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6화
12.
필로스 왕의 군대는 보통 군대가 아니었다. 그의 군대에는 다름 아니라 제이머스 공작가의 기사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기회를 준 것이다.
필로스 왕이 그들의 공을 인정해 반역죄를 사면해주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죄가 완전히 씻어진 건 아니니까. 더군다나 그들은 필로스 왕을 위한 행동이긴 했지만 결과적으로 주인이었던 제이머스 공작을 배신한 자들이기도 했다.
배신!
기사에게 배신자란 단어는 그 어떤 것보다 불명예스러운 단어였다. 심정적으로는 이해하지만, 제 아무리 실력 좋은 기사도 배신자란 꼬리표가 있으면 기회를 받을 수가 없다.
그런 그들에게 필로스 왕이 왕명으로 왕군에 들어와 싸울 수 있는 기회를 줬다는 것.
물론 최전선에서의 전쟁이다. 상대는 그 누구도 아닌 페스로 제국, 대륙 최강의 집단이며, 전쟁을 사랑하는 호전적인 존재들이다. 그들과의 전쟁은 말 그대로 사지(死地), 그 누구도 가고 싶어 하지 않는 땅이다.
그러나 제이머스 공작가 출신의 기사들은 그 기회를 주어졌다는 사실에 감사했다.
그들은 그 누구보다 최선을 다했다.
그 결과는 전공으로 나왔다.
콰앙!
기가스의 거대한 검이 단숨에 페스로 제국 기가스의 머리통을 힘차게 내리찍었다.
기가스의 머리는 가장 방어력이 뛰어나다. 내부의 동력원이 위치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무적은 아니다. 또한 외부 장갑은 어느 정도 버텨도, 내부 마나동력원에 문제가 생기는 경우도 있다.
지금은 후자였다.
외부장갑은 찌그러지는 정도에서 그쳤지만, 그 공격에 페스로 제국의 기가스의 동력이 멈췄다. 마나동력원이 멈춘 것이다. 그렇게 된 기가스는 말 그대로 깡통!
퍼억!
하지만 봐주는 건 없었다.
깡통이 되어버린 기가스의 가슴팍을, 파일럿이 탑승한 그 장소를 가차없이 가격했다.
파일럿마저 죽일 생각이었다.
푸홧!
핏물이 기가스 밖으로 튀어나왔다. 섬뜩한 광경이었다.
그러나 섬뜩한 광경은 일단 그것으로 끝이었다.
지금 쓰러진 기가스.
“우아아아!”
“이겼다!”
“우리가 제국군을 무찔렀다!”
이번 전쟁에서 남은 마지막 기가스였으니까.
승리였다.
평지에서 이루어진 전투, 어떤 의미에서 정말 제대로 된 최초의 전면전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전쟁에서!
승리자는 콩탄 왕국의 왕국군이었다. 일황자 파벌의 군대는 말 그대로 전멸했다. 그들이 끌고 온 기가스는 전부 바닥에 너부러져 있었다. 반면 필로스 왕의 기가스 중 파손된 기가수의 숫자는 20여대 남짓. 전체 숫자의 절반보다 조금 적은 숫자만이 파손됐다.
물론 적은 피해는 아니다.
그러나 비슷한 숫자로 싸웠는데 적은 전멸, 아군은 절반 이상의 병력이 남았다면 이건 대승이다.
더군다나 기가스 전투다!
이 자리에서 나온 모든 것은 고스란히 콩탄 왕국의 소유가 되어 콩탄 왕국을 위해 사용될 것이다.
특히 중요한 건 그 누구도 아닌 제국을 상대로 승리했다는 사실!
이 사실이 중요했다.
13.
순식간이었다.
평지에서 이루어진 전투에 대한 소식은 단숨에 콩탄 왕국과 페스로 제국을 휩쓸고 갔다.
심지어 전쟁에 참가하지 않는 타국에도 이 정보가 넘어갔다.
모두들 놀랐다.
“맙소사!”
“콩탄 왕국이 설마 페스로 제국군을 상대로 이런 엄청난 승리를 거둘 줄이야!”
“그동안 페스로 제국의 비호 아래, 제국만 믿고 군사력 증강에는 신경도 쓰지 않은 줄 알았는데…… 오히려 어둠 속에서 날카롭게 발톱을 갈고 있었군.”
사실 이번 전쟁에 대해서 모든 이들이 콩탄 왕국의 참패, 필패를 예상하고 있었다.
콩탄 왕국은 과거 나름 강국이었다. 페스로 제국 옆에 딱 달라붙어있음에도 여전히 그 왕국의 명맥을 유지한다는 것 자체가 강한 힘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페스로 제국의 카이탄 황제가 전쟁이 아닌 외교정책을 통해서 그리고 필로스 왕이 그런 제국의 힘을 빌려 콩탄 왕국의 왕위에 오르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콩탄 왕국이 페스로 제국의 속국 비슷한 처지가 된 것이다.
때문에 콩탄 왕국은 군대를 가질 필요가 없었다. 가장 위협적이었던 적이 가장 든든한 우군이 되었으니까. 과연 페스로 제국의 비호를 받는 콩탄 왕국을 공격할 나라가 있을까?
그런 의미로 콩탄 왕국은 군비는 꾸준하게 감소했다.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그랬다.
그러나 현실은 그게 아니었다.
몰래몰래!
페스로 제국 몰래 힘을 키웠던 것이다.
마치 지금 같은 상황을 예측한 것처럼!
어쨌거나 이 전쟁의 패배는 페스로 제국에도 여러 의미의 충격을 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특이한 건.
“하하! 일황자가 패배했군.”
“그럴 줄 알았어. 일황자가 실력은 좋다고 주변 사람들은 무능하기 짝이 없지.”
“일황자의 가장 큰 지원자라고 할 수 있는 무블 공작 자체가 전쟁하고는 동떨어진 인물 아닌가?”
“애초에 일황자가 전쟁 운운하면서 기회를 운운한 것 자체가 우스운 소리였던 셈이지.”
제국은 낙담하기보다는 오히려 기뻐했다.
낙담하는 건 일황자에 줄을 댄 귀족들뿐이었다. 그 외의 귀족들은 오히려 경쟁자의 몰락에 박수를 쳤다.
이황자 파벌과 삼황자 파벌에 속한 귀족들은 입가에서 미소가 끊이질 않았다.
특히 이황자 파벌의 분위기는 최고였다.
“하하! 역시 노운 경 말이 맞았군.”
“이제 마지막 한 번의 패배만 남았군!”
“정말 대단한 혜인이란 말이야. 어떻게 지금 같은 상황을 확실하게 예측할 수 있었을까!”
노운은 전쟁이 일어나기 전에 말했다.
일황자 파벌이 세 번의 패배를 경험할 것이라고. 그리고 그 세 번의 패배를 경험한 뒤에는 알아서 전장에서 물러날 것이라고.
첫 번째 패배는 갑작스런 기가스 파일럿들의 병사(病死).
두 번째 패배는 이번 평지 전투에서 일어난 참패!
이제 세 번째 패배만이 남은 것이다.
더불어 만약 일황자 파벌이 세 번째 파벌을 경험한다면, 그건 정말 재기가 다시는 불가한 패배가 될 가능성이 높았다.
“이미 일황자 파벌에 속했던 귀족 중 몇 명이 이황자님과 다리를 놓아달라고 부탁을 하더군.”
“내게는 뇌물마저 주더군.”
“그래서 받았나?”
“받았지! 받기만 하고 입 닫으면 누가 알겠나?”
“하하하!”
첫 번째 패배는 의문이 많이 남는 패배였다. 하지만 두 번째 패배, 그것도 필로스 왕의 왕군과 싸워 생긴 패배는 너무나도 치명적인 패배였다.
전면전이었다.
힘 대 힘!
어떠한 꼼수도 없었으며, 순수한 힘의 충돌이었다.
그런데 거기서 패배했다. 단순한 1패가 아니다. 이건 페스로 제국의 이름에 먹칠을 하는 짓이었다. 피해는 둘째 치고 일황자가 페스로 제국이란 이름에 똥칠을 했다는 의미다.
이쯤 되자 눈치 빠른 귀족들은 일황자 파벌에서 슬그머니 몸을 빼기 시작했다.
전력이 빠져나가기 시작하는 것이다.
사실 일황자 본인은 군대를 가지지 못한다. 자신을 따르는 기사는 있어도, 기가스를 소유할 수는 없다.
어디까지나 그를 따르는 귀족들이 그에게 병력을 빌려주는 셈이다.
쉽게 말해서 일황자를 귀족들이 따르는 건 어디까지나 자기가 원해서지, 일황자가 그것을 강제할 수 없다는 의미다.
한 번 빠져나가기 시작하면 막을 수 없다.
마치 손 안에서 모래가 빠져나가는 것처럼 말이다.
이런 상황에서 일황자가 내릴 수 있는 결단은 오직 한 가지 뿐이었다.
반전!
마지막 전투에 모든 걸 걸어야 한다. 귀족들 전부가 빠져나가기 전에 현재 있는 전력으로 반전의 기회를 모색해야 한다!
결국 일황자는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 말 그대로 승부수를 걸었다.
그건 다름 아니라 왕도를 향한 진격이었다.
14.
문수르는 전장에서 이루어지는 소식들을 그 누구보다 빠르고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었다.
‘GPS시스템이 확실히 이런 스케일 큰 전투에서는 정말 절대적으로 작용하는군.'
기가스처럼 거대한 병기를 이용한 전투는 GPS시스템을 이용해 그 누구보다 확실하게 볼 수가 있었다.
지금 세상을 뒤흔들고 있는 평지에서의 전투 역시 문수르는 그 누구보다 확실하게 볼 수 있었다.
‘지리적 이점이 있긴 했지만 결국 무리하게 앞뒤 보지 않고 돌격을 한 일황자 군대의 실수가 가장 컸다.’
그 전쟁은 누가 잘해서 승패가 갈렸다기보다는 그냥 일황자의 군대가 무능했다.
‘제국군이 원래 이런가?’
사실 여기서 문수르는 살짝 한 가지 의구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페스로 제국!
전쟁으로 모든 걸 이룬 국가다. 당연한 말이지만 전쟁에 있어서는 최고라고 할 수 있는 자들이 넘치는 곳이다.
그런데 일황자 파벌의 군대가 내린 작전은 도무지 최고라고 불리는 자들이 내린 것이라고는 볼 수 없을 정도로 처참한 것이었다. 보는 이가 부끄러워질 정도다.
아무리 호기가 넘친다고 하더라도 그건 아니다. 호기가 넘치는 것과 우수한 것, 그것은 별개의 이야기니까.
‘내가 너무 제국군을 과대평가한 것인가?’
어쩌면 문수르는 제국의 존재를 너무 크게 봤을지도 모른다.
본적이 없으니까.
막말로 제국군이 제대로 싸우는 걸 본 적이 없다. 그가 본 건 그 제국에 속한 귀족들이 벌이는 싸움, 그것뿐이다. 슈페언 백작의 전투 같은 것 말이다. 그건 제국이 보여줄 수 있는 전쟁의 극히 일부분, 단편에 불과하다.
생각해보면 콩탄 왕국이 오랜 세월 전쟁을 하지 않은 것처럼, 제국도 오랜 세월 전쟁을 하지 않았다.
전쟁은 무수히 많은 것으로 이루어져있다.
특히 개중에서 경험이란 요소는 절대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페스로 제국의 가장 무서운 점도 바로 그 경험이었다. 무지막지한 전쟁들을 통해서 쌓은 전쟁경험을 통해 탄생된 영웅들, 군사들, 지휘관들, 기사들, 병사들은 그 무엇보다 강력한 병기다.
하지만 카이탄 황제의 정책은 그 모든 것을 그저 살찌웠을 뿐이다.
말 그대로다.
‘제국이 내 생각보다 약하다면.’
건강한 남자를 뒤룩뒤룩 살만 찌웠을 뿐이다. 제 아무리 뛰어난 병사도 살이 찌면 둔해질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만약 제국군이 겉만 번지르르한 것에 불과하다면?
‘아니야.’
그 순간 문수르는 자신의 생각을 부정했다.
“문수르, 넌 최악을 상정해야 돼.”
페스로 제국이 생각보다 약하면 좋은 일이다. 콩탄 왕국에 득이 되면 됐지, 손해가 되는 이야기는 아니다.
더불어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정신적으로도 편할 지 모른다. 긍정적인 사고를 할 수 있을 수 있으니까.
하지만!
다른 이들은 그래도 되지만 문수르는 그러면 안 된다.
긍정적인 생각 그리고 낙관.
하지만 그것이 오판이었다면? 잘못된 선택이었다면? 착각이었다면?
적어도 문수르는 최악의 경우, 가장 강한 제국을 머릿속에 두고 생각을 해야 한다.
‘제국은 강하다.’
문수르가 다시 전쟁을 해석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강한 제국이 너무 무기력하게 패배했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들, 판단들, 가정들, 의혹들…….
그리고 나오는 결론.
“누군가 필로스 왕에게 일황자 군대에 대한 정보를 팔았을 가능성이 높겠군.”
문수르는 조금씩 진실에 가까워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