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6화
8.
페스로 제국.
강대국이다.
케르빈 월드에서 가장 강력한 힘과 권력을 가진 제국이다. 광활한 영토를 가지고 있고, 무수히 많은 기사들과 기가스를 보유하고 있다.
기가스의 시대가 시작된 이후 페스로 제국은 그 어느 곳보다 우수한 기가스를 가장 먼저 만들어냈으며, 또한 매년 가장 많은 숫자의 기가스를 생산하는 곳이기도 했다.
그런 페스로 제국의 영토를 처음 밟은 문수르의 감정은 별 게 아니었다.
“그렇게 신비할 것도 없군.”
제국이라고 해도 결국 문명의 수준은 콩탄 왕국과 다를 게 없었다. 사실 콩탄 왕국이나 페스로 제국이나 문화 수준은 비슷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두 나라는 국경을 마주하고 있는 인접국이다. 문화라는 건 흘러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페스로 제국의 건축 양식 등은 콩탄 왕국의 것과 비슷했다. 스케일도 비슷했다.
여기서 문수르는 알았다.
페스로 제국은 무지막지한 세계가 아니다. 단지 머릿수가 많은 거대한 세력일 뿐이었다.
9.
헤올라 자작령에 도착했을 때 문수르는 곧바로 헤올라 자작의 성을 방문하지 않았다.
‘상황을 살펴야겠지.’
그냥 들어가는 건 좀 아쉽다.
“로이드.”
- 실시간으로 정보 수집 중입니다.
“그보다 어떻게 생각해? 헤올라 자작령에 무언가 특별한 게 있어?”
- 이러다할 특이성은 없습니다.
“영지 수준은?”
- 콩탄 왕국의 자작 수준과 큰 차이는 없습니다.
여기서 문수르의 눈빛이 빛났다.
‘수준 차이가 없을 수가 없는데…….’
헤올라 자작.
그는 다름 아니라 무블 공작 파벌에 속한 나름 영향력이 있는 귀족이다. 그런 그가 콩탄 왕국의 일반적은 자작들과 비슷한 수준이라는 것은 쉽게 납득하기 힘들다.
적어도 콩탄 왕국의 백작 급 정도는 되는 게 정상 아닐까?
‘검소한 성격이거나, 아니면 생각보다 헤올라 자작의 위치가 그렇게 대단한 게 아닐 수도 있지.’
둘 중 하나다.
버는 건 많은데 쓰는 건 아끼는 타입. 귀족들이라고 모두 사치에 찌드는 건 아니다. 제정신이 박힌 귀족이라면 적당히 검소한 생활을 유지하며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재산을 축적한다.
물론 그냥 돈을 못 버는 영주들도 있다. 권력을 가졌다고 해서 돈을 잘 버는 건 아니다. 권력이 있으면 돈을 버는데 유리할 뿐이지, 권력 자체가 돈을 가져다주는 건 아니니까.
돈을 벌기 위해서는 영지 운영도 잘 해야 하고, 이것저것 세수 관리도 잘해야 한다.
‘아마도 검소한 편이겠지.’
페스로 제국의 상황을 생각하면 능력이 없다기보다는 검소한 타입일 가능성이 높다.
페스로 제국의 차기 황권을 놓고 일곱 황자가 파벌을 형성에 싸운다는 건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이렇게 파벌이 많이 갈리면 언제 어느 순간 무슨 일이 터질지 모른다.
갑작스런 상황에서 가장 큰 도움이 되는 건 병력 그리고 돈이다. 좀 더 들어가면 돈이 더 중요하다. 돈만 있으면 병력을 만들어낼 수도 있을 뿐더러 병력 유지에는 돈이 필요하니까.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재산을 축적하는 중일 것이다.
‘여우 같은 양반이겠군.’
문수르는 그렇게 헤올라 자작령에 대한 몇 가지 조사를 전부 한 다음에 헤올라 자작을 만나러 갔다.
10.
“문수르 경, 반갑네. 페스로 제국의 귀족, 헤올라 자작이라고 하네.”
헤올라 자작은 문수르의 만남요청을 거리낌 없이 받아줬다. 받지 않아줄 이유가 없었다.
문수르는 무블 공작의 편지도 가지고 있었을 뿐더러, 페스로 제국에서도 문수르의 명성은 어느 정도 알려졌다.
하물며 헤올라 자작은 콩탄 왕국의 인접한 곳에 영지를 가지고 있는 영줒다. 콩탄 왕국의 정세에 대해 귀도, 눈도 밝을 수밖에 없고 또한 밝아야만 한다.
언제 어느 순간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는 법이니까.
혹여 극단적인 예지만, 페스로 제국과 콩탄 왕국 사이에서 전쟁이라도 일어나게 되면 헤올라 자작은 그 누구보다 최전선에서 싸우는 셈이 된다. 적이 될지 모르는 적진에 대한 정보 조사는 당연한 것이다.
“이제르트 백작님을 모시는 기사, 문수르라고 합니다. 이제르트 백작님을 대신해 왔습니다.”
이제르트 백작이 직접 오지 않은 건 아쉽다.
하지만 헤올라 자작은 그래도 이제르트 백작이 나름 충신이며 자신의 오른팔이라고 할 수 있는 문수르를 보낸 것에 대해서는 만족했다.
이 정도면 충분히 구색이 산다.
“길게 말하지 않겠네. 무블 공작님께서는 콩탄 왕국과 원만한 관계를 원하시고 계신다네. 하지만 알다시피 콩탄 왕국은 슈페언 백작의 입김이 너무 강한 탓에 무블 공작님이 쉽사리 접근할 수 없는 상황. 만약 무블 공작님이 콩탄 왕국에서 세를 넓히는 것을 도와준다면 이제르트 백작가를 아낌없이 후원하겠네.”
시작됐다.
문수르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가볍게 숙였다.
“말씀만으로 감사합니다.”
“하하, 말뿐이 아니라네.”
“솔직히 말해서…… 슈페언 백작의 행동에 불만을 가진 자가 콩탄 왕국에 적지 않습니다.”
그 순간 문수르가 화두를 바꿨다.
“오호?”
헤올라 자작이 귀를 기울였다.
들어서 나쁠 건 없다. 더군다나 헤올라 자작 역시 슈페언 백작에 대한 앙심이 적지 않았다. 실제로도 친한 귀족끼리 모이면 슈페언 백작에 대한 험담을 즐기고는 했다.
“슈페언 백작 때문에 손해를 본 귀족들이 적지 않습니다. 더군다나 슈페언 백작의 다음 타깃에 될까 두려워 몸을 사리는 형편입니다. 이런 상황 때문인지, 필로스 전하께서도 슈페언 백작을 좋게 보지 않고 있습니다.”
어느 정도 알고 있는 사실이다.
하지만 콩탄 왕국의 사람으로부터 이렇게 들으니 느낌이 달랐다.
‘이 정도인가?’
헤올라 자작은 미소를 지었다.
설마 콩탄 왕국 내에서 슈페언 백작에 대한 불만이 이 정도까지 쌓였을 줄은 몰랐다.
‘생각보다 일이 잘 풀릴지도 모르겠군.’
이제르트 백작가를 중심으로 반 슈페언 백작 파벌을 형성하고 이후 그 세력을 친 무블 공작으로 바꾼다면?
콩탄 왕국을 장악하는 건 일도 아닐 것이다.
문수르는 그런 헤올라 자작의 심중을 꿰뚫었다. 아니, 지금 그가 그런 생각을 하도록 유인을 한 것이다.
‘좋아.’
승부수를 던질 때다.
‘슈페언 백작에 대한 앙심이 적지 않다.’
제국 내에서 슈페언 백작을 싫어할 귀족이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헤올라 자작의 반응을 보니 그 정도가 보통 수준이 아니다.
이 정도면 한 번 찔러볼만하다.
“다름 아니라…… 콩탄 왕국 내에서는 이대로 슈페언 백작을 방관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뜻을 모으고 있습니다.”
뜻을 모은다?
그 말에 헤올라 자작의 눈빛이 빛났다.
‘그렇군!’
헤올라 자작은 금방 상황을 이해했다.
슈페언 백작을 혼자서 막을 수 있는 귀족이 콩탄 왕국에 있을 리가 만무하다.
그건 말이 안 된다.
하지만 여러 귀족이 힘을 합치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슈페언 백작을 막을 수 있다.
‘제국의 반응이 무섭다는 거로군.’
물론 그렇게 되면 문제가 있다.
슈페언 백작을 콩탄 왕국의 귀족들이 연합하여 해치우면 제국이 움직일 수밖에 없다.
당연히 콩탄 왕국에서 제국과 싸우고 싶어하는 귀족은 단 한 명도 없을 테니, 슈페언 백작을 어찌하지 못하는 것이다.
‘나쁘지 않군.’
페스로 제국 입장에서도 자국의 귀족을 단체로 공격한 이들을 그냥 놔둬서는 안 된다.
슈페언 백작이 좋건, 싫건 분명한 응징이 필요하다. 그래야 제국이란 틀이 유지되고, 귀족은 국가에 충성하며, 헌신할 테니까.
하지만 정치가 개입되면 이러한 논리들이 뒤숭숭해지기 마련.
무블 공작이 적당한 정치적 수작을 부리고, 몇 가지 경우의 수가 맞아 떨어진다면 슈페언 백작을 깔끔하게 처리할 수도 있다.
“병력이 어느 정도인가?”
핵심은 이거다.
슈페언 백작이 패배하면 된다.
언뜻 보면 제국의 이름난 기사이자, 기가스 파일럿인 그가 패배한다는 건 제국의 치욕이며, 당연히 보복해야 일로 여겨지겠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그 반대다.
슈페언 백작이 패배하게 되면, 오히려 그의 명성 그리고 그의 입지가 무너지게 된다.
페스로 제국은 그런 곳이다.
다른 건 몰라도 전투에서 패배한 자에게는, 패자에게는 그 어떤 용서도, 동정도 보내지 않는다.
더군다나 지금 제국은 일곱 개의 파벌로 나뉘에서 싸우는 중이다. 슈페언 백작이 패배한다면, 여섯 개의 파벌이 슈페언 백작을 압박하기 시작할 것이다.
어차피 전쟁도 명분이다.
슈페언 백작은 너무 무리해서 콩탄 왕국을 뒤흔들었다. 그 부분을 치고 들어가면, 슈페언 백작이 제 아무리 목소리를 높여도 제국 차원에서의 보복은 없다.
충분히 그렇게 만들 수 있다.
하지만 반대로 슈페언 백작이 승리한다면, 이야기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갈 것이다.
핵심은 그 부분이다.
과연 콩탄 왕국에서 슈페언 백작의 행동에 불만을 품고 반기를 드는 귀족들에게 얼마만큼의 병력이 있는가?
“만약 무블 공작님이 서류상으로 약속만 해주신다면, 최소 일곱 명의 영주들이 움직일 겁니다.”
“일곱 명?”
“모두가 최소 세 대 이상의 기가스를 보유한 자들입니다. 또한 이제르트 백작가도 움직일 겁니다.”
구라다.
일곱 명의 영주라니? 그런 약조를 한 적은 없다. 그 정도의 영주를 모아두고 티타임을 가져본 적도 없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이제르트 백작가의 전력이면 슈페언 백작의 병력쯤은 일거에 끝장낼 수 있습니다, 라는 말을 헤올라 자작에게 말해줄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말한다고 해도 믿을지조차 의문이다.
그럴싸한 거짓말을 하는 거다.
그리고 헤올라 자작을 속여 넘기기에는 충분하다. 헤올라 자작 역시 이제르트 백작가의 위세가 요즘 보통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있다. 그런 이제르트 백작가를 중심으로 귀족세력이 모인다고 해서 이상할 건 하나도 없었다.
문제는 이 다음이다.
“무블 공작님이 도와주신다면, 좀 더 모을 수 있습니다.”
“얼마까지 가능한가?”
“40대까지는 모을 수 있을 겁니다. 또한 필로스 전하께서도 슈페언 백작의 행동을 탐탁지 않아 하십니다.”
“그렇겠지.”
“솔직히 말해서 슈페언 백작은 도를 넘었습니다. 페스로 제국이 콩탄 왕국을 위해서, 희생을 감수하고 흑마법을 처리해준다는 건 감사한 일이지만 정도가 있는 법 아니겠습니까?”
“물론일세. 적어도 무블 공작님이 이번 일을 주도하셨다면 슈페언 백작처럼 행패를 부리진 않았을 걸세.”
이 대화.
그다지 길지도 않은 이 대화는 굉장히 중요했다. 문수르는 지금 아양을 떨고 있는 거다.
별 거 아닌 것 같지만, 이런 아양이 중요하다.
결정을 내리는 건 결국 사람이다. 그리고 그 사람을 움직이는 건 마음이란 놈이다.
문수르는 어떻게든 이번 일을 확실히 성공하고 싶었다. 그렇기에 이런 아양까지 떨고 있는 것이다.
마치 잽을 날리듯 말이다.
문수르의 잽 몇 방에 헤올라 자작은 제대로 넘어갔다. 그는 슈페언 백작에 대한 험담을 했다.
“솔직히 말해서 슈페언 백작이 콩탄 왕국과 관계를 맺은 이후에 과연 그가 무엇을 했나? 콩탄 왕국이나, 제국 양쪽에 이러다할 이득이 된 적은 극히 드물었지. 결국 남은 게 없었네. 빅토리안 가문의 반역 사건도 마찬가지야. 무블 공작님이 만약 슈페언 백작의 자리를 대신했다면 진즉에 상황을 파악하고, 반역이 일어나기 전에 상황을 종료했을 걸세.”
타국의 귀족 앞에서 자국의 귀족을 힐난한다는 것.
‘생각 이상으로 제국이 분열됐군.’
세상이 아는 것 이상으로 제국은 크게 분열됐다는 의미다.
문수르는 헤올라 자작의 푸념을 전부 들었다. 그리고 그 푸념이 끝나갈 때쯤 스트레이트 펀치를 날렸다.
“무블 공작님께서 문서상으로 약조만 해주신다면 당장이라도 슈페언 백작의 오만한 콧대를 누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헤올라 자작도 마냥 바보는 아니었다.
“꼭 공작님의 공식문서가 필요한가?”
“무블 공작님의 공식문서가 아니면 후환이 두려워서라도 귀족들은 움직이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시간이 제법 걸릴걸세.”
“괜찮습니다. 아직 시간은 충분합니다.”
“좋아.”
헤올라 자작은 결단을 내렸다.
무블 공작이라면 충분히 공식 문서로 남겨줄 것이다. 콩탄 왕국의 귀족들이 힘을 합쳐 슈페언 백작에 항거한다고 한다고 해도 페스로 제국이 보복을 하지 않도록 자신이 막겠다는 내용의 공식 문서 말이다.
적어도 그 공식 문서가 있다면, 무블 공작 측도 정치적으로 사장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콩탄 왕국을 비호해줄 것이다.
물론 문수르의 진짜 목적은 그 문서만을 얻는 건 아니었다.
‘1차 계획 성공이군.’
이건 어디까지나 1차 계획에 불과했으니까.