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7화
<72화. 덫>
1.
슈페언 백작은 분노했다.
“감히!”
그의 손에는 종이문서 한 장이 잡혀 있었다. 그리고 그 종이문서에는 그도 잘 알고 있는 가문의 문양이 찍혀 있었다.
“무블 공작! 감히 당신이!”
무블 공작가의 표시였다.
슈페언 백작은 이를 갈았다. 분노에 부들부들, 몸이 절로 떨릴 지경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슈페언 백작의 머릿속에, 두뇌가 빠르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나를 치려고 해?’
종이문서의 내용.
그것은 다름 아니라 콩탄 왕국의 귀족들이 연합을 해 슈페언 백작을 상대하더라도, 차후 페스로 제국이 그 일의 죄를 묻지 않도록 무블 공작과 그 추종자들이 최선을 다해 막겠다는 내용의 종이문서였다.
쉽게 말해서 슈페언 백작을 처치하라는 내용이었다.
슈페언 백작은 이 사실에 분노했지만 동시에 마음 한 구석이 섬뜩해지는 것을 느꼈다.
‘충분히 가능하다.’
현실을 보자.
보통의 국가라면, 자국의 귀족이 타국의 귀족들에게 당했다면 좌시하지 않는다.
어떻게든 국가 간의 전쟁을 일으켜서라도 복수를 해줄 것이다.
하지만 페스로 제국의 현 상황은 조금 다르다.
슈페언 백작이 패배하면, 오히려 그는 패배자로 몰리며 이루었던 것들 중 상당수를 잃을 것이다.
정치적 입지도 잃을 것이고, 권력도 잃을 것이다.
또한 슈페언 백작에게는 정적이 넘쳐난다. 그런 정적들이 그 기회를 놓칠 리 만무하다.
‘발을 뺄까?’
여기서 슈페언 백작에게는 두 가지 선택지가 생겼다.
하나는 발을 빼는 거다.
사실 그동안 많이 활개쳤다. 콩탄 왕국에 충분한…… 아니, 넘칠 정도의 인상을 심어줬다.
이쯤에서 발을 뺀 후에 다른 방법으로 필로스 왕을 압박하는 것도 나쁜 선택은 아니다.
또한 슈페언 백작도 나름 부담감을 느끼고 있었다.
‘너무 많이 설치긴 했지.’
슈페언 백작은 흑마법사와 손을 잡은 흔적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아니, 증거는 둘째치고 의심이 들어도 무조건 공격했다. 아주 응징을 했다. 영지를 지도에서 없애버렸다.
무리한 행동이었다.
슈페언 백작도 알고 있다. 지금 콩탄 왕국 내에서 슈페언 백작을 향해 이를 갈고 있는 귀족들이 적지 않다는 것을 말이다.
그걸 염두에 두고 슈페언 백작은 열심히 영지를 부수는 한편, 콩탄 왕국의 귀족 몇몇과는 좋은 관계를, 정치적 동맹 관계를 맺고 있었다.
하지만 이 이상 무리하게 움직일 경우에는 필로스 왕과의 사이가 아주 틀어질 것이다.
슈페언 백작이 이런 행보를 보이는 건 궁극적을 필로스 왕으로 하여금 고개를 숙이게 만들기 위해서다.
슈페언 백작의 행동에 부담을 느낀 필로스 왕이 예전처럼 슈페언 백작에게 손을 내밀도록 만들기 위해서다.
하지만 정도가 심해지면, 필로스 왕은 손을 내밀고 싶어도 내밀지 못하는 상황이 나올 수도 있다.
어쩌면 지금 빠지는 게 적당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러나 마음에 걸리는 게 있다.
‘필로스 왕은 대체 의중이 무어란 말인가?’
다름 아니라 필로스 왕이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좋으면 좋은대로, 싫으면 싫은대로 슈페언 백작의 행동에 대한 반응을 보여하는데 그게 없었다.
그게 마음에 걸렸다.
‘확실히 무언가를 해야 돼.’
이대로 물러나면 계획이 실패한 듯한 느낌이 들었다. 아니, 실패보다는 패배하는 느낌이 난다.
다른 건 몰라도 패배는 납득할 수 없다.
그는 슈페언 백작이다.
이제까지 단 한 번의 패배도 겪지 않은 승리자다.
“흠…….”
여기서 슈페언 백작은 두번째 선택지를 머릿속에 떠올렸다.
두번째 선택지는 간단하다.
“내가 먼저 치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선수필승.
먼저 치는 거다.
콩탄 왕국의 귀족들이 슈페언 백작을 치기 전에 슈페언 백작이 개중 하나를 먼저 치는 거다.
그렇게 해서 이번 계획 자첼르 송두리째 무너뜨리는 거다.
그 다음에는?
지금 슈페언 백작의 손에 있는 이 문서가, 오히려 정치적 역공을 가능하게 해줄 것이다.
씨익!
슈페언 백작은 웃었다.
“그래, 그것도 괜찮지.”
이 문서의 내용, 약조의 내용은 결국 쉽게 말하면 페스로 제국의 귀족들이 콩탄 왕국의 귀족들과 야합(野合)을 한 것이다. 절대 좋은 행동이 아니다. 비난 받아 마땅한 행동이다.
더군다나 그 야합의 목적이 페스로 제국이 자랑하는 기사이자, 귀족인 슈페언 백작을 공격하는 것 아닌가?
이 사실이 정치판에 드러나면 무블 공작가의 정치적 입지는 크게 축소될 것이다.
물론 지금 어렵게 입수한 이 문서 자체를 공개해봤자 의미가 없다.
실행이 있어야 한다.
슈페언 백작이 그 어떤 공격도 받지 않은 상황에서 이 문서를 공개하면, 오히려 조작이라고 의심을 받을 것이다.
즉, 슈페언 백작은 증거를 제시해야 한다. 콩탄 왕국의 귀족들이 무블 공작 파벌의 비호를 받고 슈페언 백작을 공격하리라 했다는 증거를 말이다.
증거를 찾는 건 간단하다.
“이제르트 백작가가 좋겠군.”
문서의 내용을 보면 이 모든 일을 주도하는 건 이제르트 백작가일 터.
이제르트 백작가를 털면 뭐든 나올 것이다.
나오지 않아도 상관없다. 이제르트 백작가를 세상에서 지워버린 후에 그럴싸한 증거를 만들면 된다. 그 증거가 진짜인지, 가짜인지 증명할 수 있는 이제르트 백작가가 전멸한 이상, 그 증거는 진짜로 남을 테니까.
“좋아, 좋아.”
더군다나 슈페어 백작은 이제르트 백작가에 대한 감정이 그다지 좋지 못했다.
이야기를 들었다.
이제르트 백작가의 개입으로 인해서 필로스 왕이 빅토리안 가문의 반역을 막을 수 있었다.
반대로 말하면 이제르트 백작가의 개입이 없었다면 필로스 왕은 빅토리안 가문의 반역을 막기 위해 슈페언 백작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을 것이다.
지금하는 이 모든 고생은 어떤 의미에서 이제르트 백작가 때문에 생긴 고생이다.
“좋은 기회가 생겼군.”
슈페언 백작이 미소를 지었다.
그는 곧바로 병력의 머리를 이제르트 백작가 쪽으로 돌렸다.
2.
“흥.”
문수르는 비웃음을 머금었다.
“슈페언 백작, 걸려들었군.”
GPS시스템에 포착됐다. 슈페언 백작이 이제르트 백작가로 향하는 사실이 말이다.
문수르는 예상하고 있었다.
“그래, 그런 떡밥을 줬는데 물지 않을 리가 없지.”
문수르가 떡밥을 던졌으니까.
그 떡밥이란 게 대체 무엇일까?
“조작은 확실한 거지?”
- 진본보다 더 진본 같을 겁니다.
조작.
그건 다름 아니라 무블 공작으로부터 받은 협약서를 말하는 것이다. 협약서를 받는 순간, 문수르는 그와 똑같은 것을 하나 더 만들었다. 진짜와 똑같이 만들었다. 그것을 위조하는 건 일도 아니었다. 위조를 방지하기 위해 숨겨둔 몇 가지 수법 정도는 로이드의 눈에 전부 걸렸으니까.
그리고 그렇게 해서 위조한 공문서를 자연스럽게 슈페언 백작에게 흘러가도록 만들었다.
그렇게 해서 무블 공작가와 이제르트 백작가 사이의 은밀한 협약서를 가지게 된 슈페언 백작은 곧바로 병력을 이제르트 백작가를 향해 이동시키기 시작했다.
그런 슈페언 백작이 품은 의중을 문수르는 꿰뚫어 보고 있었다.
아니, 그걸 예상했기에 공문서를 위조하면서까지 이런 수작을 부린 것이다.
“쳐들어오면 명분은 이쪽에 있다.”
슈페언 백작, 그는 모른다. 이제르트 백작가에 무엇이 있는지, 무엇을 준비했는지 말이다.
더군다나 지금 슈페언 백작의 모든 움직임은 문수르에 의해 실시간으로 감시되는 상황.
장담한다.
슈페언 백작이 이길 수 있는 가능성, 승산은 10퍼센트를 넘지 못한다. 전쟁에서 승산이 10퍼센트라는 건, 싸우지 말라는 의미다. 절대 이길 수 없다는 의미다.
‘애초에 귀족들과 손을 잡은 생각은 없었다.’
더군다나 이 협약서는 유효하다.
슈페언 백작이 무너져도, 제국의 보복은 없을 것이다.
문수르는 미소를 지었다.
문수르, 그 역시 슈페언 백작에게 좋은 감정 따위는 없었다. 그럴 수밖에 없다.
‘이건…… 단순한 전쟁이 아니다. 이제르트 가문의 복수다.’
이제르트 가문이 몰락한 이유.
그 배경에는 결국 슈페언 백작이 있다. 슈페언 백작이 필로스 왕의 편을 들지 않았다면 카스트로 왕세가 자연스럽게 왕위에 올랐을 터.
그러면 이제르트 가문은 몰락하지 않았을 것이다. 본래의 영지에서 충분히 영광을 누렸을 것이다.
그에 대한 복수의 기회가 온 것이다.
3.
이제르트 백작가는 전쟁준비를 시작했다.
하지만 그 전쟁의 목적이 슈페언 백작이라는 사실은 극히 소수를 제외하면 전부 몰랐다.
이제르트 백작가의 병사들 그리고 기사들은 테블스 산의 몬스터들과의 전쟁을 준비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제르트 백작령의 사람들이 그리 생각할 정도니, 이제르트 백작령을 밖에서 보는 이들 역시 이제르트 백작가의 움직임에 이러다할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것이다.
물론 테블스 산 개간 작업은 현재진행형이었다. 개간 속도가 느려졌을 뿐이지 개간 작업 자체는 계속해서 진행 중이었다.
그 작업을 위해 아이언히트 10대가 투입됐다. 이렇게 투입된 전력은 슈페언 백작과의 전쟁에서 빼기 힘든 전력이기도 했다. 테블스 산은 지리적으로 봤을 때 이제르트 백작가의 뒤통수에 위치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쪽에 대한 경비가 허술했을 경우 뒤통수를 맞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더군다나 문수르는 카라카크의 존재를 염두에 두어야 했다.
‘카라카크가 몬스터 군단을 숨긴 채 때를 기다리고 있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
이미 이제르트 백작가는 카라카크가 지휘했으리라 예상되는 몬스터 군단의 공격을 몇 차례나 경험했다.
그런데 테블스 산에 대한 경계를 풀고 있으면, 그런 카라카크의 공격에 무방비로 노출되는 셈이다.
최소한 어떤 상황이 일어나도 대처할 수 있고, 하다못해 시간이라도 끌 수 있는 전력. 그 최소전력이 바로 아이언히트 10대였다.
결과적으로 슈페언 백작과의 전투에 투입되는 아이언히트는 27대였다.
물론 이 외에도 전력은 더 있었다.
2배 급 기가스 3대, 1배 급 기가스 6대.
마지막으로 드래곤 파이터까지!
솔직히 아이언히트 10대를 후방에 둔다고 해도 그 외의 전력은 충분히 슈페언 백작가의 전력을 상대할만했다.
2배 급 기가스 10대 그리고 3배 급 기가스 골든 자이언트는 분명 무시무시하다.
하지만 골든 자이언트를 드래곤 파이터가 처치한다면, 결국 적이 되는 건 2배 급 기가스 10대다.
이제르트 백작가에도 2배 급 기가스가 3대가 있다. 전체적인 스펙에서는 밀리겠지만, 무기력하게 밀리진 않을 것이다.
그 전력 숫자를 동등하다고 여기면, 결국 슈페언 백작 입장에서는 2배 급 기가스 7대로 1배 급 기가스 6대와 0.6배 급 기가스인 아이언히트 27대를 상대해야 하는 거다.
머릿수 차이가 거의 5배에 이른다. 아무리 아이언히트가 저출력이라고 해도, 이 정도 머릿수 차이면 무지막한 차이다.
여기에 전장은 이제르트 백작령이다. 이제르트 백작가의 땅이다. 개도 자기 집에서는 한수 먹고 들어가는 법이다. 지리적 이점도 전부 이제르트 백작가에 유리하다.
마지막으로 정보전, 보급전에도 이제르트 백작가가 슈페언 백작보다 훨씬 유리하다.
준비는 완벽하다.
‘싸우기만 하면 된다.’
기다리면 된다.
슈페언 백작, 그가 호랑이의 입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그냥 기다리고 있으면 된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슈페언 백작의 병력들은 전속력으로 이제르트 백작가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그러나 문수르는 몰랐다.
이 전쟁에 이목을 집중하고 있는 자가 있으리란 사실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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