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4화
10.
이제르트 백작은 고민이 많았다. 더불어 그가 해야 할 고민은 애초부터 많았다.
백작이 됐다.
자작과 백작의 작위는 단순히 1계단 차이가 절대 아니다. 어마어마한 차이를 가진다.
백작은 단순히 개인의 영리만 취해서는 안 된다. 주변 귀족들을 하나로 모아, 자신의 영지가 아닌 국가의 영토 한 부분을 지켜야만 했다. 더군다나 이제르트 백작령에는 지옥이라고 불리는 테블스 산맥이 있지 않은가? 머리가 터져도 이상할 건 없다.
그런 이제르트 백작의 가장 큰 위안거리는 역시나 문수르의 존재였다.
정말 모든 면에서 완벽함을 보여주는 문수르는 이제르트 백작가의 핵심 중의 핵심이었다.
때문에 이제르트 백작은 허락하지 않았다.
“이번 일은 절대 허락할 수 없네.”
“백작님.”
“전하께 내가 벌을 받는 한이 있더라고 지금 이 상황에서 문수르 경, 자네를 제이머스 공작가에 보낼 수는 없네.”
“재고해주십시오.”
“미안하네. 자네가 개인의 영리를 위해서 이런 부탁을 한 게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다. 또한 전하의 명이기도 하지. 하지만 그래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네.”
문수르의 부탁.
제이머스 공작가로 보내달라는 부탁. 이제르트 백작은 일전지하에 거절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나도 정치를 할 줄 아네. 미흡하나 세상을 보는 눈이 있네. 그리고…….”
말과 함께 무수히 많은 서찰들을 꺼내놓는 이제르트 백작. 그것들은 전부 다른 귀족가에서 보낸 서찰들이었다.
“이런 것들을 계속 받다보면 없던 눈치도 생길 수밖에.”
나름 강력한 귀족으로 떠오른 이제르트 백작가에게 줄을 대기 위해 혹은 그를 회유하기 위해 보낸 서찰이었다.
갑작스런 편 가르기가 시작됐다는 의미는 곧 조만간 거대한 세력다툼이 있었다는 의미다.
위험하다.
하물며 제이머스 공작과 필로스 왕이 싸움을 일으키면 그건 콩탄 왕국을 반으로 가르는 싸움이다.
그런 상황에서 문수르가 제이머스 공작가로 간다고?
범의 아가리에 머리를 집어넣는 게 더 나을 것이다.
“백작님, 그래도 지금 움직이는 게 낫습니다. 문제가 터진 후에 움직이면 그건 늦습니다.”
“사람을 보내게.”
“사람을 보내시라니, 영지 내에서는 제 실력이 가장 좋지 않습니까? 다른 이들을 보내는 건 오히려 희생만 강요할 뿐입니다.”
“그들이 죽는 건 가슴이 아프네. 하지만 적어도 문수르 경, 자네가 위기에 빠지는 것보단 낫네.”
“그건…….”
단호하다.
이제르트 백작은 그 어느 때보다 단호하게 말했다. 더불어 그런 이제르트 백작의 눈빛은 결의로 가득 차 있었다.
각오한 것이다.
이제르트 백작은 어진 군주다. 적어도 부하를 아끼고, 아랫사람을 위할 줄 아는 사람이다.
그렇기에 냉정한 선택을 할 수 있는 것이다.
“모든 기사가 그리고 모든 사람이 내겐 소중하네. 하지만 그 무엇보다 소중한 건 문수르 경, 자네네. 좀 더 노골적으로 솔직한 심정을 말하자면 내 휘하의 다른 기사들에겐 미안한 소리지만 그들 한두 명이 죽는다고 해서 이제르트 백작령이 흔들리진 않네. 그들을 완전히 대신할 사람은 없겠지만 그들이 있던 자리를 어느 정도 채워줄 이들은 많네. 하지만 문수르 경, 자네에게 문제가 생긴다면 과연 그 누가 자네의 자리를 채워줄 수 있겠나?”
정론이다.
문수르는 감히 반박할 수 없는 완벽한 정론!
“더군다나 문수르 경, 자네는 영지의 기둥이네. 당장 내가 죽어도 영지는 돌아가지만 자네가 죽으면 영지는 몰락하네.”
마지막으로 이제르트 백작은 확실한 못을 박았다.
“문수르 경, 자네의 목숨은 이제 더 이상 자네만의 것이 아니네. 자네의 어깨에는 나 이상의 책임이 얹혀 있다네. 자네는 그 사실을 좀 더 확실하게 자각할 필요가 있네.”
이런 말을 들었는데 더 이상 보내달라는 말을 할 수 있을 리가 만무하다.
“후우.”
이제르트 백작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이제르트 백작이 이렇게까지 단호한 모습을 보이는 가장 큰 이유는 따로 있었다.
“나는 문수르 경, 자네까지 잃고 싶진 않네.”
“아…….”
딸을 잃은 이제르트 백작.
그렇기에 백작의 결의는 더 단단했다.
문수르는 결국 어떤 말도 하지 못한 채 그저 고개만 숙인 채 자리를 빠져나왔다.
11.
둘이 한 자리에 모였다.
“당신이 카라카크요?”
한 자리를 차지한 이의 정체는 제이머스 공작. 콩탄 왕국을 대표하는 기사이자, 귀족들의 대표.
“후후, 겁이 없는 걸 보니 애송이는 애송이군.”
그런 제이머스 공작의 반대편에 앉은 이의 정체는 바로 카라카크.
만약 기가스의 시대가 오지 않았다면, 어쩌면 세상을 집어 삼키는 공포의 대왕이 됐을지도 모르는 존재.
그 둘이 만났다.
“애송이란 말도 참 오랜만에 듣는구려.”
“자신감이 넘치는군.”
“잃을 게 없으니까. 또한 잃을 게 없으니까 지금 이 자리에서 당신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오.”
“하하, 그렇겠지.”
짧은 침묵.
“내게 무엇을 줄 수 있소?”
그 침묵을 뚫고 제이머스 공작이 질문을 던졌다. 카라카크의 눈빛이 빛나기 시작했다.
‘이런…….’
섬뜩한 눈빛이었다. 제이머스 공작은 저도 모르게 입술을 살짝 깨물 정도로 말이다.
등골이 싸늘하게 식는다.
머리카락이 쭈뼛쭈뼛 선다.
“뭐든지.”
카라카크가 입을 열었다. 제이머스 공작은 그제야 숨을 한 번 돌린 후에 재차 물었다.
“구체적으로 말해주시오?”
“왕이 되고 싶나? 그 정도는 어렵지 않군.”
이 대목에서는 제이머스 공작은 비웃음을 머금었다.
카라카크가 과거에는 정말 무시무시한 흑마법사였던 건 맞다. 시간이 지났으니 그때보다 더 강해졌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마법사가 세상을 공포에 물들이던 시대는 저물었다.
기가스의 시대다.
제 아무리 대단한 마법사가 존재한다고 해도 기가스란 전력 앞에서는 나약해진다.
과거라면 카라카크가 세상을 바꿀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불가능하다. 카라카크는 단지 거대한 호수에 큼지막한 돌을 던지는 정도의 영향만 줄 수 있을 뿐.
그런데 그런 그가 제이머스 공작을 왕으로 만들어준다?
가능은 할 것이다.
하지만 그 기간은 찰나에 불과할 것이다. 제이머스 공작이 카라카크의 힘을 빌려 왕위에 오르는 순간 페스로 제국이 무지막지한 힘으로 콩탄 왕국을 파괴할 테니까.
카라카크라고 해도 제국의 힘 앞에서는 무기력하다.
“제국의 황제가 거슬리는가?”
그런 제이머스 공작의 마음을 카라카크는 확실하게 꿰뚫어 보고 있었다.
“맞소. 솔직히 말하겠소. 당신이 어떤 흑마법사이든 간에 어떤 수작을 부려도 제국 앞에서는 재롱에 불과할 것이오.”
“후후, 정말 그럴까?”
“나는 적어도 그렇게 생각하오.”
“정말로?”
제이머스 공작의 표정이 굳어졌다.
대체 왜 이러는 걸까?
대체 무슨 말을 듣고 싶어서 이렇게까지 뜸을 들이고 사람을 안달나게 하는 걸까?
“설마 나와 말장난이나 하고 싶어서 이 자리에 오신 건 아니실 터.”
“기가스는 강하지.”
카라카크는 인정했다.
“아무렴. 제 아무리 대단한 몬스터 병기를 만들어도 기가스 앞에서는 무용지물이지.”
카라카크의 나름 야심작이었던 몬스터 군단은 결국 콩탄 왕국조차 무너뜨리지 못했다테블스 산의 몬스터들을 이용해 만든 군단이 그 정도 위력이라면, 제 아무리 몬스터 군단을 많이 만든다고 해도 페스로 제국은 무너뜨리지 못할 것이다.
안다.
그 사실도 모르고 이 자리에 왔을 리 만무하다.
더불어 그에 대한 대응책, 기가스에 대한 대비책이 없는데 세상에 다시 등장했을 리 만무하다.
“전쟁은 사람으로 시작해서 사람으로 끝나지.”
“무슨 의미오?”
“말 그대로다. 나는 기가스를 무너뜨리지 못한다. 하지만 그 기가스를 타는 자들을 무너뜨릴 순 있지.”
그 순간.
스윽!
무언가가 제이머스 공작 근처로 접근했다. 그 무언가가 움직이는 순간, 제이머스 공작도 움직였다.
파앗!
제이머스 공작의 손이 움직였고, 단숨에 그 무언가를 잡았다.
콰앙!
그리고는 그 무언가를 식탁 위로 집어 던졌다.
떨어진 것은 시체였다.
물론 그냥 시체는 아니었다. 언데드 마법을 이용해 이룩한 일종의 시체병기였다.
제이머스 공작은 눈살을 찌푸렸다.
“날 암살하려고 이 자리에 온 것이오?”
“그럴 리가. 네 녀석이 애송이라고 해도 죽일 생각이 있었다면 고작 이런 장난감 하나를 가지고 올 리 만무하지.”
말과 함께.
딱!
카라카크가 손가락을 튕기자.
화르륵!
푸른 불꽃이 조금은 어두컴컴했던 주변을 밝게 비추기 시작했다.
그러자 어둠 속, 그림자 속에서 모습을 감추고 있던 시체들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 숫자는 대략 이십여 구.
제이머스 공작의 눈매가 파르르, 떨렸다.
‘기척이 없었는데.’
못 느꼈다.
놈들이, 그 시체들이 이 주변에 있다는 사실을 제이머스 공작은 눈치 채지 못했다.
“기가스가 발달했지만 반대로 그 기가스를 다루는 사람은 그다지 발달하지 않았더군.”
“그건…….”
“물론 기가스를 다루는 기술은 발달했겠지. 하지만 기가스를 다루는 능력이 과연 기가스를 배제한 전투에서 얼마나 도움이 되지?”
많이는 안 된다.
기가스를 탑승할 때의 경험과 기가스를 탑승하지 않았을 때의 경험은 오히려 괴리감만 줄 뿐이니까.
생각해보면 기가스는 해마다 강력해지지만, 반대로 그 기가스를 다루는 기사들의 강함은 100년전이나 지금이나 별 반 차이가 없다.
오히려 기가스가 발전하면서 파일럿이 되기 위해 요구되는 기사들의 자질은 그 수준이 내려가고 있다.
종국에는 굳이 마나를 다루지 못하는 일반인이라고 해도 기가스를 다루게 될 것이란 말이 나오는 게 그런 이유 때문이다.
그렇다.
기가스는 강하다.
그런 기가스의 약점은 바로 사람이다.
“하루 종일 기가스에 탑승한 채 살아갈 수는 없는 노릇이지.”
“파일럿을 암살한다, 뭐 이런 계획이오?”
“방금 보지 않았나? 난 이 시체들을 사일런트 킬러라고 부르지. 전쟁이 열린다면 이놈들이 기가스 파일럿을 처리해주지.”
카라카크의 그 말에 제이머스 공작은 잠시 고민했다.
그러나 사실 고민할 필요도 없이 이미 답은 나와 있었다.
“좋소.”
어차피 제이머스 공작이 고를 수 있는 선택지는 많지 않았으니까.
“내게 원하는 게 무엇이오?”
제이머스 공작, 결국 그가 결단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