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5화
<78화. 거짓.>
1.
“로이드.”
- 현재 감시중 입니다.
“이제는 내가 무슨 말을 하지 않아도 내 생각을 읽을 수 있게 된 거냐?”
- 그 정도까지는 아닙니다. 단지 지금 상황에서 주인님이 궁금해하시는 정보는 하나 밖에 없을 뿐입니다.
“그렇지.”
문수르의 입에서 나오는 짧은 한숨.
“특이점은?”
- 병력 이동이 보였습니다.
“얼마나?”
- 긴급하게 알려드리지 않아도 될 정도로 적은 숫자였습니다. 병력 이동이라기보다는 사람을 보내는 것 같습니다.
“어디로 보내는지 대략적으로 파악해. 최소한 일이 터지기 전까지 세력지도라도 제대로 구성해야 하니까.”
전쟁의 냄새가 난다.
“바람 잘 날이 없군.”
다시 전쟁이다. 빅토리안 공작의 반역이 있은 이후 페스로 제국과의 교전, 이후 다시 제이머스 공작의 반란이 있으려고 한다.
짧은 시간 내에 너무나도 많은 전쟁이 터지고 있다.
‘좋은 징조일까?’
흔히들 말한다.
전쟁 뒤에 기회가 온다고. 특히 큰 전쟁일수록 그 후에 생기는 기회도 더 크고, 많아진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전쟁이 났다고 좋아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이번 전쟁으로 이제르트 백작가가 득을 본다고 해도 무수히 많은 희생 역시 존재할 것이다.
‘좋은 징조라고 보자.’
문수르는 스스로를 잡았다.
어차피 각오는 다졌다. 작은 것을 위해서 큰 것을 포기하는 멍청한 선택은 더 이상 하지 않을 생각이다.
문수르는 두 눈을 감았다.
2.
페스로 제국.
최근 콩탄 왕국과의 충돌은 페스로 제국의 모든 귀족들을 안달나게 만들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드디어 전쟁이군.”
“그동안 너무 조용했었지.”
“우리 제국은 역시 전쟁을 해야 돼. 이제까지 제국이 가진 힘에 비해 너무 순했던 것 아닌가?”
페스로 제국.
그들이 이룩한 모든 문명과 부와 권력은 전쟁을 통한 것들이었다. 페스로 제국에게 전쟁은 두렵고, 무시무시한 것이 아니다. 부와 권력 그리고 명예마저 손에 쥘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수단이었다.
그러나 현 황제의 정책으로 인해서 전쟁보다는 친교를 통해 이익을 얻을 수밖에 없었으니, 페스로 제국의 귀족들이 몸이 달아오르는 건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더군다나 왠지 흐지부지 끝날 것 같았던 콩탄 왕국과의 협상이 아주 개판이 됐다.
전쟁은 이미 기정사실화 된 상황이다.
페스로 제국의 모든 귀족들이 앞 다투어 병력을 모으고 전장으로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동시에 모든 귀족들이 한 곳을 집중했다.
황도!
그렇다.
“황제 폐하께서는 언제 답을 주신단 말인가?”
황제의 입!
카이탄 황제의 입을 주목하고 있었다.
3.
전운이 감돌기 시작할수록 카이탄 황제의 모습을 보는 게 어려워지기 시작했다. 카이탄 화에의 측근들조차 카이탄 황제와의 만남을 요청해도 거절당하기 일수였다.
심지어 아히만트 백작, 그마저도 황제와의 대면을 거절 당했다.
이쯤 되자 귀족들은 몸이 달아오르기보다는 오히려 반대로 등골이 싸늘해질 수밖에 없었다.
‘혹시 폐하의 신상에 문제라도?’
‘정정하셨지만 사람 일은 모르는 법이지.’
카이탄 황제의 몸에 문제가 생겼을 경우. 정말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그건 기겁할 만한 일이다.
콩탄 왕국와의 전쟁이 중요한 게 아니다.
대격변이 일어날 것이다.
페스로 제국의 권력지도를 새롭게 쓰게 되는 어마어마한 대격변이 말이다.
타국과의 전쟁은 좋다.
그러나 페스로 제국의 그 어떤 귀족도 자국 내에서의 전쟁, 내전을 바라지는 않는다. 같은 전쟁이라도 의미가 완전하게 다르니까.
어쨌거나 카이탄 황제가 두문불출하는 상황에서 그와 접촉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 있었다.
노운 경.
이미 페스로 제국의 실세들 사이에서는 카이탄 황제의 총애를 받는 황제의 최측근으로 인정받은 자.
많은 것이 비밀이 감추어져 있지만 반대로 카이탄 황제를 설득하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만나봐야 하는 자.
어떤 의미에서 지금 제국의 실세 중의 실세가 된 자.
당연한 말이지만 카이탄 황제가 보이지 않을수록 노운 경에 대한 관심은 더 커질 수밖에 없었다.
아히만트 백작도 마찬가지였다.
“노운 경, 갑작스레 약속을 잡은 내 무례를 용서해주시오.”
“아닙니다. 상황이 상황 아닙니까? 제 능력이 보잘 것 없다고 해도 지금 상황이 중요하다는 것쯤은 알 수 있습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보겠소. 지금 폐하의…….”
“정정하십니다.”
정정!
“후우!”
그 말에 아히만트 백작은 숨부터 돌렸다. 그는 다행이군, 다행이야, 라는 말을 작게 읊조렸다.
“사실…….”
그런 아히만트 백작에게 노운 경이 한 마디 더 건넸다.
“이건 폐하의 충신임과 동시에 아직 그 어떤 황자분들과 관계를 맺지 않은 아히만트 백작님에게만 특별히 드리는 말씀입니다.”
그 말에 아히만트 백작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특별한 말?
그렇다는 건 지금까지 그 누구도 모르는 정보를 준다는 의미다.
뭐든 좋다.
사소한 것이라도, 아히만트 백작은 받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지금 폐하께서는 이번 콩탄 왕국과의 관계를 놓고 차기 황위의 주인을 가리고 싶어하십니다.”
“황태자!”
“그렇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우리 제국의 가장 큰 문제점은 역시 그것 아니겠습니까?”
“그렇긴 하지. 아무렴. 폐하께서 더 오랫동안 황위를 지키시는 것이 가장 기쁜 일이지만 황태자 위가 너무 오랫동안 공석이었던 감이 없진 않았지.”
모든 국가가 마찬가지겠지만 제 아무리 지도가 훌륭해도 그 후계자가 확실치 않으면 그 국가에 소속된 모든 이들은 알게 모르게 불안감을 느끼기 마련이다.
페스로 제국은 평화롭다. 더불어 귀족들이야 전쟁이 없으니 불만이지만 평민들에게 카이탄 황제는 선군이다. 전쟁 대신 풍요와 평화를 준 어진 지도자다.
그렇기에 오히려 평민들은 불안감을 느끼고 있었다.
카이탄 황제가 평생 살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더군다나 카이탄 황제의 나이가 적은 편은 절대 아니다.
그런데 황태자 자리는 여전히 공석이다.
더불어 그 황태자 자리를 놓고 다수의 황자들과 심지어 황녀들까지 후계자 경쟁 중이다.
만약 황태자 위가 여전히 공석인 상황에서 카이탄 황제의 몸에 문제라도 생기면 페스로 제국은 그 순간 사분오열, 정말 상상하기도 싫은 끔찍한 내전을 치르게 되는 것이다.
아히만트 백작 역시 이 부분 때문에 고민이었다.
그런데 황제가 마음을 굳힌 모양이다.
“그래, 때가 왔지. 그래서 폐하께서는 누구를 점 찍으셨소”
“그 부분은 저도 모릅니다. 하지만 마음 속으로 정하신 분은 있으신 모양입니다.”
“노운 경의 생각은 어떻소?”
“부족한 제가 어떻게 감히…….”
“제국 그 누구도 노운 경을 보잘 것 없다고 생각하지 않소. 오히려 노운 경이야말로 차기 제국을 이끌 제국의 기둥 아니오?”
“그 정도는 아닙니다.”
“아니오. 나는 적어도 노운 경이야말로 제국을 이끌어갈 인재 중의 인재라 생각하오.”
“말씀만으로도 감사합니다.”
아히만트 백작의 진심 어린 칭찬. 그 칭찬에 노운 경이 잠깐 고민하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이황자 님을 염두에 두신 것 같습니다.”
“아아…….”
케롤레인 이황자.
슈페언 백작이 모시던 자다.
그리고 그 슈페언 백작을 몰래 처리한 이가 다름 아니라 아히만트 백작, 바로 그다.
“케롤레인 이황자는 좋은 분이시지.”
“단순히 그 부분 때문은 아닐 겁니다. 성품적으로는 삼황자님이 폐하와 더 가깝지 않습니까?”
“그렇긴 하지.”
“폐하께서 이황자를 차기 황태자로 염두에 두신 건…… 아, 물론 제 추측일 뿐입니다.”
“계속 말씀하시오.”
“어차피 지금 황자님들은 대부분 능력이 출중합니다. 누가 차기 황위에 오른다고 해도 솔직히 큰 문제는 없지요. 문제가 되는 건 황자님들이 아니라 황자님들을 중심으로 펼쳐진 귀족들일 겁니다.”
아히만트 백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만약 제국에 어설픈 황자들만 가득했다면 황태자 위는 진즉에 주인이 정해졌을 것이다.
반대다.
너무 출중한 자들이 많으니까 과연 누구를 골라야 할지 그걸 결정하지 못했던 것이다.
여하튼 누가 황위에 오르든 황제가 되기에는 부족함이 없다.
그렇다면 황자, 자체를 보고 황태자를 정한다는 건 무의미하다.
중요한 건 그 외적인 문제다.
“현재 이황자님은 슈페언 백작님의 죽음 이후로 주변에 세가 크게 약해진 상황입니다.”
아히만트 백작의 표정이 굳어졌다. 슈페언 백작을 처리한 건 그 누구도 아닌 그였으니까.
“때문에 만약 이황자님이 황위에 오른다면 역설적으로 이황자님은 이러다할 간섭 없이 권력을 휘두를 수 있게 됩니다.”
“하지마 그럼 다른 귀족들이…….”
“그 역시 장점입니다. 다른 황자분들이 황위에 오르면 적대 세력이었던 귀족들에 대한 서슬 퍼런 칼질이 시작될 겁니다. 하지만 이황자님은 세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적당한 타협점을 찾을 겁니다. 그것이야 말로 카이탄 황제 폐하가 원하는 바 아니겠습니까?”
확실하다.
이렇게 말을 들으니, 아히만트 백작은 도저히 케롤레인 이황자 외의 인물을 황태자로 생각할 수가 없다.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제 개인적인 의견일 뿐입니다.”
“고맙소. 노운 경의 그 지식이 정말 큰 도움이 됐소.”
아히만트 백작은 만족했다.
그런 아히만트 백작의 만족스런 미소를 보는 노운 경의 입가에도 미소가 그어졌다.
묘한 미소.
그리고 섬뜩한 미소였다.
4.
“후우, 이제야 이야기가 진행되겠네.”
노운 경.
그는 제 방에 들어오자마자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롬.”
그런 그가 누군가를 불렀을 때.
- 예, 마스터.
“콩탄 왕국 돌아가는 꼴이 어때?”
- 아직 이러다할 움직임은 없습니다만 조만간 내전이 일어날 것 같긴 합니다.
“그래? 일어날 거면 쫌 빨리 일어났으면 좋겠네. 그리고 카라카크인가, 그 뭐시기 흑마법사 놈은? 어때 흔적이 보여?”
- 탐지기로 위치를 쫓는 중입니다. 일단 한 번 잡으면 그 이후에는 어렵지 않을 겁니다.
“그놈이 좀 난리를 쳐줘야 재미난 일이 가능할 텐데.”
노운 경.
페스로 제국에 갑작스레 등장하여 단숨에 실세가 되어버린 자.
그런 그의 본명은 정노운.
그렇다.
문수르 다음으로 노크맨이 된 바로 두 번째 노크맨. 더불어 원래 계획대로라면 문수르가 아닌 그보다 먼저 최초의 노크맨이 됐을지도 모르는 인물이다.
그러나 한석균 회장은 어째서인지 그를 첫 번째 노크맨으로 선정하지 않았다. 그 이후 문수르의 결과에 만족하지 못해 결국 그를 두 번째 노크맨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그보다 박문수인가, 그 녀석은 왜 이렇게 행동이 굼뜬 건지 모르겠네. 너무 소극적인 거 아니야?”
- 용의주도하다고 표현하는 게 어떻습니까?
“용의주도? 웃기네. 내가 녀석의 자리에 있었으면 이제르트 백작가를 단숨에 공작가로 만들거나 왕의 자리에 올려 놓았을 거야. 아니, 그렇게까지 많은 지원을 받았으면서 아직도 제대로 자리를 잡지 못하다니? 용의주도한 게 아니라 무능력한 거지.”
- 그럼 그 계획을 그대로 진행하실 생각입니까?“
“당연하지. 녀석 혼자 놔뒀다가는 언제 이제르트 백작가가 반석에 오르고, 한 회장으로부터 보상을 받겠어? 내가 나서서 빨리 일을 끝내고 보상을 받아야지.”
노운은 말과 함께 슬그머니 품에서 담배 하나를 꺼냈다.
이 세계에서는 절대 볼 수 없는 담배.
탁탁.
“불도 잘 안 붙네, 젠장.”
지구에서만 구할 수 있는 담배.
“후우…….”
그 담배를 한 모금 마신 노운은 라이터를 대충 근처 내던지며 푸념을 뱉었다.
“내가 황제가 되면 일단 담배공장부터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