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노크맨-238화 (236/293)

238화

4.

슈페언 백작은 그저 무식하게 힘만 믿고 싸우는 자가 아니다. 그가 만약 힘만 믿고 설치는 무식한 인간이었다면 지금 이 자리까지 올라오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는 전술과 전략에도 통달했다.

오히려 그렇게 때문에 저돌적인 공격을 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슈페언 백작은 자신의 약점을 잘 알고 있었다.

보급이 힘들다.

보급이 안 되는 군대는 절대 장기전을 할 수 없다.

더군다나 슈페언 백작의 목적은 진지 점령, 탈환 따위가 아니다. 그냥 무차별적인 파괴였다.

그렇다면 힘을 한 곳에 집중해 상대의 방어벽을 단숨에 박살내고, 그 내부를 헤집는 수법을 고르는 게 최선이자, 최고의 판단이었다.

이제르트 백작가라고 해서 다를 리 만무했다.

슈페언 백작은 이제르트 백작령의 성이 보이는 순간부터 병사들 그리고 기사들에게 말했다.

“패배는 용서하지 않으며, 죽음은 허락하지 않는다. 승리하고, 살아라. 그러함으로써 나의 부하임을 증명하라.”

슈페언 백작의 그 짧은 연설에 군사들의 눈빛이 달라졌다.

슈페언 백작가의 기사들 그리고 병사들은 자신들이 슈페언 백작가 소속이란 것을 자랑스럽게 여긴다.

그리고 자랑스럽게 여길 만하다.

슈페언 백작은 누가 뭐라고 해도 페스로 제국, 그 위대하고 거대한 제국이 자랑하는 최고의 기사들 중 한 명이었으니까.

“작전은 언제나처럼. 약탈에 빠지지 말고, 쾌락에 빠지지 마라. 승리 후에 맛보아라.”

그 말과 함께 슈페언 백작의 진격이 시작됐다.

5.

문수르는 비웃었다.

‘결국 모든 걸 망치는 건 자만심이지.’

문수르는 절대 슈페언 백작이 멍청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가 행동하는 게 저돌적인 맷돼지같이 보여도 그가 맷돼지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하지만 지금 슈페언 백작은 이제르트 백작가를 너무 얕잡아보고 있었다.

아니, 그게 아니다.

이제까지 단 한 차례의 패배도 맛보지 않았던 슈페언 백작의 마음속에는 자신감이 아니라 자만심이 꿈틀거리고 있을 것이다.

차라리 한 번의 패배라도 맛봤다면 슈페언 백작은 이렇게 저돌적으로 움직이지 않았을 것이다.

‘언제나 자만심이 위험하다.’

반대로 문수르는 최악의 경우를 상정한 채 움직이고 있었다.

‘좋아.’

준비는 전부 끝났다.

슈페언 백작이 이제르트 백작가의 성벽을 두드리는 순간 전쟁이 시작될 것이다.

6.

콰앙!

굉음이 터졌다.

슈페언 백작가의 기가스들이 이제르트 백작가의 성벽을 향해 달려들었고, 그들은 거대한 기가스의 검을 거침없이 휘둘렀다.

보통 1배 급 기가스의 공격으로 성벽을 무너뜨리는 건 불가능하다.

그러나 2배 급 기가스부터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2배 급 기가스의 공격력은 성벽에 큰 타격을 주기에 충분하다.

때문에 1배 급 기가스와 2배 급 기가스 사이에서는 단순히 출력 차이를 넘어서, 전투에서 차지하는 비중, 전략적 차이도 크다. 슈페언 백작이 2배 급 기가스만 끌고 다니는 것도 그때문이다.

2배 급 기가스 10대면 성벽 따위는 거의 무용지물이나 마찬가지다.

성벽 파괴자란 칭호가 붙어도 이상할 게 없다.

더군다나 슈페언 백작가의 기가스들은 절묘한 포지션으로 성벽을 파괴했다.

무식하게 그냥 성벽을 두드리는 게 아니었다. 적당한 거리를 두고 성벽을 때렸다. 성벽을 보다 빨리, 보다 효과적으로 파괴할 수 있는 방법과 기술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순식간이었다.

몇 번의 전쟁을 통해 무너졌던 이제르트 백작가의 성벽이, 이제르트 백작가가 간신히 세웠던 성벽이 너무나도 쉽게 무너졌다.

어쩔 수 없었다.

성벽 자체의 재질을 바꾸지 않는 이상, 성벽 증축에는 한계가 있다.

두껍게 짓는다고 만사가 아니다. 지반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저 무식하게 두껍게만 쌓으면 오히려 성벽이 제 구실을 못하는 경우도 있다.

문수르도 알고 있었다.

아니, 기다리고 있었다.

‘성벽이 무너지는 순간이 공격 타이밍이다.’

이제까지 문수르는 GPS시스템을 통해서 슈페언 백작의 전술, 공격방법을 전부 봤다.

무시무시할 정도로 위력적인 기가스 부대를 이용해 놀라우리만큼 효과적으로 성벽을 무너뜨린 후에 재빨리 성 안으로 들어가 적의 주요 전력들, 기가스를 파괴한다.

단순하지만, 그 전술을 실행하는데 있어서 슈페언 백작가의 기가스들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었고, 조금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말 그대로 스페셜리스트!

보통 이 전술 앞에서 성벽을 이용해 조금이라도 시간을 벌고자 하는 작전은 씨알도 먹히지 않는다.

그래서 문수르는 성벽을 포기했다.

아니, 오히려 성벽을 장애물로 만들 생각이었다.

성벽 너머로 기가스를 대기시켰다.

2배 급 기가스들을 앞세웠다. 그리고 미리 성 밖으로 빼두었던 아이언히트들이 뒤를 노리는 것이다.

슈페언 백작의 기가스들 역시 스페셜리스트였지만, 이제르트 백작가의 기가스 역시 충분히 단련된 스페셜리스트였다.

순식간이었다.

슈페언 백작가의 기가스들이 성벽을 부수는 순간, 기다렸다는 듯이 아이언히트들이 움직이면서 슈페언 백작가의 기가스들의 퇴로를 차단했다.

기동성이라면 그 어떤 기가스들보다 뛰어난 것이 아이언히트다.

그런 아이언히트들의 잽싼 움직임에 슈페언 백작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이게 무슨!”

그러나 놀람은 잠시였다.

슈페언 백작은 놀라기만 할뿐, 절대 당황하지 않았다.

“흥! 그래 이 정도 준비는 했겠지.”

백전노장의 슈페언 백작이다. 후방에 온 아이언히트의 숫자에 놀라긴 했지만 그뿐이었다.

딱 봐도 알 수 있다.

저 기가스가 제대로 된 기가스인지, 아니면 보통 기가스들보다 약한 기가스인지 말이다.

크기부터가 다르다.

보통 기가스보다 작다.

출력이 작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속도가 빠르다는 건 무게를 줄였다는 의미!

가볍다는 소리다.

2배 급 기가스의 적수는 못 된다.

“안으로 들어간다!”

거기서 슈페언 백작은 과감한 선택을 했다. 성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적에게 포위되는 꼴이 되겠지만, 반대로 적의 기가스들 역시 성 안으로 동시에 다수가 들어오긴 힘들 터!

더군다나 이 전투에서는 절대적인 요소가 있다.

“내가 길을 만들어주지!”

골든 자이언트!

페스로 제국이 자랑하는 3배 급 기가스가 있다. 그리고 그것을 다루는 인물은 제국 최고의 기사 중 한 명인 슈페언 백작이다.

제 아무리 잔행이들이 몰려든다고 해도 그를 막을 수 없다.

그가 가는 길이 곧 길이다.

슈페언 백작은 기세등등하게 전진했다. 이제르트 백작가의 기가스들은 그런 슈페언 백작을 가로 막을 생각은 아예 하지도 않았다.

이미 준비되어 있으니까.

쿵!

슈페언 백작, 그의 눈에 들어왔다.

“저건?”

자신의 골든 자이언트 만큼이나 거대하고, 위용이 넘치는 기가스!

순간 슈페언 백작의 등골이 싸늘하게 식었다. 전장에서 다듬어진 그의 감이 말해줬다.

‘위험하다!’

그 순간 처음으로 슈페언 백작의 이마에 식은땀이 맺히기 시작했다.

7.

문수르는 예상했다.

‘안으로 들어오겠지.’

슈페언 백작의 성정 그리고 그가 가진 전력과 이제까지의 전술을 생각하면 9할 이상의 확률로 돌진을 택할 것이다.

그래서 기다렸다.

문수르는 이제르트 백작의 성벽 안에서 대기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기다름에 보답하듯 슈페언 백작은 몸소 앞장서서 성 안으로 들어왔다.

문수르는 길게 생각하지 않았다.

‘단숨에 끝낸다.’

이미 승기는 전쟁이 시작되기 전부터 이제르트 백작가에 넘어와 있었다. 슈페언 백작만 그 사실을 모를 뿐이다.

골든 자이언트와 드래곤 파이터의 대결은 그렇게 시작됐다.

8.

골든 자이언트은 이러다할 특징은 없다. 속도가 빠른 것도 아니고, 방어력이 특출난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약하다거나 구리다는 말은 아니다.

전체적으로 부분에서, 기동력, 방어력, 공격력 등 모든 부분에서 우수하다.

만능 기체인 셈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훌륭한 전투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다.

하지만 그뿐이다.

제 아무리 대단한 골든 자이언트라고 해도, 페스로 제국의 정수가 담긴 기가스라고 해도 그의 앞에 있는 건 드래곤 파이터다.

케르빈 월드의 그 어떤 기가스도 1대1 승부로는 드래곤 파이터를 이길 수 없다.

드래곤 파이터에 탑승한 문수르의 능력 역시 최정상급이다.

더군다나 이런 문수르는 그 누구보다 훌륭한 도우미인 로이드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는다.

아무리 전투가 변수에 의해 쉽게 좌지우지되는 것이라고 해도, 슈페언 백작이 문수르를 상대로 이길 가능성은 제로에 가까웠다.

콰앙!

그렇게 충돌이 시작됐다.

드래곤 파이터는 창을 휘둘렀고, 골든 자이언트는 검을 휘둘렀다. 두 기가스의 거대한 무기가, 3배 급이라는 무지막지한 출력에서 뿜어지는 힘을 싫은 채 충돌하자 그 소리는 마치 천둥소리와 비슷했다.

꽈릉, 꽈릉!

그 천둥소리가 연쇄적으로 터져나왔다.

골든 자이언트나 드래곤 파이터는 단 한 발자국도 밀리지 않으려는 듯 공세를 퍼부었다.

두 기가스의 전투는 호각이었다.

어느 한쪽도 물러나지 않았다. 서로의 무기가 부딪치며 거친 굉음을 토해낼 뿐이었다.

하지만 그 두 기가스 파일럿은 서로 느끼고 있었다.

“대단하긴 대단한데, 결국 3배 급이지.”

문수르는 미소를 지었다.

서로 공격이 충돌할 때마다 적지 않은 충격이 문수르의 온몸을 뒤흔들기는 했지만 못 버틸 정도는 아니었다.

“젠장! 대체 이런 기가스가 어디에서!”

반면 슈페언 백작은 기겁했다. 이미 그의 몸은 땀으로 흠뻑젖어있는 상황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온몸의 근육들이 당장이라도 터질 듯이 부풀어오른 상황이었다. 육체의 힘을 한계까지 끌어내고 있다는 의미였다.

서로의 공격이 부딪칠 때마다 슈페언 백작의 체력은 뚝뚝, 급속도로 떨어지고 있었다.

슈페언 백작은 직감했다.

‘얼마 버티지 못한다.’

승산이 없다.

‘젠장!’

처음이었다. 슈페언 백작의 인생에서 이런 상황은 정말 처음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언제나 우월했고 때문에 언제나 승리자가 될 수 있었다.

그의 인생에 패배 따위는 없었다. 궁지에 몰리는 일 따위도 없었다.

그는 제국 최고의 기사들 중 한 명이었고, 페스로 제국의 이름난 귀족이었으니까.

그의 뒤에는 제국이 있고, 본인 스스로에게는 능력이 있다.

그런데 지금 그 모든 게 통하지 않고 있었다.

이 순간 슈페언 백작은 상황을 부정했다. 이 상황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으니까.

‘이건 아니야.’

납득이 안 된다.

어떻게 이제르트 백작가 주제에 자신의 기가스를, 제국이 심혈을 기울여 만든 3배 급 기가스 골든 자이언트를 이렇게 압도할 수 있는 기가스를 보유할 수 있단 말인가?

꿈이다.

이건 꿈이나 마찬가지다.

‘그래, 내가 흑마법사의 사악한 마법에 걸린 것이다. 저주에 걸려서 헛것을 보는 것이다.’

현실 도피다.

그러나 이 와중에도, 현실도피를 하는 와중에도 골든 자이언트는 슈페언 백작의 조종에 의해 움직이고 있었다.

골든 자이언트의 검이 드래곤 파이터의 목덜미를 향해 놀라울 정도로 정확한 궤적을 그리며 날아갔다.

이게 슈페언 백작이다.

보통 이들은, 기사들은, 기가스 파일럿들은 현실 도피를 하는 순간 정신이 붕괴된다.

당연히 전투는 불가능하다. 단숨에 무장해제가 된 것이다. 긴박한 전투에서 이런 행동은 죽음으로 직결된다.

그러나 슈페언 백작은 그러지 않았다. 그는 현실도피를 하는 와중에도 싸웠다.

투쟁에 대한 정신이 머릿속이 아니라 온몸의 세포 속에 깃들어 있는 것이다.

놀라울 정도의 투쟁심이다.

하지만 그뿐이다.

제대로 된 컨디션으로 전투에 임해도 슈페언 백작에게는 승산이 없는 싸움이었다.

결국 전투는 순식간에 끝났다.

콰직!

드래곤 파이터의 창이 골든 자이언트의 어깨를 잘라냈다.

쿠웅!

그 육중한 골든 자이언트의 팔이 떨어졌다. 팔이 쥐고 있던 검도 같이 바닥에 떨어졌다.

전투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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