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7화
<82화. 참전.>
1.
페스로 제국의 황도에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황제가 침묵을 고수하는 사이, 결국 참다못한 황도의 귀족들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일황자의 참패 소식이 시발점이 됐다.
“일황자가 곤경에 처했다고?”
“지금이 기회로군. 지금 움직여야지! 만약 이황자와 삼황자 중 한 명이 타락하게 되면 그때는 움직여도 의미가 없으니!”
이대로 가만히 있다가는 정말 아무 것도 못하고 무너질 것이다.
그 위기감에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황도의 귀족들이 전선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명분은 흑마법사 카라카크를 처단하겠다는 것!
이에 대해서 황제는 여전히 침묵을 고수했다. 그리고 황제의 침묵이 또 다시 특별한 상황을 만들었다.
사람이란 건 똑같은 상황이라도 제 입맛에 맞게 받아들이기 마련이다.
황도의 귀족들이 움직이기 시작했음에도 황제가 침묵을 고수하자 사람들은 그걸 암묵적은 허락으로 판단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게 전선에 새로운 제국의 군대가 추가 됐다.
그리고…….
2.
마구르는 숨을 골랐다.
“후우…… 힘들긴 진짜 힘들구나.”
그런 마구르가 조심스럽게 마차 밖을 바라봤다. 마차 밖의 풍경이 빠르게 변하고 있었다.
‘과연 가능할까?’
마구르가 지금 달리는 곳은 콩탄 왕국의 땅이 아니었다. 그가 지금 밟고 있는 땅은 다름 아니라 페서 왕국의 땅이었다.
페서 왕국!
딱히 콩탄 왕국과는 접점이 없는 국가다. 국경을 맞대고 있는 지역이 하나도 없으니까.
더불어 페스로 제국과 콩탄 왕국의 싸움에도 별 관심이 없는 곳이기도 했다. 제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긴 하지만 전체 영토를 놓고 봤을 때 정말 극히 일부에 불과했으니까.
더불어 국력이 대단한 곳 역시 아니었다.
단 하나!
‘정치적으로 불안한 이곳에서 백작님의 임무를 완수할 수 있을까?’
현재 정치적으로 조금 불안하다.
페서 왕은 젊은 왕이다. 그런 그는 무리 없이 왕위에 올랐다. 달리 말하면 그가 왕위에 오르는 과정에서 그 어떤 세력도 출혈이 없었다. 귀족들의 세력은 그대로였다는 의미다.
젊은 왕 그리고 팔팔한 귀족들.
당연히 왕권과 귀족들의 권리가 충돌할 수밖에 없는 상황!
그 대립이 지금도 진행 중이다.
정치란 게 대립각이 날카로워지기 시작하면 사소한 것만으로도 입에 거품을 물고 싸우기 마련이다.
그러다 보면 다시 정신적으로 날카로워질 수밖에 없고, 건드리는 순간 터질지도 모르는 일촉즉발의 상황이 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마구르는 페서 왕국에 왔다.
‘어떻게든 페서 왕국을 움직여야 한다. 그래야 페스로 제국을 확실히 견제할 수 있어.’
페서 왕국을 움직여 페스로 제국을 상대하게 만드는 것, 그게 바로 문수르의 계획이었다.
특별한 건 아니다. 아주 오래 전부터 있었던 일이다. 무차별적인 전쟁광인 페스로 제국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주변국들이 서로 힘을 합칠 수밖에 없었으니까.
국경을 맞대고 있지 않다고 해서 친하지 않을 이유는 없다.
오히려 원교근공이라고 해서 먼 국가와는 화친하라는 말도 있지 않았던가?
어쨌거나 이 중요한 임무를 가지고 마구르고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3.
문수르는 바보가 아니었다. 오롯하게 콩탄 왕국의 힘만으로는 제 아무리 열심히 해도 제국을 상대할 수 없다는 것쯤은 잘 알고 있었다. 타국과의 긴밀한 협조가 필요하다는 생각은 진즉부터 해왔다.
사실 그래서 필로스 왕과의 대화를 원했다.
아무래도 이제르트 백작가가 독단적으로 타국과 긴밀한 관계를 가지는 건 여러모로 모양새가 좋지 못하니까.
하지만 필로스 왕이 계속해서 이제르트 백작가의 만남을 거부하는 이상 문수르도 멀뚱히 있을 수만은 없었다.
나중에 어떤 처벌을 받는 한이 있더라도 일단은 움직여야 할 때였으니까. 주사위를 던져야 할 때였으니까.
물론 당장 어떤 확실한 일을 처리할 생각은 없었다. 어디까지나 밑그림을 준비해둘 뿐이다. 마구르를 보낸 이유는 그 때문이었다.
‘이제 남은 건.’
마구르는 잘 해줄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는 이제르트 백작가가 움직일 차례다.
‘전쟁에 참가한다.’
이제까지는 부름이 없었기에 가만히 있었다. 더불어 이제르트 백작가가 페스로 제국과 맞대고 있는 국경에서 거리가 멀기도 했기에 당장 병력을 움직일 필요가 없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지금부터 움직여야지 적당한 때에 전장에 들어갈 수 있다.
물론 문수르는 가기 싫다.
시간이 좀 더 있었으면 한다. 좀 더 시간이 있다면 지금보다 더 강한 힘을 가질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피할 수는 없다.
싫다고 해서 전쟁을 피할 수 있었다면 이 세상에 전쟁 때문에 고통 받는 사람은 없을 터.
“후우…….”
이윽고 터져나오는 한숨.
‘힘들다.’
문수르, 그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한계에 도달해버렸다.
4.
일황자 파벌이 다시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분산되었던 병력을 한 곳에 모았다.
“힘을 집중해서, 단번에 파고 든다.”
그들의 작전은 간단했다. 모든 병력을 한데 모은 후에 송곳처럼 가다듬고, 한 가지 목표를 확실하게 찌르는 것이었다.
그 목표는 역시나 왕도였다.
그들의 그런 단순한 작전은 콩탄 왕국이 보더라도 쉽게 파악할 수 있을 정도로 노골적이었다.
하지만 그래서 더 위력적이었다.
일황자 이름 아래 모인 병력의 숫자는 엄청나다. 병사의 숫자는 2만 명을 조금 넘는 수준이었지만, 기가스의 숫자가 무려 170대를 넘길 정도였다. 평지 전투에서 큰 피해를 입었지만 그럼에도 일황자의 이름하에 모인 귀족들의 세는 적은 게 아니었다.
아무리 최근 안 좋은 소식이 들렸다고 해도, 일황자 파벌은 여전히 실세 중 한 명이었으니까.
더불어 일황자는 어설픈 수작을 부리기보다는 단순하지만 확실한 방법을 택하면서, 정보의 누출에 따른 피해를 최소화한 상황이었다.
이런 일황자의 움직임에 맞추어 콩탄 왕국이 내놓을 수 있는 결정은 힘으로 맞상대하는 것, 그것뿐이었다.
문제의 시작은 그 부분이었다.
“제국의 일황자가 병력을 집중하여 왕도로 진격하고 있습니다. 그러하다면 우리들 역시 병력을 한 곳에 모아 일황자의 군대를 상대해야만 합니다. 병력을 집중하지 못하면 어떤 전쟁에서도 이길 수가 없사옵니다.”
모두가 인정하는 부분.
그러나 당장 실행하기에는 난관이 많았다.
“아직 전선에 이황자와 삼황자의 군대 그리고 심지어 황도의 귀족들마저 카라카크를 처단한다는 명분 하에 본국으로 들어오는데 병력을 집중한다는 게 말처럼 쉬운 일이오?”
“맞소. 당장 일황자의 군대를 막기 위해서는 전선에 배치된 군대를 집중시켜야 한다는 건데, 그 상황에서 이황자와 삼황자의 군대가 들어오면 오히려 전선이 무너질 것이오.”
“시간을 벌어야 하오. 후방에 위치한 귀족들이 속속 병력을 보내주고 있으니, 일단 지금 상황을 유지한 채 최대한 시간을 끄는 게 낫다고 보오.”
병력의 분산과 집중. 전쟁에서 언제나 거론되는 딜레마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압도적이 병력을 가진 페스로 제국이야 뭐를 하든, 마음 내키는대로 하면 되겠지만 콩탄 왕국은 아니었다.
무언가를 지키기 위해서는 무언가를 희생해야 한다.
문제는 그 희생을 누가 해야 하는가, 그 점이었다. 그 누구도 명확히 답을 내놓을 수 없는 문제다.
그리고 이렇게 곤란에 빠지게 되면 아무래도 다른 부분에서 도움을, 구원을 바라게 된다.
“그보다 이제르트 백작가는 어찌된 것이오?”
“맞소! 어찌하여 이제르트 백작가는 아직 전쟁에 참가하지 않을 것이오?”
이제르트 백작가.
이제는 비공식적이긴 하지만 콩탄 왕국에서 가장 강한 군대를 가진 가문으로 평가 받는 곳이다.
그런 이제르트 백작가가 이 중요한 전쟁에 참가하지 않는다는 건 이해가 안 된다.
물론 사정은 있다.
일단 이제트르 백작가의 영지 안에는 콩탄 왕국의 모든 귀족들이 두려워하는 테블스 산이 있다. 아직까지 이제르트 백작가가 테블스 산을 개간했다는 소식을 모르는 귀족들 입장에서는 이제르트 백작가가 제 아무리 병력이 많아도 테블스 산의 몬스터를 상대하기 위해서는 적지 않은 경비병력을 나두는 게 당연하다고 여긴다.
또한 피로감도 있다. 이제르트 백작가는 이제까지 굵직한 전쟁 대부분에 참가했다.
전쟁이란 게 보이는 머릿수가 전부는 아니다. 특히 기가스는 더더욱 그렇다.
한 번 전쟁을 치른 기가스는 유지 및 보수를 하는데 적지 않은 돈과 시간을 필요로 한다. 대충 다루다가는 그 비싼 기가스가 단숨에 쓰레기가 되어버리니까.
하물며 쓰레기가 되더라도 전장에서 쓰레기가 되면 기가스는 물론 기가스 파일럿과 그 전쟁 전부가 위험하다. 기가스 전력이 있다고 해도 다수의 전쟁을 치르게 되면 아무래도 당장 전선에 투입하는 게 쉽지 않다.
그리고 마지막 이유.
“혹여 이제르트 백작가가 이 상황에서 전쟁을 두고 저울질을 하는 건 아니오?”
“허허! 그럴 리가…….”
귀족과 왕.
서로 공생을 하다가도 어느 순간 싸우는 관계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모두가 콩탄 왕국의 존립을 위해 노력하지만 이 기회를 노려 보다 많은 이익을 챙기려고 하는 자들이 있다.
이제르트 백작가는 더더욱 그렇다. 아무래도 이제르트 백작게는 정치적 입지가 적으니까. 또한 필로스 왕이 이제르트 백작가에 대해서 겉으로는 다가가는 모습을 보이지만, 안으로는 이제르트 백작가의 존재를 탐탁지 않아한다는 건 정치 좀 한다는 귀족들은 다 눈치를 채고 있는 사실이다.
즉, 이제르트 백작가는 필로스 왕이 왕명을 내릴 때까지 기다릴 수도 있는 것이다.
본인 스스로 의지로 전장에 서는 것과 왕의 명령으로 전장에 서는 것.
후자는 말이 명령이지 부탁이나 마찬가지다. 즉, 왕의 부탁을 받고 전쟁에 서게 된다는 의미다.
그것이 가지는 정치적 의미, 정치적 가치.
이루 말할 수 없다.
그런 이유로 이제르트 백작이 뜸을 들일 수도 있다. 그리고 만약 그게 정말 사실이라면…….
“이제르트 백작가가 파병을 준비하고 있소.”
아마 엄청 귀찮은 사실이 연출됐었겠지.
“그거 다행이군요.”
“그럼 이제르트 백작가의 군대가 오기 전까지 일단 버티는 식으로 작전을 짜는 것이…….”
그때였다.
침묵하고 있던 필로스 왕, 그가 입을 열었다.
“이제르트 백작가의 병력은 전쟁에 참가하지 않는다.”
갑작스런 말.
그 자리에 모인 모든 대신들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전하!”
설마 필로스 왕은 이 중요한 순간에서 이제르트 백작가와 신경전을 벌일 생각인가?
일황자의 군대가 왕도를 향해 진격하는 이 상황에서?
물론 아니다.
“이제르트 백작가의 군대는 후방에 위치한 페스로 제국의 군대를 기습한다. 이것이 짐의 작전이다.”
필로스 왕.
그 역시 바보는 아니다.
“수성만으로는 답이 나오지 않는다. 이 전쟁은…… 보다 확실한 기습을 하는 자가 승리할 것이다.”
때문에 필로스 왕은 기습을 떠올렸다.
모두가 어떻게든 지키기 위한 전쟁을 떠올릴 때, 필로스 왕은 용케 부수는 전쟁을 떠올린 것이다.
그리고 그곳은 그럴싸했다.
“오오! 전하! 명안이오십니다.”
“그리하면 후방에 배치된 제국의 군대를 신경 쓸 필요 없이 전선에 배치된 전력을 모을 수 있겠습니다.”
전력을 모으지 못하는 이유가 후방에 배치된 제국의 병력 때문인 이상, 이제르트 백작가가 그들을 제대로, 후방에 배치된 제국군을 견제할 수 있다면 병력을 모으지 못할 이유가 없다.
모둔 귀족들이 이 작전에 박수를 쳤다.
더불어 그들은 알고 있었다.
지금 필로스 왕이 이제르트 백작가에 내리는 질문은 사지(死地)로 달려들라는 사형선고와 똑같다는 의미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