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4화
5.
이제르트 백작가의 대표로 온 인물은 다름 아니라 마구르였다.
마구르는 오랜만에 온 왕도의 모습을 보며 숨을 골랐다.
“정말 오랜만이네.”
페르코 아카데미를 졸업하기도 전에 왕도를 떠나 이제르트 가문의 가신이 되었다.
그 이후 여러 일들을 했다.
뿌듯했다.
마구르는 솔직히 말해서 이제르트 가문에서의 나날들이 쉽거나, 편하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이제르트 백작가를 보필하면서 무언가를 한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뿌듯했다.
많이 배우기도 했다.
이제르트 백작가는 신세계였다. 온갖 것이 있었다. 스스로가 지식을 쌓고자 원하면 세상 그 어느 곳보다 쉽게 지식과 접근할 수 있었다. 또한 그 지식들 중에서는 파격적인 것도 있고, 경악스러운 것도 있었다.
그 사실을 느낀 건 비단 마구르 뿐만이 아니었다. 아직 대륙 전체에 알려지거나 하진 않았지만 나름 뜻이 있고, 목표가 있는 학자들 등은 지금 알음알음 이제르트 백작가에 모이고 있었다.
때문에 마구르는 자신이 평생 이제르트 백작가 혹은 이제르트 부속령에서 지내다 죽을 줄 알았다.
나쁜 소리가 아니다.
그렇게 살다 죽으면 정말 여한이 없을 것 같았다.
그런 그가 지금 왕도에 온 것이다.
“언제나 그렇지만…… 왕도의 분위기는 무겁기 그지없구나.”
이제르트 백작가를 대표해서 말이다.
6.
이제르트 백작가.
최근 콩탄 왕국에서 가장 기세가 좋은 가문이다.
그러다가 최근 한 사건을 계기로 이제르트 백작가는 필로스 왕과 제이머스 공작조차 어찌할 수 없는 위치에 서게 된다.
그 사건은 당연히 슈페언 백작 사건이다.
슈페언 백작과 이제르트 백작의 전투, 이후 이제르트 백작가가 승리자로 남게되면서 콩탄 왕국은 물론 대륙 대부분의 이들은 생각했다.
이제르트 백작가의 저력은 상상 이상이다!
당연히 많은 이야기가 오고갔다.
일부는 말했다.
“상식적으로 막강한 저력을 보유하지 못한 상황에서 테블스 산의 몬스터를 상대한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는 일이겠지.”
“더군다나 이제르트 가문은 할루이 이제르트를 배출한 가문 아니었던가? 그 위대한 마법사마저 낳은 가문에 저력이 없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는 일이지.”
“오러 마스터 문수르 경이 아무 것도 보지 않고 이제르트 가문을 보필할 리 만무할 터!”
“이제르트 백작가야 말로 콩탄 왕국의 실세가 아닐까?”
뭐, 적당한 오해과 추측이 섞인 말이었지만 이제르트 백작가는 딱히 이런 말들에 대해서 부정할 생각이 없었다.
어쨌거나 이제르트 백작가의 위상은 하루가 다르게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솟아올랐다.
보통 이렇게 되면 자연스럽게 이제르트 백작가의 이름을 빌려 호가호위(狐假虎威)하려는 무리들이 등장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이게 웬걸?
이제르트 백작가는 이제까지 이러다할 정치적 동맹을 만들지 않은 상황이었다.
오히려 콩탄 왕국에서 왕따가 나름 없는 처지 아니었던가?
호가호위도 어느 정도 명분과 구실이 있어야 가능한 거지, 호랑이의 이름은 아무런 인연도 없는 종달새가 빌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런 와중에 마구르가 이제르트 백작가를 대표에 왕도에 온 것이다.
마구르는 처음이었다.
“폴 남작이라고 하네. 예전부터 이제르트 백작님을 존경했었네. 부디 자리를 한 번 마련해줬으면…….”
“후타 자작이라 하오. 내 예전부터 문수르 경을 존경하였소. 꼭 한 번 자리를 마련해주십시오.”
“호루라 상단의 상단주 호루라입니다. 부디 이제르트 백작가를 도울 수 있는 기회를 주십시오. 뭐든 일이든 앞장서서 하겠습니다.”
이제르트 백작가의 대표로 마구르가 왔다는 사실이 왕도에 퍼지자, 무수히 많은 이들이 마구르와의 만남을 요청했다.
그들은 작위를 받지도 않은 마구르 앞에서 스스로 자세를 낮추며 온갖 부탁을 했다.
그 부탁을 일일이 거절하는 것만으로도 하루가 훌쩍 지나갈 정도였다.
“이거 정말 익숙해지지 않는군…….”
마구르.
그는 평민 출신이었다. 이제까지 귀족 앞에서 제대로 허리 한 번 펴보지 못했던 자다.
하물며 페르코 아카데미에서는 어땠는가?
귀족가의 자제보다 공부를 잘한다는 이유만으로도 살해 위협까지 받았었다.
그래서 포기했다.
페르코 아카데미에서 천재소리를 들었던 마구르는 죽기 싫어서, 귀족들과의 경쟁 대신 포기를 택했다.
그 선택 후에 희희낙락 지내긴 했지만 속마음은 그게 아니었다.
억울했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이유로 무언가를 포기해야한다는 것이, 공부를, 성적을, 미래를 포기해야 한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억울했다.
그런데 지금 상황이 역전된 것이다.
귀족이라고 떵떵거리는 이들이 오히려 마구르 앞에서 자세를 최대한 낮추고 있었다.
또한 마구르에게는 적지 않은 권력이 생겼다.
필로스 왕과의 협상을 위해서 왕도에 올라왔지만, 그는 충분히 원한다면 이제르트 백작가의 이름을 빌려 권력을 휘두를 수 있다. 그럴 만한 자격과 능력이 있다.
물론 그럴 일을 할 시간은 없었다.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개인적인 만족을 위해서 왕도에 오른 게 아니다.
마구르에게는 이루 말할 수 없는 막중한 책임이 있었다.
7.
언제 어느 순간 전쟁이 일어날지도 모르는 전선.
아직 이러다할 교전은 단 한 차례도 없엇지만 이미 국경에 밀집한 페스로 제국과 콩탄 왕국의 병사들은 신경이 곤두설대로 곤두선 상황이었다.
폭발직전이다.
“빌어먹을 언제까지 이 짓을 해야 돼?”
“싸울 거면 그냥 싸우던가, 언제까지 이렇게 똥개마냥 국경을 뛰어다녀야 하는 건지…….”
병사들은 차라리 전쟁이 나는 게 속편할 것 같다는 정말 무시무시한 소리까지 하고 있었다.
그 무렵이었다.
“알란, 알란 왜 그래?”
“어디 아픈 거야?”
계속되는 강행군 때문이었을까?
병사들 중 일부가 이상현상을 보이기 시작했다. 피로감을 호소하는 것인지, 아니면 어떠한 병이 발병한 건지 알 수는 없지만 갑작스런 고열에 드러눕기 시작했다.
그 숫자는 얼마 안 됐다.
백명 중 한 명 정도.
때문에 수뇌부들은 그 부분에 대해서는 별 신경을 쓰지 않았다. 백 명이 그냥 길을 걷다 보면 한 명 정도는 지쳐 쓰러지거나 탈이 나는 게 보통이다. 또한 전염병이 아닌 이상 그런 부분을 일일이 신경 쓰는 건 무의미한 짓이 아니라 낭비였다.
오히려 그런 부분을 염두에 두고 병력 편성을 했다.
문제될 건 없었다.
그러나 아무도 몰랐다.
그 병사들로 인해서 국면이 바뀔 줄은…….
8.
“으악!”
그 비명소리가 모든 걸 갈랐다.
갑작스런 비명소리에 대치 중인 국경에서 움직이던 병사들은 저도 모르게 움직였다.
그 순간 보였다.
“앗!”
“제국군이다!”
“왕국군?”
페스로 제국의 병사들과 콩탄 왕국으 병사들, 국경 최전선에서 활동하던 그 병사들은 서로를 마주봤다.
마주보는 순간 그들은 아주 잠시 동안 침묵했다.
움직이진 않았다.
그들은 모르지 않았다.
‘여기서 교전이 일어나면…….’
‘전면전으로 번질 가능성도 없진 않다.’
무리를 이끄는 우두머리들, 대장들은 생각했다. 아직 상부에서 교전 명령은 내리지 않았다.
오히려 반대였다.
교전 상황이 일어나더라도 최대한 피할 것. 공격보다는 방어를 택하라고 했다.
아직 이러다할 교전은 없었다. 그저 마주쳤을 뿐이다. 상부의 명령도 없다. 공격할 이유가 없다.
“뒤로…….”
“물러난…….”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페스로 제국의 병사들과 콩탄 왕국의 병사들이 동시에 물러나려고 하는 순간.
“죽어!”
무언가가 터졌다.
페스로 제국군에서도, 콩탄 왕국군에서 갑작스레 병사들이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양쪽 합쳐서 네 명에 불과한 숫자였다.
그러나 그 둘은 서로의 적진을 향해 돌진했다. 무기를 앞세운 채, 입에 거품을 문 채로 말이다.
갑작스런 상황이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었기에 대처도 늦었다.
푸욱!
그 순간 적진을 파고 든 왕국군의 창이 멀뚱히 서있던 제국군의 가슴팍을 찔렀다.
“크악!”
그 짧은 비명이 전부였다. 창에 찔린 병사는 그 비명을 끝으로 이러다할 신음소리도 흘리지 않은 채 그 자리에서 사망했다.
즉사였다.
그 순간 그 제국군의 옆에 있던 동료가 반사적으로 허리춤에 차고 있던 검을 꺼내들었다.
츠릉!
검은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빠른 궤적을 그렸다.
서걱!
검은 먼저 공격한 왕국군의 목덜미를 그었다.
그와 비슷한 광경이 왕국군 진형에서도 생겼다. 제국군에서 뛰쳐나온 병사의 검에 왕국군의 병사가 당했고, 그 옆에 있던 동료가 제국군을 공격한 것이다.
이 순간 무언가가 틀어졌다.
9.
속보였다.
“뭐라고?”
“국경지역에서 교전이 있었습니다.”
“교전? 왕국군과?”
페스로 제국 소속 텅스 남작은 갑작스런 속도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교전이 이루어졌다.
국경 사이에서 탐색 중이던 부대와 아마도 비슷한 목적으로 활동 중이던 콩탄 왕국의 부대가 충돌했다고 한다.
말이 안 된다.
“교전 명령은 내리지 않았잖아?”
“그게…… 정확한 사정은 모르지만 왕국군이 먼저 선공을 취한 모양입니다.”
기사는 대답했다.
물론 대답하는 기사는 속으로 생각했다.
‘우리 쪽에서도 같이 공격했다는 말은…… 아무래도 좀 그렇지?’
그 교전에서 살아남은 이들에게 들은 정보에 따르면 양쪽에서 동시에 공격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그러나 기사는 제국이 먼저 공격했다는 부분은 제외했다.
그건 분명한 실수였으니까. 만약 문제가 생긴다면, 그 부분에 대한 처벌이 있다면 기사 역시 처벌을 당할 가능성이 높았다.
더군다나 제국군이 먼저 잘못한 게 아니라 왕국군도 먼저 공격을 시도했다고 하지 않았는가?
덮어 씌우면 된다.
‘젠장, 하필 일이 이렇게 꼬여서.’
기사는 원했다.
이번 일이 왕국군의 실수로 인해 생긴 일이라는 것을 말이다.
그러나 기사의 그 선택은 더 큰 문제의 시발점이 됐다. 텅스 남작은 기사의 말을 듣고 생각했다.
‘감히 왕국군이 먼저 선공을 했다, 이거지?’
텅스 남작은 원래 콩탄 왕국과는 거리가 먼 곳의 영주였다. 그런 그가 이곳 머나먼 국경까지 온 이유는 하나였다.
잔공을 세우기 위해서다.
그래서 일부러 최전선의 탐색 부대 지휘를 자처했다.
그런데 막상 전쟁이 일어날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상부에서는 교전을 최대한 피하라고만 했다.
솔직히 텅스 남작은 그걸 이해할 수 없었다.
누구보다 압도적인 전력을 가진 제국이 이렇게 전쟁을 피한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으니까.
아니, 제국이 언제부터 이런 소극적인 자세를 취했단 말인가?
페스로 제국은 말 그대로 제국이다.
제국이 맞다고 하면 아닌 것도 맞는 거다.
그런데 고작 콩탄 왕국 따위에게 쫄아서 정치적 수작이니, 뭐니…… 텅스 남작은 그게 굉장히 부끄러운 짓이라고 생각했다.
동시에 전쟁이 일어나야만 자신이 지금의 위치가 아닌 보다 높은 위치에 도달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제까지 너무 평화가 길었다. 평화는 마냥 달콤하지만은 않았다. 텅스 남작처럼 무(武)를 연마하는 귀족들에게는 오히려 독(毒)이었다. 이러다할 기회를 잡지 못한 채 영지에서 썩어문들어지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기회가 생긴 것이다.
‘좋아, 이정도 명분이면 충분하지.’
그게 텅스 남작을 움직이게 만들었다.
“병력을 모아라. 죽은 병사들의 복수를 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