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6화
5.
문수르의 하루는 별 볼일 없었다. 그는 일어나자마자 수련을 했고 이후에는 영지의 일을 처리했다. 충실한 나날들이었지만 특별할 건 하나도 없었다.
단지 그런 문수르를 감시하는 눈이 있다는 것만 평소와는 조금 다른 점이였다.
그 감시자의 눈이란 다름 아니라 영지의 기사들 그리고 영지의 하인, 하녀들이었다.
물론 그들이 갑자기 어떤 불순한 의도를 품고 문수르를 감시하기 시작한 건 당연히 아니다.
이제르트 백작의 명령이었다.
“문수르 경이 무슨 일을 한다면 내게 보고 해라.”
이제르트 백작은 이미 문수르에게 경거망동하지 말라고 부탁을 했다. 하지만 문수르가 혹시 이제르트 백작의 부탁을 무시하고 행동에 나설지도 몰랐으니까.
문수르 역시 자신을 감시하는 눈을 잘 알고 있었다.
‘어떻게 해야 할까?’
그래서 걱정이 많았다.
‘지금 이대로 앉아서 당할 수는 없어.’
필시 제이머스 공작가에서 음모가 벌어지고 있다. 만약 정말 제이머스 공작이 자신의 누명을 벗고 싶었다면 다른 행동을 했을 것이다.
‘만약 제이머스 공작이 정말 결백을 주장하고자 했다면 진즉에 백의종군을 했겠지.’
자신이 가진 많은 권력과 지위를 포기하는 것으로 필로스 왕에게 결백을 증명했을 것이다.
그는 그러지 않았다.
아마도 자신이 이룩한 것을 이렇게 쉽게 포기하고 싶지 않았겠지. 권력을 스스로 내려놓는 것도 혹은 누군가에게 빼앗기는 것도 제이머스 공작은 원치 않았을 것이다.
결국 제이머스 공작은 자신을 향한 필로스 왕의 칼에 자신 역시 칼을 겨누고자 할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 다음이다.
필로스 왕이 유리하다.
막말로 필로스 왕이 작정하고 제국의 힘을 빌릴 수도 있다.
그게 아니더라도 만약 필로스 왕과 제이머스 공작 간의 대립, 그로 인한 전쟁, 내전이 일어난다면 아마도 그 역시 필로스 왕이 큰 승리를 거둘 것이다.
이유?
명분 때문이다.
‘흑마법사 카라카크 때문에 일어난 전쟁이다.’
필로스 왕이 제이머스 공작을 공격하려는 이유가 무엇인가?
제이머스 공작이 카라카크와 손을 잡았다는 이유 때문이다.
이 명분이 있는 이상 제이머스 공작의 편에 서고자 하려는 귀족은 많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계산기를 두드리는 이들이 더 많을 것이다.
제이머스 공작이 무너지면 자연스럽게 제이머스 공작 파벌의 귀족들도 몰락할 테고, 새로운 자리가 생겨날 것이다. 그 자리를 노리고 열심히 머리를 굴리는 귀족들이 대부분일 것이다.
이 모든 사실.
제이머스 공작이 모를 리 만무하다.
그렇다면 제이머스 공작은 과연 이런 상황에서 무슨 선택을 내릴까?
간단하다.
‘제이머스 공작이 카라카크와 손을 잡을 가능성은 얼마든지 잇다. 아니, 매우 높다.’
어차피 카라카크와 손을 잡았다고 의심을 받는 상황에서 차라리 카라카크와 손을 잡는 것이다.
카라카크는 어마어마한 흑마법사다. 그런 그가 제이머스 공작에게 힘을 빌려준다면 적어도 제국의 개입 없이는 내전이 쉽게 끝나지 않을 것이다. 필로스 왕이 질 수도 있다.
더군다나 여기서 중요한 부분이 있다.
필로스 왕이 요청한다고 해도 과연 페스로 제국이 정말로 힘을 빌려줄까?
이제가지는 필로스 왕과 페스로 제국은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하지만 슈페언 백작의 실종사건 이후 페스로 제국과 콩탄 왕국은 대립각을 세우고 있다.
더군다나 필로스 왕은 페스로 제국과 잡고 있던 손을 이미 한 번 놓아버린 상황이다.
이런 상황에서 페스로 제국은 오히려 두고볼 것이다.
동맹국이 아닌 적국이 되어버린 콩탄 왕국의 내전을, 그로 인한 몰락을 웃으면서 바라볼 것이다.
그게 문제라는 거다.
문수르가 가장 염려하는 부분은 바로 그 부분, 모든 것이 끝난 후에 있을 페스로 제국의 공격이었다.
지금 당장 페스로 제국과 붙어도 감히 승리를 점치는 것조차가 불가능한 상황에서 내전으로 약화된 콩탄 왕국이 페스로 제국군을 상대로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반 년을 버티면 아마 역사에 남을 만한 선전을 한 셈이 될 것이다.
막말로 그냥 전쟁 전에 항복 선언을 하고 속국이 되는 게 차라리 더 나은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뭐가 됐든 이제르트 백작가를 반석에 올려놓는 건 머나먼 일이 된다.
‘제이머스 공작을 처치해야 돼.’
이런 상황에서 문수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전쟁이 일어나기 전에 제이머스 공작을 처리하거나 그게 아니면 카라카크를 처리하는 것이다. 그래야 그나마 미래를 기약할 수 있다.
그리고 그걸 위해서 문수르가 움직여야 하는 것이다.
콩탄 왕국 내에서는 오직 문수르만이 제이머스 공작을 상대할 수 있으니까.
‘그래.’
문수르가 재차 다짐했다.
‘나만이 할 수 있다.’
6.
필로스 왕은 고민했다.
‘이제르트 백작가는 움직이지 않았군.’
제이머스 공작과 전면전을 하기 전에 혹시나 하는 심정으로 이제르트 백작가에 서찰을 보냈다. 목적은 문수르로 하여금 제이머스 공작을 견제하거나 혹은 사전에 처리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르트 백작가는 움직이지 않았다.
‘이해는 되는군.’
필로스 왕은 그런 이제르트 백작가의 움직임을 이해했다. 왕의 부탁을 거절하는 게 얼마나 큰 리스크를 짊어져야하는지 모를 리 없겠지만 반대로 그 리스크를 감수하고서라도 이제르트 백작가는 어떻게든 문수르란 인재를 지키고자 한 것이다. 그리고 문수르는 그럴 만한 가치도 있다.
‘용서는 안 돼.’
하지만 이해된다고 해서 봐줄 수는 없는 노릇.
더군다나 필로스 왕은 왕이다. 그리고 콩탄 왕국에 있는 모든 것은 그의 것이다.
그런 그의 명령을 거부했다.
‘이번 전쟁이 끝나면 이제르트 백작가에게 큰 벌이 필요하겠어.’
더군다나 이제르트 백작가…… 솔직히 예전부터 썩 마음에 들진 않았다. 이제르트 백작 역시 자신이 왕위에 오르던 걸 끝까지 반대하던 인물 아니었던가?
다시 벌이 필요할 때가 온 것이다.
‘그래, 이번 일이 끝나면 불스 후작의 공에 따라서 그에게 공작 위를 하사하고, 그로 하여금 이제르트 백작가를 처리하라 명하면 되겠지.’
이제르트 백작가에 대한 생각은 거기까지였다.
일 하나하나에 미련을 가질 수 있을 만큼 왕이라는 자리는 여유가 넘치는 자리가 아니다.
‘제국에는 도움을 요청하지 않는다.’
일단 필로스 왕은 페스로 제국의 힘을 빌리지 않기로 확실하게 각오를 다짐했다.
‘공문을 보낸다.’
더불어 조만간 제이머스 공작으로 하여금 왕도에 올라오라고 하는 정식 공문을 보낼 것이다.
만약 제이머스 공작이 정말 왕도로 아무런 말없이 올라온다면 그 이후 제이머스 공작을 감금하고, 제이머스 공작가의 모든 것을 샅샅이 털어버릴 것이다. 제이머스 공작가의 모든 권력이 반의 반으로 쪼개질 것이다.
‘공작에게 주는 내 마지막 기회다.’
하지만 만약 제이머스 공작이 그걸 감수하고 왕도에 올라와서 벌주를 마셔준다면 제이머스 공작가는 명백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필로스 왕 입장에서는 이것이 최선의 시나리오.
그러나 제이머스 공작이 왕명을 거절한다면, 그때부터는 길게 볼 것 없다.
‘선공은 내가 취한다.’
왕군이 먼저 선공을 취할 것이다.
이미 이야기는 끝났다. 비밀리에 필로스 왕의 명령을 받고 귀족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왕명을 거절하는 순간, 그들이 곧바로 제이머스 공작가를 포위하듯 사방에서 전진할 것이다.
전력 차는 확실하다.
그 이후부터 제이머스 공작을 비롯해 그를 돕는 모든 세력들은 반역죄로 처리할 것이다.
냉혹한 게 아니다.
왕위를 지키기 위해서는 당연히 해야 하는 일, 왕이 왕으로 남기 위한 당연한 자질이다.
‘나중 문제는 나중을 기약해야겠군.’
7.
페스로 제국에 두 가지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하나는 콩탄 왕국의 내전 가능성에 대한 소문이었다.
“제이머스 공작과 필로스 왕이 싸운다니, 제이머스 공작이 흑마법사와 손을 잡았다는 게 사실인가보군.”
“뭐, 제국 입장에서는 콩탄 왕국이 내전으로 약해져서 나쁠 건 하나도 없지.”
“콩탄 왕국이 내전으로 약해진다면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콩탄 왕국을 무너뜨릴 수 있겠군.”
이 소문에 대해서 페스로 제국의 귀족 대부분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딱히 염려할 게 없는…… 오히려 제국 입장에서는 쌍수를 들고 환영할 일이다.
문제는 두 번째 소문이었다.
“폐하께서 드디어 황태자를 점찍었다고 하더군.”
“늦은 감이 없진 않았지.”
“자칫 잘못하면 제국에도 피바람이 불지 모르겠어.”
이 두 번째 소문 앞에서 제국의 귀족들은 몸을 부르르, 떨 수밖에 없었다.
드디어 올 게 온 것이다.
하늘 위에 여러 개의 태양은 감히 존재할 수 없다. 태양인 하나만 있어야 태양인 것이다.
이제 그 태양을 가릴 때가 왔다.
“대체 누가?”
“역시 일황자가 정통성은 확실하지.”
“정통성만으로 황태자 위의 주인을 가렸으면 애초에 이런 난리가 나오지도 않았겠지.”
“예상을 뚫고 삼황자가?”
“이황자도 슈페언 백작이 사라지긴 했지만 여전히 반전을 노릴 수는 있지.”
“누가 되든 결국 권력을 쥐지 못한 채는 눈물을 머금거나 피를 흘리게 되겠군.”
“어쩌면 이게 적기일지도 모르지. 콩탄 왕국도 내전으로 시끄러운 상황에서 빠르게 황태자를 정하고 제국을 하나로 모은다면 과연 누가 제국을 향해 어금니를 드러낼 수 있을까?”
그 소문들에 가장 큰 충격을 받은 건 모든 권력가들이 모여있는 황도였다.
카이탄 황제가 여전히 두문불출하는 가운데, 귀족들은 애만 태우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 그들을 바라보는 한 사내의 시선에는 묘한 승리감이 깃들어 있었다.
‘디데이가 얼마 안 남았군.’
그의 이름은 노운.
‘콩탄 왕국에서 전쟁이 일어나는 순간, 나도 일을 벌이면 딱 적당하겠어.’
그는 지금 제국에서 일어나는 소란을 생각하자 저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그럴 수밖에 없다.
지금 일어나는 모든 일은 그 누구도 아닌 노운, 그가 기획하고, 주도해서 나온 결과물들이었으니까.
지금 제국이라는 땅이, 대륙 최고의 세력이 한 사내에 의해서 농락 당하고 있다는 의미다.
‘끝내주는군.’
이 얼마나 멋진 일인가?
‘그래, 이거지. 난 이런 걸 원했던 거야.’
노운은 미칠 지경이었다. 모든 일이 자신의 계획대로 흘러갈 때마다 느껴지는 카타르시스에 미칠 지경이었다.
더 흥분되는 건 이게 시작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런 노운의 타오르는 감정에 물을 뿌리는 존재가 있었다.
- 마스터, 너무 막 나가시는 것 같습니다.
노운을 도와주고 동시에 노운을 감시하는 인공지능 롬.
현재 롬은 기존에 한석균 회장에게 보고했던 계획과는 다른 노운의 행보에 경고했다.
“무슨 소리야?”
- 회장님에게 말씀드린 계획과는 다르게 움직이고 계십니다.
“그 정도 융통성은 당연한 거지. 무엇보다 내가 이제르트 백작가를 위협하는 것도 아니잖아?”
- 이번 일은 회장님에게 보고될 겁니다.
“마음대로. 마음대로 해. 어차피 칼자루를 쥔 건 내 쪽이지. 그 문수르인가, 뭔가 하는 놈은 절대 한 회장이 원하는 결과를 내놓지 못하니까. 하지만 난 한석균 회장이 원한다면 이제르트 백작가를 왕으로도 만들 수 있지!”
롬의 경고에도 노운은 조금의 물러섬도 없었다.
이 점이었다.
문수르는 한석균 회장 입장에서 조금은 무능해보일 수 있는 노크맨이었지만 적어도 한석균 회장과의 약속을 최대한 지키려고 하려는 의지를 가지고 노력을 하는 자였다.
그러나 노운은 아니다.
그에게 지금 상황은 게임이고, 놀이이다. 그는 한석균 회장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해서 노크맨의 힘을 쓰고 있다.
- 마스터.
“너무 시끄럽게 굴지 마. 롬, 넌 내 명령만 수행하면 돼.”
계속되는 롬의 경고에 오히려 노운이 역으로 경고를 했다.
결국 롬은 입을 다물었다.
노운은 미소를 지었다.
‘황제는 이미 내 꼭두각시가 된 상황. 디데이가 오면 제국은 이제 나의 것이 되겠지. 이제르트 백작가를 반석에 올리는 것? 내가 제국의 주인이 된다면 그딴 건 하루아침에도 가능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