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2화
<77화. 음모.>
1.
제이머스 공작은 미칠 노릇이었다.
“빌어먹을…….”
알로소 자작 사건은 콩탄 왕국을 단숨에 휩쓸었다. 그걸 모르는 자는 콩탄 왕국에는 없다. 심지어 전 대륙의 모든 이들이 이번 일을 주목할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알로소 자작이 흑마법사와 손을 잡았으며, 그 흑마법사의 배후가 다름 아니라 아주 오래 전 죽었으리라 여겨졌던 사악한 흑마법사 카라카크일 줄이야?
카라카크란 흑마법사가 표면에 드러나는 것만으로도 보통 사건이 아닌데 그의 마수가 벌써부터 콩탄 왕국 깊숙한 곳에 끼쳤다는 건 충격, 그 이상의 것이었다.
그러나 제이머스 공작을 미치게 만드는 건 따로 있었다.
‘이렇게 가다가는 내 위치가 위험해진다.’
카라카크.
제이머스 공작이 그 이름은 들으면 이번이 처음이다. 아니, 예전에 듣기는 했다. 정확히는 책을 통해서 봤다. 대마법사 할루이 이제르트가 활약할 당시 그런 할루이 이제르트에 버금가던 마법을 가졌으나, 악마와 거래해 흑마법의 구렁텅이에 빠진 마법사라고 했다.
이후 할루이 이제르트와 어떠한 충돌이 있었고, 그 충돌 이후 세상에서 사라졌다는 것도 알았다.
거기까지였다. 제이머스 공작이 카라카크에 대해서 아는 사실은 말이다.
그런데 이번 알로소 자작 사건을 계기로 카라카크가 콩탄 왕국에 지독한 마수를 뻗쳤음이 밝혀졌다.
심지어 아직 확실하게 밝혀진 건 아니지만, 카라카크와 빅토리안 공작이 관계됐으리란 이야기도 있었다. 그와 관련된 증거가 발견되는 중이라고 한다.
빅토리안 공작마저 카라카크의 마수에 걸렸다면 콩탄 왕국 내에서 적지 않은 귀족들이 카라카크의 마수에 빠져들었다는 의미!
여기까진 아무래도 좋다.
제이머스 공작을 힘들게 하는 건 다름 아니라 최근의 일이었다.
‘그 협약서를 써서는 안 되는 일이었어. 아니, 쓰더라도 필로스 전하를 찾아가 먼저 이야기를 했었어야 했다.’
최근 제이머스 공작은 불스 후작가 납치사건에 개입한 무리들과 협상을 하고 있었다.
물론 제이머스 공작은 말한다. 그 협상은 일반적인 협상이 아니라 숨어 있는 적을 잡기 위핸 묘책이었다고.
그러나 문제는 그걸 아는 건 제이머스 공작과 그의 일부 측근들 뿐이라는 사실이다.
필로스 왕에게는 말하지 않았다.
이유?
괜한 걱정을 시키기 싫었으니까. 그냥 몰래 처리해서 귀족들을 구한 후에 놈들을 뒤를 캐서 발본색원하면 끝나는 일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생겼다.
녀석들은…… 아니, 카라카크는 인질을 조금씩 내주었다. 처음에 인줄을 내준 이후로 꾸준하게 인질을 내주었다. 물론 그에 대한 대가로 몇 가지를 요구하긴 했지만 사실 그들이 요구하는 대가는 제이머스 공작에게 그다지 부담스럽지 않은 수준의 것이었다.
그래서 그냥 그 대가를 지불했다.
어차피 나중에 놈들의 꼬리를 잡으면 지불한 모든 대가를 돌려 받을 수 있으리라 여겼으니까.
때문에 놈들이 협약서를 쓰자고 했을 때도 개의치 않았다.
썼다.
어차피 놈들과 진짜 거래를 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고, 인질을 받는 순간 곧바로 반격을 할 생각이었으니까.
그 반격을 준비할 무렵이었다.
알로소 자작 사건이 터진 것은 말이다.
심지어 제이머스 공작을 미치게 하는 건, 자신이 하는 일에 알로소 자작도 관계되어 있다는 점이었다.
‘설마 그 협약서가 발견되는 건 아니겠지?’
만약 알로소 자작의 영지에서 제이머스 공작과 카라카크가 거래를 했다는 증거가 발견된다면?
제이머스 공작은 항변할 것이다. 불스 후작가에서 납치당한 인질들을 구하기 위한 술책이었다고.
하지만 그 항변이 정말 제대로 먹힐 것인가? 아니, 구한 인질들을 제시하면 어느 저도 믿어주긴 할 것이다. 그러나 그런 제이머스 공작의 말을 백퍼센트 믿는 이가 있을까?
당장 필로스 왕부터 일말의 의심을 할 것이다.
그 의심은 점차 커질 것이다.
종국에는 필로스 왕과 제이머스 공작의 사이를 크게 갈라놓는 시발점이 됐다.
제이머스 공작에게는 좋은 일이 아니었다.
아니, 제이머스 공작은 최악의 경우도 염두에 두어야 했다.
‘최악의 경우 내가 반역자로 몰릴 수도 있다.’
제이머스 공작, 잘못하면 그는 빅토리안 공작의 길을 갈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2.
무블 공작은 자기 영지로 돌아갔다.
영지에 돌아왔을 때 무블 공작은 알로소 자작 사건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나를 노린 게 카라카크라, 그건가?”
무블 공작은 처음에는 분노했다.
감히 흑마법사 따위가 자신을 노린다는 사실을 도무지 용납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자 무블 공작은 차츰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일이 진행될수록, 한 가지는 확실했다.
현재 콩탄 왕국에는 흑마법사 카라카크의 마수가 적지 않게 퍼져있는 상황이었다.
어쩌면 필로스 왕마저 흑마법사의 마수에 넘어간 상황일지도 모른다.
이건 충분한 명분이다.
페스로 제국이 콩탄 왕국을 공격해도 충분한 명분! 이미 무블 공작이 공격을 당한 상황 아닌가?
결국 전쟁은 계속된다.
호전적인 페스로 제국이, 가뜩이나 콩탄 왕국에 대해 감정이 좋지 못한 제국이 가만히 있을 리 없다.
여기서 무블 공작의 입장이 바뀌었다.
무블 공작은 전쟁을 원하지 않는다. 강한 군대가 없는 그는 전쟁에서 이러다할 공을 세우기가 힘드니까.
그러나 지금은 아니었다.
“나쁘지 않군.”
그때와는 상황이 다르다.
만약 페스로 제국이 콩탄 왕국을 친다면, 이번에는 명분이 다르다. 어디까지나 흑마법사와 그의 잔당들을 처치하기 위한 전쟁이다. 콩탄 왕국 전부와 싸울 필요가 없다.
더불어 무블 공작은 이번 일의 명분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키포인트이기도 했다.
공격 당한 건 그다.
그러니까 그의 의견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 막말로 무블 공작이 전쟁을 원치 않는다고 격렬하게 주장하면 당장 전쟁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반대로 무블 공작이 전쟁을 주도할 수도 있다.
더불어 무블 공작이 만약 이제르트 백작가를 포용한 뒤에 그들을 선두에 선다면?
과거 슈페언 공작이 필로스 왕에게 힘을 실어준 것처럼, 무블 공작이 이제르트 백작가에 힘을 실어주는 것이다.
더 나아가 페스로 제국이 이제르트 백작가에 힘을 실어주는 결과가 될 것이다.
그럼 자연스럽게 콩탄 왕국은 흑마법사와 손을 잡은 무리들과 그렇지 않은 무리들이 내전을 시작할 테고, 당연히 제국의 원조를 받은 이제르트 백작가가 이길 터.
그 다음은?
제국이 원하는 자…… 아니, 무블 공작이 원하는 자가 콩탄 왕국 왕위에 오를 것이다. 그리고 이제르트 백작가는 콩탄 왕국의 절대권력을 휘두르게 될 터.
그 모든 걸 무블 공작이 좌지우지할 수 있다.
무블 공작은 콩탄 왕국을 자신의 절대적 우군으로 만들 수 있는 기회를 잡을 수 있는 것이다.
“좋아.”
무블 공작은 망설이지 않았다.
“당장 이제르트 백작가와 밀담(密談)을 나눠야겠어.”
3.
문수르는 이를 갈았다.
“카라카크…… 이걸 노렸군.”
카라카크.
어째서 그가 회담 장소에 고작 세 마리의 블레이더만 보냈는지, 처음에는 이해가 안 됐다.
그러나 진행되는 이야기를 보니 카라카크가 노리는 건 따로 있었다.
카라카크는 제대로 표면에 모습을 드러낼 생각이었다.
동시에 카라카크는 콩탄 왕국의 혼란을 야기시켰다.
“제국의 개입이 무섭지 않은 건가?”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든다.
지금 당장 카라카크가 이런 식으로 표면에 등장하면 콩탄 왕국은 정치적 혼란을 맞이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페스로 제국은?
페스로 제국은 오히려 이번 기회를 구실 삼아, 흑마법사 카라카크를 무찌른다는 명분 하에 대군을 이끌고 콩탄 왕국으로 들어올 수도 있다.
카라카크가 제 아무리 희귀한 블레이더와 몬스터 데스나이트 그리고 몬스터 군단을 다룬다고 해도 페스로 제국을 상대로는 감히 싸울 수 없는 처지다.
결국 카라카크는 패배할 것이다.
콩탄 왕국을 손에 넣는다고 해도 그의 미래는 정해진 셈이다.
그런데 대체 왜 이런 일을 했을까?
여기서 문수르는 답을 내놓았다.
‘카라카크의 마수가 제국에도 뻗쳐있다.’
확실하다.
카라카크가 밑도 끝도 없이 갑작스레 이런 일을 계획하고 기획하고, 실행했을 리 만무하다.
분명히 놈의 마수는 제국에도 뻗쳐 있다.
그렇기에 이번 일이 일어나면, 카라카크의 마수에 넘어간 제국의 귀족이 문제를 일으킬 것이다.
‘대체 무엇을 원하는 거지?’
한 가지 궁금한 게 있다.
과연 궁극적으로 카라카크가 원하는 건 대체 무엇일까? 흑마법사가 무엇을 소망하든, 인류는 그에 대항할 것이다. 아니, 인류만이 아니다. 엘프들도, 드워프들도 세상이 흑마법사들의 손아귀에 빠져드는 걸 결코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카라카크는 결국 세상 전부와 싸워야 한다.
세상전부와 싸우면서까지 그가 원하는 건 대체 뭘까?
“아니, 아무래도 좋다.”
그 순간 문수르의 눈빛이 살벌한 살기를 내뿜기 시작했다.
그래, 카라카크 놈이 무엇을 원하든 그건 문수르에게 중요한 일이 아니다.
중요한 건 이제야 놈이 표면 위로 모습을 드러냈다는 것.
때문에 세상 모든 이들이 카라카크를 노리기 시작한다는 것.
“네놈은 내가 죽인다.”
기회가 왔다.
이리아 아가씨의 복수를 할 기회가 온 것이다.
문수르는 이 기회를 그냥 넘길 생각은 없었다.
문수르는 곧바로 이제르트 백작을 찾아갔다.
4.
필로스 왕은 한숨을 토해냈다.
‘최악이구나.’
협상회담이 취소됐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하늘이 무너지는 느낌이었다.
결국 제국과의 전쟁은 피할 수 없는 것인가?
그러나 그 이후 알로소 자작 사건이 터졌을 때 필로스 왕은 그 순간 떠올렸다.
‘이건 어쩌면…….’
흑마법사의 마수가 왕국 곳곳에, 자신의 나라 곳곳에 퍼져있다는 건 치욕적이고, 굴욕적이고, 비참한 일이었다.
필로스 왕은 자신의 나라에서 흑마법사란 질병이 퍼지는 걸 제대로 알지도 못했다.
분명하다.
이건 왕의 입장에서 필시 반성해야 하는 일이다.
그러나 동시에 필로스 왕은 이것이 오히려 자신의 목을…… 그러니까 자신의 왕위를 지킬 수 있는 기회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정확히 말하면 필로스 왕은 결국 페스로 제국 앞에 고개를 숙일 생각을 한 것이다.
이제까지 페스로 제국과 원만한 관계를 맺지 못하고 계속해서 충돌했던 이유는 결국 하나다.
필로스 왕이 고개를 세웠으니까.
이제까지 페스로 제국 앞에서 고개를 숙이고 허리를 숙이며 자세를 낮췄던 필로스 왕이 갑자기 태도를 바꾼 것이 마찰의 원인이다.
필로스 왕도 이유는 있다.
콩탄 왕국을 페스로 제국의 속국이 아니라 번듯한 왕국으로 세우고 싶었을 뿐이다.
실제로 페스로 제국의 힘을 빌려 왕위를 얻는 순간부터 필로스 왕은 페스로 제국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계획을 세우고, 조금씩 그 계획을 실행했었다.
하지만 상황이 이렇게까지 최악이 되자, 필로스 왕은 포기해버렸다.
콩탄 왕국의 오롯한 독립!
그걸 포기한다는 거다.
그렇게 되면 필로스 왕이 가질 수 있는 선택지는 무궁무진할 정도로 많았다.
결과적으로 페스로 제국과 손을 잡으면, 결국 어찌 됐건 왕위는 유지되고 왕국도 존립될 것이다.
페스로 제국의 개입에 정말 속국이나 다름 없는 처지가 되겠지만, 왕위를 잃고, 왕국마저 무너지는 것보다는 그게 낫지 않은가?
필로스 왕은 그런 생각을 했다.
그런 생각을 할 무렵이었다.
알로소 자작령에 대한 탐문과 조사가 끝나고, 그 결과가 필로스 왕 앞에 도착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결과를 봤을 때 필로스 왕은 결단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제이머스 공작, 그대가 정녕…….”
페스로 제국에 다시금 고개를 숙이는 것.
필로스 왕이 그 결단을 내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