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3화
<74화. 효시.>
1.
카이탄 황제는 말했다.
“노운 경, 준비는 끝났는가?”
카이탄 황제와 독대 중이던 노운 경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폐하, 1년 안에 모든 것이 종결될 것입니다.”
“그래…… 노운 경이 그러하다면 그러한 거겠지. 슈페언 백작의 일은…….”
“제국 그리고 황제 폐하를 위한 일 아닙니까? 슈페언 백작께서도 만족하셨을 겁니다.”
“죄는 내가 짊어져야겠지.”
카이탄 황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그의 얼굴은 흑빛이었다. 마치 당장이라도 죽어버릴 사람의 그것처럼 말이다.
2.
페스로 제국과 콩탄 왕국이 마주보고 있는 국경.
“움직여라!”
“빨리 움직여라! 다음 포인트까지 휴식은 없다! 뒤쳐지는 자는 용서치 않겠다!”
그 국경이 들썩이고 있었다.
적지 않은 병력들 그리고 숨기려고 해도 숨길 수 없을 만큼 거대한 기가스들이 움직이고 잇었다.
국경을 기준으로 페스로 제국도 움직였고, 그에 대응하듯 콩탄 왕국의 병력도 움직였다.
국경으로 병력이 모이고 있는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아직 이러다할 교전이 없는 상황에서 페스로 제국과 콩탄 왕국은 조금이라도 전술적 이점을 차지하기 위해서 서로의 위치에 따라 다시 위치를 바꾸는 등, 쉴 새 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그러나 전면적인 교전은 없었다.
대비하라, 라는 명령은 나왔지만 교전하라는 명령은 나오지 않은 탓이다.
사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아직 논의가 많았다.
콩탄 왕국 그리고 페스로 제국, 두 국가 내부적으로도 이미 두 가지 의견이 충돌 중이었다.
“전쟁은 위험합니다.”
“외교를 통해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전쟁을 통한 해결은 서로에게 피해만 줄 뿐입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모든 이들이 전쟁을 원하는 건 아니었다. 심지어 페스로 제국 내에서도 전쟁을 원치 않은 자들이 적지 않았다.
콩탄 왕국은 두말할 것도 없다. 콩탄 왕국의 귀족들 대부분이 전쟁을 피할 수 있다면 어떻게든 피하기를 소원했다. 필로스 왕조차 그런 소망을 가지고 있었으니 두말할 것도 없을 터.
사실 페스로 제국이 우호적인 제스처를 취하기만 한다면 절대 전쟁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최소한 콩탄 왕국이 선공을 취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당연히 콩탄 왕국은 수비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결국 전쟁의 스위치는 페스로 제국의 손에 달리게 된 것이다.
3.
무블 공작은 황도에 올라왔다.
그는 황제 폐하와의 알현을 요청했다. 그 요청은 무려 일주일 뒤에나 받아들여졌다.
‘빌어먹을!’
그 사실이 무블 공작은 기분을 뒤틀리게 만들었다.
‘어째서 일이 이런 식으로 흘러가는 것인지!’
무블 공작.
그는 슈페언 백작이 패배했다는 소식에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기쁨의 환호성을 내질렀다.
기회를 잡았다고 생각했다.
특히 가장 골칫거리였던 슈페언 백작을 추락시켰다는 사실이 굉장히 중요했다.
현재 페스로 제국 내를 가르고 있는 일곱 황자의 파벌들.
그런 파벌들은 저마다 특성이 있다.
정치력을 무기로 삼는 곳이 있고, 반대로 강력한 힘! 무력을 무기로 삼는 곳도 있다.
전자의 대표적인 경우가 제국 중앙정계에서 큰 입김을 가진 무블 공작이다.
반대로 후자의 대표적인 경우가 페스로 제국에서도 손꼽히는 강력한 기사이자, 영주인 슈페언 백작이다.
그러나 오랜 역사 속에서 정치가 아니라 검으로 국가를 일으켜세웠던 페스로 제국에서는 아무래도 정치력보다는 무력이 더 무게감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무력은 곧 정치력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슈페언 백작 역시 무력을 이용해 막강한 정치적 입지를 구사하지 않았던가?
무블 공작은 그게 언제나 속이 탔다.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오히려 자신의 입지가, 자신이 미는 황자의 파벌 입지가 줄어드는 걸 걱정했고 실제로도 줄어들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슈페언 백작의 몰락은 단순히 한 개인의 몰락, 한 파벌의 몰락이 아니었다.
일종의 상징이었다.
무력만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의미의 상징!
그러나 설마 그 슈페언 백작의 죽음까지는 예상하지 못했다.
‘최악이야. 최악의 시나리오가 만들어졌어.’
슈페언 백작의 죽음.
물론 아직 그 누구도 슈페언 백작의 죽음을 확인한 건 아니다. 시체를 확인한 것도 아니다.
정확한 사실은 세 가지다.
슈페언 백작이 페스로 제국으로 향하고 있었다는 것.
그러던 중에 콩탄 왕국의 국토 내에서 공격을 당했다는 것.
그리오 이후에도 슈페언 백작의 소식은 없다는 것.
어쨌거나 이번 일을 계기로 페스로 제국은 분노했다. 분노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제국의 귀족이 타국의 땅에서 당했다.
그것도 그냥 귀족이 아니다.
슈페언 백작!
제국 최고의 기사들 중 한 명이다. 그런 그가 패배했다는 소식에 대한 충격이 가시기도 전에 그가 공격을 당해 소식이 사라졌다.
당연히 페스로 제국은 콩탄 왕국과의 전쟁을 해야 한다는 주장이 생기기 시작했다.
무블 공작 입장에서는 좋을 것 없는 이야기다.
까놓고 말해서 전쟁이 일어나면 결국 가장 큰 이익을 받는 건 강력한 힘, 무력을 지닌 자들이다.
주둥이만으로는 전공(戰功)을 세울 수가 없는 법이니까.
또한 중앙정계에 달라 붙어 있어야만 제 입지를 구축하고 또한 지킬 수 있는 무블 공작 입장에서는 콩탄 왕국의 국경까지 혹은 콩탄 왕국 안으로 까지 병력을 보내는 것도 쉽지 않다.
즉, 콩탄 왕국과의 전쟁이 일어나면 무블 공작이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다.
더불어 얻을 수 있는 것도 거의 없다.
반면 강한 무력을 지닌 황자 파벌들은 이 기회를 제대로 노릴 것이다. 앞다투어 콩탄 왕국으로 쳐들어갈 것이고, 전공을 세울 것이다.
그 전공의 결과에 따라서 황태자위가 달라질 수도 있다.
무블 공작 입장에서는 최악의 시나리오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도저도 시도해보지도 못하고 패배자의 길을 걷는 것이다.
그래서 카이탄 황제와의 알현을 요청했다.
어떻게든 이번 사태를 전쟁까지 비화시킬 생각이 없었다.
‘더군다나 그 문서가 밝혀지기라도 하면…….’
또한 무블 공작에게는 지금 굉장한 약점이 하나 있다.
이제르트 백작가와 암중으로 계약을 했다. 이제르트 백작가가 슈페언 백작을 쳐도 그에 대한 복수 여론이 생기지 않도록 작업을 해주겠다는 내용의 서약서를 썼다.
무블 공작이 직접 사인을 했다.
만약 콩탄 왕국이 정말 궁지에 몰리면 그것이 세상에 공개될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될까?
끝장이다.
슈페언 백작에 대한 콩탄 왕국의 공격으로 인해 일어난 전쟁인데, 무블 공작이 그 뒤를 봐줬다?
모든 비난의 화실이 무블 공작가를 향할 것이다.
정치적 생명이 끝장 나는 수준이면 차라리 다행이다. 어쩌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처벌을 받을 수도 있다.
그건 막아야 했다.
즉, 어떻게든 이번 사태가 전면전으로 번지는 것만큼은 막아야 했다.
그리고 간신히 카이탄 황제와 알현할 기회가 온 것이다.
‘어떻게든 폐하를 설득한다.’
무블 공작은 만반의 준비를 했다. 이미 정치의 세계에서는 닳을 만큼 닳은 인간이 무블 공작이다.
여우 중의 여우다.
이제까지 혀 하나로 자신의 막강한 정치적 입지를 구축한 자다.
그는 자신있었다.
카이탄 황제를 설득할 확신이 있었다.
그렇게 무블 공작과 카이탄 황제의 만남이 이루어졌다.
4.
콩탄 왕국의 주변국으로는 세 곳이 있다.
하나는 페스로 제국이다.
다른 두 곳은 아르지 왕국과 테일즈 왕국이다.
사실 아르지 왕국과 테일즈 왕국, 이 두 곳에 콩탄 왕국은 이러다할 정치적 관계가 없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국경을 맞대고 있는 범위가 크지 않다.
또한 그 두 국가와 콩탄 왕국 사이에는 강과 산맥 따위 같이 굳이 구분하지 않아도 충분히 국경선 역할이 할 만한 것들이 다수 존재했다.
마지막으로 두 국가와 콩탄 왕국은 역사적으로도 사실 이러다할 충돌 없이 서로 있는 둥 없는 둥 살아왔다.
콩탄 왕국이 그런 두 국가에 외교를 위한 사신을 보냈다.
목적은 하나였다.
“페스로 제국이 전쟁이 일으킨다면 그 칼 끝이 단순히 콩탄 왕국만을 향하진 않을 것이옵니다. 하물며 이번 전쟁의 시발점이라고 할 수 있는 슈페언 백작의 일에 대해서 콩탄 왕국은 아무 것도 모릅니다. 만약 슈페언 백작의 일이 다른 누군가의 수작에 의한 것이라면, 결단코 전쟁이 일어나서는 안 될 것이옵니다.”
페스로 제국을 막는 것.
“그러하니 부디 대의를 위하여 그리고 대륙의 평화를 위하여 콩탄 왕국에 힘을 빌려주십시오.”
그런 페스로 제국과 나름 말상대라도 하려면 결국 힘이 있어야 한다.
콩탄 왕국 혼자 힘으로는 의미가 없다.
페스로 제국의 주변국들과 콩탄 왕국이 동맹을 통해 힘을 맺고 동시에 같은 말을 해야 의미가 있는 것이다.
반응은 달랐다.
아르지 왕국은 고개를 끄덕였다.
“콩탄 왕국의 의견은 잘 들었소. 심사숙고하여 결정을 내리겠소.”
긍정적인 의견이었다.
반면 테일즈 왕국은 정반대였다.
“그 일은 어디까지나 페스로 제국과 콩탄 왕국의 일 아니오? 테일즈 왕국은 그 일에 개입할 생각이 없소.”
명백한 거절이었다.
사신들은 각자의 성과를 얻고 콩탄 왕국으로 돌아왔다. 필로스 왕의 표정은 침울했다.
‘최소한 주변국들이 힘을 모아줘야 한다.’
외교를 위하 사신을 보낸 건 두 왕국뿐만은 아니었다. 멀리 있는 칼란 왕국에도 사람을 보냈다. 하지만 거리가 거리인지라 답이 오려면 좀 더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러나 벌써부터 의견이 갈리고 있었다. 필로스 왕 입장에서는 좋을 것 없는 상황이었다.
특히 이미 페스로 제국과의 국경 상황은 일촉즉발의 상황, 당장 손가락만 가져가도 터지기 일보 직전의 상황이었다.
이쯤 되면 단순히 페스로 제국이나 콩탄 왕국의 수장이 의도하지 않더라도 전쟁이 일어날 수 있다.
애초에 전쟁이란 건 그렇게 마음대로 좌지우지할 수 있는 게 아니다.
한번 터지면 되돌릴 수 없다.
일단 전쟁이 일어나면 막고 싶어도 막을 수가 없다. 전쟁의 시발점도 마찬가지다.
역사 속 전쟁 중 상당수가 처음 그 시작은 작은 충돌 혹은 오해에서 비롯한 작은 전쟁에서 시작됐다.
지금 국경에 이렇게 힘이 몰리면 분명 오해로 인해서 교전이 생기게 된다.
교전 이후에는 전쟁은 번진다. 불처럼 번진다.
그렇게 해서 커진 전쟁은 어느 한쪽이 완벽하게 굴복하고 항복하지 않는 한 끝나지 않는다.
만역 페스로 제국과 전쟁을 한다면 굴복하는 쪽은 콩탄 왕국이 될 터!
그것 만큼은 피해야 했다.
‘대체 어떻게…….’
필로스 왕이 고뇌에 빠졌다.
그때였다.
“전하.”
“말하거라.”
“이제르트 백작가에서 사람이 도착했습니다.”
이제르트 백작가란 단어에 필로스 왕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드디어 온 것이다.
‘그래, 일단 이제르트 백작령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이제까지 필로스 왕이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사실이 있다.
다름 아니라 슈페언 백작의 패배다.
솔직히 이 부분은 아무도 모르고 있다. 아니 어떻게 이제르트 백작가가 슈페언 백작을 상대로 승리를 거둔단 말인가?
가능은 하다.
다른 귀족들이 이제르트 백작가에 힘을 실어줬다면 불가능할 건 없다.
또한 이제르트 백작가에는 나름 막강한 전력도 있으니까.
하지만 정확한 사실이 무엇인지는 모르다. 정말 귀족들이 힘을 빌려준 것일까?
그게 아니면 신의 계책을 써서 승리를 거둔 것일까?
혹시 흑마법의 힘을 빌렸을 수도?
일단 그걸 파악하는 게 중요했다. 또한 이제르트 백작가에서 나온 슈페언 백작은 제국으로 돌아가던 길에 공격을 당했다. 여기에도 의문점이 잔뜩 있다.
그래도 슈페언 백작이다.
아무리 패배했고 그 패배로 인해 전력 소모가 크다고 해도 골든 자이언트를 가진 슈페언 백작을 이러다할 흔적도 남기지 않고 처치하는 게 말처럼 쉬운 일일까?
이 부분의 문제도 이제르트 백작가가 알고 있을지 몰랐다.
그런 상황에서 이제르트 백작가의 사람이 온 것이다.
“당장 만나도록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