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0화
3.
공식으로 문서가 왔다.
필로스 왕이 기다리던 내용이었다.
“그래, 기회가 왔군.”
다름 아니라 페스로 제국이 협상을 원한다는 내용의 문서였다. 카이탄 황제의 인장이 찍힌 공식문서!
필로스 왕은 속으로 환호성을 질렀다.
‘최악의 상황은 피했다.’
필로스 왕은 일단 빠르게 움직였다.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무조건 협상은 가질 것이다.
문제는 대표다.
과연 누구를 대표로 세우는 게 좋을까?
사실 이미 대표는 정해져 있었다.
‘이제르트 백작가.’
다름 아니라 이제르트 백작가, 그들이 페스로 제국과의 협상에 콩탄 왕국 대표로 나갈 것이다.
필로스 왕이 원해서 그런 게 아니다.
사전에 약속을 했다.
이제르트 백작가에서 대표로 왔던 마구르는 필로스 왕과의 대화에서 말했다.
“이제르트 백작가는 전력을 다해 국경에서 싸울 것입니다. 혹여 결과가 좋게 나와 제국 쪽에서 협상을 제시할 경우, 이제르트 백작가가 대표로 나서고 싶습니다.”
거래였다.
이제르트 백작가가 그 어떤 조건 없이 전력을 다해 싸우는 대가로, 차후 제국과의 협상시 대표가 되고 싶다는 제안.
필로스 왕은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어떻게든 전장으로 끌고 나오려고 했던 이제르트 백작가가 알아서 전력을 이끌고 전장에 나오겠단다.
대가는 제국과의 협상 대표직!
필로스 왕 입장에서는 제국과 협상, 그것이 이루어지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할 수 있는 상황!
물론 지금 이제르트 백작보다는 다른 이를, 좀 더 믿을 수 있는 측근을 대표로 삼고 싶은 게 필로스 왕의 솔직한 심정이다.
그러나 그게 아니더라도 이제르트 백작가가 굳이 이번 일을 망칠 것 같진 않았다.
“좋아.”
약속을 했다.
그럼 지켜야 한다.
필로스 왕은 이제르트 백작가를 협상의 대표로 정하기 위한 공식적인 절차를 취했다.
4.
문수르는 이야기를 들었다.
“협상이 시작된다고?”
“예.”
“그럼 전선에서 물러나야겠군.”
협상이 시작되면 잠시 동안 휴전 상태가 될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어설프게 전성에서 어슬렁거리는 건 좋은 형태가 아니다. 뒤로 물러나야 한다.
문수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후방으로 이동합니다.”
“예!”
이제르트 백작군은 문수르의 명이 떨어지자마자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신속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러는 와중에도 문수르는 GPS시스템을 통해 제국의 동향을 살피는 걸 잊지 않았다.
“로이드.”
- 예, 주인님.
“특이 동향이 있으면 바로 말해줘.”
제국이 어떤 식으로 뒤토수를 칠지는 아무도 모른다. 회담하는 척 여기를 할 수도 있다.
‘불안해.’
물론 문수르가 좀 더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건 느낌이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불안하다.
감이 좋지 못했다. 왠지 무슨 일이 일어날 것만 같은 조짐이 느껴졌다. 그게 정확히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만약 협상이 결렬되면…….’
문수르가 생각하는 최악의 상황, 협상결렬일까?
아니다.
협상결렬은 그냥 협상결렬일 뿐이다. 그냥 현재 상태가 유지되는 선에서 그칠 것이다.
그리고 협상이 결렬될 이유 역시 없다. 협상의 대표로는 이제르트 백작가가 뽑힐 것이다.
이미 사전에 논의를 했다.
‘마구르가 있다.’
이제르트 백작이 참석하고, 그를 돕기 위해 마구르가 곁을 지킬 것이다. 더불어 그들은 어떻게든 이 전쟁을 끝내는 방향으로 협상을 이끌어갈 것이다. 협상에서 문제가 생길 가능성은 없다.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는 건가?’
문수르는 스스로를 다독였다.
5.
협상은 콩탄 왕국과 페스로 제국의 국경 사이에 위치한 알로소 자작령에서 이루어졌다.
알로소 자작령은 콩탄 왕국의 땅이었지만, 페스로 제국은 딱히 불만을 가지진 않았다.
협상 대표로는 페스로 제국에서는 무블 공작이, 콩탄 왕국에서는 이제르트 백작가가 나왔다.
이 순간 무블 공작은 생각했다.
‘최상의 시나리오군.’
이제르트 백작가가 대표로 나올 줄은 몰랐다. 단지 그렇게 되기를 소망했을 뿐.
그런데 그렇게 됐다.
‘내쪽으로 바람이 분다.’
이쯤 되면 무블 공작은 느낄 수밖에 없다.
바람이 바뀌고 있다.
이제까지 무블 공작의 정면에서 불었던 바람이 뒤에서 불기 시작했다. 무블 공작은 이 기회를 놓칠 생각이 없었다.
‘일단 전쟁을 끝낸다.’
가장 먼저 필요한 건 이번 상황을 휴전 혹은 종전으로 끝내는 것이다.
동시에 콩탄 왕국과 긴밀한 관계를 맺는 것이다. 물론 그 관계를 주도하는 건 무블 공작이 될 것이다.
예전 슈페언 백작의 역할을 무블 공작이 대신하는 것이다. 무블 공작은 콩탄 왕국에 대한 영향력을 가지니 정치적 입지도 올라갈 것이고, 이제르트 백작가 역시 콩탄 왕국의 대표로 페스로 제국과의 긴밀한 소통기구가 될 테니 손해볼 건 없다.
윈윈이다.
이제르트 백작가는 이 제안은 거절하지 못할 터.
‘후후후! 드디어 내 시대가 왔구나.’
콩탄 왕국과 관계가 다시 개선되면, 이제 남은 다섯 명의 황자 파벌들이 경쟁을 시작할 것이다.
그리고 그 경쟁에서 무블 공작은 그 누구보다 우월한 지위를 누릴 수 있을 것이다.
때가 온 것이다.
무블 공작, 그가 페스로 제국의 실세가 될 수 있는 때가!
6.
콩탄 왕국과 페스로 제국의 협상이 시작됐다.
대륙의 모든 이목이 이 협상에 주목됐다.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협상의 결과에 따라서 대륙의 정세 판도가 바뀔 수 있으니까.
“콩탄 왕국이 협상을 거절할 이유는 없지. 콩탄 왕국 입장에서는 전쟁을 끝내는 게 최선.”
“이러다할 피해도 없으니 말이야.”
“무그 백작만 꼴이 좋지 못하게 될 뿐.”
대부분의 이들이 원할한 협상이 이루어지리라 예상했다.
그런 그들의 예상은 크게 다르진 않았다.
문제는 다른 곳에서 터졌다.
7.
이제르트 백작의 호위로 붙은 이는 다름 아니라 가누스였다.
더불어 가누스는 정체를 숨긴 채 비밀스럽게 이제르트 백작의 호위를 하고 있었다.
가누스가 붙었다는 사실을 아는 건 세 명 뿐이었다.
이제르트 백작 본인과 문수르 그리고 이제르트 백작의 호위를 총괄하게 된 포비어 경.
이유는 하나였다.
엘프였으니까.
아무래도 엘프와 드워프는 아직까지 외부로 공개하기에는 조금 무리가 있었다. 문수르가 무리를 해서라도 기가스 파일럿을 육성하려고 했던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어쨌거나 가누스는 이제까지 조심스럽게, 암중으로 이제르트 백작을 호위했다.
그러나 협상 장소까지 호위할 수는 없었다. 아무래도 자리가 자리였으니까.
가누스는 협상이 이루어지는 성 밖에서 주변상황을 살폈다.
‘음?’
그런 가누스가 이상한 조짐을 느낀 건 협상을 위한 회담이 시작된지 3일째에 접어들 무렵이었다.
감이 좋지 않았다.
뭐라고 해야 할까?
‘흑마법사인가?’
느낌만으로도 살아있는 생물의 기분을 비틀기에 부족함이 없는 기운! 가누스는 확신했다.
‘맞아, 흑마법사다.’
가누스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가누스가 가장 걱정했던 것…… 아니, 문수르가 가장 걱정했던 사실이 있었다.
만약 협상이 이루어지면, 필시 그 협상이 제대로 성사되길 원하지 않는 자가 있을 터.
특히 이제까지 콩탄 왕국 내에서 수작을 부렸던 흑마법사는 기어코 방해를 할 것이다.
문수르는 그렇게 생각했기에 가누스에게 강조했다.
“흑마법사가 나설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러니까…… 최악의 경우라도 이제르트 백작님의 목숨만큼은 구해주십시오.”
그런 문수르의 우려에 맞추어 가누스도 만반의 준비를 했다. 폐욤 족장으로부터 몇 가지 마법 아티팩트를 받았다.
가누스는 그것을 사용했다.
8.
포비어 곁으로 이제르트 백작가의 기사 한 명이 다가왔다. 기사는 귓속말로 무슨 말을 건넸다.
그 광경을 무블 공작가의 호위 기사들이 묘한 눈초리로 바라봤다.
사실 무블 공작가의 기사들 입장에서 이제르트 백작가의 기사들은 신기한 존재였다.
단순히 타국의 기사라서 신기하다는 게 아니다.
지금 콩탄 왕국 내에서도 가장 신비한 인물 취급을 받는 게 아니람 아니라 이제르트 백작가의 기사들이다.
기사란 건 갑자기 툭, 튀어나오는 게 아니다.
뛰어난 재능을 가진 이가 오랜 시간에 걸쳐 훈련을 하고 노력을 해야 도달할 수 있는 경지다.
이제르트 백작가에는 이제까지 이러다할 이름 난 기사가 없었다. 그런데 그런 곳에서 문수르란 오러 나이트가 나왔다.
그뿐인가?
아직까지 알려지진 않았지만, 이제르트 백작가 소속으로 전장에서 활약을 한 기사의 숫자가 적지 않다.
기가스 파일럿도 마찬가지다.
지금까지 알려진 바에 따르면 이제르트 백작가가 소유한 기가스는 최소 15대 이상이라고 한다.
그건 달리 말하면 기가스 파일럿이 15명 이상이라는 의미인데, 가뜩이나 구하기 힘든 기가스 파일럿을 그렇게 많이 보유했다는 건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다.
때문에 무블 공작가의 기사들은 처음에 호기심 어린 눈으로 이제르트 백작가를 살펴봤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는 경계심을 갖췄다.
‘보통이 아니다.’
‘제법 단련된 자들이다.’
‘제국에서라도…… 충분히 한 자리를 차지할 실력자로군.’
무블 공작의 호위기사들이 어수룩한 실력자들일 리 만무하다. 제 아무리 무블 공작이 힘이 없는 귀족, 무력보다는 머리를 쓰는 부류라고 해도 그는 황도에 상주하며 카이탄 황제와 긴밀한 관계를 가진 막강한 귀족이다.
가뜩이나 강한 기사들이 넘쳐난다는 페스로 제국에서 최고의 기사들만이 무블 공작의 측근이 될 수 있다.
이번 호위에도 그런 기사들이 참석했다.
나름 오러 나이트들 중에서도 그 수준이 절정에 다다른 자들이다.
그런 그들이 보기에 이제르트 백작가의 기사들은 대부분이 무블 공작가의 기사들과 실력이 비슷했다.
특히 포비어 경이라는 자.
느껴지는 포수, 기세가 보통이 아니다.
‘오러 마스터인가?’
‘그에 근접한 실력자일수도.’
‘하긴 이제르트 백작 휘하에는 이미 오러 마스터인 문수스르란 자가 있으니까.’
그렇게 모두가 이제르트 백작가의 기사들을 경계할 무렵.
포비어가 슬그머니 자리를 비웠다.
자리를 비운 포비어는 곧바로 데리고 온 병사들을 불렀다. 이제르트 백작가의 병사들은 보통 병사들이 아니다.
온갖 것에 능한 스페셜리스트들이다. 수색은 물론 전투 등 온갖 분야에서 골고르 능력을 발휘한다.
가장 믿을 수 있는 자들이다.
그들에게 말했다.
“이제부터 탐색을 시작한다.”
탐색.
그 단어에 병사들이 긴장했다.
이제르트 백작가는 알고 있다. 흑마법사 카라카크에게는 아주 기괴한 병사가 있다.
속칭 블레이더라 불리는 그것들은 인간과 똑같은 형태를 하고 있고, 겉으로 봐서 절대 분간이 불가능하지만 그 속에는 무시무시한 병기를 숨기고 있다.
또한 기존의 흑마법을 판별하는 마법이나 장치에도 걸리지 않는다.
그런 블레이더 몇 마리가 협상에 난입해서 요인들을 해치운다면 어떻게 될까?
필시 사단이 날 것이다.
또한 여기는 콩탄 왕국의 영역이다. 문제가 생기면 단순히 전쟁만으로 이야기는 끝나지 않을 것이다.
때문에 이제르트 백작가는 협상 대표를 자처했다.
이제르트 백작가에는 완벽하진 않지만 블레이더를 구분할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었으니까.
탐색이란 그 블레이더를 찾아내는 것을 의미했다.
방법은 간단하다.
준비한 작은 바늘을 이용해 대상과 접촉 그리고 바늘을 찔러보는 것이다.
우연을 가장해서!
인간이라면 비명을 내지른다.
그러나 고통을 모르는 블레이더들은 절대 비명을 지르지 않는다.
단순하지만 확실한 방법!
병사들이 움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