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6화
<75화. 기습.>
1.
콩탄 왕국과 페스로 제국의 전선은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고 있었다.
페스로 제국은 물러나지 않았다.
물러날 수가 없었다.
“우리는 제국의 군사들이다! 절대 물러나지 마라! 제국의 역사에 패퇴를 기록하지 마라.”
이제까지 전쟁과 침략 그리고 승리라는 것만으로 역사를 써내려왔던 페스로 제국.
전쟁이 어떻게 됐건, 그 전쟁으로 인한 피해가 어떻게 됐건, 한 번 전쟁이 일어난 이상 물러선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콩탄 왕국도 마찬가지였다.
필로스 왕은 모든 귀족들에게 전했다.
“패배한다면 모든 것을 잃을 것이다.”
필로스 왕은 알고 있다.
만약 페스로 제국이 전세를 휘어잡게 된다면, 이후에는 절대 협상 테이블이 마련되지 않으리란 사실을 말이다.
이미 피를 본 맹수는 절대 사냥을 멈추지 않는다.
그렇다면 오히려 맞서 싸워야 한다.
오히려 전세를 우세하게 이끌어가는 것만이 페스로 제국으로부터 협상을 이끌어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러나 필로스 왕의 말에도 교전이 이루어졌을 때 콩탄 왕국의 병사들은 연전연패를 거듭했다.
병력의 차이가 너무 났다.
그동안 페스로 제국의 비호를 받으면서 콩탄 왕국은 승승장구할 수 있었다.
굳이 콩탄 왕국이 군대를 육성하지 않아도 제국의 힘을 빌려 얼마든지 주변국들을 견제할 수 있었으니까.
그것이 지금 상황에서는 독이 되어, 족쇄가 되어 콩탄 왕국을 압박하고 있었다.
더군다나 병사들의 전투가 끝나고, 이후 기가스들이 속속 전선에서 움직이기 시작했을 때 콩탄 왕국의 피해는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커질 수밖에 없었다.
그 무렵이었다.
이제르트 백작가의 병력이 전선에 도달한 것은 말이다.
2.
문수르는 자신했다.
‘넓은 전장을 기준으로 싸운다면, 이제르트 백작군이 패배할 이유는 하나도 없다.’
이 전쟁, 콩탄 왕국에게는 불리할지 몰라도 이제르트 백작군에게는 압도적으로 유리했다.
전장의 크기 때문이었다.
페스로 제국과 콩탄 왕국 사이의 국경이 곧 전장이나 다름없는 상황에서, 이제르트 백작군에는 절대적인 도우미가 있었다.
GPS시스템이다.
적의 위치, 적의 이동경로 그 대부분의 것을 파악할 수 있는 이제르트 백작군.
심지어 이제르트 백작군의 주축이 되는 아이언히트는 그 어떤 기가스들보다 기동력이 뛰어났다.
문수르가 지휘하는 이제르트 백작군은 게릴라전을 통해서 연전연승을 거두었다.
이제르트 백작군이 전장에 뛰어든지 보름도 되지 않아서, 이제르트 백작군에 의해 파괴된 페스로 제국의 기가스 숫자가 50여 기가 넘어갈 정도였다.
그건 엄청난 피해였다.
그런 이제르트 백작군의 활약이 페스로 제국의 몸을 저도 모르게 움츠리게 만들었다.
동시에 이제르트 백작가의 명성이 전장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3.
무그 백작.
페스로 제국의 귀족이자, 제국이 보유한 3배 급 기가스 중 하나인 레드 스톰의 주인이기도 한 그는 페스로 제국에서 호전성으로는 슈페언 백작과 순위를 다투는 인물이었다.
더불어 슈페언 백작의 소식을 들었을 때 가장 기뻐하던 자이기도 했다.
“하하! 드디어 그 슈페언 백작이 죽었군.”
아직 슈페언 백작의 시체가 발견된 것도, 공식적으로 그의 죽음이 선언된 것도 아니었지만 무그 백작은 슈페언 백작을 죽은 인간 취급했다.
더불어 무그 백작은 이게 하늘이 준 기회라고 생각했다.
“그래, 차라리 전쟁이 낫지! 이제까지 제국이 몸을 웅크린 채 있었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는 거야.”
무그 백작은 필시 전쟁이 일어나리라 생각했다. 그의 감이 그렇게 말해주고 있었다.
때문에 무그 백작은 그 어떤 귀족들보다 빠르게 병력을 모으고, 당장 전장으로 떠날 준비를 끝냈다.
이윽고 무그 백작이 전장에 도착했을 때, 당연한 말이지만 국경에 모여있던 귀족들은 무그 백작은 총책임자로 받들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무그 백작은 3배 급 기가스의 주인임과 동시에 제국에서도 내놓라하는 세력가 중 한 명이었으니까. 그런 그를 수하 부리듯 부릴 수 있는 자는 세상천지에 카이탄 황제, 그밖에 없었다.
자연스럽게 모든 것이 무그 백작을 중심으로 재편됐다.
더불어 전장의 모든 상황들이 무그 백작 앞에 도착했다.
그렇게 해서 무그 백작이 받은 것은 감탄이 나올 정도로 훌륭한 승전보가 아니라, 참혹할 정도의 패전소식들이었다.
무그 백작은 이를 갈았다.
“이 무능한 것들!”
무그 백작이 귀족들을 모아 호통을 내질렀다. 평소에도 다혈질로 유명한 그다.
그런 그의 호통 소리에 귀족들이 저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감히! 감히 콩탄 왕국을 상대로 패배를 해? 제국의 역사에 먹칠을 해도 정도가 있지!”
“무, 무그 백작님…… 하오나 콩탄 왕국 소속의 이제르트 백작군은 너무나도 신출귀몰합니다.”
“맞습니다. 마치 귀신처럼 우리들의 위치를 파악하고, 귀신처럼 공격을 한 후에 귀신처럼 사라집니다.”
“추격을 하고, 포위망을 만드려고 해도 도무지 잡을 수가 없습니다. 전력을 집중해서 함정을 파놓아도 절대 걸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걸 어떻게 아는지, 전력의 공백이 생긴 지역에 타격을 줍니다. 때문에 어설프게 병력을 한 곳에 집중할 수도 없는 상황입니다.”
귀족들은 변명을 했다.
그러나 무그 백작은 그 변명이 듣기 싫었다.
“웃기는 소리 하지 마! 고작해야 콩탄 왕국의 귀족 나부랭이 하나 때문에 지금 제국군이 국경에서 움직이지 못한다고 하는 건가? 고작 귀족 나부랭이 하나 때문에?”
무그 백작이 화를 낼만한 상황이긴 했다.
이제르트 백작군의 등장 이후 페스로 제국군의 거칠 것 없던 진격은 멈출 수밖에 없었다.
그뿐인가?
오히려 전선이 뒤로 밀린 상황이었다.
말 그대로다.
단순히 패배한 게 아니라, 패퇴한 것이다.
그러나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게, 이제르트 백작군은 너무나도 신출귀몰하게 전장을 헤집었다. 어설프게 병력을 분배해두면 이제르트 백작군의 먹잇감이 됐다.
결국 제국군이 내릴 수 있는 결정은 이제르트 백작군도 쉽게 덤빌 수 없을 정도로 전력을 뭉쳐두는 것인데 전력을 뭉쳐두면 자연스럽게 활동범위가 줄어들 수밖에 없다.
콩탄 왕국의 병력들은 그 틈을 노리고 잃었던 지역을, 영지를 되찾고 있었다.
“그냥 치고 들어가면 되잖아!”
그러나 이 상황을 무그 백작은 단순하게 생각했다.
“이제르트 백작군만 있다면, 동시에 공격을 하면 될 텐데, 그걸 못하고 있다니!”
이제르트 백작군이 대여섯 군단도 아니고, 결국 영지 한 개 분량의 병력일 터.
페스로 제국과 콩탄 왕국이 마주하는 국경은 길고 넓다.
그 국경지역에 동시다발적으로 공격이 이루어지면 이제르트 백작군이 막을 수 있는 건 한두 곳뿐이다.
그럼 되는 거다.
열 곳을 치면 두 곳은 패배하더라도 나머지 여덟 곳을 승리할 테니까.
단순한 논리였다.
그러나 전쟁에서는 가끔 이런 단순한 논리가 먹힐 때도 있는 법이다.
물론 이 논리는 한 가지 전제조건이 있다.
분명히 피해를 보는 자들이 생긴다는 것. 달리 말하면 적당한 병력을 이제르트 백작군에게 미끼로 주고, 이제르트 백작군이 미끼에 시선이 끌린 사이 다른 전장에서 승리를 거두는 작전이니까.
이제까지는 그 작전을 생각한 자는 있어도 입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솔직히 지금 전장에 온 자들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전공을 통해 자신의 입지를 넓히는 것이지, 전장에서 개죽음을 당하는 게 아니다.
그러나 이제는 아니었다.
무그 백작이 모든 작전권을 가진 이상, 그의 논리대로 움직일 것이다.
“당장 병력을 재편한다.”
4.
문수르는 두 눈을 감았다.
- 주인님 괜찮으십니까?
로이드가 말을 걸어왔다. 문수르는 두 눈을 감은 채로 입을 열었다.
“로이드, 괜찮을 것 같냐?”
- 글쎄요, 지금 주인님의 몸상태는 지극히 정상입니다.
계속되는 전투.
그러나 그렇게 전투를 치른 것치고 문수르는 지치지 않았다. 지칠 이유가 없었다.
로이드가 적당한 표적을 찾아내고, 그에 따른 공격작전을 수립하면 그 작전을 따르면 된다.
강행군?
아니다.
로이드는 최대한 이제르트 백작군이 감수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만 움직이고 있었다.
수십 번이 넘는 전투를 치렀지만, 생각보다 피로감은 덜했다.
무엇보다 계속되는 승리는 조금의 피로감마저 무색하게 만들었다.
이제르트 백작군의 사기는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다.
병사들마저 피로감을 느끼지 못하는데, 문수르가 피로감을 느낀다는 건 말이 안 된다.
로이드의 말이 맞다.
문수르는 힘들지 않았다. 그의 몸에서는 여전히 힘이 넘치고 있었고, 그 무수히 많은 전투에서 단 한 곳의 상처도 입지 않았다.
문수르도 알고 있다. 자신이 멀쩡하다는 것을 말이다.
그러나 그런 문수르의 머릿속은 복잡하기 그지없었다.
“로이드, 하나만 묻자.”
- 예, 얼마든지.
“이번 전쟁이 끝나게 되면…… 이제르트 백작가는 필시 반석에 오르는 거겠지?”
- 주인님과 제가 세운 계획과 상황이 맞아 떨어진다면, 이제르트 백작가는 향후 수백 년 동안 영광을 누릴 수도 있을 겁니다. 최소한 백 년 내에는 콩탄 왕국 최고의 가문이 되겠지요.
이리아가 잡혀간 이후, 문수르는 각오를 다졌다.
가장 빠른 시일 내에 노크맨으로서의 역할을 완료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나는 이제 더 이상 이곳, 케르빈 월드에 남을 필요가 없어지는 건가?”
- 그건 아마도 회장님께서 판단하시겠지요.
“내가 판단할 수는 없는 건가?”
- 이 문제는 잘 모르겠습니다. 죄송합니다.
로이드가 사과를 했다. 문수르는 피식, 웃었다.
끝이 다가오고 있다.
‘그래, 모든 소설은 프롤로그가 있다면 에필로그도 있는 법이지.’
이번 전쟁이 끝나게 되면, 필시 페스로 제국과 콩탄 왕국의 정치 관계가 크게 바뀔 것이다.
아니, 바꾸게 만들 것이다.
그래야만 이제르트 가문의 위치가 견고하게 바뀔 테니까.
그 후에 문수르의 역할…… 문수르는 그걸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무엇을 해야 할까?’
한석균 회장과 한 약속이, 계약이 끝난다면 과연 문수르는 무엇을 해야 할까?
무슨 길을 걸어야 하는 거지?
그때였다.
- 주인님.
“무슨 일이야?”
- 국경 근처에 3배 급 기가스로 보이는 물체가 도착했습니다. 붉은 기체인 걸 보면, 아마도 레드 스톰인 듯합니다.
“레드 스톰이면…… 무그 백작이군.”
무그 백작이란 말에 문수르의 눈빛이 달라졌다.
솔직히 말해서 지금 이제르트 백작군이 피로감을 느끼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적들의 수준이 낮았기 때문이다.
어중이떠중이들이었다.
기가스가 있어도, 병력이 있어도 제대로 써먹지 못하는 자들이었다.
페스로 제국은 전쟁을 통해 일어난 제국이었지만, 최근 십여 년 동안의 평화는 페스로 제국이란 맹수의 덩치만 키웠을 뿐, 어금니와 발톱의 날카로움은 도리어 빼앗아갔다.
그러나 그래도 제국은 제국이다. 그 제국이 쌓아온 역사, 그 역사에 축적된 본질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제국에는 강자들이 넘쳐난다.
또한 몸집이 커진 것, 그것 역시 충분히 위협적이다.
무그 백작이 나섰다는 건, 전쟁의 국면이 백팔십도 달라질 수 있다는 의미였다.
그리고 문수르 역시 이런 상황을 어느 정도 예측하고 있었다.
아니, 오히려 늦은감이 있었다.
“이제야 제국도 제대로 움직이는군.”
무그 백작이 오기 전까지 제국은 적지 않은 피해를 입었다. 특히 가장 큰 피해는 자존심이 뭉개졌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아니다.
무그 백작을 중심으로 국경에 모인 병력들이 모일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보다 체계적이고 효율적인 작전을 시행할 것이다.
“숫자로 밀어붙이겠지.”
머릿수로 밀어붙이는 건 무식하지만 그 어떤 전술보다 효과적이고, 위력적이다.
이미 국경 근처에 모인 제국군의 숫자는 적지 않다.
그들을 이용해서 동시에 여러 곳을 타격한다면, 제 아무리 이제르트 백작군이 신출귀몰하다고 해도 전부 막을 수 없다.
이 정도 상황은 문수르도 예측했다.
예측했기에 그에 대한 카운터도 만들어 두었다.
“로이드.”
- 무그 백작의 위치를 파악 이후 동선을 추측 중입니다.
“좋아.”
문수르가 준비한 카운터.
그건 다름 아니라 무그 백작, 그를 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