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3화
5.
모든 거사(巨事)는 소리 없이 진행된다. 마치 폭풍전야의 그것처럼 말이다.
권력자들은 그 사실을 안다.
필시 시끄러워야 할 상황에 너무 고요함이 계속되면 오히려 그것이 폭풍이 오는 일임을 직감하는 것이다.
필로스 왕 그리고 제이머스 공작.
콩탄 왕국을 양분하는 두 권력자는 그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느꼈다.
‘제이머스 공작이 때를 기다리는구나.’
‘전하가 나를 버리실 마음의 준비를 끝냈구나.’
언젠가는 오는 일이긴 했다. 귀족과 왕권, 이 두 가지는 공존한 적이 극히 드무니까.
혹여 공존한다고 해도 그건 말 그대로 일시적인 합의에 불과할 뿐, 결국은 두 권력은 충돌한다.
제이머스 공작과 필로스 왕의 사이가 긴밀했던 건 맞으나, 결국 그건 과거의 이야기.
나중에 올 일이 일찍 왔을 뿐이다.
필로스 왕도, 제이머스 공작도 지금 상황을 그렇게 생각했다.
때문에 그들은 단지 피를 흘리는 패자가 되기보다는 피를 흘리더라도 미소를 지을 수 있는 승자가 되기를 원할 뿐이었다.
그 둘이 움직였다.
6.
필로스 왕은 제이머스 공작을 무너뜨리기로 결심했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니었다.
‘명분은 있으나, 내가 포기해야 할 것이 너무 많구나.’
가장 간단한 방법은 제국의 힘을 빌리는 것.
그러나 그렇게 되면 간신히 제국의 간섭으로부터 벗어났던 콩탄 왕국이 다시 제국의 손아귀에 들어가게 된다.
물론 이 방법이 제일 빠르다. 이런저런 생각 없이 국왕이 공식적으로 제국에 병력을 요청한다면 제국은 그 무엇보다 확실한 명분을 가지고 콩탄 왕국에 올 수 있으니까. 제이머스 공작이 제 아무리 대단하다고 해도 제국을 상대할 순 없다.
하지만 필로스 왕은 쉽사리 그 선택을 할 수가 없었다.
의외?
이미 과거 왕위를 얻기 위해 했던 한 번 해봤던 왜 쉽게 선택하지 못하는 걸까?
말 그대로 이미 해봤기 때문이다.
페스로 제국의 힘을 빌려 왕위에 오른 뒤에 필로스 왕이 치른 대가는 결코 작은 게 아니었다.
그걸 또 다시 한다?
싫다.
너무나도 싫다.
그건 왕이라고도 할 수 없는 처지의 왕이 되는 일이다.
더군다나 지금은 그때보다 상황이 더 나쁘지 않은가? 제국과 거의 전쟁 중이나 다름없는 상황이다. 그런 상황에서 제국의 힘을 빌리려면 예전보다 곱절이나 되는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이다.
아니!
극단적인 경우 제국은 힘을 빌려주지 않고 팔짱을 긴 채 방관할지도 모른다.
기다리는 거다.
필로스 왕과 제이머스 공작, 콩탄 왕국을 양분하는 두 세력이 서로 싸우면서 넝마가 되면 그 후에 콩탄 왕국 전체를 날름 먹기 위해서!
‘다른 방법.’
결국 필로스 왕은 다른 방법을 찾아야 했다. 다른 방법이 없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방법은 많다.
‘불스 후작은…… 그 세력으로는 아직 제이머스 공작을 견제하긴 힘들지.’
다른 귀족으로 제이머스 공작을 견제하는 방법.
‘그럼 암살을 해야 할까?’
또 다른 방법은 정말 간단하게 제이머스 공작만 확실하게 암살로 죽이는 것.
‘암살.’
지금 상황에서 그나마 해볼 만한 건 역시 암살이다.
실패하면 모든 명분을 제이머스 공작에게 넘겨주는 꼴이 되겠지만 성공하면 정말 이야기는 빠르게 정리된다.
하지만 제이머스 공작은 콩탄 왕국을 대표하는 무인 중의 무인!
어설픈 암살자들은 감히 공작의 근처에조차 가지 못한다.
‘대체 누구를…….’
콩탄 왕국에서 그런 제이머스 공작을 무력으로 그나마 견제할 수 있는 자는 한 명 뿐이다.
‘문수르 경을 보내야 하나?’
문수르.
어쩌면 그가 이번 일의 해답이 될지 모른다.
7.
제이머스 공작.
그는 필로스 왕이 자신을 처리하기 위해 어떤 방법을 쓸지 어느 정도 예상할 수 있었다.
‘기어코 이런 날이 오는군.’
필로스 왕가의 관계는 나쁘지 않았다. 그 둘의 긴밀한 관계와 협조가 아니었다면 빅토리안 공작의 모반을 막아내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과거의 일.
제이머스 공작은 순순히 짓밟혀줄 생각이 눈곱만큼도 없었다.
무엇보다 그는 잘못한 게 없으니까.
그는 절대 모반을 꿈꾼 것도 아니고, 카라카크란 흑마법사와 손을 잡은 것도 아니다.
단지 귀족들을 구하기 위해 손을 잡은 척, 했을 뿐이다.
그런데 그 이유로 모든 것을 잃어야 한다?
납득할 수 없다.
납득한다고 해도 순순히 당할 순 없다.
‘지금 내 상황.’
하지만 반대로 필로스 왕이 작정하고 제이머스 공작, 자신을 무너뜨린다면 제이머스 공작이 그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많지 않다.
두 가지 뿐이다.
하나는 망명하는 것. 말 그대로다. 모든 걸 버리고 약소한 재산만 챙긴 채 다른 국가로 넘어가는 것이다. 필로스 왕도 그렇게 도망친 제미어스 공작을 굳이 쫓진 않을 것이다. 제이머스 공작이 모든 권력과 지위를 포기한 것으로도 충분히 만족하겠지.
두 번째는 제국의 힘을 빌리는 것! 말 그대로다. 필로스 왕이 왕위를 찬탈했던 것처럼 제국의 힘을 빌려 제이머스 공작이 왕이 되는 것이다.
‘왕.’
왕이라는 단어.
찰나라도 좋다. 아주 잠깐이라도 좋다. 그 자리에 잠시 동안만 앉을 수 있다면 무엇이든 포기할 수 있는 자들이 세상에는 넘쳐난다. 빅토리안 공작만 해도 그렇다.
모든 걸 가졌던 공작이다.
평생 써도 못 쓸 재산과 권력을 가졌던 빅토리안 공작도 결국 왕위를 탐내다가 몹쓸 죽음을 맞이했다.
왕위라는 것이 주는 매력은 그 정도로 무시무시하다. 제이머스 공작이라고 해서 자유로울 수 있을 리 만무하다.
‘내가 왕이 된다면…….’
제국의 힘을 빌려 왕이 된다는 것. 허수아비, 꼭두각시 왕이겠지만 역사에는 왕으로 기록되겠지.
왕명은 어떻게 될까?
설레긴 설렌다.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묘한 흥분감과 쾌감이 온몸을 휩쓸고 지나간다.
하지만 제이머스 공작은 이내 그 쾌감들을, 야릇한 기운들을 짓눌렀다.
‘제국은 필로스 전하와 나, 둘 중 하나를 골라야 할 때가 오면 필시 전하를 고를 터.’
냉철하게 생각하면 제국이 제이머스 공작과 손을 잡을 이유는 없다. 더군다나 제이머스 공작을 치려는 명분이 흑마법사와의 결탁 때문 아니었던가? 제국이 흑마법사와 손을 귀족의 편을 들어 왕위를 준다?
대륙 전체가 제국을 욕할 것이다.
제국이 굳이 그런 리스크를 감수할 이유 역시 없다.
더군다나 제국이 애초에 콩탄 왕국의 권력쟁투에 나설 이유 자체도 지금은 없다.
전시 상황이나 다름 없으며, 무엇보다 제국 입장에서는 적국이 알아서 자중지란으로 망해주겠다는데 굳이 그걸 건드려서 어느 한쪽을 세워줄 필요는 전혀 없다.
‘제국과는 손을 잡는 시도조차 하지 않는 게 좋다.’
여기서 오히려 어설프게 제국과 접촉했다가는 페스로 제국의 간계에 넘어갈 것이다.
제국과 손을 잡으면 미래가 없다는 의미다.
‘남은 건…….’
그럼 이 상황에서 고를 수 있는 파트너는 대체 누가 있을까?
파트너는 많이 있다. 손을 내밀면 잡아줄 자들은 얼마든지 있다. 하지만 개중에 필로스 왕의 힘, 더 나아가 제국마저 견제해줄 정도로 확실한 힘이 있는 자는 지금으로써는 오직 한 명만 떠오른다.
‘카라카크.’
이미 전설이 되어버린 흑마법사.
지금 제이머스 공작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자는 그뿐이었다.
8.
“하하.”
청년은 호탕하게 웃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호탕하게 웃는 것처럼 느껴질 저도였다.
“드디어 왔구나.”
그런 청년의 눈빛에는 호탕한 웃음과는 어울리지 않는 사악하기 그지없는 빛이 감돌고 있었다.
“드디어 때가 왔어.”
사내의 정체.
“이것으로 모든 준비는 끝났다.”
흑마법사 카라카크!
과거의 악몽! 이제는 동화책에서조차 보기 힘든 그 저주 받은 이름!
그가 등장한 것이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선 것이다.
“좋아, 제이머스 공작. 네놈을 내가 왕으로 만들어주지. 아무렴! 그래야지. 네놈이 왕이 되어야 내가 원하는 걸 이룩할 수 있을 테니까.”
9.
비밀스런 연락이었다.
그래서 금방 알 수 있었다. 너무나도 비밀스러운 접촉이었기 때문에 누가 접촉한 것인지, 오래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필로스 왕이로군.’
필로스 왕의 접촉이었다. 물론 그가 직접 왔다는 건 아니다. 사람을 시켜서 편지를 보냈다.
편지 내용은 장대했다. 대략 9페이지 분량이었다. 이 정도면 굉장한 장문인 셈이다.
편지에는 온갖 내용이 가득했다. 별 거 아닌 이야기, 문수르의 업적을 칭찬해주는 이야기, 한 번 만나보자는 이야기…… 그러나 개중에 한 가지 부분만이 문수르의 눈에 들어왔다.
‘제이머스 공작.’
제이머스 공작에 대해 언급한 부분이 있었다.
제이머스 공작을 공격하라거나 암살하라는 말이 있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반대였다.
- 제이머스 공작의 행동이 참으로 우려스럽다. 어쩌면 그는 지금 외로울 것이다. 그런 제이머스 공작의 마음을 헤아려줄 수 있는 자는 그와 동등한 경지에 오른 무인인 문수르 경, 자네 밖에 없을 듯하다. 자네가 조심스레 그와 만나 이야기를 만는다면 짐의 오랜 벗인 제이머스 공작이 품고 있는 외로움과 걱정을 조금이나마 덜 수 있지 않을까, 짐은 그리 생각한다.
제이머스 공작을 걱정하며 부디 그와 말상대가 되어달라는 내용.
누가 보더라도 필로스 왕이 왕국의 충신인 제이머스 공작을 위하는 마음이 가득한 문장이다.
그러나 문수르가 그런 문장에 넘어갈 정도로 어수룩한 인간일 리 만무하지 않은가?
오히려 제이머스 공작이 언급되는 순간 알았다.
‘나보고 제이머스 공작을 처리하라는거군.’
문수르는 비릿한 웃음을 머금었다.
지금 왕국이 돌아가는 꼴을 그 누구보다 잘 하는 이가 바로 문수르다. 그럴 수밖에 없다. 지금 문수르는 모든 역량을 다해 제이머스 공작령과 왕도를 감시 중이다. GPS 시스템을 통해서 기가스의 움직임과 병력의 움직임을 파악하는 중이다.
이미 반쯤 전시사태다.
숨기려고 하지만 하늘 위의 눈마저 속일 수는 없다.
이런 상황에서 제이머스 공작을 만나라는 것은 그를 만나서 여차하면 처치하라는 의미다.
물론 그에 따른 책임은 문수르의 몫이다.
혹여 문제가 생기면 필로스 왕이 책임지는 게 아니라 문수르 그리고 문수르의 주군인 이제르트 백작이 책임져야 하는 것이다.
너무 무책임한 일.
그러나 필로스 왕은 말 그대로 왕. 반대로 문수르는 이제야 기사 작위를 받은 인간이다.
필로스 왕이 죽으라면 그 자리에서 죽는 것이 이 나라, 이 세상의 순리이며 규칙이다.
물론 문수르는 이걸 거절할 수도 있다. 적당한 구실을 이용해 대충 넘어갈 수도 있다.
더불어 지금 상황에서 제이머스 공작을 만나는 일은 여러모로 부담스러울 수도 있다.
‘아니, 어쩌면 기회일지도 모르겠군.’
그러나 이내 문수르는 상황을 바꾸었다. 어차피 상황은 최악으로 흘러갔다. 콩탄 왕국은 이제 제이머스 공작과 필로스 왕, 둘이 세력을 양분한 채 싸우게 될 것이다.
제국은 그걸 구경만 할 것이다. 굳이 적이 알아서 힘을 빼주는데 나설 필요는 없다. 나선다고 해도 어느 한쪽이 완전한 그로기 상태일 때, 그냥 살짝 발만 담그겠지.
그렇게 되면 이후에는 제국과 제대로 된 전쟁조차 벌이지 못한다.
최악의 시나리오다.
그런 시나리오만큼은 피해야 한다.
그리고 지금 상황에서 그 시나리오를 피할 수 있는 나름 최선의 방법이 있기도 하다.
‘제이머스 공작을 내가 처치한다면…… 전쟁은 없다.’
싸움은 둘이 있어야 가능하다.
한 명만으로는 싸움을 할 수 없다.
‘좋아.’
문수르가 각오를 다졌다.
‘일단 제이머스 공작을 만난다. 어쩌면 카라카크에게 한 방 먹일 수 있는 기회일지도 모르니까.’
그건 정말로 위험한 각오였다.
============================ 작품 후기 ============================
정말 오랜만에 뵙습니다.
그동안 노크맨 연재 문의를 많이 해주셨고, 연재를 재개한다고 말씀드렸는데 이제야 그 약속을 지키게 되네요.
최대한 빨리 연재를 지속할 생각이며, 올 해가 가기 전에 확실하게 완결을 지을 생각입니다.
키스미투파이트와 검성귀환의 연재는 아직 잡지 못했습니다. 검성귀환의 경우에는 사실상 집필을 접은 상황이고, 키스미투파이트는 이후 기회가 되면 좀 더 새롭게 바꾼 초능력물로 리메이크를 할 예정입니다.
글을 쓰면 완결을 짓는 게 작가의 도리인데 언제나 어수룩한 실력으로 독자분들을 실망케 해서 죄송할 따름입니다.
더불어 기존의 글도 책임지지 못한 채 새로운 연재를 하는 무책임한 모습에 다시 한 번 사과드립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