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3화
7.
언제나 그렇듯 무언가를 하기 위해서는 명분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런 명분을 만들기 위해서는 때로는 적당한 거짓을 섞어 이야기를 꾸며내고는 한다.
더군다나 제 아무리 어처구니없는 거짓말이라고 해도 세 사람이 동시에 비슷한 거짓말을 하면 마치 사실처럼 느껴지는 법이다.
제국의 황도에서 지금 그런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더러운 흑마법사 놈이 감히 카이탄 폐하를 노린다고?”
“말도 안 되는 일! 감히 우리 페스로 제국을 어떻게 보고!”
카라카크.
그 전설적인 흑마법사가 카이탄 황제를 노린다는 소문은 페스로 제국 귀족들의 분노를 사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여기까진 일반적인 이야기.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이렇게 흑마법사 따위가 우리 페스로 제국을 얕잡아보는데 가만히 있을 일입니까?”
“맞습니다. 당장 응징을 해야 합니다.”
“응징이고 자시고 당장 내가 군대를 이끌고 그 흑마법사 놈을 지옥으로 보내겠소.”
갑자기 흑마법사에 대한 이야기가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쉽게 말해서 황도에 있는 귀족들이 앞 다투어 흑마법사를 처단하겠다고 나서기 시작한 것이다.
어떻게 보면 참 대단한 행동이다. 제국 황제를 위해서 몸소 사병을 이끌고 움직이겠다니? 대단한 충성심이 아니면 감히 나올 수 없는 행동이다. 아마 그런 충성스런 귀족들만 있다면 왕이나, 황제의 자리는 참 고민 없는 달콤한 자리가 됐을 것이다.
쉽게 말해서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거다.
황도에 있는 귀족들이 갑자기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이유는 정말 간단했다.
명분이 생겼으니까.
지금 황도에 있는 귀족들은 일황자와 이황자 그리고 삼황자 파벌에 속하지 못한 자들이다.
그런 그들이 카라카크를 응징한다는 명분 하에 군대를 움직일 수 있는 기회가 생긴 것이다.
더군다나 카라카크, 놈이 있는 곳이 어디인가? 놈이 주무대로 활동한 장소가 어디인가?
그렇다.
“당장 콩탄 왕국을 초토화시키는 한이 있더라도 흑마법사 카라카크를 처치하겠사옵니다.”
“폐하는 그저 가라고만 명령하시면 되옵니다.”
“모든 건 제가 책임지고 해결토록 하겠습니다. 부디 분부만 내려주시옵소서.”
콩탄 왕국이다.
카라카크는 그 어디도 아닌 콩탄 왕국을 주무대로 활동하는 흑마법사였다. 그런 카라카크를 잡는다는 건 병력을 이끌고 콩탄 왕국으로 들어간다는 소리다.
즉, 콩탄 왕국과 전쟁을 할 수 있다는 의미다.
이번 황태자 위를 놓고 벌이는 전쟁에 어느 정도 발을 걸칠 수 이는 기회가 되는 것이다.
더불어 그 기회를 이용하면 앞서 움직인 세 명의 황자들을 방해할 기회도 생긴다.
전공을 세우면 황태자 위를 준다고?
그렇다면 역으로 생각해보자. 전공을 세우지 못하고 오히려 졸전만 치르게 되면?
그때에도 황태자 위를 줄 수 있을까?
어림도 없는 소리다.
황태자의 자리는커녕 지금 가지고 있는 황자의 자리까지 내놓게 될 것이다.
페스로 제국은 그런 곳이다.
전공을 세운 자에게는 이루 말할 수 없는 부와 명예를 주지만 반대로 전쟁에 패배한 자에게는 가차 없는 조롱과 지탄을 보내고 종국에는 주류에서 퇴출시켜버린다.
물론 당장 황도에 있는 귀족들이 콩탄 왕국의 전쟁에 참가한다고 해서 그들이 세 황자들을 제대로 견제하고, 몰락시킬 수 있다는 확신이 있는 건 절대 아니다.
단지 중요한 건 손가락만 빨면서 상황을 지켜봐야 했던 처지에서 이제는 직접 변수를 만들 수 있는 기회를 잡게 됐다는 사실, 그 부분이다.
더군다나 현재 황도에 모인 귀족들 중에 일황자나 이황자, 삼황자 파벌의 귀족은 극히 드물었다.
반대 의견을 내놓는다고 해도 기존 귀족들의 득달같은 공세에 그들의 의견은 제대로 고개조차 들지 못했다.
결국 황도에서 카라카크를 처치하기 위해 병력을 보내야 한다는 의견이 대세가 되기 시작했다.
8.
문수르는 편지를 받았다. 편지 내용은 간단했다.
- 성공.
그걸 본 문수르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기회가 생겼다.’
문수르가 환호하는 이유. 그건 다름 아니라 그가 황도에서 부린 수작이 먹혔기 때문이다.
‘그래, 결국 지금 제국군을 막기 위해서는 그들 스스로가 자중지란을 일으키도록 유도해야 한다.’
문수르, 그가 한 일은 다름 아니라 황도에 소문을 푸는 일이었다.
카라카크, 놈이 제국의 황제를 노린다는 소문!
증거도 제대로 없는 말 그대로 소문, 달리 표현하면 헛소리에 가까운 것이었지만 문수르는 알았다.
‘정치란 건 제 이익을 위해선 말도 사슴으로 만드는 세계지.’
황도에 남은 귀족들 대부분은 어떻게든 다시 황태자 위를 놓고 벌이는 레이스에 참가하고 싶어 한다. 그들은 절대 구경꾼으로 남아 손가락만 빨면 승자의 환호를 보는 비루한 처지가 되기 싫다.
더불어 필사적이다.
일황자부터 삼황자까지, 셋 중 누가 황태자가 되든 지금 황도에 있는 귀족들에게는 전혀 도움이 안 되는 일이니까. 오히려 피 비린내 나는 숙청이 시작되면 그 숙청의 타깃이 될 게 뻔한 상황이다.
결국 그들은 별 거 아닌 소문에 살을 붙이고 정치적 이유를 붙이면서 종국에 명분을 만들었다.
‘남은 건 황제의 결단.’
카이탄 황제, 결국 결정은 그가 내린다.
‘이대로 대세가 된 명분을 거절하는 건 나름 강한 권력을 쥔 황제에게도 부담스러운 일이지.’
황제 입장에서는 사실 이 대세가 썩 마음에 들진 않을 것이다. 어쨌거나 이번 황태자 위를 놓고 벌이는 콩탄 왕국과의 전쟁은 황제의 머리에서 나온 생각이니까.
이런 상황에서 다른 귀족들이 카라카크를 빌미로 이 판에 끼어든다는 건 예상 외의 일이다.
그러나 거절하는 건 위험하다.
말 그대로 카라카크를 처단해야 한다는 게 대세가 된 상황이다. 이런 상황에서 황제가 그들의 의견을 묵살하면?
오히려 더 큰 소란이 생길 것이다.
제 아무리 황제의 권력이 제국 내에서 절대적이라고 해도 귀족들을 무조건 무시할 수는 없다.
더군다나 그 누구도 아닌 황제를 위해서 목숨을 바쳐 카라카크와 싸우겠다고 하지 않았는가?
놀라울 정도의 충성심과 희생정신을 보여주는 그들을 마냥 내치는 건 모양세부터가 좋지 못하다.
‘황제가 빨리 결단을 내렸으면 좋겠군.’
뭐든 간에 황제가 결단을 내리는 순간 제국에는 다시 한 번 큰 태풍이 몰아칠 것이다.
그리고 그 시간은 이제르트 백작가가 좀 더 확실하게 힘을 키울 수 있는 시간을 벌어줄 것이다.
‘좋아 남은 건.’
물론 아직 모든 일이 끝난 건 아니다. 지금은 단지 적당한 밑그림만 그렸을 뿐이다.
‘필로스 왕을 설득해야 할 차례로군.’
더 중요한 일은 지금부터다.
이제부터 문수르는 필로스 왕을 설득해서 콩탄 왕국의 모든 힘을 하나로 합쳐야 한다.
어쨌거나 제국의 전쟁은 피할 수 없으니까.
‘문제는.’
하지만 필로스 왕을 설득하기 전 큰 문제가 하나 더 있긴 했다.
‘이제르트 백작님을 설득하는 거로군.’
이제르트 백작.
그는 절대 문수르가 혼자서 왕도에 올라 필로스 왕을 만나는 걸 쉽게 허락하지 않을 테니까.
9.
노운은 이를 갈았다.
“젠장.”
이제까지 여유롭기 그지없었던 그가 분노하게 된 이유는 황도에서의 소란 때문이었다.
“이런 경우는 내 계획에 없었는데.”
카라카크를 이용한 황도의 귀족들이 결과적으로 대세론을 만들었고, 그 대세론을 통한 명분을 만들었다.
이제 황도의 귀족들마저 콩탄 왕국과의 전쟁에 참여할 수 있는 실날 같은 기회를 잡은 것이다.
사실 그건 아무래도 좋다.
어차피 노운이 원하는 건 제국의 혼란이며, 황자들을 무능한 인간으로 만들어 그들을 후계자 경쟁에서 탈락시키는 것이다. 콩탄 왕국과의 전선이 더 개판이 된다면 나쁠 건 없다.
문제는 황제다.
‘지금 황제는 내가 없으면 아무 것도 못한다.’
카이탄 황제.
그는 지금 노운의 꼭두각시다. 노운이 내리는 명령만 무조건적으로 수행하는 인형이다.
달리 말하면 노운이 어떠한 명령을 내리기 전까지 카이탄 황제는 아무 것도 하지 못한다.
그게 문제라는 거다.
‘지금 당장 황도로 가야 한다.’
황제가 황도의 귀족들이 주장하는 걸 받아주든 그걸 거절하든 결국 황제가 명령을 내리기 위해서는 노운이 다시 황도로 가서 황제를 움직여야 한다.
귀찮은 일이다.
무엇보다 지금 상황에서 전선을 비우는 건 썩 좋은 일이 아니니까.
‘귀찮게 됐어.’
이 순간 노운은 대체 누가 이런 수작을 부렸는지, 그것이 정말로 궁금했다.
‘어떤 놈이야?’
갑자기 카라카크가 등장했다. 필시 누군가 카라카크란 존재를 끄집어냈을 것이다.
‘아니, 잠깐.’
그 순간 노운의 머릿속에 어떤 생각이 들었다.
‘계속해서 황제가 침묵을 고수한다면 과연 황도의 귀족놈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도 궁금하군.’
이윽고 그가 미소를 지었다.
“그래, 어차피 제국이 혼란에 빠질수록 좋은 건 나지.”
노운, 그는 움직이지 않기로 결정을 내렸다.
그런 노운의 선택이 어떤 결과로 나올 지는 지금 이 순간에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10.
이제르트 백작.
그는 문수르의 부탁에, 황제를 만난다는 그 부탁에 거절 대신 다른 제안을 했다.
“내가 다녀오겠네.”
문수르가 오히려 역으로 기겁할 만한 이야기였다.
“백작님? 그게 대체 무슨 소리입니까?”
“말 그대로네. 어쨌거나 이제르트 백작가를 가장 확실하게 대표할 수 있는 건 나 아닌가?”
맞는 말이다.
문수르는 어디까지나 이제르트 백작가의 대리인 정도 밖에 없는다. 이제르트 백작가의 대표는 이제르트 백작이다.
더불어 필로스 왕을 만나는 자리 아닌가?
“문수르 경, 자네의 명성은 대단하지만 필로스 전하를 만나는 자리에 대리인을 보내는 것도 이상한 일 아닌가? 오히려 그 일로 필로스 전하가 꼬투리를 잡을 수도 있는 일.”
“위험합니다.”
“그렇다면 더더욱 내가 가야겠지. 적어도 내가 위험에 빠진다고 당장 영지가 위험해질 리는 없지 않나?”
문수르는 대답하지 못했다.
‘이걸 준비했구나.’
이제르트 백작, 그가 무엇을 준비했는지 이제 알 수 있었다.
계속되는 문수르의 요청에 그가 내놓은 대답은 문수르가 아닌 본인이 움직이는 것, 그것이었다.
그리고 그게 합리적인 판단이기도 했다.
대리인을 보냈다가는 오히려 욕을 먹는다. 만나는 사람 입장에서는 자신을 얕잡아 보는 느낌이 들 테니까. 하물며 상대라 필로스 왕이라면? 가뜩이나 이제르트 백작가를 곱지 않게 보는 그다.
결정적으로 문수르와 이제르트 백작, 둘 중 하나가 희생을 해야 한다면 이제르트 백작이 하는 게 맞다.
문수르는 어쩔 수 없었다.
‘괜히 말을 꺼냈나?’
약간 후회가 들었다.
‘아니.’
그러나 이내 마음을 고쳐 잡았다.
‘지금은 확실하게 배팅을 할 때다. 여기서 손해를 두려워해서 소극적으로 나서면 더 많은 걸 잃어.’
필로스 왕이 다짜고짜 이제르트 백작을 어찌하진 않을 것이다. 공식적인 만남이 이루어질 테니까.
더불어 이제르트 백작도 뛰어난 자다. 적어도 문수르가 원하는 것, 그 이상을 얻으면 얻었지 그 이하를 얻진 않을 것이다.
문수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럼 잘 부탁하네. 내가 이제부터 무엇을 해야 하는지 일단 그것부터 말해주면 좋겠군.”
“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