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노크맨-265화 (263/293)

265화

6.

일황자 파벌이 전선을 넘어 움직였다. 모든 전력이 한 번에 움직이는 건 아니었다. 전선에 도착한 전력 중 3할은 후방에 배치했으며, 진격한 7할의 전력은 다시 4개의 부대로 나뉘어 움직였다. 그렇게 해도 한 부대에 소속된 기가스의 숫자는 대략적으로 50대를 가뿐하게 넘어갔다. 일황자 파벌의 군대가 전선에 이끌고 온 기가스의 숫자가 200대를 넘었다는 의미였다.

어마어마한 숫자다.

동시에 이것이 페스로 제국의 전력(戰力)이기도 했다.

전 대륙에서 가장 많은 기가스 그리고 가장 선진화된 기가스를 보유한 국가가 바로 페스로 제국이었다.

페스로 제국의 전쟁에 대한 자신감 역시 이런 배경에서 나오고 있었다.

때문에 일황자 파벌의 군대는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이 정도 전력이면 문제 없지.”

“당장 영지 서너 개 정도 점령하고 시작하면 그 후부터는 알아서 백기를 들겠지.”

패배는 없다.

더군다나 일황자 파벌은 단순한 승리를 원하는 것이 아니었다.

“속도전이다.”

“다른 황자들의 세력이 움직이기 전에 최대한 빠른 속도로 영지를 무너뜨리고, 왕도로 이동한다.”

전공을 세워야 한다.

그럼 전쟁에서 가장 확실한 전공은 무엇일까?

왕을 잡는 것이다.

그 어떤 게임도 왕을 잡는 순간 승리가 결정된다. 왕을 잡는 것이야 말로 가장 확실한 전공인 셈이다.

즉, 이번 전쟁은 누가 먼저 왕도에 도달하느냐, 그것이 핵심이었다.

일황자 파벌은 그걸 잘 알고 있었기에 가장 빠른 루트를 이미 잡았고, 거침없이 진격을 강행했다.

그게 실수였다.

7.

기가스의 장점은 무지막지한 파괴력이다. 기가스를 막을 수 있는 건 기가스 뿐이며, 제 아무리 대단한 난공불락의 요새라고 해도 기가스를 이용하면 얼마든지 무너뜨릴 수 있다.

하지만 이런 기가스에도 단점이 있다. 가장 큰 단점은 역시 기동력이란 놈이다.

느리단 게 아니다. 기가스는 엄청 빠르다. 문제는 그 빠른 속도를 계속해서 유지할 수 없다는 것이다.

마나동력원의 수치를 일정하게 유지해야 한다. 이동을 위해서 마나동력원 전부를 소비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진격 그리고 휴식.

결과적으로 이런 기가스의 움직임은 기습이란 걸 무의미하게 만든다. 어느 정도 정찰병만 배치하면 단숨에 적의 이동 경로 및 이동 방향 등을 전부 파악할 수 있다.

……라는 건 일반적인 논리.

그러나 정말 기가스의 결정적인 단점은 기가스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

“시작해야겠군.”

어둠이 내렸다.

칙칙한 어둠이.

마치 끈적끈적한 늪을 닮은 어둠이.

그 어둠을 틈타, 흑마법사가 만들어낸 마물이 스멀스멀 움직이기 시작했다.

8.

전쟁을 할 때 가장 중요한 건 역시 보초를 세우는 일이다. 기가스들도 보초를 선다.

“흐아암…… 정말 피곤하군.”

기가스 파일럿이 기가스에 탑승한 채로 보초를 서는 것이다.

이상한 일은 아니다.

하지만 피곤한 일인 건 사실이다. 더불어 기가스 파일럿이 보초를 서게 되면 넓게 볼 수는 있다. 높은 망루에서 보초를 서는 것과 비슷한 효과를 가지니까.

하지만 반대로 낮은 장소, 어두운 장소에 대한 식별능력은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쉽게 말해서 카라카크, 그가 만든 사일런트 킬러라는 놈은 기가스 파일럿으로는 절대 발견이 불가능한 놈이었다.

그런 사일런트 킬러들이 어둠을 틈타 단숨에 일황자 파벌의 군대의 진지 안으로 들어왔다.

사실 사일런트 킬러들의 전투력은 그다지 높지 못했다. 절대적은 은밀함을 위해서 많은 것을 포기했으니까. 공격력은 굳이 따지다면 일반 병사들 수준을 조금 넘는다. 기사 하나가 최소한 십여 마리의 사일런트 킬러를 가지고 놀 수 있다.

그러나 이 전투력에 대한 부분을 카라카크는 정말 쉬운 방법으로 해결했다.

스윽…….

그건 다름 아니라.

푸슈슈!

독이란 놈이었다.

흑마법사 카라카크, 온갖 동식물을 상대로, 심지어 인간이나 엘프, 드워프를 가지고도 생체실험을 한 그가 독에 대한 관심이 없었을 리 만무하다. 독을 실험했다. 보다 은밀하고, 보다 효과적으로, 보다 치명적이며, 해독마법으로 치료가 불가능한 독을 만들고자 했다. 제 아무리 오러를 다뤄 독에 대한 저항력이 일반인의 곱절 이상이나 되는 오러 나이트들조차 순식간에 죽일 수 있는 독을 만들고자 했다.

그 결과는?

당연히 성공이다.

백 년 넘게 진행해온 연구다. 이미 진즉에 성공했다.

효과적인 독을 만들었다.

연기를 피우는 순간, 독연은 오러 나이트의 감각을 일시적으로 마비시키고, 반응속도를 늦춘다.

그 후에 천천히, 일주일이라는 시간에 걸쳐서 시름시름 앓다가, 저도 모르는 사이 죽는 독이다.

그렇게 독을 풀어 놓은 사일런트 킬러들은 귀신처럼 사라졌다.

9.

전쟁이 터지기 시작한 이후로 속보가 빠른 속도로 페스로 제국의 황도로, 콩탄 왕국의 왕도로 퍼지기 시작했다.

1차전의 승자는 페스로 제국이었다.

“당연한 결과지.”

“하하하! 나약한 콩탄 왕국 놈들은 단 하루를 버티지 못하는군.”

“이 기세면 황도까지는 한 달 안에 함락시킬 수 있겠군!”

2차전의 승자도 페스로 제국이었다. 페스로 제국은 단 두 번의 전쟁으로 단숨에 2개의 영지를 점령한 것이다.

심지어 3차전까지 페스로 제국이 전쟁에서 승리하면서, 전세는 단숨에 제국쪽으로 기울었다.

사실 놀랄만한 일은 아니었다. 어떤 의미에서는 모두가 예상한 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4차전에 있었다.

4차전에서 페스로 제국군이 패배했다. 갑자기 기가스 파일럿들이 피를 토하며 쓰러졌고, 심지어 예비 기가스 파일럿들마저 비슷한 증상을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제 아무리 강력한 기가스라고 해도 기가스 파일럿이 없으면 무용지물!

결국 페스로 제국의 병력은 알아서 후퇴를 했다. 그러나 우습게도 기가스는 그대로 전장에 나둔 채 몸만 빼놓고 도망쳤다. 어쩔 수 없었다. 기가스를 일반 병사들이 끌고 움직이는 건 엄청난 노동력을 요구하는 작업이었으니까. 신속이 생명인 후퇴에서 그런 작업을 할 수 있을 리 만무했다.

그 과정에서 콩탄 왕국은 정말 아무런 피해 없이 무려 38대라는 기가스를 노획할 수 있었다.

물론 당장 쓸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콩탄 왕국 기준에서 막강한 전력증대가 이루어진 건 분명한 사실이었다.

그리고 이루어진 5차전.

그 5차전의 승리자는 다름 아니라 콩탄 왕국이었다.

그것도 4차전처럼 갑작스런 사고가 아니라, 힘 대 힘! 정면 대결에서의 승리였다.

10.

“말도 안 돼!”

일황자 파벌의 기가스 파일럿들은 기겁했다.

“이런 전력이 어째서 여기에!”

평지였다.

말 그대로 그 어떤 수작도 부릴 수 없는 평지! 오직 하나, 순수한 힘과 뛰어난 전략적 판단 그리고 그동안 갈고 닦은 기량만으로 승부가 나는 진정한 전장이었다.

때문에 콩탄 왕국의 군대가 등장했을 때, 일황자 파벌의 군대들은 오히려 미소를 지었다.

콩탄 왕국이 드디어 미쳤구나!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일단 등장한 기가스의 숫자가 상당했다. 대력적으로 가늠된 숫자만 50대가 넘고 있었다.

일개 영주는 물론 대여섯 명의 영주들이 힘을 합쳐도 이루기 힘든 기가스 숫자였다.

물론 기가스의 외갑에 칠해진 색이나, 외갑에 그려 넣어진 영주의 문장은 제각각 다르긴 했지만 페스로 제국의 기가스 파일럿들과 참모들의 눈은 옹이구멍이 아니다.

보면 안다.

여러 영지에서 보낸 기가스들이 한데 모여 병력을 꾸린 건지, 아니면 겉모습만 그렇게 비오도록 만든건지.

후자였다.

그 순간 몇몇 이들은 직감했다.

‘단일 세력으로 이 정도 기가스를 보유할 수 있는 건…….’

‘제이머스 공작이 아니면 필로스 왕뿐.’

‘하지만 제이머스 공작이 반역죄로 현재 왕성 지하감옥에 수감 중이란 걸 고려하면…….’

이 세력.

“왕군이다!”

필로스 왕의 군대가 분명했다.

그리고 그 사실을 파악하는 순간 보통 이들이라면 오히려 아연실색하겠지만 그 전장에 등장한 일황자의 군대는 환호했다.

“대어가 알아서 미끼를 물어주는 구나!”

“이렇게 운이 좋을 수가!”

잡으면 된다.

눈앞에 있는 저 콩탄 왕국의 왕군만 처치하면 일황자가 황태자 위에 오를 수 있는 것이다.

그 사실이!

이번 전쟁을 길게 끌 필요가 없다는 사실이!

“진격!”

“대륙 끝까지 쫓는 한이 있더라도 전멸시켜라!”

일황자의 병력들이 무리하게, 앞뒤를 가늠하지 않고 무작정 돌진하도록 만들었다.

11.

보통 전쟁을 하게 되면 일단 작전을 세운다. 제 아무리 평지라고 해도 적의 병력 숫자, 배치 상황, 병력의 수준 등을 가늠해서 그에 맞는 작전을 세워야 한다.

당연한 일이다. 전쟁은 애들 장난이 아니다. 체스판 위에서 이루어지는 체스게임도 아니다. 체스 게임은 진다고 해서 큰 문제가 있는 게 아니다. 하지만 전쟁은?

작은 실수.

혹은 작은 오판.

그로 인해 패배를 하게 된다면, 너무나도 많은 것을 잃는다. 신중의 신중을 기약하는 게 전쟁이다. 그리고 신중함이 바로 모든 전쟁에서 통용되는 진리다.

제 아무리 페스로 제국이라고 그런 전쟁의 진리를 모를 리 만무하다.

하지만 그들은 오만했다.

모든 지휘관이라면 숙지해야하는 그 사실을 머릿속에 두지 않았다. 온갖 상황들이 그들의 머릿속에서 신중함이란 단어를 없애버렸다. 오히려 역으로 신중함이 있어야 할 자리에 초조함이란 놈이 있었다.

반면 이미 어느 정도 변장을 하고 대기 중이었던 필로스 왕의 군대는 정반대였다.

평지라고 하지만 그들은 몇 가지 수작을 부려 놓았다.

또한 보기에는 평지지만 어느 정도 기울이가 있는 평지였다. 필로스 왕의 군대가 좀 더 낮은 위치에 있었다.

이 차이.

중요하다.

기가스가 한 번 균형을 잃으면 다시 일어나는 건 말처럼 쉬운 일이 절대 아니다.

하물며 무너진 기가스를, 넘어진 기가스를 그냥 두고 일어날 때까지 기다려주는 적군은 없다. 무방비나 다름없는 기가스야말로 가장 우선적인 타깃이 된다.

이런 상황들이 전장에서 어우러졌다.

필로스 왕의 왕군을 향해 일황자의 군대가 미친 듯이 돌진하기 시작했고, 이윽고 충돌했다.

쿠웅!

지진이 난 듯 땅이 울렸고.

콰앙!

천둥이 치듯, 굉음이 터졌다.

한 번의 교전으로 단숨에 열두 대의 기가스가 전투불가가 될 정도로 심각한 파손을 입었다.

어마어마한 격돌이었던 것이다.

이 부분에서 중요한 것은.

“맙소사!”

“이건 말도 안 돼!”

전투불가가 된 열두 대의 기가스 중에 왕군 소속의 기가스는 네 대에 불과하다는 사실.

역으로 말하면 일황자 소속의 기가스는 무려 여덟 대가 단숨에 전투불능이 된 것이다.

너무 큰 차이였다.

똑같이 충돌…… 아니, 오히려 일황자 쪽이 돌진을 했다. 최대한의 속력을 끌어내서 가속했다. 그 어마어마한 기가스의 몸뚱이가 어마어마한 속도로 부딪쳤다.

이렇게 보면 오히려 일황자의 군대가 더 좋은 결과를 내놓아야 하는 게 보통 아닌가?

지휘관들이 당황했다.

하지만 전장에서는 타임 요청 같은 걸 할 수는 없다.

1차적 충돌에서 기세를 올린 필로스 왕의 군대는 냉정하게 움직였다. 전투불능이 된 기가스의 가슴팍을, 파일럿이 탑승하는 장소를 확실하게 분쇄해버렸다.

“크악!”

비명소리가 나며, 기가스의 가슴팍에서 붉은 핏물이 튀어나왔다. 마치 심장이 터지듯 말이다.

확인사살!

가장 중요한 일이지만 당장 눈앞의 적이 있는 상황에서 가장 하기 힘든 일이다.

그 정도로 지금 필로스 왕의 군대는 냉철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반대로 일황자의 군대는 이 모습에 당황했다.

그리고 다시 시작된 2차 교전.

그 결과는 이미 두 군대의 기세로 예측할 수 있을 정도로 확연해진 상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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