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7화
8.
왕명을 담은 공문이 제이머스 공작가 앞에 도착했다.
물론 서찰 한 장만 덜렁 온 건 당연히 아니었다.
“제이머스 공작은 왕명을 받들라.”
오십 명으로 이루어진 무리들, 왕명을 전달하기 위해 구성된 집단이었다. 단순한 집단이 아니었다. 그들은 말 그대로 왕과 같은 위엄을 가진 자들이었다. 그들을 대하는 건 왕을 대하는 것과 마찬가지인 상황이었다.
그런 그들을 제이머스 공작은 잡았다.
“감옥에 가두어라.”
그들을 잡아 영지의 감옥 안에 가두었다.
그건 말 그대로 왕을 감옥에 가두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필로스 왕의 얼굴에 먹칠이 아니라 똥칠을 하는 일이었으며, 필로스 왕의 모든 것을 부정하는 일이기도 했다.
그러나 오십 명 중 단 한 명도 그런 제이머스 공작의 부당한 행위에 반발하지 않았다.
그들은 이러다할 반항도 없이 제 발로 감옥으로 갔다.
그리고 소리쳤다.
“제이머스 공작, 이제 그대는 반역자요. 그대는 필로스 전하의 마지막 배려마저 외면하셨소. 이제 그대에게 남은 건 이루 말할 수 없는 파멸과 자멸, 그 두 가지 뿐이외다.”
사실이었다.
제이머스 공작이 필로스 왕이 보낸 신하들을 감옥에 넣었다는 정보가 필로스 왕의 귀에 들어가는 순간 콩탄 왕국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콩탄 왕국 곳곳에서 대기하고 있던 귀족들이 제이머스 공작령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쿠웅!
그 중심에는 당연히 기가스가 있었다.
그 육중한 거인병기들은 섬뜩한 무기로 무장한 채 빠른 속도로 진격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들 무리 중에는 이제르트 백작가도 있었다.
9.
‘기어코 터졌구나.’
문수르는 그 누구보다 빠르게 전쟁의 시작을 파악했다. 그리고 전쟁의 시작을 파악하는 순간부터, 제이머스 공작이 필로스 왕이 보낸 자들을 감옥에 보내는 순간부터 문수르는 움직였다.
이미 대기 중이었던 이제르트 백작가의 병력들과 함께 제이머스 공작령으로 향한 것이다.
사전에 이제르트 백작을 설득한 덕분이었다.
“백작님, 이미 백작님은 한 번 왕명을 거부하셨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이번 전쟁에서마저 뒷짐을 쥐고 계신다면 제이머스 공작 이후 타깃은 이제르트 백작님이 될 것입니다.”
“음…….”
“고민하실 문제가 아닙니다. 백작님이 말씀하셨던 것처럼, 결국 영지를 지키는 게 최선 아닙니까?”
“알겠네. 그럼 어느 정도의 병력이 필요한가?”
“어차피 테블스 산 역시 개간작업이 많이 끝난 상황입니다. 영지 전체병력의 5할을 이끌고 가겠습니다.”
“5할이나…….”
5할이라는 수치.
보통 영지의 경우라면 그냥 최소한의 경비 병력만을 남겨두고 대부분의 전력을 가지고 움직일 것이다. 그런 보통 귀족들에게 5할이란 수치는 대수롭지 않은 수치다.
그러나 이제르트 백작가는 아니다. 이제르트 백작가의 병력은 숨겨진 것까지 합치면 어마어마하다. 특히 기가스 전력은 압도적이다. 제국에서 실세라 불리는 영주와 비등하다 못해 뛰어넘을 수도 있을 정도다.
그 전력의 5할이라는 것!
아마 그 전력만으로도 제이머스 공작가를 무너뜨릴 수 있을 것이다.
“너무 많지 않나?”
“이번 전쟁은 최대한 빨리 끝나야 합니다. 내전이 길어지면 피해를 보는 건 결국 왕국이고, 기뻐하는 건 그 누구도 아닌 페스로 제국이 될 겁니다. 차라리 이번 기회에 제이머스 공작을 처리하고 왕국을 하나로 모으는 것이 페스로 제국을 상대하는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무엇보다…….”
무엇보다?
“제이머스 공작은 결국 카라카크와 손을 잡았습니다.”
카라카크!
더 이상의 설명은 무의미하다. 그 말을 듣는 순간, 그 이름을 듣는 순간 이제르트 백작의 표정에도 굳은 결의가 가득 차올랐다.
그래, 카라카크!
“알겠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자신의 딸아이를 납치한 흑마법사!
그 사악한 놈을 죽일 수 있다면 무엇이 아까울까?
“원하는 만큼의 병력을 가져가게. 영지는 내가 지키도록 하지.”
“감사합니다.”
그렇게 해서 모인 이제르트 백작군은 빠른 속도로 제이머스 공작령을 향해 이동했다.
워낙 기동력이 좋은 이제르트 백작군이었기에 제이머스 공작령과 거리가 제법 있었지만 가장 먼저 도착할 수 있었다.
그런 이제르트 백작군을 기다리고 있던 건 다름 아니라 제이머스 공작군이었다.
10.
문수르는 길게 이야기하지 않았다.
‘어차피 제이머스 공작은 항복을 하지 않는다.’
보통 경우라면 항복을 요구하거나 혹은 귀족 간의 예법에 맞추어 예의를 갖추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제이머스 공작이 항복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았을 뿐더러, 그는 지금 반역죄로 지명 당한 상황이다. 반역죄 앞에서는 그 어떤 예의도 없다.
문수르는 수하들에게 말했다.
“공격.”
말이 끝나기 무섭게 훈련된 이제르트 백작군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제르트 백작군의 기가스들이 먼저 움직였다. 그들은 준비해온 해머와 방패를 들고 성문 근처로 천천히 전진했다.
“젠장, 대체 어디야?”
성벽 위에 올라온 제이머스 공작가의 병사들은 이제르트 백작가의 군대를 보며 당황했다.
“기가스가 오는데?”
“해자가 있잖아. 건너올 수 없어.”
“그래도 기가스잖아?”
그때였다.
“저 깃발!”
병사 한 명이 소리쳤다.
“이제르트 백작가다! 이제르트 백작가야!”
그제야 병사들은 자신들의 눈앞에 있는 군대가 그 어디도 아닌 이제르트 백작가의 군대임을 알 수 있었다.
동시에 그것은 공포의 시작이기도 했다.
“이, 이제르트 백작가?”
“그럼 저기 거대한 기가스는…….”
“영웅 문수르가 왔단 말이야?”
영웅 문수르!
그 명성은 단순히 이제르트 백작가에서 맴돌지 않은 채 콩탄 왕국 전체를 흔들고 있었다.
심지어 페스로 제국마저도 콩탄 왕국에서 가장 조심해야 할 요주의 인물로 문수르를 지목하고 있을 정도다.
콩탄 왕국의 왕국민들에게는 그 무엇보다 든든한 아군이며, 영웅이다.
그러나 그 영웅이 적군이 되어 등장했을 때 주는 공포감은 엄청난 것이었다.
“젠장!”
“우리보고 어떻게 하라는 거야?”
그런 병사들의 동요.
그건 사실 이제르트 백작군 입장에서는 예상외의 일이었다. 더불어 이제르트 백작군과 문수르가 이 사실을 파악한 건 1차 공격이 시작된 이후부터였다.
해머를 든 기가스들이 해자 근처까지 이동했다.
그리고 대기했다.
방패를 앞세운 채 혹시 모를 공격을 기다리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문수르가 GPS시스템을 통해 성벽너머의 상황을 파악하고 있었다.
보통 이런 경우라면 기가스에게 타격을 주기 위해서 성벽 뒤에 기가스가 대기하기 마련이다.
‘기가스는 있다.’
성벽 뒤에는 현재 기가스가 대기 중이었다.
하지만 이상했다.
‘왜 이렇게 움직임이 없어?’
기가스들은 그 어떤 움직임도 없었다. 해자 근처, 성벽 바로 지척까지 이제르트 백작군의 기가스가 도착했음에도 말이다.
더 놀라운 건 병사들의 움직임이었다.
성벽 위의 병사들이 우왕지왕 갈피를 잡지 못한 채 당황하고 있었다.
‘말도 안 돼. 제이머스 공작군이 왜 이렇게 군기가 빠졌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제이머스 공작, 그가 누구인가?
문수르가 등장하기 이전부터 콩탄 왕국 최고의 기사이자, 최고의 무인으로 칭송 받던 자다.
더불어 막강한 군대를 운영하던 영주이기도 하다. 그의 휘하에 있는 병사들은 그 어느 영주의 군대보다 군기가 잡혀있었고, 실력 역시 보통 영지의 병사들보다 월등했다.
그런 그들이 이 중요한 전쟁을 앞두고 당황한다고?
‘기사!’
이유는 하나다.
‘기사가 없다!’
병사들을 지휘하고, 통솔해야 하는 기사가 없는 것이다.
그 순간 문수르가 다시금 기가스를 바라봤다.
“로이드, 기가스 안에 파일럿이 타고 있나?”
- 파악 중입니다.
“기가스가 언제부터 성벽 근처에 배치됐지?”
- 12시간 전입니다.
“우리가 도착한 게 3시간 전…… 그리고 12시간 전이라면 시간상으로는 늦은 밤이었지?”
- 예.
“밤중에 GPS시스템이 표적을 놓칠 확률이 얼마나 되지?”
- 상황에 따라서 다르지만 어제의 경우에는 구름이 많이 끼고, 날씨가 좋지 못했던 탓에 표적을 놓칠 확률이 44퍼센트 정도 나옵니다.
도망간 것이다.
기사들이 병사들에게 간단한 명령만 내린 후에 잽싸게 몸을 빼 도망친 것이다.
기가스들도 버려둔 채!
‘빌어먹을.’
당연한 말이지만 기사들이 도망을 쳤는데, 제이머스 공작이 성 안에 있을 리 만무하다.
‘날씨는 상관없어. 어차피 제이머스 공작이 도주를 주도했다면 비밀 통로를 통해서 도망쳤을 테니까.’
제이머스 공작.
그가 선택한 건 전면전이 아니었다.
일단 도주하는 것.
‘타국으로 망명이라도 하려고?’
이 상황에서 떠오르는 경우의 수는 다름 아니라 제이머스 공작의 망명시도다.
사실 어떤 의미에서 가장 합리적인 선택일수도 있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 목숨을 구할 수 있는 확률이 가장 높은 방법이기도 하니까.
하지만 그럴 바에는 차라리 필로스 왕이 마지막 기회를 줬을 때 그 기회를 받아들이는 게 낫지 않았을까? 그렇게 하면 적어도 공작이란 지위는 유지할 수 있었을 것이며, 자신의 대에서는 불가능하겠지만 훗날을 기약할 수 있었을 터.
그런데 이제 와서 망명을 선택한다?
말이 안 된다.
‘아니야. 망명이 아니야.’
망명이 아니라면 대체 무엇을 위해서?
‘게릴라전?’
주요전력은 보조한 채로 콩탄 왕국 전역을 누비며 게릴라전을 준비했을 가능성.
더군다나 여기에 신출귀몰한 카라카크의 존재를 염두에 둔다면…….
‘젠장, 게릴라전을 택했군.’
확실하다.
제이머스 공작이 꺼내든 카드는 게릴라전이었다.
생각해보면 당연한일일지도 모른다. 제 아무리 제이머스 공작이 뛰어난 실력을 가진 무인이라고 해도 콩탄 왕국 전체와 싸워서는 이길 수 없을 것이다. 전면전을 하는 게 멍청한 짓이다. 그 역시 자살행위나 마찬가지일 테니까.
‘아니, 가만.’
그 순간 떠오르는 한 가지 상황.
게릴라전 역시 리스크가 있다. 무엇보다 기가스가 대세인 요즘 같은 시대에서 신출귀몰한 게릴라전은 불가능하다. 기가스는 이동시간에도 제약이 있을 뿐더러, 은밀함과 엄폐가 핵심인 게릴라전과는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다.
게릴라전을 시도한다고 해도 한두 번 정도.
그 이후에는 꼬리가 밟혀서 추격을 당하고, 종국엔 패배할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제이머스 공작은 자신에게 주어진 그 한두 번의 기회를 어떻게 이용할까?
답은 나와 있다.
“왕도가 위험해!”
왕도다.
필로스 왕을 죽이는 것!
어차피 반역을 꿈꾼다면 왕을 죽이고 왕위를 찬탈하는 게 유일한 해답일 것이다.
가장 확실한 해답!
물론 그 후에는 페스로 제국이 흑마법사와 손을 잡고 왕위를 찬탈한 제이머스 공작을 처단하기 위해 군대를 보내겠지만 그건 말 그대로 후의 이야기다.
지금 당장 제이머스 공작에게 닥친 최우선 과제는 필로스 왕과의 전쟁에서 이기는 것, 그뿐이다.
“빌어먹을!”
결국 실수한 것이다.
GPS시스템을 너무 믿은 문수르, 그가 최악의 선택을 내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