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9화
9.
전쟁은 전투가 끝난 것으로부터 시작된다는 말이 있다.
슈페언 백작은 문수르 앞에 패배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난 건 아니었다. 아직 슈페언 백작가 소속의 10대의 기가스들은 전부 멀쩡했다.
너무 빨린 끝난 셈이다.
슈페언 백작과 문수르의 전투는 너무 빨리 끝났다. 아직 제대로 된 전투는 시작조차 안 됐다.
“백작님!”
“젠장!”
물론 슈페언 백작과 문수르의 전투로 인한 결과, 문수르의 승리 그리고 슈페언 백작의 패배, 이것이 전장에 미치는 영향은 절대적이다. 사기가 크게 바뀔 수밖에 없다.
하지만 슈페언 백작가의 기가스 파일럿들은 백전노장이었다.
이 순간 그들은 자신들이 해야 할 일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백작님을 구한다!’
10대 기가스 전부가 부셔지는 한이 있더라도 슈페언 백작은 무조건 구해야 했다.
충분히 가능하다.
골든 자이언트는 파손 당했지만 팔 하나가 떨어졌을 뿐이다. 다리는 멀쩡하다. 시간만 벌면 충분히 도망칠 수 있다.
10대의 기가스들이 마치 하나의 몸이 된 듯, 동시에 움직였다. 그들의 목적은 단 하나!
‘저 기가스를 잡는다!’
골든 자이언트를 무릎꿇린 드래곤 파이터!
슈페언 백작가의 기가스들이 드래곤 파이터들을 향해 몸을 날리기 시작했다.
쿠웅, 쿠웅!
10대의 기가스들이, 그것도 2배 급 기가스들이 한 곳을 향해 돌진하자, 지진이 난 것마냥 땅이 울리기 시작했다.
콰앙!
슈페언 백작의 기가스들은 서로 부딪치는 것도 개의치 않았다. 또한 드래곤 파이터와의 충돌도 무서워하지 않았다. 아니, 그들은 애초에 그게 목적이었다.
몸통박치기!
말 그대로다.
무기가 아니라 몸뚱이를 내던져서 드래곤 파이터로부터 슈페언 백작을 구할 생각이었다.
드래곤 파이터 입장에서는 갑작스러운 일이다. 골든 자이언트와의 전투가 막 끝난 순간 10대의 기가스들이 전부 자신에게 덤벼드는 형세니까.
그러나 문수르는 놀라지 않았다.
오히려 충분히 예상하고 있었다.
“그래, 이렇게 나오는 게 정석이지!”
슈페언 백작이 무너지는 걸 수하들이 그냥 넋놓고 보고 있을 리가 만무하다.
또한 슈페언 백작이 무너졌다고 사기가 바닥을 칠만한 자들도 아니다.
이제까지 그들은 그 어떤 군대보다 호전적이었다. 그런 그들의 기세가 한 번에 꺾일 리 만무하다.
문수르가 와이어를 조작하기 시작했다.
‘맞서 싸운다.’
오히려 문수르는 드래곤 파이터를 앞으로 전진시켰다. 다가오는 10대의 기가스들과 맞상대를 할 생각이었다.
물론 10대1로 싸워서 이길 생각은 없었다.
드래곤 파이터의 움직임에 맞추어, 이제르트 백작가의 기가스들 역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 상황 역시 염두에 두고 짠 작전이 있다.
오히려 절호의 기회다.
무시무시한 2배 급 기가스 10대가 등을 보인 채 무질서한 행동을 보이고 있다.
그런 2배급 기가스 10대 주변에는 수십여 대의 기가스가 포위 중이다.
드래곤 파이터가 조금만 버티면, 10대의 기가스들을 상대로 조금의 시간이라도 끈다면, 전세는 단숨에 무너진다.
완승을 거둘 수 있는 것이다.
10.
카라카크는 이제르트 백작령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눈빛에는 검은 기운이 일렁이고 있었다.
“좋아.”
그는 만족하고 있었다. 지금 이제르트 백작령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말이다.
때문에 그는 멈췄다.
“지금 이제르트 백작가를 무너뜨릴 필요는 없겠지.”
그는 부르고 있었다.
테블스 산에 웅크리고 있던 괴물을, 단숨에 이제르트 백작가를 무너뜨릴 수 있는 무시무시한 괴물을!
하지만 지금 그 괴물을 멈췄다.
다시 잠에 빠지도록 만들었다.
때가 아님을 느낀 것이다.
11.
슈페언 백작가와 이제르트 백작가의 전투는 치열한 격전이었지만, 반대로 그 결과는 처참한 것이었다.
슈페언 백작가의 완패였다.
슈페언 백작의 패배 이후 슈페언 백작을 구하기 위한 기가스들의 무리한 공격.
그런 공격을 완벽하게 예측했던 이제르트 백작가의 완벽한 대처!
결과가 처참한 건 당연했다.
슈페언 백작가의 기가스들 전부가 파괴됐다. 그것들은 전부 이제르트 백작가의 노획물이 되었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영지 밖에서 도망치는 영지민들을 잡기 위해 대기 중이었던 슈페언 백작가의 사병들 역시 후방으로 빠진 아이언히트와 탈라트 부족의 엘프들의 손에 시체가 되어버렸다.
인과응보라고 해야할까?
이제까지 도망자를 학살하던 그들이 이번에는 도망자가 되어버린 것이다.
사병들 역시 전부 죽었다.
하나도 놓치지 않고, 확실하게 끝장을 냈다.
결과적으로 이번 전쟁에서 살아남은 슈페언 백작가 소속의 인물은 여덟 명이었다.
슈페언 백작과 살아남은 일곱 명의 기가스 파일럿들. 그들이 전부였다.
그들은 무장이 해제된 채 포로가 되어 이제르트 백작가에 끌려갔다.
물론 그들의 주둥이는 여전히 살아있었다.
“포로의 대우를 해주시오.”
“이런 처우는 용납할 수가 없소!”
슈페언 백작가 소속의 기사들이 소리를 질렀다. 문수르는 그런 기사들은 감옥에 집어넣었다.
식사는 희여멀건 스프와 딱딱하게 굳은 호밀빵이 전부였다.
다른 건 없었다.
오직 슈페언 백작에게만 편의를 제공했다. 그 편의란 것은 혼자 감옥을 쓸 수 해주는 특권이었다.
그건 굉장힌 무례였다.
상대는 제국의 귀족이었다. 그것도 보통 귀족이 아니라, 페스로 제국에서 떵떵거리며 막강한 권세를 누리는 슈페언 백작이었다.
포로로 잡은 건 그렇다 쳐도, 이렇게 감옥에 처박은 채 식사조차 제대로 제공하지 않는 건 페스로 제국이 콩탄 왕국을 침범한다고 해도 이상할 게 없을 정도의 일이었다.
사실 이제르트 백작가 내에서도 슈페언 백작에 대한 이런 대우를 놓고 말이 없진 않았다.
상대의 명성 그리고 위치를 생각해서 최소한의 예의는 갖추는 게 도리가 아니겠느냐, 하는 말이 나왔다.
하지만 문수르는 단호했다.
“슈페언 백작에 대한 특별대우는 없습니다. 또한 그는 포로가 아닙니다. 이제르트 백작령에 칼을 휘두른 범죄자입니다. 범죄자는 감옥에 수감되고, 최소한의 먹을거리만이 제공되는 게 이제르트 백작령의 법도입니다.”
문수르가 이렇게까지 나오자 그 누구도 반발하지 못했다.
이제르트 백작 역시 이런 문수르의 행동을 그냥 두고만 봤다. 이러다할 제지는 없었다.
그럼 대체 문수르는 왜 이런 선택을 한 것일까?
슈페언 백작에 대한 이런 처우는 필시 나중에 이제르트 백작가에 정치적으로 큰 부담을 줄 텐데?
그 이유는 간단했다.
‘제국은 믿지 못한다.’
페스로 제국의 무블 공작과 협약을 맺었다. 합의를 이루었다. 문서로도 남겼다.
그러나 그 협약에는 몇 가지 함정이 존재한다.
슈페언 백작을 콩탄 왕국의 귀족들이 연합하여 공격했을 경우, 페스로 제국이 제국 차원에서 콩탄 왕국에 보복을 하는 걸 막도록 노력하겠다, 라는 것이 협약의 내용이다.
노력이다.
막아주겠다는 게 아니라, 노력하겠다는 말이다.
애초에 페스로 제국을 움직이는 건 결국 황제다. 황제가 콩탄 왕국으로 쳐들어가라고 하면 귀족들은 따라야 한다. 무블 공작이 나름 강력한 권세를 누린다고 해도 황제 이상은 아니다.
단지 무블 공작이 정치적 수완을 발휘해 그걸 막아주겠다고 협약서를 써줬을 뿐이다.
물론 이 협약서는 무블 공작에게도 부담스럽다. 이 협약서 내용이 공개되면 무블 공작에게도 정치적 공격이 날아올 테니까.
하지만 이 협약서만 믿고 제국이 콩탄 왕국을 치지 않으리라 생각하는 건 멍청한 짓이다.
나중을 기약해야 한다.
아니, 이미 주사위는 던져졌다.
‘제국과는 마찰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문수르는 바보가 아니다.
제국에 갔을 때, 헤올라 자작을 만났을 때, 그곳에서 몇 가지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제국은 지금 터지기 일보직전이다. 겉으로야 황제의 강력한 카리스마와 권력 때문에 번듯해보이지만, 후계자는 아직까지 정해지지 않은 상황에서 후계자들이 서로 치고받고 싸우고 있다.
물론 여기까지는 누구라도 알 수 있는 사실이다.
그러나 문수르는 최근 콩탄 왕국을 중심으로 일어났던 페스로 제국의 권력 싸움에 초점을 맞췄다.
그 권력 싸움이 갑작스레 일어났을리 만무하다.
필시 이유가 있다.
특히 이제까지 권력쟁투에서는 이러다할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던 아히만트 백작이 왜 콩탄 왕국의 정치에 개입하려고 했을까?
거기까지 생각이 닿는 순간, 문수르는 어느 정도 직감했다.
‘페스로 제국이 황제가 후계자를 정하려고 한다.’
그때부터 문수르는 어떤 식으로든 케르빈 월드에, 대륙에 거대한 폭풍이 올 것이라 생각했다.
어쩌면 이제까지의 세력구도가 크게 흔들리는 대전쟁이 일어날수도 있다.
이런 대전쟁은 외면한다고 해서 외면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맞서 싸워야 한다.
그리고 그걸 대비해서 문수르는 슈페언 백작을 이용해야만 했다. 여기서 그를 처치하는 건, 정말 최악의 수다. 그렇게 되면 이제르트 백작가는 궁지로 몰린다.
그를 감옥에 넣고, 그런 대우를 한 건 보다 확실한 협상을 하기 위해서였다.
문수르, 그가 감옥에 수감된 슈페언 백작을 찾아간 건, 그가 수감된지 열흘이 흐른 뒤였다.
12.
슈페언 백작의 몰골은 초췌했다.
그럴 수밖에 없다.
전투에서 패배한 이후에 곧바로 정신을 차릴 시간도 없이 감옥에 수감되었다.
그 이후에는 정말 간신히 죽지 않을 정도의 식사만이 보급됐다심지어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나름 슈페언 백작의 편의를 위해서 큰 감옥을 그 혼자 쓸 수 있도록 이제르트 백작가가 배려를 해줬지만, 슈페언 백작 입장에서는 고독만을 곱씹게 되느 고문 아닌 고문이나 마찬가지였다.
처음에는 미칠 것 같았다.
그러나 반대로 시간이 흐를수록, 슈페언 백작의 머릿식은 차갑게 식어가기 시작했다.
분노로 가득찼던 가슴도 식기 시작했다.
또한 혼자 있다보니 생각할 수 있는 시간 역시 길어졌다. 슈페언 백작은 감옥에서 많은 생각을 했다.
그렇게 하나둘, 자신이 이제까지 걸어온 길을 되돌아보았다.
물론 이제까지 그가 저지른 학살이나 무자비한 파괴에 대한 반성을 한 건 아니었다.
애초에 반성 따위를 할 인간이었다면 그런 일을 저지르지도 않았을 것이다.
단지 검토를 했을 뿐이다.
자신이 무엇을 했는지 그리고 무슨 실수를 했는지 또한 그때 어떻게 했으면 더 좋은 결과를 낼 수 있었는지.
나중에는 지금 자신의 상황을 분석하기 시작했다.
이제르트 백작가가 미치지 않고서야 자신을 이렇게 취급하진 않을 것이다.
지금 이 말도 안 되는 대우에는 무언가 분명한 이유가 있다.
슈페언 백작은 기사이자 정치인이었다. 이제까지 힘에 의존한 건, 그에게 강력한 힘이 있었기 때문이지, 지능이 떨어져서 그런 게 아니었다.
힘이 없는 지금 슈페언 백작은 머리를 굴렸다. 생각을 했다. 사고를 이어갔다.
그리고 답을 내놓았다.
그 답을 내놨을 무렵, 슈페언 백작 앞에 문수르가 등장했다.
슈페언 백작은 문수르를 보는 게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러나 보는 순간 알 수 있었다.
“네가 문수르로군.”
슈페언 백작의 음성은 사로잡힌 호랑이의 그것처럼, 굉장히 작지만 살기가 가득 차 있었다.
문수르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내가 문수르입니다.”
문수르 역시 가볍게 자신의 소개를 했다.
그렇게 페스로 제국을 대표하는 기사와 콩탄 왕국에 떠오르는 신성이 철창을 두고 마주했다.
역사적인 만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