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4화
<81화. 움직임.>
1.
제이머스 공작.
콩탄 왕국의 영웅이자, 최고의 기사였던 그는 지금 왕성의 차디찬 지하 감독에 사지가 결박된 채 수감되어 있었다.
죄명은 반역죄!
모든 귀족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죄다.
하지만 반대로 많은 권력가들이 많이 저지르는 죄이기도 했다.
권력에 대한 욕심이란 그 끝이 없는 법이니까. 충분히 높은 경지에 올라간다고 해도, 더 높은 자리를 원하게 된다.
그러다 결국 반역을 저리는 것이다.
성공하면 모든 걸 가질 수 있지만 실패하면 모든 걸 잃게 된다.
제이머스 공작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모든 걸 잃었다. 가지고 있는 영지, 재산은 물론 공작의 작위까지!
심지어 그는 모든 기사들에게 당연하게 받아오던 존경심마저 잃어버리고 말았다.
“빌어먹을 제이머스 공작. 오늘 식사다.”
“공작은 무슨! 쓰레기! 기사 주제에 암살이라니? 이런 자가 왕국에 있다는 게 수치다.”
제이머스 공작의 혹시 모를 수작을 막기 위해 배치된 기사들은 제이머스 공작을 볼때마다 저마다 한 소리씩 했다.
제이머스 공작은 그런 그들을 보며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단지 두 눈만 번뜩일 뿐이었다.
그 눈빛 앞에서는 제 아무리 단련된 기사들이라고 해도 오금이 저릴 수밖에 없었다.
‘젠장, 여전히 눈빛 하나는…….’
‘이게 오러 마스터의 실력인가?’
일부러 힘을 쓰지 못하도록 식사량을 제한했음에도 제이머스 공작의 기세는 조금도 줄어들지 않고 있었다.
더불어 제이머스 공작은 여전히 입을 열고 있지 않았다.
필로스 왕의 명에 따라 어떻게든 제이머스 공작을 고문하면서까지 흑마법사 카라카크에 대한 정보를 캐내려고 했지만 제이머스 공작은 오직 한 가지 말만 할 뿐이었다.
“내가 아니다. 필로스 왕, 그야 말로 흑마법사 카라카크와 손을 잡은 진짜 원흉이다. 콩탄 왕국을 무너뜨리고자 하는 진짜 악당이다!”
그 말에 귀를 기울이는 자는 없었다.
하지만 그런 제이머스 공작의 말이 소문이 되어 퍼지는 걸 막을 수 있는 사람 역시 없었다.
2.
이제르트 백작이 필로스 왕에게 편지를 보냈다. 한 번 만나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의외의 일이 생겼다.
“필로스 전하께서 내 면담 요청을 거절하셨네.”
“사실입니까?”
“이 편지를 보면 알 수 있지 않나?”
필로스 왕은 이제르트 백작의 면담 요청을 단칼에 거절했다. 왕의 인장이 찍힌 편지에는 그렇게 쓰여 있었다. 더군다나 이것저것 이유를 대기보다는 그저 만나기 싫다는 내용만이 있었다.
노골적이다.
보통 왕이 귀족을, 그것도 힘이 있는 귀족을 다룰 때는 어느 정도의 예의를 차리고, 돌려 말하기 마련이다. 혹여 상대방이 마음이 조금이라도 상하면 좋을 건 없으니까.
이제르트 백작가는 지금 콩탄 왕국의 실세 중 실세다. 권력의 중추에 위치한 건 아니지만, 압도적인 무력을 가지고 있다.
특히 이번 제이머스 공작의 반역사건 당시, 그 누구보다 빨리 제이머스 공작가에 도달한 후에 제이머스 공작의 그 거대한 성의 외성 성벽 전부를 단시간에 무너뜨렸다는 이야기는 이미 콩탄 왕국 전역에 퍼진 상황이었다.
그 때문에 이제르트 백작가에 대해서는 온갖 소문이 퍼져 있었다.
“이제르트 백작가에는 무려 100대의 기가스가 있다더군!”
“이제르트 백작가의 기가스는 보통 기가스들보다 그 빠르기가 최소 두 배 이상이라더군!”
“이제르트 백작가에 문수르 경, 그가 조종하는 기가스는 대륙 최강의 기가스라고 하더군.”
“이제르트 백작가이 고대 유적을 발견했다는 게 사실인지도 몰라.”
허황된 소문도 많았지만 결과적으로 콩탄 왕국에서 이제르트 백작가는 최강 전력을 가진 가문이 되었다.
더군다나 제이머스 공작이 반역죄로 몰락한 상황!
그런 상황에서 페스로 제국이 지금 콩탄 왕국으로 쳐들어오기 위해 벌써 국경에 집결했다는 정보가 퍼진 상황에서 콩탄 왕국이 기대할 수 있는 귀족은 이제르트 백작가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렇다면 필로스 왕은 당연히 이제르트 백작을 만나야 한다.
물론 필로스 왕이 이제르트 백작가를 탐탁지 않아하는 건 맞지만…….
‘필로스 왕은 자기감정에 휘둘려 확실한 이익을 버리는 사람이 절대 아니야. 합리적인 자라고.’
이해할 수 없다.
‘젠장.’
그런데 왠지 싸한 느낌이 온다.
“다시 편지를 보내보겠습니다.”
“그렇게 하게.”
“그럼 일단은…… 한동안 움직일 순 없겠군요.”
“언제라도 출격이 가능하도록 대기하겠지만 솔직히 말해서 병사들의 피로감이 적지 않네.”
“그렇겠지요.”
병사들의 사기는 하늘을 찌르고 있다.
이제르트 백작가는 이제 콩탄 왕국 최강의 가문이 되었고, 그 가문에 속한 병사들은 콩탄 왕국 최강의 병사가 되었으니까.
또한 제이머스 공작과의 전쟁에서 이제르트 백작가는 극히 미미한 피해만 입었을 뿐이며, 막대한 공을 세우기도 했다.
무엇보다 이제르트 백작가의 병사들은 정말 엄청나다고 표현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강한 충성심을 품고 있다. 그런 그들은 지금 이 혼란 속에서 오히려 이제르트 백작가를 위해 희생할 각오를 다지고 있다.
다 좋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피로감을 없애주는 건 아니다.
오히려 반대다.
이런 모든 것들 그리고 최근 많은 사건사고들은 병력뿐만이 아니라 이제르트 백작가 전체의 피로감을 누적시켰다.
물론 또 다른 이유도 있다.
“요즘 영지가 너무 바쁘게 돌아가고 있어.”
“풍족하지만 피곤하지요.”
“이런 날이 오는 날을 꿈꾸었지만.”
이제르트 백작령은 지금 쉽게 말해서 풀가동 중이다. 열심히 곡식을 수확하고, 광산에서 광물을 캐내고, 공장에서는 기가스를 생산하고, 병사들의 무기를 생산 중이다.
일하는 영지민들은 기뻐하고 있다.
이제르트 백작령에서는 자신이 일할 만큼 대우를 받고, 더 많은 일을 할수록 추가적은 보수를 받으니까.
일이 많을수록 돈이 쌓인다. 일감이 없어 배를 곯을 때를 생각하면 정말 행복하다. 모두가 먼저 일을 하려고 나선다.
“지금의 분주함이 마음에 들진 않는군.”
하지만 이제르트 백작은 이 분주함의 원인이 결국 살아남기 위한 발악이란 걸 알고 있었다.
문수르는 쓴웃음을 지었다.
‘어떻게든 해야 한다.’
이제 궤도에 올랐다.
이제부터 남은 건 달리는 일이다. 열심히! 정말 뒤를 돌아보지 않으며 무조건 달려야 한다.
‘어떻게든 해야 돼.’
그렇기 위해서는 필로스 왕이 이제르트 백작의 말을 들어야 한다. 만약 필로스 왕과 이제르트 백작가가 반목을 한다면.
‘그렇게 되면 끝장이야.’
제 아무리 자중지란에 빠진 페스로 제국이라고 해도 절대 이길 수 없을 테니까.
3.
전쟁.
페스로 제국이 가장 좋아하는 단어다. 그들은 전쟁에서 패자였던 적이 극히 드물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빌어먹을!”
일황자 파벌의 귀족들이 전선에서 모임을 가졌다. 그들의 표정은 전장을 나가는 장수의 그것이 아니라, 전쟁에서 비참하게 패배한 장수의 그것과 흡사했다.
“이게 대체 무슨 꼴입니까?”
“후우! 낸들 어찌 하겠소?”
“콩탄 왕국과 싸우기도 전에 벌써 오백이 넘는 병력이 자기 영지로 돌아갔소.”
“다섯 명의 귀족이 전선에서 이탈했소.”
“미치겠군.”
세 황자 파벌 간의 경쟁이 도를 넘었다. 곳곳에서 시비가 일어났고, 심지어 칼부림까지 있었다.
칼부림 끝에 죽은 귀족까지 나올 정도였다. 병사들 중에서는 반병신이 되거나 혹은 큰 피해를 입어 영지로 돌아간 자들이 상당수였다. 일부는 어느 정도 상황의 심각성을 눈치 채고 일찌감치 몸을 뺄 준비를 하고 있었다.
최악이다.
현재 빠진 병력은 전체 병력에서 놓고 봤을 때 사소한 경우이며, 요즘 전쟁은 병력이 아니라 기가스로 하는 만큼 일반 병사 오백여 명 정도가 빠진 건 티도 안 나는 수치이지만, 문제는 전쟁을 좋아하던 페스로 제국의 귀족들이 전쟁터를 떠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더군다나 이번 전쟁이 보통 전쟁인가?
황태자 위를 놓고 벌이는 경쟁이다. 이번 전쟁이 끝나면 어마어마한 권력개편이 있을 것이다.
즉, 만약 배신을 한다면 지금 해야 한다. 지금 이후에는 배신을 하고 싶어도 못하는 처지가 될 테니까.
“지금 가장 기세가 좋은 파벌이 어디요?”
“그야 이황자 파벌이지.”
“슈페언 백작이 사라진 이후 세가 급격히 줄어들었는데 오히려 그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중립을 표방하던 귀족들이 대거 달라 붙었소.”
“더군다나 아히만트 백작까지 은연중에 이황자를 지원하고 있으니.”
“이제까지 아히만트 백작은 오직 폐하를 위해서만 검을 들었소. 그런 아히만트 백작이 이황자를 보좌한다는 의미를…… 귀족들이 모를 리 만무하지 않소?”
“후우! 정말 힘들군.”
“차라리 3년 전에 확실하게 결판을 냈었어야 했소.”
일황자 파벌의 귀족들 중 일부도 눈치를 보고 있다.
즉, 지금 같은 대치 국면이, 대립구도가 계속되면 배신하는 귀족들이 늘어날 것이고, 결국 웃는 건 이황자가 될 것이다.
“차라리 움직이는 게 어떻소?”
그런 상황에서 일황자 파벌이 내릴 수 있는 최선.
그건 다름 아니라 가장 먼저 움직이는 것이다.
“대가가 적지 않을 텐데…….”
“이대로 가다가 이도저도 안 되는 것보다는 차라리 손해를 감수하고서라도 움직이는 게 낫소.”
“동의하오.”
“좋소. 그럼 반대하는 분은?”
손을 드는 자는 없었다.
그것으로 회의는 끝이었다.
4.
“일황자 파벌이 전선을 움직이고 있습니다.”
소식이 들렸다.
노운은 미소를 지었다.
“그렇군요.”
“우리들도 움직일까요?”
기사의 물음에 노운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병사들과 기사들이 휴식을 취할 수 있게 하세요. 더불어 우리는 전선을 뒤로 물립니다.”
“예?”
기사가 놀랐다. 노운은 그런 기사를 지으며 미소를 지었다.
“그 이유는 작전회의에서 설명하겠습니다. 일단 귀족분들을 모아주세요.”
“알겠습니다.”
5.
이황자 파벌의 귀족들이 모인 작전회의. 그 자리에서 노운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일황자 파벌은 앞으로 세 번의 패배를 경험할 것입니다.”
마치 미래를 예측하는 듯한 말.
보통 경우라면 그런 말을 뱉은 자를 미친놈 취급하겠지만 여기 모인 귀족들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들은 마치 신의 계시를 들은 것마냥 두 눈을 반짝이며 노운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속보가 왔습니다. 현재 필로스 왕의 군대가 전선에 배치 중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지금 아미언 자작군으로 위장 중이죠. 즉, 일황자 파벌이 가장 먼저 싸우게 되는 건 콩탄 왕국에서 가장 실력이 좋은 왕국군이 될 것입니다. 동시에 삼황자 파벌이 수작을 부렸습니다.”
말을 끊는 자는 없었다.
모두가 숨만 죽이고 있었다.
“삼황자 파벌의 귀족 중 한 명이 일황자 파벌에 대한 정보를 콩탄 왕국에 보냈습니다.”
그 말에 누군가 말했다.
“그건 좀…….”
“간첩행위 아니오?”
“그 부분에 대한 증거 역시 제가 따로 포착해두었습니다.”
“역시 노운 경!”
“이걸로 삼황자 파벌의 약점 하나를 쥐게 됐군.”
귀족들이 미소를 지었다. 그들은 지금 자신들이 이황자 파벌에 선 걸 감사하게 여겼다.
슈페언 백작의 실종, 이제는 거의 사망으로 확실시되는 그 사건 이후 이황자 파벌에 속했던 귀족들은 전부 울상을 지었지만, 이제는 오히려 상황이 백팔십도 반전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굳이 우리가 먼저 전장에 나설 필요는 없습니다. 그것이 전선을 뒤로 미루고, 병사들과 기사들에게 휴식을 주는 이유입니다.”
그 말에 모든 귀족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그들을 보며 노운은 미소를 지었다.
‘정말 쉽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