거절하지 않았다.
‘그래, 일단 필로스 왕을 보는 거다.’
역사의 수레바퀴는 그렇게 멈추지 않고 계속 돌아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