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2화
4.
문수르는 영지 곳곳을 돌아다니며 영지를 점검했다.
이제르트 백작가는 지금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호황을 누리고 있는 상황이었다. 테블스 산 개간으로 인해서 영토는 예전보다 곱절이나 늘었다. 반대로 테블스 산 개간을 통해 몬스터의 개체수가 꾸준히 줄어들면서, 몬스터의 위협이 넘치던 땅에서 이제는 가장 살기 좋은 영지로 바뀌게 된 것이다.
엘프와 드워프들 역시 점차 그 숫자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콩탄 왕국 곳곳에서 숨어살던 다른 부족들이 콩탄 왕국의 이야기를 들고 알음알음 찾아온 것이다.
또한 돈이 넘쳤고, 돈이 넘치니 자원이 넘쳤다. 문수르는 이러한 것들 중 대부분을 군수물자 생산에 투입했다.
‘전쟁에 대한 대비를 해야 한다.’
기가스 양산은 물론, 일반 병사들에 대한 무장의 질도 다른 영지의 병사들과는 차원이 다른 수준까지 끌어올렸다. 여기에 드워프와 엘프들로 구성된 부대까지 창설했다.
하지만 이 모든 것들이 진짜 제대로 된 결과물을 내기 위해서는 결국 시간이 필요했다.
‘젠장 1년만!’
딱 1년!
1년만 주어진다면 이제르트 백작가의 전력을 지금보다 2배 가까이 키울 수 있는 자신이 있었다.
지금도 이제르트 백작가는 엄청난 전투력을 보유하고 있다. 그런 이제르트 백작가의 전력이 2배가 된다면?
전세를 뒤집을 수 있는 절대적인 카드가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이제르트 백작가는 어디 가서 아쉬운 소리를 할 필요가 없어진다.
필로스 왕?
오히려 필로스 왕이 갑의 자리에서 을의 자리로 내려오게 될 것이다.
결국 문수르가 해야 하는 일은 그 무엇도 아닌 시간을 버는 일, 바로 그것이었다.
‘제국의 진격을 막아야 한다.’
문제는 지금 콩탄 왕국이 제 아무리 내부적으로 정치를 하든, 수작을 부리든 간에 페스로 제국의 움직임을 막을 수는 없다는 사실이었다. 페스로 제국을 막기 위해서라면 결국 페스로 제국으로 가야 한다.
“후우…….”
물론 간다고 해서 딱히 어떤 결과가 당장 나오는 건 아니다.
하지만 이제르트 백작령에 콕 박혀 있는 것보다는 페스로 제국으로 가는 게 나을 것이다. 적어도 작은 실마리 하나라도 발견은 할 수 있을 테니까. 그 실마리가 큰 복이 될 지 누가 안단 말인가?
‘큰 흉이 될 수도 있지.’
물론 반대로 정말 이제르트 백작가를 파멸의 구렁텅이로 넣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문수르는 재차 한숨을 내쉬었다.
‘카라카크.’
이 와중에 문수르를 계속해서 괴롭히는 존재는 그 무엇도 아닌 카라카크의 존재였다.
여전히 카라카크는 잡히지 않고 있다. 잡히기는커녕 위치조차 파악되지 못하고 있다.
‘백 년 넘게 숨어살았던 놈이다. 놈이 작정하고 숨었는데 그걸 찾을 수 있을 리가 없지.’
카라카크는 지뢰다.
지금 콩탄 왕국을 언제 어느 순간에 절망의 구렁텅이에 넣을 수 있는 지뢰!
그런 지뢰를 그냥 놔두는 것도 위험하다.
하물며 놈의 의도를 문수르는 아직까지도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카라카크는 대체 무엇을 원하는 것일까?
세상의 파멸?
제국의 몰락?
그게 아니면 마왕의 현신?
모르겠다.
도무지 놈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 수가 없다. 녀석은 단 한 번도 자신이 원하는 게 뭔지 말하지 않았으니까.
단지 놈은 계속해서 적을 만들 뿐이다.
콩탄 왕국을 적으로 만들고, 페스로 제국을 적으로 만들고…….
‘적.’
그 순간.
‘그래, 페스로 제국 입장에서 카라카크는 적이지.’
문수르의 눈빛이 번뜩였다.
‘시간을 끌 수 있는 기회가 아직은 남아있어.’
5.
페스로 제국의 군대가 콩탄 왕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접경지역으로 모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당장 전쟁이 터지진 않았다.
일단 전쟁이란 게 하고 싶다고 해서 말처럼 쉽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전쟁 명령이 떨어져도 병력을 점검하고, 군수품을 점검한 뒤에 계획을 세우고 작전을 수립해야 한다.
더군다나 지금 콩탄 왕국을 노리는 군대는 하나로 뭉쳐지기는커녕 3개의 파벌로 나뉜 상황이었다.
일황자 파벌과 이황자 파벌 그리고 삼황자 파벌까지!
그들은 서로 눈치를 보느라 쉽사리 움직이지 못했다. 심지어 서로의 행보를 방해하는 방해공작까지 있었다. 그런 방해공작의 대표적인 사례는 바로 시비였다.
“어디서 감히 두 눈을 부릅뜨고 이분을 쳐다보느냐! 이분은 유서 깊은 명문가, 하우르 백작가의 장남, 시비르온 하우르 님이시다!”
“아니, 어디서 몰락한 백작가 장남 따위를 가지고 허세를 부리시나? 여기 귀족 아닌 사람이 있긴 하나?”
“이놈이 감히 자작 주제에!”
이유도 없다.
그냥 다른 파벌에 속한 귀족이란 걸 아는 순간 힘있는 귀족들은 작위도 무시한 채 시비를 걸었다.
“지금 뭐라고 했어? 응? 나보고 자작 주제에? 그래 좋아. 그럼 어디 한 번 내 기사들 앞에서도 그런 소리를 해보시지. 내 기사들을 검으로 꺾는다면 내 얼마든지 백작가 장남을 백작대우 해주지. 하하하!”
“이, 이런…….”
“왜? 막 기분이 부들부들 떨리고 그래? 응? 그렇게 떨리면 그냥 한 대 쳐봐. 자, 자! 여기 얼굴 대줬다. 쳐보라니까?”
곳곳에서 파벌끼리 시비를 걸고 심할 경우에는 칼부림까지 일어나고는 했다.
우습게도 전쟁을 하기도 전에 자중지란으로 인해서 사상자가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이 문제는 수뇌부들에게도 골칫거리였다.
“공통의 적을 앞둔 상황에서 이렇게 같은 제국민들끼리 싸우는 것도 좀 그렇지만…….”
“여기서 물러나면 지고 들어가는 걸 증명하는 꼴이니.”
“어쩔 수 없이 용납하는 수밖에 없군.”
“하물며 자기가 모시는 주인을 위해서 목숨을 걸고 도발을 하고 싸운 자들을 군법으로 처벌하는 것도 좀 그러지 않은가?”
저절로 한숨이 나오는 상황.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유일하게 웃음을 잃지 않는 사내가 한 명 있었다.
‘잘 돌아가는군.’
노운.
그는 오히려 지금 이 상황이 너무나도 만족스러웠다.
‘그래 좀 더 싸워라. 기왕 싸우는 김에 나름 파벌을 대표하는 대표귀족들끼리 한 판 붙었으면 더 좋겠는데.’
노운은 이 싸움에 어떻게든 더 큰 불을 지르고 싶었다.
가능하다면 그냥 콩탄 왕국과 싸우기 전에 황자들끼리 서로 칼부림을 하기를 바라고 있었다.
이유?
그래야만 명분이 생기니까.
‘이번 기회에 확실하게 황자들의 무능력함을 전 대륙에 알릴 필요가 있지.’
노운, 그가 꿈꾸는 건 황제의 자리다.
사실 지금 이미 황제의 권력은 노운의 손에 있다. 카이탄 황제는 노운의 꼭두각시가 됐다. 노운이 원하는 일이 있으면 황제를 조종해 시키면 모든지 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재미가 없다.
노운이 원하는 건 제국 황가의 시대에 종말을 고하고 본인 스스로가 새로운 황조로 등극하는 것이었다.
그걸 위해서 가장 필요한 조건이 차기 황제의 자격을 가진 자들, 황자들의 몰락이다.
페스로 제국의 황자들에 대한 평가는 간단하다.
모두가 유능하며, 뛰어나다.
그리고 그 사실 때문에 이제까지 카이탄 황제가 확실한 후계자를 정하지 못했다. 차라리 한 놈이 확실하게 두각을 나타내면 굳이 카이탄 황제가 고민하지 않아도 알아서 서열 정리가 됐겠지만 모두가 비등비등하게 우수하니, 한 명을 고르는 게 마땅치 않은 것이다.
즉 대체자가 너무 많다.
한 명이 어떠한 실수로 실각을 하더라도 그 자리를 대신 채울 인간들이 너무 많다.
노운 입장에서는 짜증나는 일이다. 때문에 일단 황자들 중 일부를 처리해야 한다.
그래서 황제를 조종해 이번 일을 꾸몄다.
다른 황자들도 있는데 굳이 일황자부터 삼황자까지만 뽑은 건, 그 셋만 일단 처리하기 위해서였다.
더불어 이번 계획에서 노리는 바는 한 가지 더 있었다.
‘한석균 회장을 위해서라도 일단 이제르트 백작가를 위해서 내가 힘을 한 번 써줘야지.’
한석균 회장은 노크맨이 되는 조건으로 이제르트 백작가의 부흥을 요구했다.
노운은 그게 별로 탐탁지 않다. 이제르트 백작가가 어찌되든 솔직히 상관없다.
하지만 노크맨으로 남기 위해서는 그런 한석균 회장의 요구조건을 들어줄 수밖에!
이번 전쟁에서 노운의 수작으로 인해 제국군은 정말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치욕적인 대패를 할 것이다.
반대로 콩탄 왕국은 모두가 예상했던 패배를 뒤엎고 엄청난 대승을 거두겠지.
그 대승의 중심에 이제르트 백작가가 있을 것이다.
그럼 자연스럽게 이제르트 백작가의 콩탄 왕국 내 지위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을 것이다.
그럼 끝이다.
‘그 정도면 충분하지.’
그 정도면 충분히 이제르트 백작가가 부흥했다고 판단해도 부족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으로 한석균 회장과의 거래는 끝이다. 그 이후는 말 그대로 노운의 자유시간!
노운이 무엇을 하든 한석균 회장은 간섭하지 않는다. 더불어 노운이 무엇을 요구하든 한석균 회장은 그것을 들어줘야 할 것이다.
‘3년 안에 황위에 오르고.’
그 이후 계획도 확실하게 짜여있다.
‘제국을 내 것으로 확실하게 만든 뒤에.’
제국을 손에 넣는 순간!
‘전 대륙을 통일시켜 나의 세계로 만들어야지.’
노운은 세상 전부를 지배하는 정복자가 될 것이다. 그리고 모든 것을 바꿀 것이다.
‘이 차원에서 난 신이 되는 거다.’
그 상상만으로도 노운은 정말 기쁜 듯한 미소를 지었다.
6.
페스로 제국의 황도.
무수히 많은 권력자들이 모여있는 이곳은 언제나 치열한 정치적 전쟁터였다.
그러나 최근에 황도는 조용했다.
“세 황자와 그들을 따르던 귀족들이 전부 빠져나가니, 황도도 참 조용한 곳이었군.”
세 명의 황자들이 추종자들을 이끌고 나갔다. 그 세력이 이제까지 황도에 주둔하던 귀족들의 절반을 넘어 전체의 7할 정도였다.
하지만 반대로 말하면 아직 황도에는 정치적 발언권과 적지 않은 전력을 가지고 있는 3할의 귀족이 남아있다는 점이었다.
“조용한 게 아니라, 부글부글 끓기 직전인 거지.”
더불어 남게 된 귀족들은 지금 이루 말할 수 없는 분노로 가득 차오른 상황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다.
그들이 모시던 주인이 황제의 말 한 마디에 단숨에 후계자 경쟁에서 탈락했으니까.
황제가 고른 황자는 일황자부터 삼황자까지, 셋뿐이었다.
당연히 사황자 아래로 존재하는 모든 황자들은 순식간에 지붕 위로 올라간 닭 쫓던 개가 된 것이다.
그런 그들에게 줄을 댔던 귀족들은 이제 황태자가 결정되는 순간 그들의 자비만을 기다리는 애처로운 신세가 됐다.
하지만 이런 상황을 순수하게 받아들일 정도의 인물들이었다면 애초에 정치의 세계에 발을 들여 놓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들은 기회를 기다렸다.
반전의 기회!
단숨에 지금 상황을 뒤집고, 다시금 그들이 모시는 황자들이 권력투쟁에 끼어들 수 있는 기회!
그 기회는 우연찮게 등장했다.
소문.
카라카크, 그가 카이탄 황제의 목숨을 노리고 있다는 그 소문이 바로 기회의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